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데리다와 체체, 차이, 유령론
해체의 철학자 데리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데리다의 기본적인 구조를 이해하기 어렵다. 글 자체가 너무 어려우니깐 말이다.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를 읽어도 그 기본이 잡히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맥락을 읽으려면 우리는 더 이전으로 넘어가야 한다. 구조주의를 주창한 소쉬르의 언어학 이전에 서양철학이 기본적으로 깔고 있는 의식구조도 알아야 한다. 오늘은 깊은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20세기의 흐름과 데리다의 기본적인 개념으로써 해체와 탈구축, 차연과 차이에 대해서 알아보자. 다음회에서는 유령론과 메시아론을 통해서 데리다의 비판이 어떻게 새로운 미래를 가져올 수 있을지 가늠해보자.
20세기 소쉬르가 등장하면서 철학계에는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가 진행되었다.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에 사실은 생각의 방식이 담겨 있고, 그것은 곧 일종의 '구조'라고 하는 구조주의 논의가 진행되었다. 우리는 모두 시대의 자녀들이다. 그러니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은 소쉬르의 철학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논의도, 타자를 이해하는 방식도, 자신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도 언어적인 관점에서 혹은 상징계의 관점에서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도 하나의 현상이다. 17세기에는 데카르트를 비롯한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신을 떠난 인간이 사유의 독립을 이루기 위한 인식론적 전회epistemological turn가 일어났고 거의 200여년을 이러한 전회를 향유하며 과학과 계몽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1950년이 지나면서는 마셜맥루한의 이야기처럼 미디어적 전회medial turn이 일어났다. 언어가 아니라 이미지가 사유의 방식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이전까지 사람들이 생각하던 방식이 모두 새롭게 정의되었고, 해석도 달라지게 되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들뢰즈는 '시네마'에서 이미지가 운동으로 연결되고, 운동이 다시 이미지로 분할되는 방식으로 인간의 기억을 정리했다. 인간은 누구나 이미지와 그에 연결된 감정을 중심으로 사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그 자체로 현실보다 훨씬 더 개연성을 주고 이미지들의 연결이 매끄러워서 사람들의 정체성이나 사유를 더욱 튼튼하게 해주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물질과 지속의 이론으로 시작된 이미지적 전회는 들뢰즈에 와서 끝났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새로운 전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들뢰죄는 그 동안 언어적 전회로 인기를 끌어온 라캉의 이론과 프로이트의 논리들을 '인간 외에는 모두 무의식'이라는 의미로 비인간주의를 표방하면서 무의식을 언어적으로 분석하는 이원론을 종말시킨 것 같았다. 그래도 들뢰즈에게서는 초월적이기는 하지만 일원론이라는 기반이 있었고 기존의 영토를 벗어나는 탈영토화는 자연스럽게 재영토를 만드는 재구축이 일어난다고 하는 방향성이 있었다. 목적론적 사고는 모든 전회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자크 데리다에 와서는 이 모든 것들을 헐어버리는 '해체론'이 등장한다. 이것을 전회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명확하게 해체의 논리는 포스트 모더니즘이나 포스트 구조주의와 같은 '포스트'철학들이 등장했다. 그럼 도대체 데리다의 철학이 어떻길래 모든 것들을 포섭했다는 들뢰즈의 철학도 해체할 수 있었을까? 어떤 부분이 과연 들뢰즈의 논리를 벗어나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었을까? 이런 궁금증도 일어난다. 그럼 데리다의 철학을 한번 들여다 보도록 하자.
https://brunch.co.kr/@minnation/1868
사실, 하이데거가 서양철학의 형이상학적 역사를 해체하기 위해서 자신의 철학을 펼친다는 의미로 사용한 단어가 데스트룩치온Destruktion이나 압바우Abbau이다. 존재와 존재자에서 존재자에게 집착한 현대를 존재로 돌려보내기 위해서 해체해야 한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에서 '해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는 한다. 여기서 하이데거의 해체는 존재의 그림자를 찾아가서 회복하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데리다는 '해체'를 본격적으로 자신의 철학의 중심으로 가지고 오면서 하이데거를 포함한 서양철학 전체를 해체하려는 전략을 세운다. 이른바 '해체의 일반전략'이다.
과거로부터 서양철학은 언제나 두 가지의 이원론을 지지해 왔다. 플라톤이 이데아와 현실세계를 구분한 것처럼, 진리와 거짓은 언제나 두가지의 극점에서 나타났다. 있음과 없음이나 감정과 이성의 대립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실상 우리 삶은 그렇게 나누어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나눈 상태에서 형이상학의 우월성을 지배의 논리로 가져온 서양철학은 제국주의의 역사를 지나면서 철저하게 자신들의 속내를 드러냈다. 데리다의 일반전략은 바로 이러한 대립쌍으로 나눈 지배의 구조를 폭로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힌 억압된 것들을 해방하는데 있었다.
그리스 철학에서 수사학의 삼요소는
'에토스-로고스-파토스'였다.
에토스는 인격을, 파토스는 감동을, 로고스는 언어를 뜻했다. 그런데 서양철학은 예나 지금이나 주구장창 하는 말이 쓰여진 말보다 우위에 있었다. 문자기록과 대화의 대립에서 실시간의 대화는 언제나 기록된 문자들을 뒤집어 엎어 버리고서는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러한 말의 역사는 곧 기록의 역사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로고스라는 말하는 언어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음성중심주의'로 가자는 것을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대립적인 구조 자체를 벗어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어차피 무엇이 중심이었다가 다시 중심을 바꾸어 버리는 것은 그 구조에서는 지배와 피지배가 억압의 모순을 계속 잉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표와 기의로 나누어지고, 표음문자와 표의문자로 나누어지는 상징체계를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 여기서 데리다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 낸다. 이른바 원기록 archi-ecriture라는 것이다. 데리다 이전까지 소쉬를 비롯한 구조주의자들은 모두 구조를 분석한다는 미명아래 이원론을 쓰고, 억압을 잉태한체로 권력관계의 우위를 목적으로 하였다. 샤르트르가 그랬고, 푸코가 그랬으며, 들뢰즈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데리다가 보기에는 원래 존재하는 것과 재현하는 것들의 세계를 살고 있는 것처럼 만드는 언어를 그 자체 하나로 존재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니깐 기표와 기의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원래 그게 하나였다는 것이다. 해체는 이런 의미에서 언어구분의 해체였다.
해체는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다.
외부의 압력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내부에 해체의 가능성들이 잠재되어 있다. 데리다는 해체를 위한 정교한 텍스트 읽기를 권한다. 텍스트 안에서는 상상과 실재의 결합이 사실상 표현되지 안은 모든 것들이 표현된 것들에 의해서 음폐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텍스트 안에서 해체는 일어난다. 그렇게 보면 서양철학의 모든 순간에 음폐되어 있는 것들이 문자기록 안에 있고 해체의 가능성들은 항상 어떤 문헌이나 이야기에 도사리고 있다.
자크라캉의 의하면 우리가 사는 삶은 상상계와 실제계 그리고 상징계로 나누어진다. 상징계는 언어이며 상상계는 우리가 관념과 정신이다. 실제계는 오감으로 느끼는 세상이다. 오감으로 느끼는 세상에서는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셀수 없을 만큼의 현실이 동시간대에 지나간다. 그것들 중에서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음폐는 자연스럽다. 오히려 표현된 것들, 우위를 점한 것들은 그 자체로 음폐가 아니라 발가벗겨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데리다는 해체는 엄밀히 말하면 내부에 음폐된 것들이 펼쳐지면서 새롭게 재구축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어제밤 놀이터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라는 문장에는 내부적으로 수 많은 것들이 음폐되어 있다. 한 남자가 서 있을 때의 날씨와 온도, 그 남자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와 어제라는 시간에 동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행동과 놀이터라고 부르는 장소에 놓여진 놀이기구들의 배치... 끝이 없을 정도로 수 많은 것들이 쏟아져 나온다. 심지어 이것을 보고 있는 내 안에 있는 상상력이 한 없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텍스트 안에서 이렇든 실제계의 무한성이 상상계를 무한의 영역으로 끌어 놓는다. 따라서 언어라는 상징계로 표현하려고 하는 순간 낚시에 걸린 물고기 마냥 드러나도록 표현되었지만 셀 길 없는 바다 속의 다른 물고기들과 해조류들이 음폐되는 것이다. (밝히 드러나 보이는 순간들을 개현이라는 단어로 쓰기도 한다.)
구조 자체가 개연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자유를 얻는다. 반드시 이것은 해야한다에서 벗어난 사람은 반드시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하게 된다. 소쉬르가 말한 구조주의의 구분법조차도 넘어선 데리다는 이제 그 구조를 넘나는 일들을 시작한다. 그 가장 첫번째가 새로운 상징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기존의 단어와 상징체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특별하게 담아내는 상징을 만든다. 이전에 없던 단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단어에는 형식과 내용이 모두 바뀐다. 새로 창조된다. 예를 들면, 로고스중심주의라는 영어는 logoscentrisme, 갈등이 기존의 구조라는 단어에 갈등을 섞어서 내제된 구조라는 stricture으로, 무엇인가를 독차지하지 않고 개방되어 있는 것을 탈-전유라고 하여 exappropriation라고 명명하는 것들이다.
철학은 항상 개념을 창조하는 분과학문이다
데리다에게 중요한 것은 기호의 자의성이라는 개념이 음성언어만이 아니라 기록된 언어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특히 음성언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기록된 언어의 차이가 먼저 존재해야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기호의 자의성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는 말과 쓰는 말은 실제 그 대상이 가리키는 대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제 밤 놀이터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라는 것에서 어제라는 것은 단어상으로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 사람들 간의 약속에 의해서 어제라는 것은 해가지고 밤이 지나서 다시 해가 지는 구분에서 이전에 해가지는 시간대를 가리킨다. 그러니 '밤, 놀이터, 남자, 서있다' 이런 모든 단어들은 사실 자의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이렇게 자의적으로 연결된 것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언어라는 것은 값을 가지고 있지 않은 텅 빈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도 허무하다'라고 할 수 도 있지만, 그래서 '언어의 자의성은 오히려 우리의 대화와 시간, 사람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모든 것에서 자유함을 준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데리다에게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기호의 자의성은 기원을 해체하고 재구축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 어떤 개념이나 상징은 항상 그 뜻과 발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화한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우리는 '어떤 기원을 인정은 하되 거기에 갖히지 않고 현재의 자유를 향유'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여기서 기호의 자의성으로 결국 언어의 '시간내기'와 '공간내기'가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디페랑스differance가 바로 '차연'이라는 개념을 설명해 준다.
원래 difference에서 a로 모음을 바꿈으로서 새로운 단어와 뜻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밀어내기, 지연하기는 공간을 밀어내서 계속 현재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움을 담을 공간을 만들고, 기원에서부터 멀어지는 시간은 계속해서 새로운 공간과 만나서 오늘, 지금이라는 시간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니 기원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계속 현재 진행중이며, 기원에서 말해지던 상징은 언제나 '장소와 시간'을 새롭게 만나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최신의 개념이 되는 것이다. 더욱이 이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과거의 기록 밖에는 없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기록에서도 시간의 지연과 공간의 지연이 존재하는 것이다.
차연에서 중요한 것은 '차이'가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차이에 따라서 단어가 바뀐다는 것이다. 엄밀하게는 단어의 뜻과 내용이, 발음, 사용법이 바뀐다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자의성과 만나면 결국 '오늘, 지금, 여기, 기록된 것을 읽는 것, 기록된 것을 기억해서 말하는 것'이 새롭게 차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제논의 무한급수처럼 오늘 나의 존재에서 계속해서 창조가 일어나고, 기존의 기원에서 탈구축은 순간순간 무한대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소쉬르 이후에 새로운 주체 이론으로 자리매김한다. 내가 지금 사용하는 언어가 바로 주체인 나에게서 시작되는 기원이 되는 것이다.
오늘은 데리다에 대한 기본 개념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앞으로 데리다의 기본 개념을 가지고, 자본주의 비판과 서양철학 전체를 비판해보고자 한다. 유령론이나 메시아론 같은 메타담론을 다루어 보면서 나의 생각도 확장하거니와 다른 개념들과도 연결해보아야 겠다. 오늘 알아본 차연의 개념을 깊이 있게 이해한다면 기존의 생각을 넘어서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거칠 수 있을 것이다.
https://brunch.co.kr/@minnation/2300
https://brunch.co.kr/@minnation/4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