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인식과 자기개념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안톤 체호프'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극적효과를 더하는 사실주의 소설가로 유명하다. 체호프의 단편 선 중에서 '상자속에 든 사나이'라는 작품에서는 엄청난 상금을 받기 위해서 상자속에 혼자 갖히는 청년이 등장한다. 1000일 동안 만약 상자 속에서 사회와 단절된 체로 견딘다면 엄청난 상금을 받게 되는 것이다. 청년은 처음에는 잘 버텼다. 1일, 일주일, 한달, 1년.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청년은 고민하게 되었다. 진짜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내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길래 나는 나의 인생의 시간을 여기에 쓰고 있는 것일까?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인가? 그렇다면 그 욕망이 충족된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이런 고뇌에 휩쌓인 마자막 날, 청년은 상자 속을 홀연히 나와서 사라졌다. 그 이후에 청년을 본 사람은 없었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는 그 의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하루만 기다리면 엄청난 상금을 받아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할 수 있는데 왜? 하루를 견디지 못했을까? 처음에는 그 청년이 미련해 보였다. 그리고 어느정도 시점이 지나자 의문들이 꼬리를 이었다. 그 사이에 어떤 마음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그러다가 이야기를 간직한 체로 나이를 먹고 인생을 살아보니 어느정도 상자 속에 든 청년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오늘은 그것이 무엇인지 써 보고자 한다. 왜 그 청년은 상자를 빠져나가게 되었을까? 어쩌면 이것은 아무도 모르는 나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나 사이의 간극을 설명해 줄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아인식'과 '자기개념' 사이에서 서성이는 인간의 근원을 보여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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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2시,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연락을 차단한체, 햇빛도 들 수 없을 만큼 암흑 속에서 자신을 놓아 두어 보라! 처음에는 캄캄한 방안에서 아련한 사물들을 시선으로 찾다가 이내 그 노력을 포기하고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서 조금씩 집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일어나는 일은 과거의 일들이 내면의 극장에서 상영이 되기 시작한다. 이전에 있었던 사건들, 그때의 감정들, 좋아하던 것들, 힘들었던 기억들. 그러한 회고만으로도 몇시간을 보낼 수 있지만, 그 시간들이 흘러가는 가운데 명확하게 하나의 명증한 것들이 남는다. 그것은 지금 내가 이것을 생가하고 있고, 무엇인가 나 자신을 바라보는 새로운 내가 있다는 것이다. 조금씩 이 시간이 길어질 수록 점점 나와 연결된 모든 것들은 끊어지고 비로소 고유한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오직 나만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자아이다
자아인식은 self-awreness라고 한다. 스스로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자아인식은 다른 사람과 연결하지 않고 오로지 나 자신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나를 말한다. 그러니 사람들이 보통 자아인식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스르로를 스스로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자아인식이 안되는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것을 어려워하지만 자신이 어디에 속했고, 무엇을 했고, 어떤 환경 속에서 누구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잘 설명한다. 자신과 연결된 것들이 끊기면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처럼 허무해지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고유함을 찾기 위해서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자아인식은 보통 자기반성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루에 5분이라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기반성을 해 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이것이 습관이 되면 계속해서 자기 객관화를 해 나가는 가운데 성장하게 된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모르면,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방향성은 없어지고, 결국 같은 곳을 뱅뱅 헤메이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마지막에 후회하는 일들이 많아진다. 곰곰히 살펴보면 자기객관화과 안되는 사람들은 보통 자아인식을 하기 어려운데 그것을 몇가지의 특징들이 있다. 만약 자신이 이런 습관들을 가지고 있다면 자기 반성을 할 기회가 부족하다는 것으로 보면 된다.
먼저, 자기자신을 객관화 하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글쓰기를 어려워하고 즐겨하지 않는다. 타인에 대한 글쓰기이든, 사회에 대한 글쓰기이든, 자기자신에 대한 글쓰기이든. 글쓰기는 글의 대상과 일정한 거리감을 둠으로써 객관성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글을 쓴다면 자기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글이라는 것은 '글을 쓴 이상' 이미 자기 자신과 떠나서 새로운 생명과 같다. 글을 쓸 당시의 자기자신의 상태, 환경, 조건, 시간이 다시는 도래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라고 할려면 '동일성'을 기반으로 해야 하는데 글은 이미 그 동일성의 범주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깐 자신에 대한 글쓰기는 그 순간 사진을 찍어 놓은 것처럼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를 보여주는 엑스레이 촬영과 같다. 자신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으며,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고,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자신에 대한 글쓰기를 자주 쓸 수록 자신의 영혼과 마음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서 자신이 쓴 글을 다시 보게 되면, 그 당시에 자신이 했던 이야기들이 지금도 자신에게 유효한지를 비교할 수 있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의 간극을 이해할 수도 있게 된다.
삶은 해석의 갈등이다
프랑스의 해석학자 폴 리꾀르는 '해석의 갈등'이라는 책에서 인간은 언제나, 어디서나 해석의 갈등을 겪는다고 말한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해석의 갈등은 기억에 의존할 수도 있고, 기록에 기반을 둘 수도 있는데, 해석학은 특히 기록의 차원에서 접근한다. 리쾨르의 의하면 지금 의식하고 있는 나의 정신은 말하고 있는 나의 언어로 담기고, 그것을 기록으로 하게 되면 단어를 선정하고 문장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무의식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당시의 기록을 남기는 글은 그 자체로 무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어져 있고 자아인식은 무의식과 의식을 모두 이해하는 것이라면, '자신에 대한 글쓰기'는 무의식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이 자아에 대한 인식은 글쓰기를 통해서 무의식의 영역을 열어주면서 다시 의식의 영역으로 합쳐진다. 자신에 대한 글을 자주 쓴다는 것은 자신을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제공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에 대한 글쓰기가 아니여도 된다. 어떤 글이라도, 글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무의식을 의식으로 끌어내는 작업이며, 쓰고나서는 다시 무의식으로 들어간다. 내가 쓴 글을 내가 보고 또 다른 무의식이 생겨나기도 하며, 내가 쓴 글을 내가 보면서 다시 의식이 깊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자아인식을 위한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그럴려면 이제는 자아인식과 자기개념을 연결해 보아야 한다.
자아인식이 자신의 고유함을 객관화 시키는 작업이었다면, 자기개념은 사람들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작업니다. '자아'가 자기 스스로를 정립하는 작업이었다면, '자기'는 사회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작업이다. 김난도 교수의 2020 트렌드 코리아에서는 새로운 트렌드로 '멀티페르소나'를 주목한다. 페르소나는 원래 연극을 할 때 배우들이 역할에 대해서 갖는 몰입도를 이야기하는데 그 어원은 '가면'이다. 역할이 써 있는 가면을 쓰면 그 가면의 역할 대로 말과 행동을 해야하는 것을 말한다. 멀티페르소나는 그야말로 역할이 여러개인 인간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사회 속에서 한 인간은 다양한 역할을 담당한다. 집에서는 아들, 딸, 아빠, 엄마로 회사에서는 대리님, 과장님, 부장님으로, 학교에서는 학생과 선생님으로.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이 많을 수록 더 많은 페르소나를 가지게 된다.
자기 개념은 사회 속에서, 엄밀히 말하면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자신이 어떤 페르소나를 설정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자기개념은 수동적일 수도 있고, 능동적일 수도 있다. 수동적인 자기개념은 사람들이 자신을 표현해주고 피드백을 주는 만큼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들이 원하는 페르소나로 행동하게 된다. 반대로 능동적인 자기개념은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는가, 어떤 분위기와 컨셉인가에 따라서 자기개념을 설정하고 자신의 페르소나를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드레스코드를 맞추거나 톤앤 매너라고 하면서 말투와 표정을 설정하는 것이 대부분 자기개념을 능동적으로 쓸 때 사용하는 말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사실 능동적인 자기개념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프로페셔널하다고 말하고, 누구나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능동적으로 페르소나를 바꾸는 사람들을 극찬하게 된다. 그러나 페르소나를 너무 자주 바꾸게 되거나 상황에 맞지 않는 페르소나를 사용하게 될 경우에는 자기개념은 자신이 의도하거나 원하는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배우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자신이 연기에 완전히 몰입하고 나서, 연극이 끝나고 그 페르소나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때라고 한다. 그 배역이 자신인지, 자신이 그 배역인지 분간이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멀티페르소나는 잘 사용하면 센스있는 사람이 되지만, 잘못사용하게 되면 자신의 정체성에도 혼란이 오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자기인식과 자기개념의 균형이 필요하다
사실 이 고민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은 어쨌든 혼자 살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자아인식과 자기개념을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아인식과 자기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위에서는 두 가지를 따로따로 설명했지만 사실은 연결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 있다. 다만, 자아인식과 자기개념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나는 균형적으로 이해하고 있나?'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두 가지 모두를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두 가지가 균형이 잡히지 않을 때 문제는 발생한다. 자아인식이 너무 강해서 자기개념을 덮어 버리는 경우와, 자기개념이 너무 중요해서 자아인식을 가려버리는 경우가 발생한다. 비슷해 보이지만 이 두가지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먼저, 자아인식을 계속해서 진행할 경우 '자기의 고유함'에 대한 확신이 생긴다. 일종의 신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신념이 사람들 속에서도 '고유함'을 추구하게 되면 고집불통이 된다. 특히 천재라고 불리거나, 엘리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자아인식에 이상이 생기면서 스스로를 과인대표하거나 과소대표를 하게 된다. 자기에 대한 인식이 강해지고 그 인식이 부정적인 인식일 경우 세상을 온통 불완전한 세계로 인식하게 된다. 반대로 긍정적인 자아인식이 강하게 형성되는 경우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자아가 형성된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이 인간보다 더 큰 존재를 만나는 '근본기본'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경험한 사람은 자기자신을 벗어나서 사고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인생의 여러 경로에서 자아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자아가 형성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자아인식의 결과로 형성된 고유한 자아가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협력을 방해하고, 다른 이의 말을 자주 끊으며, 자신의 감정이 다른 사람들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자아인식만으로는 다른이와 살아갈 수가 없다.
자기개념은 사람 속에서 나인데, 자기개념이 자이인식을 덮어 버리게 되면 자존감이 떨어지고 사람들 앞에서 의기소침해지고,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게 될 만큼 조직에 충성하는 일이 생긴다. 조직이 곧 내가 되고, 국가가 곧 내가 되고, 사람들의 말이 곧 내가 된다. 그러나 그 사람이 어떤 시기, 어떤 환경에 태어났는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자기개념이 자아를 만들어 버린다. 자아인식의 부족과 자개기념의 과잉은 곧 사람들을 대중으로 만들어 버리고 자신의 의견이라는 것은 없고 대중문화가, 여론이, 소문이 자신을 말해주는 것 같이 느껴진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 유튜브의 '좋아요'기능은 철저하게 자기개념으로 자아를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여기에 매몰될 경우 좋아요가 많으면 기뻐하고 좋아요가 줄어들면 슬퍼하게 된다.
조아리스 원도우라는 이론은 미국의 심리학자인 조셉 루프트(JOSEPH LUFT)와 해리 잉햄(HARRY INGHAM)이 고안한 모델이다. 둘의 이름의 앞글자를 따 조해리의 창(JOHARI'S WINDOWS)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아리스 윈도우를 통해서 자신이 다른 사람과 열려 있는 부분이 어느정도인지를 알 수 있고, 또한 자신도 모르고 남들도 모르는 부분을 글쓰기를 통해서 찾아낼 수도 있다. 개방된 '열린창' 영역이 넓어질 수록 자아인식과 자기개념을 조화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은 아는데 남들이 모르는 영역이 바로 '자아인식'이 과잉된 영역이며, 자기는 모르는데 남들만 아는 영역이 '자기개념'이 과잉된 영역이다. 또한 우리의 인생은 무한의 시간 속에서 미지의 영역인 나도 모르고 남들도 모르는 미래를 현재로 가져오는 오늘의 행동을 하면서 살아간다.
1. 공개영역 (OPEN WINDOW) : 본인 스스로와 상대방 모두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겉으로 잘 드러나는 정보 영역이다. 예) 이름, 나이, 성별 등
2. 맹인영역 (BLIND WINDOW) : 본인 스스로는 잘 모르나 상대가 알고있는 정보 영역이다. 예) 타인의 눈에 보이는 자신의 매너, 성격, 무의식적 행위 등
3. 비밀영역 (HIDDEN WINDOW) : 본인 스스로는 잘 알고 있으나 상대방은 모르는 정보 영역이다. 예) 욕망, 감정, 비밀, 기호(호불호), 희망, 꿈 등
4. 미지영역 (UNKNOWN WINDOW) : 자신도 모르고 있으나 상대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미지의 정보 영역이다.
조아리스 윈도우에서 열린창을 확장하는 방법을 2가지로 제안한다. 첫번째는 열린창에서 '숨겨진 창'으로 확장하는 방법은 '자기 표현이다' 다른 사람은 자아인식의 결과를 모르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를 '표현'으로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대화가 되었든, 글이 되었든, 사진이 되었든, SNS가 되었든. 이러한 자기표현을 통해서 사람들은 자아인식의 결과를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창'으로 확장하는 방법, 그러니깐 다른 사람은 아는데 나는 모르는 부분을 알아가는 방법은 피드백을 받는 것이다. 나에 대해서, 나의 글과 나의 행동에 대해서 피드백을 받는 것이다. 다양한 사회적 활동을 통해서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어떤 컨셉으로 여겨지고 보여지는지를 피드백으로 받으면서 내가 보이지 않았던 창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자아인식과 자기개념을 조화롭게 사용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열려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자신의 주장을 자연스럽게 하면서도, 남들의 피드백에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변에 괜찬은 사람은 대부분 이 두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 조화롭게 사용하는 사람들, 균형감각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 수록 열린창 영역이 더 넓어지면서 미지의 영역이 조금씩 줄어들게 되고 결국 자신을 이해한 것과 사람들 속의 나를 실시간으로 연결시켠서 생동감 있는 삶을 살게 된다. 어쩌면 '동기'와 '열정'이 넘기는 사람은 이러한 조화가 넘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상자속에 든 사나이는 왜 거대한 양의 상금을 마다하고 목표한 날짜 전에 상자 속에서 나오게 되었을까? 남들이 아는데 나는 몰랐던 부분을 찾아내서 였을까? 그랬다면 원래는 사람들이 설정한 대로 '인간은 욕망을 추구하게 되어 있고, 너도 그들과 같아'라고 하는 자기개념에 충실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과연 돈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것이었을까?'라는 깨달음을 얻어서였을까? 체호프는 답을 주지 않는다. 자아인식과 자기개념의 확장을 느낄 수록 그 답은 매번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자기 스스로 정한 답을 찾아서 사는 것도 불편하고, 남들이 정해 놓은 답을 살아가는 것도 불편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와 같이, '자아인식과 자기개념의 끊임 없는 대화'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아를 인식하는 글쓰기를 꾸준히 해 나가면서도 사람들과의 진솔한 대화와 피드백을 통해서 사람들이 이해하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이것들을 끊임없이 연결해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성숙은 일어나는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더욱 더 글을 쓰고, 더욱 더 대화를 하면서 또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고 사람들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 하는 것이겠다.
사람들이 나를 만날 때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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