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철학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민네이션 Jan 10. 2017

차이와 반복

바깥의 철학자 질 들레즈

20160105_철학아카데

조광제_질들뢰즈

차이와반복 1


https://brunch.co.kr/@minnation/1682


들뢰즈

그는 누구인가? 그가 오늘날 현대세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어떤 영향력을 미쳤는가?시간개념으로 봐야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이 읽힌다.


차이, 반복

1968년 들뢰즈가 이 책을 출간할 때쯤 '현대적 사유'와 '현대적 세계'에 대한 진단을 제시한다.이 책은 철학적 사유와 각종 언어활동 및 예술의 영역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헤겔주의적인 사유의 체계를 무효화시키고 있는 것이 새롭다.


들뢰즈, 철학자들

하이데거는 존재론적인 차이에 점점 더 역점을 두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하이데거는 말하고 있다."존재는 차이다"라고 이야기하면서 하이데거는 존재자와 존재를 구분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하기로 한다.구조주의의 실행은 공현존의 공간 속에 차이지는 성격들을 배분하는 근거하고 있다. 다시말하면 구조주의는 공간자체를 분할하여 존재를 매칭하고 있다. 공간이라는 배치 안에서만 정의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깐 공간의 배치에 따라서 존재가 달라진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 시대의 소설기법은 가장 추상적인 반성뿐만 아니라 실제의 기법들에 있어서 조차 차이와 반복을 선회한다.


이 이야기는 그 전시대의 헤겔주의가 물러가고 차이와 반복을 중심으로 '동일성과 부정성'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차이가 부정적인 것을 함축하고 결국 모순으로 이르게 되는 것은 오로지  차이를 동일한 것에 계속해서 종속시킬 때만 일어난다. 차이는 동일성의 부정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동일성을 우위에 놓는 것은 표상의 세계를 정의한다. 


그러나 현대적 사유는 동일성들의 상실이라고 할 수 있는, 표상의 파탄에서 부터 시작한다. 현대적 사유는 동일한 것에 대한 표상 아래에서 작동하는 모든 힘들을 발견함으로써 태어난다. 현대적 세계는 시뮬라크르(가상)의 세계이다. 이러한 시뮬라크르에서 인간은 신보다 더 오래 지속되지 않으며 주체의 동일성은 실체의 동일성보다 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모든 동일성은 가장 심오한 작동인 차이와 반복의 작동에의해 시각적인 효과로서 모의되고 산출될 뿐이다. 다른 것들을 동일자로 환원하고 다른 것들을 부정적인 것을 통과하도록 만드는 표상의 형식들과 무관하게 사유하고자 들뢰즈는 표현한다.



표상, 재현

Vor/stellung이라는 것은 재현이라는 뜻이다. vor앞이라는 전치사이고, stellung은 놓여 있다라는 뜻이다. 맨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맨 앞에서 대표한다는 뜻이다. re/presentation이라는 말은 현재를 다시 현재화시킨다는 말이다. 들뢰즈는 의식중심으로 표상적 주체를 부정한다. 의식에 의해서 생겨나는 주체가 아니기에, 동일한 것들이 절대로 생성될 수 없다. 완전히 1차원적인 직선은 절대로 존재할 수 없고, 실제로 선을 그리면 절대로 동일한 선을 그릴 수 없다. 헤겔의 변증법은 정-반'이라는 대립구조가 성립하지 않는다.


근대 사상의 흐름도


언어, 차이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차이와 동일성'이라는 낱말을 사용할 수 이밖에 없는 이른바 개념 활용에서의 것을 전제하지 않고, 차이를 말할 수 없다. 

푸코는 17세기 에피스테메가 붕괴하고 19세기에 새로운 에피스테메가 등장하는 데 이것이 역사성, 배치에 의거한 편성물인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19세기부터 완전히 변한 것은 바로 이러한 편성이다. 가능한 모든 질서의 일반적인 기초로서의 표상 이론은 사라진다. 사물들에 대한 자발적인 표이자 일차적인 격자로서 표상과 존재들 간의 필수 불가결한 중계소 역할을 하던 언어 또한 사라진다"




민네이션, 생각


나는 왜 들뢰즈에 집중하는가? 근본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현실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라캉을 싫어했다는 데, 라캉데로 하면 the real이라는 것과 reality를 구분했다고 한다. the real은 아무도 볼 수 없고 매순간 재현될 때마다 현실에서 사라져간다. 그러니깐 표상될수록, 재현될수록 the real은 사라져간다. 그리고 인간은 the real을 찾으려고 한다. 재현된다는 것은 시간개념에서 볼 때, 매번 매시간 매 현재에 나타난다. 영원한 현재에 말이다. 우리는 영원한 현재를 살고 있지만, 매번 언제나 같은 것을 재현할 수 없다. 항상 우리는 다르다. 항상 우리는 차이를 만들어 낸다. 항상 반복되지만 항상 차이가 생긴다.


관련은 없지만 이런식의 비판도 가능하다. 마르쿠제 사상에 대한 단상.


지속성과 지향성은 결국 차이와 반복만을 만들어낸다.

동일하다는 것은 언제나 불가능하다. 우리는 매번 다른 시간을 살고, 다른 시간이기 때문에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고, 아무리 재현한다고 해서 똑같이 재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동일자는 없다.


이런 사유를 좋아하는 것은 위에서 이야기한대로, 구조주의가 이야기하는 배치 역시 나의 진짜 존재가 아니고(상황에서 만들어지는 나의 상황이 곧 나는 아니다) 또한 하이데거에 의해서 존재'에 대해서도 알맹이가 없는 설명이기 때문이다.


시간개념을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대부분의 철학자들의 사고와 생각이 몸에 익혀진다. 칸트의 이야기도 어느정도 이해가 되고,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영원회귀'의 개념도 시간개념만 제대로 이해하면 니체의 생각에 어느정도 다가가갈 수 있다.


라캉의 욕망의 그래프


푸코가 이야기하는 에피스테메'의 입장에서 구조주의적인 배치이론은 사실 의식의 배치라고 할 수 있고, 다시 말하면 인식론적으로(생각 안에서) 배치한 것의 다름 아니다. 따라서 서 있는 곳이 다르면 당연히 다른 것이 배치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이런 사유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 결국 구조를 만들어내는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질 것이 뻔한 인간의 본성을 인정해야 해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칸트에 대한 책을 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칸트가 나눈 방식으로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오직 오감으로만 인식한 것들을 사실'이라고 인식하고, 당위에 의해서 인식하는 것을 '실천이성비판'에서 논의하고 있다. 그러니깐 당연히 '재현할 수 없는 것들은 오직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보여지는데, 칸트는 이것을 너무 잘 알았던 것이다. 새롭게 드러나기 때문에 이것은 반복에 의해서 재현되는 것처럼보이지만, 재현이 아니라 드러나는 것이다.


반복된 것들이 리좀적 성격을 갖는다. 마지막 사진처럼. 구성주의의 일주라고 생각된다.

 represent되지는 않고 present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생각해야 할 것들이 있다. 한나아렌트에 의해서볼 때 노동(생명, 언어)을 통해서 만들어진 산물과 작업(도구성, 인공)을 통해서 만들어진 사물은 시간개념에서 볼 때 다르다. 그러니깐 생명을 가진 존재와 생명을 가지지 않은 사물의 시간개념이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참고1_하이데거, 실존주의


1-1.후설이 퇴직하기 2년 전 제자 중 한 사람이 특히 철학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친 한 권을 냈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은 현상학이 현 상태로는 주도면밀하지 못하다고 주장했는데 왜냐하면 현상학은 의식의 자료들을 음미하려 했으나 이전의 철학에서 물려받은 항목들은 ‘주관’ ‘대상’, ‘행위’, ‘내용’과 같은 개념들을 사용했다. 후설이 상관 관계가 있는 의식과 실재의 두 영역이 있다는 데카르트의 기본 틀을 받아들인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었다. 후설이 현상학에서 채택한 소재는 의식과 실재 중 의식이었으나 하이데거는 현상학의 첫 번째 과제가 의식과 실제의 구분에 선행하는 존재(Sein)개념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식과 실재를 정반대로 대비하게끔 하는 그 경험이 곧 우리가 음미해야할 원초적 현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철학의 본성을 분명히 하고 의식이 아니라 존재를 우리의 출발점으로 하기 위해 데카르트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위적 범주로 돌아가는 것은 충분치 않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이전의 철학이야말로 철두철미한 현상학자가 본받아야 할 최상의 실례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온갖 전제 가정들이 달라붙은 전문적인 철학적 어휘가 형성되기 이전에 생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하이데거는 우리가 순수한 자연 상태에서 철학을 할 수 있도록 청결한 어휘를 고안하는 과업을 수행하고자 했다.


1-2. 하이데거의 가장 중요한 신조어는 현존재(Dasein)이다. 현존재는 철학적인 물음을 물을 수 있는 존재 유형인데, 하이데거의 현존재에 대한 설명을 보면 처음에는 데카르트의 자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지만 데카르트의 자아는 본질적으로 생각하는 것인 반면 하이데거에서 생각은 본질적이 아니다. 그에게 생각은 현존재가 존재하게 되는 여러 방식들 중 하나일 뿐이다. 현존재의 원초적 요소는 ‘세계-내-존재’이며, 현존재는 생각과 의지의 구별이나 이론과 실천의 구별에 선행한다. 현존재는 관심을 갖는 존재로서 걱정하는 존재다. 내가 세계에 관해 무언가 걱정하거나 관심을 보이는 경우에 한해서, 나는 세계에 관해 물음을 던지게 되고 그와 같은 물음에 대해 지식 주장의 형태로 답을 하게 된다,


개념과 판단은 세계에 대처하기 위한 도구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한층 더 원초적인 그와 같은 도구들, 즉 문자 그대로 도구인 것들이 있다. 목수는 망치를 사용함으로써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능숙하게 그것을 잘 다룰 경우에는 망치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망치에 대한 의식은 목수가 실재와 충실하게 마주치려는 자신의 계획에 집중하지 못하게 방해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이렇게 뻔 한 방식으로 대처하는 실재들을 ‘손 안에 있음’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손안에 있는 것과 손안에 있지 않은 것의 구별은 우리가 세계의 공간성을 구성하는 기본 바탕이 된다.


1-3.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기본적 본성을 강조한다. 우리는 현존재를 하나의 실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인생을 펼쳐가는 존재라고 생각해야한다. 우리의 인생은 자신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개발하는 것이다. 애당초 우리는 물리적이고 문화적인 역사적 상황에 내던져져있다. 하이데거는 이 ‘던져져있음’이 현존재의 ‘사실성’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아직 겪어본 적 없는 그 사람일 수 있고 나의 잠재력은 나의 성취와 마찬가지로 나의 존재에 본질적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실제로 내가 누구인지 규정지을 때 미래는 과거와 현재에 우선한다. 현존재는 ‘될 능력’이며, 내 인생에서 내가 무엇을 목표로 삼고 있는가에 따라 나의 현재 상황과 능력의 중요성이 결정된다. 하지만 그 성취와 잠재력이 무엇이든 간에 모두 끝은 죽음이다. 내 인생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은 내가 무엇이 될 것인지와 내가 무엇이 될 수 있었는지의 차이를 고려해야하는데 여기서 죄의식과 분노가 나온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의 활동은 세 가지 근본적인 양상을 갖는다. 첫째, 그가 ‘조율’이라고 일컫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내던져진 상황 자체를 매력적이라거나 불안하다거나 따분하다는 식으로 나타내고, 그 상황에 다양한 종류의 기분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둘째, 현존재는 담론 적이다. 현존재는 담화의 세계 안에서 즉 우리가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언어와 문화에 의해 명확히 표현되고 해석된 것들 사이에서 작용한다. 셋째. 현존재는 특별한 의미의 ‘이해’다. 현존재의 활동은 어떤 목표, 현존재의 문화적 맥락 안에서 인생 전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 어떤 ‘위하여’를 지향한다. 현존재의 이 세 가지 양상은 각각 시간 과거, 현재, 미래에 해당한다.


비록 현존재가 생물학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 안에서 작용한다고 할지라도 개인의 활동을 일으키는 인간의 본성과 같은 그런 것은 없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의 본질은 그것의 실존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실존주의’, 즉 개인의 종의 구성원에 불과한 것이 아니면 보편 법칙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철학 학파의 아버지가 되었다. 내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는 내가 자유롭게 선택하여 나 자신을 무엇이 되게 하는가에 달려있다. 그냥 순응ㅇ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 것은 현존재의 진정한 결정이 아니며 나의 현존재에 대한 배신이다. 진정한 결정을 위해서는 나는 선택의 이유가 인간의 본성에 있는 것도 아니고 신의 명령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과 어떤 선택도 나의 삶에 선험적 의미를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자각하면서 자신의 삶을 살아야한다.


1-4. 《존재와 시간》은 읽기 어려운 책이라서 하이데거 특유의 어휘와 난해한 구문이 그의 프로젝트에 필수적이었는지 자의적이었는지 논의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신랄한 반대자인 길버트 라일도 그의 책 논평에서 ‘인간 영혼의 근원적인 작용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에 감탄할 따름이라고 인정했다.


현상학의 저작으로서 《존재와 시간》은 현상학의 창시자인 후설의 어느 저작들보다 더 큰 갈채를 받았으나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불행했다, 하이데거는 1929년 프라이부르크에서 후설의 철학 교수직을 이어받았다. 1933년 그 대학의 총장이 되어 5월 취임연설에서 나치주의야말로 독일 국민이 마침내 역사사의 정신적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매개체라고 환영했다. 그는 총장으로서 명예 교수인 후설을 비롯하여 정년이 아직 5년이나 남은 다섯 명의 유대인 교수들을 모두 대학 도서관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전쟁이 끝난 뒤 하이데거는 히틀러에 대한 지지를 속죄해야 했고, 1945년에서 1950년까지 스스로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을 중단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1976년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은 뒤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