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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an 17. 2023

폴리스의 교회와 노모스의 복음

왕을 위하여_제임스 스미스_2장 폴리스로서의 교회 재고하기

들어가며


정치신학과 공공신학을 구분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기준은 'One of Them'으로서 사회의 각각 영역을 인정하면서 신학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두는지이다. 정치신학은 그런 접근이 아니라 정치적인 장에서 하나님의 역사와 이스라엘의 역사, 성경의 이야기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기준을 제공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라면, 공공신학은 이를 넘어서 더 큰 차원에서 정부와 시장,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공공영역안에서 신학이란 무엇이고 교회란 무엇이고 인간이란 무엇이며, 성도란 무엇인지를 밝힌다. 따라서 사전에 해야할 일은 '교회'는 그 자체로 신학에서 어떻게 보고있는지이다. 


오늘은 제임스 스미스의 왕을 위하여 2장을 들여다 본다. 여기서는 폴리스로서의 교회를 이야기하면서 하나의 공동체로서 공공의 일부인 교회의 정체성과 역할을 살펴보는 시간이다. 예로부터 폴리스는 몸이라고 불렀고 폴리스의 문화를 노모스라고 해서 정신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서 몸이라면 폴리스로서 교회는 그러한 몸의 하나이고, 노모스로서도 하나의 정신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비유는 플라톤주의나 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영지주의로 치달을 위험도 있고 흑백논리나 이원론의 뿌리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 한번 더 깊이 들어가보자. 



기독교 정치는 무엇인가?

영역에서, 공간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치는 권력을 쟁취하고 세력을 얻는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문제이다. 

스미스는 이것을 예전적으로 본다. 기독교 정치의 본질적인 부분은 기독교 예배가 정치적인 것이다.

모든 세속적인 예전도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쇼핑몰이나, 국가의례와 스포츠 경기는 예전이다. 

따라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왕이심을 선포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예배의 의례는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름받고 만왕의 대사로 보냄받은 백성의 불가피한 정치적 전망인 사회적 상상을 담고 있다. 

역사적 기독교 예배의 레퍼토리는 창조와 문화의 번영에 대한 성격적 전망을 이루고 사회적 상상을 그 안에 담고 있다. 

예배는 언제나 세상 속의 정치적 개입이며, 예수는 주님이라고 말하는 주장은 카이사르는 주이시다라고 하는 것을 거부하는 정치적 행위이다. 


하우어워스의 관점 비판

교회가 정치적이라는 것은 '대항문화'로서 존재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 하우어워스의 관점이다. 

그는 불신앙의 세상에서 '교회'는 타국이라는 의식을 심어지면서 체류하는 곳으로 말한다. 그러니깐 '나그네된 백성'으로 성도들은 교회에서 하나님나라의 방식을 실현하면서 예배한다고 말한다. 

하우어워스는 '교회는 사회의 윤리다'라고 말한다. 교회는 정치적 실제라고 주장한다. 

하우어워스의 의도는 천상의 시민들이 지상 도성의 시민들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행동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비정치적인 것으로 보는 영적 이해를 바로잡으려는 것이다. 교회를 폴리스로 볼 때 핵심은 교회를 국가 가운데 있는 내세적 섬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 도성만을 정치적이라고 생각하고 국가의 습관과 훈련에 '정치'를 넘겨주려는 유혹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오도노반과 스미스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천상의 폴리스의 형성적 훈련에 집중한 다음 현시대의 경쟁하는 창조 영역 안에서 일하도록 보냄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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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스와 노모스

폴리스는 체제와 시스템이라면 노모스는 문화이다. 문화는 정치문화도 포함하고 있다. 

노모스는 시스템인 폴리스를 만드는 재료이면서 물결이면서 분위기이다. 

그렇게 볼 때 노모스를 만들어내는 것은 예전적인 인간의 몸과 말과 행동이다. 

따라서 교회의 예배는, 예전은 폴리스의 노모스를 바꾸는 계기가 되고 이것은 정치적이 된다. 



열방의 욕망, 오도노반

예배에서 시연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과 맺은 언약의 이야기다. 

예전은 우리의 상상력 안으로 가라앉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이야기의 상연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독특한 정치적 상상을 구별시키는 것은 이 이야기의 구체적 사항들이다.

이 이야기드의 내용이 그리스도를 따르며 성령의 능력을 입은 이 폴리스의 에토스를 그려낸다. 

올리버 오도노반은 획기적인 저서 '열방의 욕망'은 바로 이 이야기와 역사에 대한 자세한 해석으로 성경 안에 담겨 있으며 교회의 예전적 실천의 골격을 이루는 정치적 상상력을 분석한다. 

기독교 정치신학이 성경적인 까닭은 이스라엘과 같은 정경화된 정치적 실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가 우리가 정치적 맥락에서 분별력있게 시대의 징조를 읽어줄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정치신학은 예언자적이어야 한다. 단순한 고발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긍휼에 관해서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정치신학이다. 


2가지의 유혹

우리는 예배를 그저 우리가 일고 있는 정치를 뒷받침하는 연로로 바라보려는 유혹을 피해야 한다. 

우리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정의를 우리가 이 지상의 여정 중에 국가, 주, 시 안에서 경험하는 바에 한정하려는 유횩을 피해야 한다. 


정치적인 것, 오노도반

정치적인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통치로부터 분리된 자연의 한 특징으로 이해하 ㄹ수 있는 단순한 현세적, 지상적 실제가 아니다. 

정치적인 것은 그리스도께서 창조하고 속량하며 지배하는 만물의 범위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신학이 복음적이려면 반드시 정치적이야 한다. 

정치적 질문을 배제해 보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온전히 선포하지 못할 것이다. 사라믇ㄹ이 죄에서 해방되어야 하는 곳에서 그들을 노예 상태로 내보려 두게 될 것이다. 

정치적인 것은 하나님의 행동,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승천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복음이 불어넣는 정치적 상상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예수, 그분의 몸이신 교회와 맺으신 언약의 역사라는 우물에서 물을 긷는다. 



하나님의 통치

언약적 역사의 핵심은 하나님의 통치가 있다. 성경의 드라마를 시연하는 예배를 통해 우리는 정치적 역사를 하나님의 통치 역사 안에 두는 법을 배운다. 

왕국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를 훈련시키는 기독교적인 정치적 상상력을 갖추기 위해서 우리는 그러한 형성적 예배에 몰입해야 한다. 

피조물을 올바르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이스라엘과 예수님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보아야 한다. 창조의 지배가 회복, 실현, 강화된 것으로서 부활은 하늘로부터 갑자기 정치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권과 단어

구원 : 야훼께서는 해방자, 방어자, 승리자 보호자시다. 

심판 : 왕이신 하나님은 의로운 심판자로서 사법적 권위를 행사하신다. 

소유 :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소유물과 기업을 주시지만 이것은 이스라엘 자체가 야훼의 소유라는 주장이기도 하다. 


오도노반, 정치적 권위 자체에 관한 두 공리

첫 번째, 정치적 권위가 작동하는 방식에 관한 기술적 혹은 현상학적 설명이다. '권력, 권리의 실행, 전통의 항구화가 한 통합된 행위자 안에서 보장되는 데서 정치적 권위가 생겨난다'

두 번째, 이스라엘의 역사를 계시된 구원의 역사로 보는 규범적 주장이다. '어떤 체제가 실제로 권위를 확보하거나 계속 보유하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 봉사라는 인간적 책무의 성취가 아니라 역사 안에서 신적 섭리가 작동한 결과다'


카이퍼적 세속주의의 유혹_민네이션

아브라함 카이퍼의 모든 창조는 하나님께 속했고 모든 창조물은 선하다라고 하는 명제를 후세들이 받아들이면서 몇가지의 분화를 겪게 된다. 

첫번째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분화'와 '개현'의 관점에서는 우리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방법을 찾고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선하기 때문에 모두 잘 받아들이면 된다는 세속주의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카이퍼주의는 세속주의를 피할 수 없으며 이 세상 자체에만 집중함으로써 세속적인 자유주의자가 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이러한 세속주의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성경의 이야기를 '자연'에 내어 줌으로써 원래부터 자연이 가지고 있었던 속성인 것처럼 여긴다. 따라서 성경이, 하나님이, 복음이 필요한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개현'과 '분화'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북미 카이퍼주의자들의 문제이다. 


찰스테일러의 전환

종교개혁은 이 세상의 정의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노력을 촉발함으로써 우리가 하늘을 잊어버릴 수 있는 가능성까지 촉발시켰다. 

종교개혁은 두 층위 기독교의 이원론을 거부함으로써 이 세상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자연주의로 나아가는 길으 열었다. 

테일러는 이것을 일식이라는 용어로 설명했다. 더 심층적인 목적으로 단순한 인간 번영을 초월하는 선에 대한 의식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인간 번영을 원하신다고 생각하지만, 뜻이 이루어진다라는 것은 인간이 번영하게 하소서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전근대 기독교에서는 행위자와 사회적 기관 모두가 영원한 텔로스를 인식하면서 살았다. 텔로스는 심판, 지복직관 삶의 목적이다. 

테일러가 보기에 이러한 더 높은 선은 인간 번영을 넘어서는 의무감을 포함하는 번영에 고나한 세속적 관심과 일정한 긴장 관계에 있다. 

이생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아니며, 이를 인정할 때 우리는 이생을 다르게 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테일러는 이 점에서 중요한 전환이 있으며, 그 전환은 종교개혁에 의해 가능해졌지만 애덤 스미스와 존 로크등의 작업이 확고히 자리잡았다고 지적한다. 

역사적으로 섭리의 교리는 우주에 대한 자비로운 궁극적 계획을 보여주는 반면, 로크와 스미스에게서 우리는 새로운 강조점을 확인할 수 있다. 

섭리는 일반적으로 상호이익, 특히 경제적 이익을 위해 세상을 질서 짓는 것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용역의 교환에 참여하며, 따라서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우주 전체가 이러한 경제를 위한 장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새로운 섭리를 말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축소시키며, 하나님의 관심을 경제적으로 만든다. 그 결과 인간화와 내재화되고 하나님의 섭리적 관심의 텔로스가 내재성 안에 포위 당한다. 


제임스 스미스와 변주적 카이퍼주의

스미스는 카이퍼적으로 변주된다. 종말에 대한 확고한 세대주의적 관점을 견지하면서 구속을 대단히 편협하게 이해하는 북미 복음주의의 대체로 이원론적인 분파 안에서 회심하고 성장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도시 계획이나 화학공학이나 개발도상국의 수자원 확보에 관해 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할 말이 거의 없었던, 휴가에 대비하는 천국 중심의 경건이었다. 

결국 불타없어질 세상에서 정의나 번영에 왜 굳이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는가? 

카이퍼 복음을 들었을 때 충격과 화가 동시에 났다. 죄와 영혼 구원 뿐만 아니라 창조, 문화 만들기, 정의에 대한 관심을 포함하는 구속에 대한 통전적 이해를 아우르는, 성경 서사에 대한 더 풍성한 이해를 접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비물질적인 영혼에만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속량하시며 피조물을 갱신하신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이 세상의 구속도 성취했다. 복음으 누일의 영혼을 위한 탈출 장치에 관한 선언이 아니라 샬롬의 틈입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자칫하면 카이퍼주의의 변주가 일어나면서 이 세상의 내재성만으로 빠져들 위험도 있다. 그래서 결국은 예전과 예배, 우리를 형성하게 하는 것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장feild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형성되는지와 그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동시에 볼 수 있어야 했다. 



마치며


아브라함 카이퍼의 '왕을 위하여'(프로레게)라는 책에서 하나님나라의 일반은총과 보존의 은혜를 이야기하면서 세계관을 교회에서 세상으로 확장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 많은 이들이 소위 말하는 세속주의에 빠지기도 했고, 자유로운 시장에서 길을 헤메이기도 했다. 스미스와 같이 북미신학을 하는 이들은 자연스러운 제국주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라는 텃밭에서 자신들의 생각이 자라나고 또 결실을 맺는 과정을 분석한다. 이것은 네덜란드의 전통인 세계관주의자들과는 다른 관점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적인 적용은 어느정도는 미국자본주의의 세례를 받았기에 겹치는 부분도 있다. 폴리스로서 교회는 노모스로서 하나님나라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적용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3장에서 그 장면들을 함께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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