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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r 02. 2020

들뢰즈의 존재론

아트렉쳐 연재시리즈_질들뢰즈

-1. 지난시간

오랜시간동안 지난시간에 연재했던 고민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베르그송이 이야기하던 ‘상징에 기대지 않고도 직접 의식에 들어오는 이미지’가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서 현실로 나타나는지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 속에서 잠겨서 살았다. 우리에게 전해진 의식에 직접적으로 들어오는 이미지들은 처음에는 인상을 남기고 그 인상은 우리의 감각의 어느부분에 가서 닿는다. 그리고 감각들이 계속 반복되어 다른 감각와 차이가 발생하게 되면 그것은 감정이 되어서 우리의 깊은 곳까지 쌓인다. 그리고 이렇게 쌓인 감정이 바닷물을 박차고 뛰어 오로르는 돌고래처럼 실재계에서 상상계로 올라가서 인지되고 이해되어서 상징으로 나오게 된다. 언어는 그렇게 이미지와 감각을 연결하는 인지구조에서 태어난 생명체이다. 인간의 기억에는 차곡차곡 이러한 언어들이 쌓여서 집을 짓고 방을 만든다. 그리고 언어의 축적은 문명을 만들고 문명은 역사를 만든다. 어디서부터 시작일까 고민해 보면, 상징이 없는 비매개적인 것들이 먼저인 것이다.


https://brunch.co.kr/@minnation/1525 



0. 들어가기

누군가에 대해서, 누군가의 인생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가면서 던져 놓은 상징과 상상과 글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묻힌 기억일 것이다. 베르그송은 들뢰즈에서 스피노자와 니체로부터 전해지는 다양한 기억들을 묻혀 놓았고 들뢰즈는 조금씩 조금씩 정리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들뢰즈가 그렇게 역사에 떼를 벗기면서 우리에게 준 유산은 다른 방식으로 삶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으로 부터 시작해서 인간으로 끝나는 방식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함께 거니는 다른 방식 말이다. 오늘 우리는 간략하게 들뢰즈가 펼쳐놓은 세계에 들어가볼 것이다.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를 잘 표현한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 형태 안에 존재는 항상 탈영토화되었다가 새로운 잠재성을 가지고 돌아온다.


철학사의 시작에서 보자면,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상상계의 철학자들과 아리스토레스로 대표되는 실재계의 철학자들, 그리고 ‘언어’에 의해서 상징계로 들어가서 두 영역을 모두 아우르는 소크라테스계의 철학자들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이렇게 실재로 경험하는 것들과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들, 그리고 말로 이루어지는 것들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구분을 바탕으로 들뢰즈를 보자면, 아마도 들뢰즈를 실재계에 속하는 철학자로 보고 그와 함께 스피노자와 베그르송을 연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들뢰즈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하고 오해받는 부분들을 살펴볼 것이다. 들뢰즈를 이해하면서 실재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어떤 방식으로 회화로 표현되는지도 조망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독일의 외광학파인 로비스코린트의 작품으로 형태 안에서 새로운 존재들이 튀어 나올 것 같다.



1. 존재론과 무의식

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존재론과 인식론, 가치론과 윤리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실은 무엇이 먼저냐의 싸움이기는 하다. 들뢰즈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존재론적인 접근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이미 어떤 관점을 가지기 전에 사람은 다양한 존재들과의 관계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도 존재이면서 자연에 있는 모든 것들도 존재이고, 타자도 존재이다. 우리는 존재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존재로 볼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다음 이야기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구분한 범주론과 플라톤의 범주론은 큰 차이가 있다.



사실 들뢰즈에 대한 이해가 전반적으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들뢰즈가 가지고 있는 존재론적 기반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존재론은 그의 저서 ‘안티오이디프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자연주의와 비인간주의이다. 들뢰즈는 그동안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해 오던 ‘의식’중심의, 상상계적 전통이 우위에 있는 것을 부정한다. 프로이트에게는 정신이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자크라캉에게는 그 무의식이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다라고 표현되지만 들뢰즈는 오히려 의식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무의식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몸과 자연, 우주의모든 것들이 우리가 의식할 수없는 무의식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의식의 세계가 사실은 의식의 세계보다 훨씬 더 광활하고 거대한 것이다. 무의식의 존재들 속에서 의식적인 존재들은 아주 아주 작은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의식이 결여하고 있는 모든 사물이 무의식이다.




따라서 들뢰즈에게 무의식의 탐구는 존재자체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시작되면서 의식이 점하고 있던, 다시 말하면 인식론이 우위에 있던 세계에서 존재 자체에 대한 우위로 바뀌는 과정인 것이다. 들뢰즈는 존재론이 제대로 정립되고 나면 인간이 토대로 삼고 있었던 인간우위의 존재론이 빚어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들뢰즈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첫번째 저서로서 '안티오이디프스'를 썼고, 두 번째 저서로서 '천개의 고원'을 썼다.  안티오이디푸스에서는 존재론의 해체를, 천개의 고원에서는 새로운 존재론을 이야기했다. 여담이지만 들뢰즈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자본주의가 있기 때문에 존재가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인간의 의식이 중심이 된 자본주의는 가치를 자본에 축적하고, 그 자본으로 모든 존재들을 '교환가치'로 환원시켜서 숫자를 매기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안에는 이미 그 자체로 존재론과 인식론이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프로이트 모델에서는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모두 인간안에서만 생각했기 때문에 진정한 무의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개체론을 미리 상정하고 그 안에 존재의 의미를 넣어가는 방식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프로이트가 그려논 도식에서 무의식은 인간론 안에서 제한된 의식의 반대급부에서만 가능하다.


제대로된 존재론 위에서는 제대로된 인식론과 윤리론이 정립되고 그에 따른 바르게 된 행태론이 제시된다. 이때 비로소 인간은 제대로 된, 현실적이고 실현가능한 행위을 할 수 있게 된되는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존재하는 물질과 인간의 몸 그리고 정신을 포함한 의식과 무의식의 연관관계와 상하관계, 포함관계를 정립하기 시작한다.


인간에게 집중된 '의식과 이성' 중심의 존재론의 범위를 넓혀서 의식 외의 모든 것들을 존재론으로 놓는 기획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부분의 이성 중심의 존재론은 그것을 바탕으로 인식론과 가치론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밑바닥에 의식과 무의식의 존재가 포함되면서 자연과 인간의 연결관계에서 존재론이 나오고 그에 따른 다양한 관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철학사에서 보여지는 이성의 사고를 감성과 무의식의 사고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고'라고 부를 수 없는 감각의 역사를 타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완전히 다른 방식의 질서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들뢰즈의 사고에서 인간은 여러가지 양태들 중에 하나, 여러가지 잠재력이 발현된 것들 중에 하나가 된다. 이러한 들뢰즈의 사고는 철학 뿐 아니라 건축과 미술 그리고 정신의학과 사회구조형성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제레미 레프킨이 이야기한 엔트로피의 관점에서도 들뢰즈의 논의를 살펴 볼 수 있다.


2. 관점과 세계

원래 유명한 사람들은 관점자체를 흔들어 놓고서는 자신의 관점을 제시했는데 니체의 관계론(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 스피노자의 잠재성(모든 현실적인 것은 잠재적인 것이 실현된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모든 것들은 정과 반이 서로 왔다 갔다 하는 가운데 완성된 형태인 정으로 구현된다), 칸트의 선험적 가치(인간은 태어나면서 부터 12개의 범주를 갖고 태어난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모든 물질들은 정반합의 변증법을 통해서 발전한다)과 역사적 변증법(역사는 변증법에 의해서 발전한다) 등과 같이 수 없이 많은 관점들이 전체를 설명하기 위해서 제시되었다. 물론, 철학은 물질 자체를 규정하는 유클리드의 기하학이나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아인슈타인의 상대적이론과 같이 물질세계 자체를 분석하는 많은 이론들이 이미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들은 서로 주고 받으면서 서로를 형성해 간다.


들뢰즈는 새로운 인간관을 제시하기 위해서 존재론 자체를 다시 들여다보는 작업을 했다. 사실, 존재론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고민의 시기에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이 강하게 일어난 사건이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네덜란드에서의 새로운 공화국이, 마르크스는 프랑스혁명에 대한 해석으로, 들뢰즈는 세계대전 이후에 프랑스의 68혁명에서 이러한 존재의 틈들을 느꼈다. 그리고 존재론을 새롭게 정립하지 않으면 또 다시 인류의 문제는 자신들만이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인 우주와 자연에까지 파괴력을 미칠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투쟁인 존재론에 대한 투쟁은 전세계를 휩쓸게 된다. 들뢰즈가 가지고 있던 사상의 얼개가 오랫동안 내려왔던 감각의 역사들을 일깨운 것이리라. 그러니 들뢰즈가 가진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일이 필요하다.


68혁명은 새로운 존재론을 위한 투쟁이었고, 마침내 감각의 열정이 프랑스를 뒤엎었다.



3. 존재론과 실재계

그렇다면 자연의 존재들은 어떤 방식으로 발현하는가? 인식론보다 존재론을 우위에 놓고 본격적으로 들어가보면 자연이 확장하는 방식, 자연의 발생에서 인간의 몸도 발현되어서 결국 정신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들뢰즈는 '천개의 고원'에서 6가지 발생의 순서를 이야기한다. 바로 S_지층, 성층작용Strates, stratification - A_배치물Agencements - R_리좀Rhizome - C_고른판, 기관없는 몸체_Plan de consitance, Corps sana oranes - D_탈영토화Deterritorialisation - M_추상적인 기계들(도표와 문) Machines abstraites (diagramme et phylum) 이다. 지층에서부터 추상적인 기계들까지 아래서부터 위로 자라나는 사이에 존재는 점점 의식을 가진 주체가 되기도 하고 의식으로 알 수 없는 무의식의 영역에 머무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무의식과 의식의 차이는 무엇이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잠재성이 현실성을 가지는 강도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잠재성이 발휘되는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도는 계속해서 다른 존재와 차이를 나타내는데, 이러한 차이가 반복될 때 주체는 계속해서 '되기'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이렇게 '되기'를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차이가 반복되어서 주체가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해를 넓히기 위해서 라캉의 3가지 구분(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을 통해서, 들뢰즈 계열의 철학자들과 대립되는 인식론의 우위를 주장하는 철학자들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철학사 속에서는 실재계와 상상계를 구분하는 방법들은 있으나 아래와 같이 결합해본 시도는 별로 없다. 상상계와 실재계가 만나서 상징계가 만들어진다는 것과 사물들은 플랫폼으로서 물질과 정신의 결합에 의해서만 생명을 가지게 되다는 설정은 나름대로 정리 해본 결과이다. (각자 맞는지 아닌지는 상상해보고 연구해보길 바란다.)


최근들어서 순수일자(오직 하나의 근원, 신이나 물질의 근원이나)의 논의가 조금 더 분화되어서 순수다자라는 이름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한개가 아니라 처음부터 여러개였다는 의미이다. 어찌되었든 절대정신으로부터 분화된 객관정신은 정반합을 통해서 점점 현상에 맞는 정신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물질세계와 만나기 전에 물질을 구조화시키는 시뮬라크르(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개념을 빌려왔다)로 구성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상상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아직은 생각에 불과하고 이 생각들이 어떤 현실의 주체들과 만나야 한다.


반대로 물질에서 시작한 실재계의 존재들은 다른 것들과의 차이(아브젝시옹은 떨어짐 분리됨을 뜻하며 이것은 줄리아크리스테바의 이론에서 빌려왔다.)를 만들어 내면서 점점 현상으로 나아오며 차이가 반복해서 주체를 형성해 나가면서 현실에서 자신에게 맞는 시물라크르를 탑재한다. 그래서 플랫폼으로 우리눈에 보이는 사물들은 각자의 시물라크르를 가지고 있고 물질에서부터 발생되어서 나온 노마드에 만나서 주체가 된다. 그리고 주체는 끊임없이 상징을 생산해 낸다. 역사적으로 무엇이 먼저 였는지는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들뢰즈는 실재계에서 물질으로 부터 만들어진 노마드들이 계속해서 자신의 시뮬라크르를 갈아치우면서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이것이 배치에 관한 들뢰즈의 이론이다. 쉽게 말하면 노마드는 전쟁기계이다. 계속해서 영토화되어 있는, 시뮬라크르를 갈아 치우면서 새로운 접속을 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자신의 주체성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시간의 흐름에서 그 '차이'를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잠재성의 차원에서 현실성의 차원으로 나오면서 물질은 계속해서 차이를 반복해서 생산해 낸다. 그리고 차이가 다른 반복을 시작하면서 다른 주체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에 있어서도 들뢰즈식으로 설명을 하면 물질 중에서 영혼이나 정신을 가진 것들이 반복해서 그 차이를 유지할 때 주체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은 언어라는 차이를 계속해서 반복해서 공유할 수 있는 '학습'이라는 방법을 발견했고, 인간 종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언어는 동물과 반복해서 차이를 발생시키는 원인이 된다. 다시 말하면서 상징계 안에서 '언어'라는 상징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바로 잠재성에서 끌어 올라오는 물질들의 세계에서 '감성'이 탄생하게 된다. 역동성을 가진 마음, 센서티브, 감성, 감각과 같은 것이다. 베르그송의 논의에서는 감각과 감정, 그리고 정서로 대변되는 물질계의 차원이 인식과 기억, 인식으로 발전하는 것을 보았다면, 들뢰즈도 마찬가지로 물질계에서 지속적으로 축적된 감각들이 감정을 만들어낸다고 보았다. 존재론으로 내려간 들뢰즈의 '되기'과정에서는 감각이 언제나 먼저였던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후에 살펴보겠지만 예술론에 있어서도 '감각의 논리'를 이야기 한다.



4. 들뢰즈와 예술


예술가들은 이러한 의미에서 들뢰즈가 말하는 새로운 존재론을 이미 실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로 어떤 것을 기본 존재로 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상상계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개체로 일정화된 정체성을 실현하는 주체를 설정하고서 구도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실재계에서 순수하게 함께 엮여들어가면서 배경과 날씨와 역사 속에서 만들어지는 감각과 감성의 역사를 기본 존재로 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또한 이미 완성되어 있는 현상의 배치와 권력을 점유한 영토의 문제에 있어서도, 어떤 부분을 영토로 남겨두고 어떤 부분을 탈영토화시킬 것인가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의미가 탄생하게 된다는 것도 문제시 했다.


들뢰즈는 그런 의미에서 아일랜드의 천재 화가인 프란시스 베이컨(1909~1992)의 작품들을 통해서 자신의 사상을 설명했다. 특히 베이컨이 그리고 있는 얼굴의 형태에 대해서는 그가 말하는 탈영토화의 의미가 제대로 드러나 있다. 베이컨의 그림에는 하나같이 개체성을 상징하는 주요한 영토가 파괴되어 있다. 예로부터 얼굴은 인간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얼굴에서도 눈동자는 육체를 넘어서는 정신의 특권을 강조하는 포인트였다. 그러나 베이컨은 한결같이 주체로 구성되어 있는 인간의 얼굴을 뭉개버리고 지워버리고 슬쩍 흘려 버린다. 이렇게 함으로써 감각하고 있는 주체의 '되기'가 한결 수월해 진다. 시간에 의해서도 변화하는 얼굴을 표현할 수 있게 되고, 주체화되어 있는 인간의 독특성을 '기관없는 신체'로 바꾸어 버린다. 한마디로 이미 권력화된 인간의 존재론을 탈영토화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베이컨은 잠재성의 문을 열었다. 오히려 다양하게, 다층적으로 발현되는 인간의 얼굴을 개방한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되어가는 존재이다. 인간 뿐이겠는가?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되어가는 존재이다. 거기에서 차이가 발생하고 그 차이가 반복되면서 지금 우리가 되어 온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도 계속해서 되기가 진행되고 있다.


루시안 프로이드에 대한 3개의 연구_1969, 프랜시스 베이컨


자연주의 혹은 사실주의 관점에서 그려진 회화는 인간이 자연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새로운 문이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에서 인간은 정해진 존재였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주의 안에서는 명확한 구분이 가능했다. 움직이고 자연스러운 인간과 생산하고 인공적인 인간의 삶, 자연과 문명의 대립, 노동과 공장의 대립, 화가와 대상의 대립 말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자신들의 영토싸움이다. 영토는 자신이 서 있는 관점에서 그어지는 지도의 구획들을 넓히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존재론은 인구의 분포와 삶의 가능성을 위한 부분만 고려 되었다. 자연스럽게 인간중심의 '영토화'는 자연을 파괴하고 동물들을 나누어 놓았으며 지구 자체를 무너뜨리는 결과들까지 가지고 왔다. 더욱이, 이러한 상황들이 지속되면서 인간은 현실성만을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기 시작했고 잠재성은 논의되지 않고 보여지지도 않았다.


십자가 책형을 위한 3개의 습작_1962, 프란시스 베이컨


나는 왜 정육점 고기가 아닌가?
_프란시스 베이컨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을 중심으로 보는 시선으로 집중했던 19세기의 인상주의가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인상주의에서 인간의 관점에서 받아들여진 인식의 방식으로 모든 사물에 확대하는데, 이것은 들뢰즈의 분석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중심으로 모든 존재들을 자본으로 환원했던 결과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프란시스 베이컨은 그의 작품들을 통해서 현실성 위에 영토를 꾸려 놓았던 인간 중심의 존재론을 잠재성 속으로 흘려보내는 역할을 한다. 그의 작품들에는 인간의 가장 큰 영토인 얼굴이 탈영토화되고 있다. 탈영토화된 인간의 얼굴은 이제 '인간'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상황에 처한다. 그리고 곧 인간도 아닌 자연도 아닌 모호한 비식별영역으로 들어간다. 곧 이어서 '상징계'가 비틀어지고 인간이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던 문학과 언어와 구조가 비틀어지기 시작한다. 예언과도 같이 모든 것들이 탈영토화 해버리는 포스트모더니즘까지 갔다. 그런 의미에서 존재론적으로 들뢰즈가, 회화적으로는 프란시스 베이컨이 아방가르드의 전사였다.

자화상을 위한 습작 3점_1976_프란시스 베이컨



0. 나오기


라캉의 구분을 빌려서 초기에는 상상계에서 바라본 존재론과 인식론 그리고 그에 맞는 회화작품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지금은 실재계에 속하는 철학자들인 베르그송과 들뢰즈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다음으로 들뢰즈와 베르그송이 참조했던 스피노자로 넘어갈 시간이다. 생각같아서는 더 깊은 연구를 하고 싶지만 일단 실재계를 거쳐서 상징계의 철학자들까지 돌아온 후에, 이러한 연구를 근거로 여러가지 예술작품들을 찾아볼 생각이다. 무슨 어벤져스의 큰그림도 아니고. 그러나 철학과 예술은 뗄레야 땔 수 없으니 조금씩 천천히 깊이와 무게를 더해가는 시간들을 가져보자.


다음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통해서 약간? 중세시대의 느낌들의 작품들도 찾아보자.




질 들뢰즈, 소개



들뢰즈는 파리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냈다. 평생을 결핵과 천식으로 시달리다가, 말년에 인공생명유지장치를 스스로 떼어내어 목숨을 끊었다. 1968년에는 건강을 문제를 무릅쓰고 혁명의 한가운데에서 투쟇아다가 쓰려져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은며 특히 1968년 혁명의 성취인 파리8대학을 만들고 그곳에서 강의하다 퇴임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니체와 철학’으로 프랑스의 니체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또한 국가 박사학위 논문인 ‘차이와 반복’은 니체 연구를 심화한 결정판으로 평가된다. 1969년 평생의 친구인 가타리를 만나 말년까지 공동 작업을 수행했다. 그 결과물이 ‘안티 오이디푸스 : 자본주의 분열증’, ‘카프카:소수 문학을 위해’, ‘천개의 고원 : 자본주의와 분열증 2’, ‘철학이란 무엇인가’이다. 그 밖에도 문학, 회화, 연극, 영화에 대한 다수의 미학 저술을 남겼고, 철학사 연구 및 윤리학과 정치철학에 속하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새로운 존재론이 만들어지던 68혁명을 기억하며.


1)들뢰즈에 대한 좀 더 철학적인 내용은 아래 글을 참조.

https://brunch.co.kr/@minnation/439


2)라캉의 RSI구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참조

https://brunch.co.kr/@minnation/1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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