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벤야민의 아우라 개념 이해하기
최근 블록체인 업체 대표인 데미안 허스트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그리피티 아티스트 뱅크시의 작품을 대체불가능한 토큰인 NFC로 만들고 모두 불태웠다. 사람들은 이들을 바보라고 조롱하기도 하지만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의 개념에서 보면 복제품이 난무하는 시절에 원본이 없어져야만 디지털 원본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정확한 개념이다. 발터벤야민의 관점에서 원본은 오직 1개여야만 하고 기술복제의 시대에 사진을 시작으로 복제품들이 등장하면서 원본의 아우라는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해에 따라서 이제는 원본을 제대로 찍은 사진 1장만 이제 진정한 원본이 되고, 복제할 수 있는 플랫폼에서도 꼬리표가 붙어서 진품임을 감정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여전히 '아우라'라는 개념으로 설명 가능한 것들이 너무 많기는 하다.
유대인이었던 발터벤야민은 1940년 대 피레네 산맥을 넘는 도중에 음독자살을 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 마르크스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기 위한 자본주의 비판에서 문학비평까지 나아간 벤야민은 한 시대에 고독한 철학자였다. 역사에 대한 개념과 마르크스에 대한 이해가 있지만 오늘은 예술작품 비평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아우라의 개념에 대해서 살펴보자. 특히 아우라의 몰락과 부활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우리 사회의 엘리트주의와 셀럽, 유명인사들이 어떻게 유명해지고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자리를 차지하는지 알아보자.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의 일회적 현상
벤야민의 '아우라'개념의 본질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거리감'이고 다른 하나는 '접근불가능성'이다. 이러한 본질은 사실 예술작품의 물질적인 특성에 기인한다. 예술작품은 희귀할수록 값어치가 올라간다. 희귀하다는 것은 '멀리있음'을 뜻한다. 벤야민은 무엇보다 예술작품의 '진품성'을 중시했다. 1900년대 사진기술이 발명되면서 원본작품의 진품성은 더 없이 중요해졌다. 특히 사진은 한번의 촬영으로 복제가 가능했기에, 진품에 대한 논란이 커질 수 밖에 없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아무리 정교한 모방품이라도 진품의 질감과 색감에 미묘한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었지만, 사진은 진품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래서 사진기술은 그 자체로 '혁명'적인 사건이 되었다. 이로 부터 이제는 현실을 똑같이 모방하여 진품임을 증명하는 것보다는, 하나의 생각과 흐름으로써 자신의 생각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진짜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의 3가지 핵심
벤야민이 이야기하는 아우라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공간과 시간' 안에서 발생한다. 아우라란 공간과 시간의 직물 속에서 탄생한다. 자연 속에서 오직 한번만 반짝이는 아우라는 보는 사람들은 그 공간, 그 시간에서 아우라를 흠뻑 흡수하는 것이다. 아우라는 물리적인 관점에서 원본인가 그리고 그것이 진품인가 그리고 일회적인가라는 특징을 가지며, 또한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어떤 경험과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가와도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진품이 나와 가까워지면서 이 공간에서 만나는 이 시간이 바로 아우라가 발생하는 시점이다.
- 원본성 : 예술작품은 오직 하나만 존재할 때, 원조일 때 가장 아우라가 많다. 원본은 복제품이 있다는 말이 된다. 원본성을 인정받는 작품은 아우라를 발산하게 된다.
- 진품성 : 원본이 지금 여기, 이시간에 존재한다는 것이 진품성이다.
- 일회성 : 아우라는 그 당시, 그 장소에서 오직 일회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니깐 그 장소와 그 시간이 아니면 그 아우라를 볼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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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과 주체
아우라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지만, 주체가 이것을 경험할 때에만 의미가 있다.
주체의 일회적 경험과 심미적 경험으로서 아우라는 가까이에 오게될 때 떨림과 흥분과 같은 일종의 아우라적 경험이 된다.
예술작품은 사실 그 작가가 경험한 아우라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깐 아우라의 아우라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예술작품을 보면서 '지향성'을 가지게 된다. 아우라가 존재하다는 것과 아우라를 향항 작가의 열망 자체를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아우라는 '물질적 특성'과 '심미적 특성'이 교차하는 직물과 같은 것이다. 사실 이러한 관점은 벤야민의 '낭만주의'적 관점에 따른 것이다. 낭만주의는 '이상'과 '현실'을 끊임없이 연결하려고 했던 작업이다.
아우라와 시선
아우라의 경험은 인간 사회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반응'형식과 관련이 있다.
누군가 우리를 바라볼 때 나도 무의식적으로 그 사람을 보라보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아우라의 충만함을 느끼는 것이다.
아우라의 제의적 성격에서 '충만감'은 사람으로 하여금 황홀함에 빠지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드른 누군가의 시선을 뺏으려고 혹은 집중하게 하려고 하는 아우라적 관종에 빠지게 된다. 그 사람들은 그 만큼 아우라를 경험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제의적인 측면에서 '성상'과 '상징'을 아우라로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아우라를 더 깊이있게 하기 위해서 성스러운 조형물을 만들었지만 그것이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진부해진다면 아우라를 잃어가는 것이다.
벤야민이 활동하던 당시 후설의 현상학은 벤야민과 같은 방식으로 주관성을 이야기한다. 특히 타자적 주관의 경우에는 시선과 의식이 타인과 겹치면서 발생하는 주관성이다.
후설이 정리한 4가지의 주관
1) 외재적 주관
외재적 주관은 자아 외의 존재하는 지향성이 닿아서 인식된 자연, 사물, 공기, 건물, 우주와 같은 외부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우리의 주관에 의해서 그것들을 계속해서 인식된다.
2) 내재적 주관
내재적 주관은 외재적 주관이 인식될 때 내 안에서 느껴지는, 이해되는 것들이다. 몸이 아프다거나, 마음이 좋다던가, 머리가 아프던가, 시원하다라는 등의 여러가지 인식들이 내재적 주관을 만든다.
3) 수리적 주관
수리적 주관은 수학적 주관과 같다. 외재적 주관과 내재적 주관도 마찬가지로 몇개가 있는지, 어떤 배열로 구조화되어 있는지, 어느정도라고 말할 수 있을려면 수리적 주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4) 타자적 주관
타자적 주관은 다른 사람을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외재적 주관과 다른 부분은 다른 사람을 사물로 인식하지 않고 타자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다른 것들을 인식하는 것처럼 타자도 나처럼 다른 것들을 인식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같은 의식적인 능력이 있으나 그것도 역시 내 안에서는 '그와 그녀에 대한 주관'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제 아우라는 조금 정의해 보았으니 아우라가 사용되는 분야들을 한 번 생각해보자. 아우라는 예술작품에 대해서도 보통 발생하지만 같은 방식으로 사람이나 개념, 제의적인 관점에서 종교에서도 발생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기 직전과 사랑하면서 발생하는 아우라를 포함해서, 성경 안에서 종교적인 아우라를 충분히 경험할 수 있다. 또한 조직 생활을 할 때 조직 안에서 아우라를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다양한 경우의 수가 있지만, 몇가지만 생각해 보자.
연애를 할 때 아우라
썸을 탈때의 아우라는 멀리 있음에 기인하며, 그 사람이 진품이라는 가치는 아우라를 발생한다.
그 사람을 다 알았다고 생각하고, 너무 가까이에 있으면 아우라는 사라진다.
다른 사람과 차이가 없다면 그 사람은 오징어로 전락한다.
매력자본의 관점에서 아우라를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매력자본은 상대방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이 성적매력, 태도, 말솜씨를 포함해서 내면의 매력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우라의 몰락으로 너무 뻔한 모습을 보여주는 마음에서는 물리적으로도 너무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멀리로 못가는 일이 발생한다.
아우라를 매번 유지하고 혹은 더 확장하기 위해서 상대방이 더 깊어지고 성장하고 발전하고, 그러면서도 매번 다른 경험을 준다면 어떻게 될까?
한번 만나보면 자신의 틀 안에서 못나가는 사람들을 바로 알게 된다. 그 사람은 이미 그 안에 아우라도 없고 또한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아서 매력이 없어진다.
그 사람만 가지고 있는 원본성, 진품성, 일회성의 관점에서 독특한 가치와 의외성은 아우라를 발휘한다.
보고 있어도 보고싶은그대
성경과 아우리
성경에서 하나님은 아우라의 근본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아우라로만 파악할 수 있는 존재이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얼굴이 밝아져서 사람들이 처다보지 못했던 것은 아우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그럼 예수님의 아우라는 무엇이었을까?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은 물리적으로는 '아우라'개념에서 벗어난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고 계속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원본성, 진품성, 일회성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아우라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제의적 가치는 존재한다는 것을 기본으로 그 자체로 현실을 초월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성소 휘장이 찢어지면서 성전이 가지고 있던 아우라는 몰락한다. 예수님이 부활한 후에는 '부활'이라는 범접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아우라는 부활한다.
리더십과 아우라
카리스마 리더십에서 '카리스'는 신으로 부터 받은 선물을 뜻하는데, 아우라를 말한다.
리더가 아우라를 가졌다는 것은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과 해결하는 방법, 존재만으로도 범접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을 때 리더십은 아우라를 발휘한다고 말할 수 있다.
보통 대통령이 되면 없는 아우라도 생기게 된다. 원본으로서 오직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대통령'이라는 호칭은 그자체로 아우라를 만들게 된다.
그러나 리더십은 그 자리에 오르게 되면 항상 증명을 해야 한다. 그래서 증명하지 못하게 되면 아우라는 몰락하게 된다. 한번 몰락한 아우라가 부활하려면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아우라를 유지하기 위한 리더십들은 항상 노력하게 된다.
아우라의 제의적인 성격이 리더십에 연결되면 리더를 숭배하는 일들도 충분히 가능해진다.
기본적으로 아우라가 가지고 있는 가치가 사라지는 것을 아우라의 몰락이라고 한다. 반대로 아우라가 잃어 버린 가치를 다시 회복하면서 재아우라화가 된다. 아우라가 부활하는 것이다. 사실 아우라는 원본과 진품이 핵심인데, 복제가 가능한 시대에는 원본을 복제한 원본은 또 다른 원본이 된다. 그래서 복제를 오히려 아우라의 재아우라화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아우라는 시간과 공간에서 일회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원본의 본제는 그 자체로 아우라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아우라가 몰락했다고 해서 포기하는게 아니라 재아우라를 위한 준비를 하는 것도 가능하다.
아우라의 몰락
기본적으로 아우라는 원본성, 진품성, 일회성의 관점에서 물리적인 경험과 심미적인 경험이 결합되어 있다.
아우라의 몰락은 당연히 예술작품이 복제되면서 시작되었고, 복제뿐 아니라 용도가 변경되면서 더욱 큰 몰락을 맞는다.
아우라는 물리적인 경험에서도 빛을 바래고 심미적으로도 어떤 감흥을 주지 못할 때 사라진다.
이러한 몰락을 막고자 NFT를 적용하여 원본을 불태우고 하나의 그림만이 메타버스에 유통되도록 하는 사례도 생기고 있는 것이다.
아우라의 부활
그러나 아우라는 사라지지 않는다. 아우라의 본질은 어디론가 숨어 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아우라를 부활시킨다. 복제에 복제를 가하고, 가치에 가치를 더해서 새로운 아우라를 창조하는 것이다.
예술활동은 어쩌면 아우라의 끊임없는 부활일지도 모른다.
17세기가 지나면서 자연과 초월적인 것에 쓰던 단어들이 인간에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시대가 오면서 자연이 가지고 있는 웅장함과 위대함을 인간이 모방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건출물과 치타보다 빠른 자동차, 새보다 높이나는 비행기를 넘어서 우주로 날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인간은 인간 자신에게 아우라를 부여했다. 플라톤의 말처럼 이 현상계는 이데아의 복제품이라면, 그래서 의미가 퇴색된다면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에서는 지금 여기서 부활한 아우라를 만나볼 수 있는 것이다. 예술 작품에서 쓰이던 아우라가 리더십에, 연애와 사랑에, 역사와 같은 보이지 않는 개념에도 사용된다. 이것은 그 자체로 아우라의 확장인지 아니면 아우라의 몰락인지는 아우라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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