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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an 13. 2023

민족주의는 결국 인종주의를 필요로 한다

에티엔발리바르_인종/국민/계급_1부 보편적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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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어느순간이 되면 새로운 경지에 이른다. 역사의 반복은 사실 인간 삶의 반복과도 연결되어 있다. 어느시대나 우리가 '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일정한 패턴을 가진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정한 패턴이라는 것은 '생각의 패턴, 언어의 패턴, 실제 삶의 패턴'으로 세분화시켜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서 사람들은 '우리'라는 의식이나 우리와 다른 '개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마련이다. 19세기가 넘어가면서 국민국가라는 Nation building 개념이 발명되면서 '우리'가 '인종'이 되기도 하고, '계급'이 되기도 하고 '국민'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러한 범주의 구분에서 겹치는 지점은 그 모두가 같은 분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 우리의 몸이다.


구조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구조에 적응하면서 국가와 문화, 사회와 시장이 흘러간다는 생각을 했던 사람들을 '구조주의자'라고 불렀다. 구조라는 원인이 '개인의 개성'이라는 결과를 만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구조주의의 다양한 기류 가운데 '마르크스'주의는 구조를 만드는 원인을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로 나누고 하부구조는 보이는 것들인 '물질'이며 상부구조는 보이지 않는 것들인 '사상'으로 명명했다. 하부구조는 보통 경제라고 하는데, 이러한 경제를 구조화하는 것은 바로 '생산수단의 소유형태'라고 말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이다. 그러면 상부구조는 당연히 이러한 생산수단의 소유여부에 따라서 만들어 놓은 법과 질서, 정치와 사회이다. 그런데 후기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하는 사상들은 이러한 구조를 변동시킨다. 그 중심에 발리바르가 있고 이것을 세계로 뻗어 나가면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을 만나게 된다. 오늘부터 서교연구인문사회연구실에서 이 책을 여러 연구자들과 읽는다.

http://seogyo.net/


진태원, 서문


이 책은 1988년 처음 출간된 이래 현대 인문 사회과학의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알튀세르의 구조적 마르크스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발리바르와 브로델의 역사학을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월러스틴의 만남은 중요한 자직 사건이었다. 그 사건의 결실인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적 이론틀인 '토대와 상부구조'개념을 심원하게 개조하면서 역사적 자본주의의 체계의 재생산/변혁에서 국민국가의 역할이라는 새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이 질문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에서 역사의 주체로 간주된 계급은 인종과 국민이라는 또 다른 정체성들과 교차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인종주의와 국민주의는 단순한 가상이 아니라 역사적 자본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이루는 것이다. 오늘날의 급진 정치는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1장 “‘신-인종주의’는 존재하는가?”_발리바르


사회적 구성체란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상부구조와 토대구조를 이야기하면서 토대는 '사회적 구성'이라는 말을 쓴다. 사회적 구성을 social formation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마치 축구전술의 4-4-2 전술과 같이 구성요소의 연결관계에 따라서 다른 구성이 된다고 말한다. 특히 토대차원에서 '생산수단-생산자-자본가'의 구성에서 사회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증명한다. 사회구성체는 이렇듯 구조를 만들어내는 요소들이 모여있는 방식이다. 이러한 접근은 사실 들뢰즈나 푸코와 같이 혹은 분석철학과 같이 '요소'의 '연결'이 새로운 질서를 만든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까지 왔다면 우리가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인종'이라는 것은 그럼 어떻게 구성되었을까?라는 질문도 해볼 수 있다.


대중이라는 범주 자체는 중립적이지 않으며,
사회적인 것의 자연화 및 그 인종화의 논리로 직접 통한다


구인종주의-신인종주의

구인종주의에서는 '본질적으로 생물학적 인종주의'라고 할 수 있다. 피부색이나 생김새로 인종을 구분하는 것이 구인종주의라면, 신인종주의는 생물학적인 공통점이 아니라 '문화'를 중심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사회적 구성체의 관점에서 신인종주의의 구성은 그럼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는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진다. 생물학적 인종주의는 사실 구분하기 쉽고 누구나 갖다 쓸 수 있는 개념이다. 인종을 통해서 국가도 만들고 사회집단도 만들고 법도 만들수 있다. 플라톤의 구분법으로 보면 자연주의적 정신주의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의 관점에서 정신의 구성을 보는 이러한 관점은 자연스럽게 인간이 자연 속에서 어떤 차이점을 가진 존재인지를 볼 수 있게 만든다. 반대로 이러한 자연적인, 생김새대로 나누는 방식은 오히려 편하다. 그런데 문제는 문화다. 문화의 차이를 어디까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구인종주의의 3가지

나치즘 : 아리안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족주의는 유태인을 타자화 시키면서 인종주의의 '배재의 논리'를 완성한다.

흑인차별과 아파르헤이트 : 백인의 타자화는 가장 극명한 대비인 흑인들과 연결된다.

식민주의 : 식민지와 제국의 구분은 자연스럽게 인종으로 나누어졌고, 식민지의 국민들은 제국의 국민들과 구분되면서 배제와 혐오의 대상이 되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신분 바꾸기가 진행된다.

푸코가 말하는 '통치성'은 이전에는 생물학적이었으나 이제는 '문화'라는 코드로 바뀐다는 것이다

차이주의적 인종주의

문화를 중심으로 문화의 차이를 통해서 인종을 나누는 것은 신인종주의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발리바르는 신인종주의를 맞이하는 사람들이 문화적 배경이 그자체로 '본질'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한다. 인종주의는 어떤 기준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구인종주의든 신인종주의든 '구분이 차별을, 차별이 배제를, 배제가 혐오를 낳을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인종주의는 그 자체로 '정체성'의 논리이다. 인종이라고 부르는 순간 바운더리가 생기고, 그 바운더리 안에 있는 사람과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정해진다. 이것은 생기새 뿐 아니라 문화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타자의 문화는 우리의 문화를 침범하거나 현혹할 수 있기 때문에 몰아내야 하는 것으로 바뀐다.


문화에 속하지 않으면 문화적 타자가 되면서 배제의 대상이 된다


현대의 인종주의와 난민

발리바르는 신인종주의가 '문화'라는 코드를 기반으로 구별과 혐오를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서 회고적으로 과거의 구인종주의를 다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 타자, 다른 민족을 정의하는 방식은 문화적인 부분에서도 그렇고 생물학적인 부분에서도 그렇고 결국은 정체성 담론이다. 정체성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정체성을 잃어버릴 것인가의 문제로 바뀐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자연스럽게 사회적인 형성을 가지고 오고 이것이 새로운 주인기표를 만나면 국민이 되기도 하고, 계급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타자혐오는 '난민'문제로 이어지고 발리바르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가지고 있는 '난민포비아'의 핵심은 신인종주의라고 말한다.


문화적 차이는 신사적인 것 같지만 오히려
더 뚜렷하게 우리의 생활 곳곳에서 배제를 만들어낸다


보편적 인종주의_발리바르

신인종주의의 현행 변종은 다음과 같은 담론과 사회적 테크놀로지를 향해 발전하도록 정해져 있는 이행기의 이데올로기적 형성체를 구성할 뿐인지도 모른다.

그곳에서는 계보적 신화의 역사적 서사의 측면이 상대적으로 영향력을 상실하는 한편, 정상적인 사회생활에의 최적의 재생사에의 지적 성향이나 자질의 심리학적 가치 평가의 측면이 전면에 나온다

이때 일련의 인지과학이나 사회심리학, 통계학이 유전과 환경의 몫을 배합하고 조제하면서 이런 성향과 자질을 측정하고 선별하고 관리통제하기 위해 제공된다.

신인종주의의 현행 변종은 '포스트 인종주의'를 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국민국가의 체계의 틀에서 사회관계나 인구 이동의 세계화가 국경개념을 재사고하고 그 적용 양상을 파급시키도록 하며, 나아가 이러한 세계화가 사회적 예방의 기능을 국경에 부여하고, 더 개체화된 규정에 그것을 결부시키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물학적 테마가 회귀한다

발리바르는 문화의 관점에서 신인종주의를 규정하고 다시 구인종주의로 돌아온다.


2장 “보편주의,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긴장들”_월러스틴


보편주의의 기원들

보편주의라는 것은 모든 것이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다. 보편주의의 관점에서 인권은 존중되면서 평등의 논리가 전개된다. 이러한 보편주의에 비해서 인종주의나 성차별주의와 같은 극단적인 차별들이 존재한다. 보편주의는 그 안에서도 하나의 지적전통인가 아닌가?에 따라서 혹은 이데올로기적 자본주의의 경제에 적합한 제도라고 보여지기도 한다. 쉽게 말하면 종교에서도 '일신론'을 주장하는 논리는 보편주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계몽주의라던가 역사주의라던가 '어떤 주의'는 그 자체로 보편성을 기반으로 해야 가능한 것이다.


자본주의와 인종주의

보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는 이데올로기로서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를 사용한다. 노동력에 대한 임금의 구분을 나누기 위해서 자본주의는 너무나 쉽게 인종의 구분을 사용한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우리가 너무나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직장에서의 차별이 정당화되는 논리는 보편주의적이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논리가 보편주의라는 외형에서 내부적으로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를 가지고 간다. 그런데 이것이 '보편주의-자본주의'가 지배적인 체계로 존재할 수 있었던 원인이다. 인종주의는 기능적으로 보면 노동력의 에스닉화라고 불린다. 인종에 따라서 사회의 위계가 정해지고 정해진 위계에 따라서 노동력의 가치를 구분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것은 자연적으로 '능력주의'와 연결될 수 밖에 없다.


자본주의와 능력주의_월러스틴

자본 축적의 끝없는 추구에서 본질적인 한 요소로서, 보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주창하고 이를 실행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계 내부에서는 정언명령일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들이란 '보편적 용매'와 다름없고, 그것은 화폐라는 단일한 척도에 의해 표시되는 동질적인 상품 형태로 모든 것을 환원하도록 작용한다.

이것은 두개의 결과를 갖는다. 첫째 그것은 제화의 생산에서 효율성을 가장 높일 수 있게 해준다. 둘째는 능력주의는 결제적 효율적일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안정을 가져온다고 한다.

역사적 자본주의에서는 보수의 분배에 불평등이 존재하더라도, 이 불평등 정도에서 고보수자에 대한 저보수자의 분노가 심하지 않은 것은, 이것은 정당화가 전통이 아니라 능력에 기초하여 제공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속에 의해 얻은 특권보다 능력에 의해 얻는 특권이 도덕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좀 더 수용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발리바르의 보편성

자본주의적 보편적 : 동일한 화폐를 가지고 보편적인 생활을 영위해 간다.

국민적 보편성 : 국민성과 경계에 기반한 보편성을 말한다.

이상적 보편성, 상징의 보편성, 권리의 보편성 :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것들로서 인간 내면에 가지고 있는 이상적인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보편성을 말한다.

월러스틴의 주장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떠받치고 있는 보편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3장 “인종주의와 민족주의”


인종주의와 민족주의의 불가분성

인종주의자들은 언제나 민족주의자와 거리를 둔다. 우리는 우리를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민족주의자이지 인종적으로 차별하려는 인종주의와 다르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종의 관계가 있다. 민족주의라고 말하는 순간 민족이라는 기준이 바로 인종을 벗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발리바르는 그러한 인종의 구분이 오히려 생물학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문화적이고 더 나아가 국가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한국이야 단일민족이라는 고착관념 때문에 '민족주의'는 거룩하고 숭고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다문화, 다민족으로 구성된 유럽의 다양한 국가들은 '민족주의'를 말하는 순간 인종주의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인종주의는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문화적 차이를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내부의 외부화, 외부의 내부화_발리바르

프랑스식 식민지화는 스스로를 동화주의적이라고 선전했고, 영국식 식민지화는 문화를 존중한다고 선전했다. 이렇게 또다른 백인은 동시에 나쁜 백인이기도 하다. 각각의 백인 국민은 정신적으로도 가장 백인적인 것이다.

그들은 가장 엘리트주의적인 동시에 가장 보편주의적이다. 명백한 모순이다.

탈식민지화 과정이 가속되면서 이 모순은 그 형태를 바꿨다. 그 이상들에 비춰볼 때, 탈식민지화는 불완전한 동시에 도착적이되고 말았다.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다른 사건들과 서로 교차하면서, 탈식민지화는 새로운 정치적 공간을 창출했다.

이 공간은 전략들인 형성되고 자본과 테크놀러지, 메시지가 순환되는 공간일 뿐 아니라 시장의 법칙에 복종하는 전체 주민들이 물리적이고 상징적으로 만나는 공간이다.

이렇게 식민지 정복 시대 이후부터 인종주의를 구조화하는 차원들 중 하나를 형성하는 내부성-외부성이라는 애매한 편성이 재생산되고 확대되고 재활성화되고 있다.

구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에서 자본주의 중심부로 향하는 이주를 통해 야기되는 국내의 제3세계화 효과에 대해서는 누구나 아는 것처럼 진부하다.

외부의 내부화라는 형태는 인종과 에스니시티의 표상이 가동되는 지평을 이루지만, 그러나 이 형태는 인종과 에스니시티의 표상이 가동되는 지평을 이루지만, 그러한 형태는 내부의 외부화라는 외견상 안티테제의 형태로부터 추상적으로 분리될 수 있을 뿐이다.


인종주의의 핵심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 그 자체의 가장 불변적인 언표 행위들 중 하나의 가정하는 것과 반대로, 인간의 생물학적 또는 심리학적 '기억'이 '인종'인 게 아니라 근대 사회들의 역사적 기억에서 가장 집요한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 인종주의인 것이다.

인종주의가 과거와 현재의 상상적 융합을 계속 작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사에서 집합적 지각이 전개된다.

다시 말하면 인종주의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주는 브릿지가 되는 것이다. 인종을 통해서 과거의 사건과 사물, 구성과 어떤 기억들이 플랫폼을 지나서 현재로 이어주는 것이다. 가장 흔한 예로 애국심이라는 국민의 기본적인 정신상태는 '인종주의'와 연결되면서 나와 같은 동일성을 가진 인종들이 경험한 일들로 바뀐다는 것이다.


인종주의의 두가지

인종주의는 실현되는 방식에 따라서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위에서 설명한대로 인종을 나누면 생기는 것은 것은 피아식별이고 이를 통해서 타자에 대해서 나를 지키려는 정체성 담론이 인종주의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따라서 인종주의는 그 자체로 머물러 있지 않고 인간이 무엇인가를 할 때 자신을 지키는 행위의 시작이 된다. 그래서 인종주의는 '절멸의 인종주의'라고 하는 폭력적인 인종주의와 '배재적 인종주의'라고 하는 차별을 통한 배제의 다소 온건한 방식으로 나누어진다. 어느곳이든 인종주의가 보편적으로 이야기되는 곳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배제와 차별은 자연스러워진다.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의 양가성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정상적인 이데올로기와 정치를 초과적 이데올로기와 행동으로 인종주의에 대면시키는 것에 의미의 핵심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또한 즉각적으로 의문들과 또 다른 개념적 구별의 의문들이 생겨난다.

인종주의에 우리의 고찰을 집중시키기보다 차라리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라는 더 객관적인 양자택일을 특권화하는 것이 적절하다.

예를 들어, 민족주의 자체가 국민들의 제국주의적 성격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 효과일 가능성이든, 또는 제국주의적 시대와 환경에서 국민들의 생존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 효과의 가능성이든, 더욱이 파시즘과 나치즘 같은 통념드도 도입함으로써 연쇄는 더욱 복잡해진다.

파시즘과 나치즘은 민족주의인가 아니면 제국주의인가라는 관련된 물음들의 네트워크와 더불어서 말이다.


영화 '페르시안 수업'은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넘나들지만, 서로 다른 민족의 언어를 배우는 보편성을 보여준다.


인종주의의 광의적 정의 4가지

1) 그 어떤 국민도 실제로 예스닉한 토대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

2) 소수자화오 인종화라는 현상은 전적으로 상이한 출생의 상이한 사회집단들을 동시에 겨냥한다.

3) 우선은 환영의 네트워크에 의해, 이어서 담론과 행동에 의해 이질적이면서도 강력하게 묶인 인종주의의 이 광범위한 구조가 민족주의오 필연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민족주의를 구성하는 데 공헌한다.

4) 결국 인종주의가 발전되고 있는 사회들이 동시에 평등한 사회, 즉 개인들 사이의 지위 차이를 무시하는 사회들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인 동시에 제도적인 근대 인종주의의 구조적 조건들 속에 집어넣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이런 사회학적 테제가 없다. 평등한 것은 근대 국가가 아니고, 근대적인 국민적 국가이다.


민족주의에서 인종주의가 나올 수 있고,
인종주의에서 민족주의가 나올 수 있다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의 상호성

역사적으로 보면 특이하게 역사적으로 서로 연쇄적으로 축적되는 사레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바로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의 상호성의 주기가 있다.

외부를 향해서일 뿐만 아니라 내부를 향해서도 인종주의는 끊임없이 민족주의에서 나온다.

미합중국의 경우 최초의 공민권 운동을 저지하는 체계적인 인종 격리제도인종들이 헤게모니적 사명을 가져야 한다는 관념을 고수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생겨났다.

민족주의가 인종주의에서 나온다는 것은 자신이 그것에 대해 반작용하는 공식적 민족주의가 심층적으로 인종주의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새로운 국민의 이데올로기로서 스스로를 구성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의 표상들과 실천들 사이에서는 간극이 존재한다.

간극은 모순과 강제된 동일화 사이에서 흔들린다. 동일화가 외관상 완벽하게 보일 때 모순은 가장 첨예화된다.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의 그 자체 사이에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행태들 사이에, 즉 민족주의의 정치적 목표와 어떤 대상에 대한 어떤 순간에 인종주의의 결정화 사이에 모순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종주의는 민족주의의 표현이 아니라 민족주의의 대체보충,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민족주의에 대한 내적 대체 보충이다. 이것은 데리다의 개념과 일치한다. 언어와 문자의 관계에서 언어의 중심에 문자가 대체보충되는 것처럼 주변호된 것이 본질을 구성하게 되는 현상을 대체보충이라고 한다.

그런 관점에서 민족주의의 본질은 사실 대체보충으로서 인종주의이다. 인종주의가 없이 민족주의는 작동할 수 없다.


일본 자이니치의 고민을 다룬 영화 '고'는 한국인이 자이니치를 인정하는 순간 그들을 무시하는 것인가 존중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던져준다.


보편성의 역설들

발리바르는 이 장의 마지막으로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를 보편성과 연결시킨다. 그러면서 두가지의 질문을 던진다. 민족주의에 대한 대체보충인 인종주의가 어떻게 미화시키는가? 또한 실제로 이것들은 어떤 모순을 가지고 있는가? 발리바르는 상호 모순적인 것들이 연결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비약이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적인 이상화이다.

인종주의는 보편적인 것의 측면과 특수적인 것의 측면에서 동시에 형상화된다. 인종주의가 민족주의와 관련해 표상하는 초과, 그리고 인종주의가 민족주의에 가져오는 대체보충은 민족주의를 보편화하고 결국 보편성 결여를 교정하고 보완한다.

인종주의는 민족주의의 양가성을 더욱 강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인종주의를 통해 그 물질적 모순의 이상적 모순으로 변식이라는 '전방 도주'에 착수하는 것이다.

인종주의는 하나의 역사철학이다.

인종주의는 역사를 인간의 고유한 본성이나 고유한 탄생에 관한 감춰지고 폭로되는 비밀의 결과로 만드는 하나의 역사철학이다.

그것은 사회들과 민족들의 운명에 과한 비가시적 원인을 가시적으로 만드는 철학이며, 비가시적 원인에 대한 몰이해가 타락을, 또는 악의 역사적 권능을 설명해준다.

인종주의는 그차제로 서열화되는데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면서 신성화시켜야만 민족주의와 함께 보편성의 담론으로 넘어가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보편성을 넘어서는 특수성의 대체보충으로 인종주의는 무엇보다도 과잉 민족주의로 제시된다. 경쟁의 공간 또는 격화되는 저쟁의 공간에서는 단순한 정치적 민족주의는 취약한 것으로서, 유화적인 입장으로 지각된다.

보편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 인종주의는 자신이 거래할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민족주의로 들어온다. 그것중에 하나는 초이상주의가 된다. 초국가적이면서 초민족적인 개념을 가지고 민족주의를 대체한다. 인종주의적 국제주의나 초국민주의가 만들어진다. 마치 일본의 대동아공영권과 연결된다.

최근에는 민족주의적 국제주의라는 것이 등장한다.

정치적 시민권은 국민일 때만 가능했는데 사회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논쟁을 넘어서는 새로운 개념들이 필요하다.


진격의 거인은 전형적인 민족주의 안에 인종주의를 보여준다.



참고링크


https://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0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106100300045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68199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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