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신학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민네이션 Feb 12. 2023

우리는 왕을 기다린다

제임스스미스_왕을 기다리며_결론

0. 들어가기


캐나다의 철학자 찰스테일러는 그의 대작인 '세속시대'에서 세속화(secularization), 세속성(secularity)이라는 것을 기존의 논의와 다르게 정의한다. 찰스테일러는 세속화를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눈다. 1) 공적영역에서 신앙과 종교 혹은 신의 개념이 사라지는 과정 2) 라이프스타일 자체에서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실천이 사라지는 과정 3) 포스트모던시대의 신앙의 토대가 여러가지 토대 중에서 하나로 전락한 것이다. 이러한 3가지의 구분 중에서 찰스테일러는 3번째의 관점을 집중적으로 세속화의 개념과 연결한다. 어쩌면 북미 기독교는 이미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에, 크리스찬돔 이후에 세속화의 결과로 신앙은 하나의 선택지가 된 것이다.


특히 신앙이 주는 '충만함'이라는 요소가 내재적으로 스스로 끌어올리거나 종교가 아닌 다른 출처들에서 얻을 수 있게 된 것이 핵심이다. 종교를 통해서 고양되고 승화되는 정신의 충만함이라는 경험이 이제는 자연을 깊이 음미하거나,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충족감을 얻거나, 스펙터클한 경험을 통해서 기존의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는 것과 같은 과정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속화 시대이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의 특징을 내제가 아니라 초월도 포함한 것으로 본다면 어떻게 정리가 될 것인가? 찰스테일러는 초월성을 아가페의 사랑, 초월적인 신의 존재, 인생 전체의 관점에서 현재를 조망하는 삶이라고 보았다. 그러니깐 인본주의 시대의 초월성은 대부분 추방당하고 인간의 내재된 것들의 극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임스 스미스는 초월과 내재를 하나로 묶어내는 것을 '예전'이라고 본 것이다. 우리 안에 자연스러운 내재적 형성과 하나님의 사랑이 초월적으로 어우러지는 예배의 과정을 통해서 인간은 새로운 길에 들어서게 되고 그 길을 걸어가는 내내 예전을 통해서 진정한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이다. 스미스는 마지막 결론에서 아우구스투누스로 돌아와서 두 도성을 이야기한다. 여전히 우리는 나그네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외계인처럼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예배를 통해서 확인하고 또 삶에서 확장해 간다.  이제 '왕을 기다리며'의 결론에서 스미스가 어떻게 마무리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https://brunch.co.kr/@minnation/3278



1. 하늘을 향한 두 환호 : '문화변혁'의 세기에서 온 보고서


위에서 살펴본 테일러의 저작에서 우리는 질문들을 추려볼 수 있다. 테일러는 결국 우리의 세속시대를 만들어 낸 것은 다름 아닌 종교개혁이라고 주장한다.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초월적이고 언제나 거기 계시는 주님이 아닌 가정적이고 경제적이며, 정치적인 삶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이다. 테일러는 이를 하늘의 소멸이라고 부른다. 특히, 그 동안 중세를 지탱해 오던 플라톤주의 혹은 신플라톤주의가 붕괴하면서 '천국만이 내 집은 아닙니다'라고 믿게 된 것이다. 원래 플라톤은 이 세계는 이데아의 모방일 뿐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방한 세계에서 언젠가는 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가게 되며, 이데아의 세계의 일부가 모사품인 우리에게 비춰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종교 개혁 이후에는 오히려 반플라톤주의가 트렌드가 되면서 사람들은 조금씩 초월성 보다는 내재성과 사회성을 더 중시하게 된 것이다.



찰스테일러가 던지는 질문 feat. 세속 시대

어떻게 우리는 주술에 걸려 있던 기독교 중세로부터 근대의 과격한 탈주술화로 이행했는가?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세계에 대한 성례전적 이해로부터 전적으로 자연적 실체인 평평해지고 내재적인 우주로 넘어 왔는가?

언제 그리고 왜 우리는 하나님의 도성을 향한 순례를 포기하고 지상 도성을 그토록 편하게 느끼게 되었는가?


제임스 스미스가 던지는 질문

우리가 피조물의 선함을 끈질기게 강조하다가 무언가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너무 많이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듣기와 순종보다)

천국을 잃어 버린다면 피조물도 잃어버리고 우리에게는 자연만 남는 것은 아닐까?

이른바 지상 도성이 선하다고 열렬히 주장하려다가 천상 도성에 대한 갈망을 잃어 버리고 만 것은 아닐까?

근본주의적 내세성을 적극적으로 버리려 하다가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을 잃어 버린 것은 아닐까?


스미스는 복음주의가 발견한 '이 세상의 가치'를 존중하는 태도가 지나처서 이러한 문제들이 발생했다고 본다. 그러니깐 일반은총과 영역주권과 같이 이 세계를 너무 집중한 나머지 반영지주의를 타파하기는 했지만 영적 초월성에 대해서는 잊어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땅 위에 하늘을 구체화할 뿐 아니라 하늘을 땅으로 환원하려는 노력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결국 '살롬'을 자연화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한 복음주의를 정치적인 것과 동일시하며, 기독교의 관심을 정치적으로 축소시키게 된다. 여기서 스미스는 그레이엄 그린의 '조용한 미국인'이라는 소설과 한스 부어스마의 '천상적 참여'를 통해서 문제를 설명한다.


한스 부어스마의 고민, '천상적 참여'

개신교에서는 피조물의 선함과 내재적 삶을 중시하는 사이에 세계를 탈주술화할 위험을 무릅쓴다.

피조물의 선함을 강조함으로써 영지주의를 부정할 수 있지만, 이렇게 되면 결국은 자연밖에 안 남을 것이다. 인간의 선함은 한계가 있고, 자율적으로 움직이지만 항상 이해가능한 자연이 오히려 선함을 꾸준히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창조질서에 자율성을 부여하는 틀'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존재론적 틀은 정치적으로 복음주의적 행동주의와 연결된다. 특히 이미 부여된 창조질서가 세속화된 기존의 제도와 문화에서는 복음주의의 행동은 방향이 설정된 결과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이데올로기적 덫에 걸린다는 것이다.

천상이 사라진 상태는, 천상 도성의 가치와 방법이 사라진 것이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부분도 희미해진다.


한스 부어스마의 저작을 통해서 스미스는 문제점을 더 확증해 가면서 결론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의 두 핵심 주제로 돌아온다. 그것은 1) 예배의 한 양식으로서 정치에 대한 예전적 혹은 의례적 분석의 필요성, 2) 그리스도의 몸의 예전적 실천을 정치적 중요성으로 삼고, 공동선으로 발전시킴으로써 기독교적 정치참여에 대한 교회 중심적인 이해를 높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배 안의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서 집중하고, 이것이 공동의 선으로 이해되면서 교회가 자연스럽게 정치에 대한 일종의 지향점을 갖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성경에 나오는 '생명, 번영, 회복, 실천'과 같은 가치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주장되면서 실천되지만 그것은 천상 도성의 가치와 연결되어서 언젠가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간다는 것이다.



2. 신중함 기르기 : 교회의 무게 중심 만들기



피조물의 선함과 정치의 유익함을 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영역' 주위에서 수 많은 지향성들이 회오리치는 소용돌이를 과소평가하고 있다. 단순한 전략으로서의 정치 참여는 그 안에 이미 정치적 실천의 형성적 영향력이라는 근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에서는 사랑을 기반으로 정치를 바라본다. 우리의 사랑의 형성은 예배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는 정치적 실천의 '예전적 힘'이라는 차원에서 정치를 바라본다. 그러니깐 정치란 사랑을 지향하는 가운데 형성되는 예전이라는 것이다. 지상도성의 여러가지 정치적 구조는 결국은 국가로 귀결된다. 그러나 그 구조가 지향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지향이면서도 세속화된 지향성이다.


물론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지상도성에서의 국가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낙관적으로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대립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이고, 그 정도라는 것은 '지향'에 대한 정도이다. 그러니깐 궁극적인 목적의 관점에서 볼 때 궁극적인 것과 준궁극적인 것이 있다는 것이다. 지상 도성의 정치 구성에 참여하는 것은 예배와 종교의 정체성의 문제다. 제국의 공식적 실천은 단지 정치적이거나 단지 세속적이지 않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도성과 대립하는 텔로스를 지향하는 의미로 가득차 있는 형성적 실천이다. 제국의 공적 실천 안에서는 전혀 다른 텔로스가 넘처난다. 즉 하나님의 도성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목적의 왕국이다.


정치 참여에 있어서 나그네된 백성들이 참여할 수 있을지 없을지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정도까지 참여'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결코 우리가 이중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도성의 시민은 언제나 자신이 이방인 거류민의 상황에 처해 있음을 인식할 것이다. 문제는 정치적일지 말지가 아니라 어떻게 정치적일 것이냐이다. 정치의 영역에 뛰어들 것인가가 아니라, 정치적인 사회 안에서 어떤 지향을 가지고 그 지향을 실천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래서 결국은 이러한 지향을 형성하고 또 지키고, 또 기다리면서 실천하기 위해서는 에클레시아 안에서 '예전적 형성'이 필요한 것이다.



3. 계산된 양가성 : 상황에 따른 협력을 위한 네가지 원칙


아우구스티누스는 천상의 시민들이 정치적 에너지를 위한 무게 중심이 교회라고 주장하며, 궁극적으로 지상도성의 정치를 비판하는 평가를 내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입장이 지상 도성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마니교적으로, 절대적으로 거부하는 태도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치 현상학에서는 네 가지의 요인에 근거한 선택적, 의도적 협력을 지지한다. 네 가지 요인을 통해서  스미스는 자신의 주장을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재해석하여 설명한다.


1) 무질서한 사랑조차도 피조물의 욕망을 증언한다.

형식적 차원에서 무질서한 사랑의 구조 조차도 결코 제거할 수 없는 피조물의 욕망을 증언한다.

여기서 우상숭배는 인간됨을 구성하는, 예배하고자 하는 제거할 수 없는 종교적 충동에 대한 끈질긴 증거다.

우상숭배는 타락에 의해 잘못 지향하는 피조물의 영속적 구조에 대한 증언이다. 욕망 자체는 피조물의 구조에 대한 증거이다.

지상 도성의 정치적 욕망이나 사랑은 궁극적으로 도착적이며 잘못 지향이지만, 그럼에도 그 지향적 도착이 피조물의 구조를 보여준다.

이것은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존재론적 주장'이다.


2) 모든 비판은 상황 의존적이다. 어떤 기독교 비판도 전면적이거나 절대적일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상 도성 비판은 결코 '전면적'이거나 '절대적'일 수 없다. 참여적 존재론이 그런 비판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강도떼 조차도 평화와 비슷한 것 혹은 평화의 그림자를 유지한다. 없는 것보다 비슷한 것이라도 있는 편이 나으며, 순전한 어둠보다 그림자가 낫다.

얼마나 하늘에 도성에 가까운가에 대한 정도평가는 사실은 방향평가이며 평가도구는 자가 아니라 각도기다.


3) 궁극적 차이가 있는 곳에서도 준궁극적 수렴을 인정하라.

궁극과 준궁극을 구분하는 섬세함은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이 두가지가 나누어진다고 하더라도 수렴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포함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지향성의 관점에서 사랑을 설명하는 접근방식 덕분에 다른 사회 구성에 비해 잘못된 방향을 덜 지향하는 사회 구성을 신중하게 인정하는 동시에, 지상 도성의 문화적 실천에 참여하는 것이 결국에는 예배의 문제이다.

따라서 우상숭배 문제라는 예리한 감각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 이웃을 사랑하라는 부르심 때문에 우리는 이웃들이 살고 있는 공유된 영토로 들어갈 수 밖에 없으며, 하나님이 우리의 동료 시민들을 위해 바라시는 바와 조화를 이루는 선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4) 종말론을 잃어 버리지 말라. 목적론적 감수성을 개발하라.

아우구스티누스는 무질서한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사랑의 양상조차 제한적으로, 상황에 따라 긍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도성 시민들이 그러한 사랑을 이용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지상도성의 내재적 평화가 궁극적으로 공허하며 지속 불가능하다고 지적하면서도 그것을 거부해서는 안된다라고 주장한다.

지상도성의 평화를 이용한다는 것은 제국을 기독교화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지상 도성 안에서 정치적 평화를 추구하는 목적은 교회를 위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치적 실현에 대한 피조물의 요청에 응답해야 할 피조물로로서의 소명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정치제들을 만들어내는 문화적 일은 창조의 본성이 요구하는 바다.

정치의 목적은 신체적 사회적 필요를 지닌 인간을 돌보고 그들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뒤섞인 공간permixtrum인 공동의 삶 곧 지상의 도성으로 보내진다.





4. 돈키호테를 칭송하며


지상 도성 정치의 냉혹한 현실주의와 약삭빠른 합리성 속에서 교회가 보여주는 소망의 정치에는 언제나 돈키호테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결국 정치신학에서는 우리에게 왕국 상상하고 절대로 도착하지 않을 것처럼 왕을 기다리라고 요구하지 않는가? 돈키호테가 추구하는 것처럼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며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지향을 실천적으로 살아낸다.


우리는 왕을 기다린다


현실을 직시하라고 하는 두려움과 축소의 정치 역시 궁극적인 무언가에 대한 어떤 믿음에 영향받지 않고서는 세상에 대한 견해를 갖을 수 없다. 정치적 현실주의로 통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누군가의 궁극적 견해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어떤 사랑에 의해 활력을 얻는 견해다. 궁극적으로 번영하는 폴리스에는 성경적 전망이 포함되어 있으며 복음의 선포가 정치를 상상하는 급진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제시될 기회와 가능성이 열린다. 다시 말하면 정치는 이미 어떤 지향을 가지고 있으며 다원적일지라도 지향이라는 차원에서는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이다. 이모든 것은 누가 세상을 설명하는 화자라고 말하는지에 달려 있다. 이 화자는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부활하신 왕이다.



0. 나오기


적극적 기다림이 필요하다. 적극적 기다림은 천상 도성의 시민들을 구별 짓는 특징으로 세상을 정세와 권세에 내주는 정적주의 및 은혜와 무관한 개선을 상상하는 행동주의의 둘 다에 저한한다. 마치 하박국이 하나님으리 다리며 성루에 자리를 잡듯이 우리는 에클레시아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성루라는 것을 안다. 에클레시아의 형성적 훈련과 실천은 하나님이 우리의 지각을 성화하여 우리가 현실을 더 명확히 계시와 소망에 비추어 볼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에클레시아에서 우리의 사랑은 왕을 향해 재조정되고 다시 왕을 가리키며, 그 다음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증언하도록 뒤섞인 공간안으로 보냄을 받는다.


우리의 가장 혁명적인 행동은 소망하기다


두려움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습관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정치에 참여하지만 두려움 없이 참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한다. 두려움은 우리를 마비시키며 올바른 결정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왕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왕은 '두려워 말라'라고 말씀하신다. 두려워 말고 소망하기를 계속해야 할 이유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폴리스의 교회와 노모스의 복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