brunch

매거진 예술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민네이션 Jan 24. 2023

여행자

기형도

그는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육체를 

침대 위에 집어던진다. 


그의 마음속에 가득찬, 오래 된 잡동사니들이 

일제히 절그럭거린다.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이곳까지 열심히 걸어왔었다, 

시무룩한 낯짝을 보인 적도 없다. 


오오, 

나는 알 수 없다, 


이곳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내 정체를 눈치챘을까. 


그는 탄식한다, 그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 


모퉁이에서 마주친 노파, 

술집에서 만난 고양이까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중얼거린다,

 무엇이 그를 이곳까지 질질 끌고 왔는지, 


그는 더 이상 기억도 못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는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쭉하고 가늘은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여행자_기형도




살다보면 '인생의 목적'을 잃어 버린 사람들을

만나는 때가 있다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 이들에게서

보여지는 삶의 쓸쓸함이란


아무리 흥미로운 것을 보아도

도착증세를 보이는 표정에서


인생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그랬을까

아니면 인생이 너무 가벼워서 그랬을까


어디로 갈 수도 없고

어디에 가고 싶지도 않는 것은


결국 그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목적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한 때는 자식들이, 한 때는 사랑하는 사람이

한 때는 높은 지위가, 한 때는 재물과 소유가.


그런데 그런것들이 어느새 몸을 관통해서

지나가고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허무하게 느껴지는 때에 여행을 떠나는 이들

내일로 떠나지만 항상 과거에서 헤메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드는 생각은

이 사람들은 여행이 목적이 아니었구나


그냥 떠나는 게 자신이 잃어버렸다는 것을

잊어 버리기 위한 행동이었구나


구두끈이 끊어지고 운동화가 닳아지고나서도

흐리멍텅한 눈빛에는 하늘이 아무리 맑아도


잿빛하늘로 보일 수 밖에 없으리

그러니 우리는 매순간 다른 여행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앞으로 향하는 여행을

누군가는 제자리를 빙빙도는 여행을.


나는 어떤 여행을 하고 있을까?

새벽 4시가 되어서야 드는 생각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나설 준비를 하는 내가


어떤 미래를 꿈꾸고

어떤 과거를 걸어왔을까?


시간여행자에게 내면의 여행자가

물어보는 시간에.


나는 어느새 운동화 끈을 묶고서는

새벽을 달리고 있다


처음부터 목적이 없었던게 아닐까

없어서 스스로 만든게 아닐까


내 정체를 눈치 챈 이들이

반갑다고 달려오는 시간이 많아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2023-1 그림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