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몰두하고 있는 개념들
요즘들어서 생각이 많아진다. 무한의 발견과 무의 발견을 경험하고 살아간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살고 있는 삶 속에서 이런 것들이 어떻게 연결될까 이런 고민도 해본다. 장님이 꼬끼리 만지듯이 여러가지 더듬다가 그것도 횟수가 반복되니 나름대로 이해가 되기도 하다. 철학이라는 것이 말이다. 이런 고민들을 하면서 살고 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그래도 계속 고민하고 고민해서 이웃들과 어떻게 자유롭게 지내고 꿈이 발현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시간이다. 무한에 대해서, 무한의 공간에 대해서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3가지 단서, 3가지 구분
사실 철학은 3가지의 단서로 시작한다. '인간-세상-인간과 세상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3가지의 단서 어딘가에서 시작한 철학은 자신이 증명하려고 했던 진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인간을 정의하기도 하고, 자연을 정의하기도 하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정의하기도 한다. 물론 자연 안에는 세상이라고 하는 지구와 사회, 물건과 물질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인간이라는 한계와 가능성은 이러한 3가지의 단서를 넘어서지 못한다. 철학에서 만약 이 3가지의 단서를 넘어서서 '영혼과 신의 존재'가 들어오게 되면 '신비주의' 혹은 '초기 낭만주의'가 되어 버린다. 칸트나 헤겔, 라이프니츠나 프로이트 같은 철학자들은 모두 3가지의 단서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는 중이다.
어떻게 보면 3가지의 단서가 하나의 카테고리라면 다시 3가지의 구분이 생긴다. 인간과 세상, 세상과 인간의관계가 가로줄이라면 세로줄은 '존재-인식-윤리'라는 단서가 주어진다. 그러니 이것들이 합쳐지면 나름대로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인간존재와 자연 속의 존재들 그리고 그 존재들이 만들어가는 가족, 공동체, 사회, 국가, 우주의 존재들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공간들에 분할이 생기고 여러 존재들이 그 속에서 나오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이른바 개념들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나는 오랜시간 개념들의 왕국을 거닐었다. 중세가 저물어가는 가을에서부터 현대라는 우상이 황혼을 지니가는 시기까지, 쉴새 없이 걷고 계속해서 주인장이 뉘신지를 물어면서 다녔다.
무한의 공간, 무한의 언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철학적으로는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상상력'과 '실재의 경험' 그리고 '언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물론 종교적으로는 언어가 없이도 신비한 체험을 할 수 있지만, 이성의 능력과 감성의 깊이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상상과 실재 그리고 언어가 전부이다. 이 세가지는 모두 수와 무, 무한의 경계에서 왔다 갔다 한다. 상상력의 갯수를 헤아릴 수 있지만, 또한 매번 무한으로 생성되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실재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변주는 아무리 경험헤도 인생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상상력과 실재의 경험을 합쳐서 만들어지는 언어 역시 무한이다. 무에서 무한으로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숫자에서 잠시 멈출 수는 있지만 항상 일정하지 않고, 정해지지 않는다.
무한의 공간에서 무한의 언어를 가지고 무한의 실재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한계는 시간의 문제일 뿐 대부분 극복된다.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한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가 문제이다. 무한에 윤리에 있다면, 언젠가 우리는 멈출 수 있을 것이다. 상상하는 것을 멈출 수 있고, 실재에서 만들어내는 경험을 멈출 수 있고, 언어를 통해서 다양한 문장들의 생성을 멈출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의 가장 큰 능력은 '멈춤'의 능력에 있다. 스스로가 어디쯤에 있고, 어디를 가지 말야아 하고, 언제는 움직이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고 선택하는 것이 인간의 능력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무한의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인간의 궤적과 무한의 언어가 그 공간에 메워지면서 하나의 역사가 되고 기록이 된다. 무한 속에서 만들어지는 숫자들은 무한을 향해서 가지만 언제나 방황한다. 그래서 숫자들에게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1, 2, 3, 4, 5 와 같은 개념을 아라비아에서 만들어 냈고, 1st, 2nd와 같은 기수와 서수의 차이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이해가 중요한 이유는 언젠가 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언젠가는 '무한의 경계'속에서 나갈 수 있는 시간이 온다는 것이다. 상상이 과잉되거나, 실재가 과잉되면 인간은 어떤 경계를 넘어서 버려서 실재의 엄청난 난입 속에서 상상력이 봉쇄 되어 어리고, 상상력의 엄청난 범람 속에서 실재는 무의미하게 만들어져 버린다. 언어는 이것들 중에서 어떤 것을 우선해서 표현해야하는지 찾느라 시를 발명해 냈다. 논리라는 이름으로 쓰지 않아도 무한의 공간에서 빛을 발하는 '시'의 능력은 인간을 언제나 한계 바깥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유한의 공간, 유한의 언어
인간이 사유를 하기 시작하는 것은 현실에서 뼈저린 패배나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느끼는 때이다. 이럴 때는 시간의 흐름보다 인간 자신의 존재가 더 앞에 있거나 더 늦게 있게 된다. 그래서 미래에 있을 아픔이나 어려움을 먼저 경험하기도 하고,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의 감정들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기도 한다. 말 그대로 현재의 무한의 공간이 미래와 과거 사이를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자신을 지키느라 현재를 유한한 공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자신을 고정해 놓고 미래의 닥쳐올 일 때문에, 과거에 지나간 사건 때문에 더 이상 무한의 상상력과 무한의 실재를 경험하지 못한다. PTSD는 그런 의미에서 과거에서 미래로 던져진 유한의 그물이다. 과거의 사건이 미래의 일어나지도 않을 사건을 만들어 놓기 있으니깐 말이다.
이러한 유한의 공간에서 언어는 표현력을 잃어 버린다. 무한과 무한이 만나는 지점에서 무한의 언어가 나오지만, 유한과 유한이 만나는 지점에서 인간의 언어는 공간 속에 갖혀 버린다. 언어는 곧 상상과 실재의 유한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유한의 언어를 하는 사람은 이미 그 사람이 그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뜻한다. 과거 어린시절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사람의 언어는 그 자체로 유한하다. 그래서 곧 누군가를 배제하고, 미래에서 걸어올 사람들에게 바리케이트를 친다. 미래 있을 어려움을 미리 대비하느라 현재에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은 미래에 대해서 언어를 꺼낼 때 이미 정해진 것들을 꺼내 놓는다.
유한의 공간에 갖힌 인간들의 언어는 항상 스스로를 공간을 제한하고 나아가서 다른 사람의 공간과 언어도 제한한다. 이른바 권위주의이다. 권위주의는 자신이 권력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의 한계에 갖혀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과 인간의 관계에서 세상이 고정값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무한한 인간을 자신의 언어로 가두어 놓을려고 하는 과정에서 권위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이런 측면에서는 무한의 공간과 무한의 시간을 전제로 한다. 그래야만 언어의 민주성이 곧 무한의 언어로 바뀌면서 '진보'할 수 있게 된다. 스스로를 감옥으로 만든 사람들 곁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이들이 보이는 때면, 무한에 대한 향수를 느기게 된다.
개념들의 연속, 행동의 연속
무한과 유한 사이에서, 인간이 존재와 세상의 존재가 서 있다. 그리고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다른 존재를 인식하고, 그 존재에 대한 어떤 의무감이나 감정이 생기면서 결국 윤리라는 도덕이 생긴다. 이것도 물론 하나의 방법이다. 순서는 뒤바뀔 수 있지만 무한이라는 공간 속에 서 있는 것은 다르지 않다. 또한 시간이라는 것은 만들어낸 개념이긴 해도 인간의 삶이 계속해서 흘러간다는 측면에서는 개념들도 연속적으로 변화를 거듭하고, 행동 역시도 변화를 거듭한다.
내가 누구인지, 지금 이 시대가, 상황이 나에게 어떤 감정과 인식을 주는지가 현상학이라면, 그 현상을 살아낸 사람들과 존재들의 관계, 존재의 궤적을 시작으로 분석을 해 가는 과정이 해석학이다. 인간은 언제나 현상학으로 행동하고, 행동한 것을 해석받으면서 산다. 그 해석이 자신이 되면 자아성찰이 되는 것이고, 타인이 되면 비판적 담화분석과 같이 타인에 대한 철학과 비평이 되는 것이다. 개념들의 연속, 다시 말하면 우리의 상상계에서 일어나는 매번의 생각들이 실재계에서 우리가 행동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물론 이 연결은 언제나 무한이다. 또한 이것을 유한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그 유한을 우리는 습관이라고 부른다.
예측가능한 행동은 예측가능한 개념에서 나온다. 예측가능한 개념을 우리는 일종의 신념이나 고정관념 혹은 편견이라고도 부른다. 무한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내어 놓을 때, 고정관념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시간 위에서 달리는 존재들은 언제나 무한과 유한을 왔다갔다 하면서 신념을 가지기도 하고 습관을 가지기도 했다. 무한의 공간으로 무한의 실재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자유를 경험한 이들이 가지는 언어는 기존 사람들의 습관과 신념을 벗어나게 만든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은 결국 무한에 대한 인식이었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산다. 본질에 접근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개념들을 왔다 갔다가 하다가 무한을 발견하고 엄청난 기쁨을 맛보는 중이다. 8세기 정도에 인도베다철학에서 0이라는 숫자, 그러니깐 무라는 개념을 발견하고서는 엄청난 비밀로 남게 되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인생은 어쩌면 무라는 0에서 시작해서 1,2,3,4로 나아가다가 어느순간에는 무한이라는 영역으로 나가는 것이 아닐까?이런 생각들을 해본다. 군가가 누리는 자유를 다른 사람도 누리기 위해서는 공간과 언어의 자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오늘 같은 생각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