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철학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민네이션 Jun 29. 2020

해석학과 정신분석학

폴 리쾨르_해석의 갈등 4


번역하신 양명수 선생님의 해제를 읽는 것만으로도 리쾨르의 정수를 이해할 수 있다. 리쾨르의 저작 중에서 악의 상징, 해석갈등, 타자로서 자기자신 등을 배워왔지만 가장 재미있는 책은 아마도 해석의 갈등이 아닐까? 그 구조 자체도 너무 독특할 뿐 아니라, 철학의 진면목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철학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라고 할 때 결국은 철학은 해석하는 작업이다.


삶을, 상징을, 의식을, 관계를, 인격을, 주체를 해석하는 작업말이다. 그 작업의 결과가 때론 글이 되고, 그림이 되고, 영화가 되고, 말이 되는 것. 이러한 해석을 하기 위해서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 그것이 바로 해석의 갈등이다. 특히 그 갈등 중에서도 해석학과 정신분석의 갈등을 테마로 해서 주요한 논의가 일어나는데, 이것을 더 자세하게 풀어 놓은 책이 '타자로서 자기 자신'이다. 오늘은 양명수 선생님의 해제의 내용들을 발췌해보고 나름대로 해석해 본다.


언제나 해석은 자기의 해석이다. 그러니깐 어떤 유명한 철학자 혹은 비평가의 해석은 나의 해석이 아니다. 기가 철학을 해야 한다. 자신의 언어와 글, 스토리로 써 보아야 한다. 철학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니깐, 자신의 글과 이야기도 오롯이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해석도 자신의 것이 되고, 그래야만 다른이의 해석을 자기것처럼 여기거나 나의 해석을 다른 사람과 똑같다고 여기지 않게 된다. 여기에 진정한 민주주의, 자유가 깃들 있다.


https://brunch.co.kr/@minnation/1640


우리는 언제나 과거를 해석한다. 현재는 현상학적으로 살 뿐이다.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 겪고 있는 사건들은 모두 어느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 의미가 스물스물 흘러나온다. 그러나 현상은 그 현장에만 만족하지 않고 정신에서 나오는 정신현상학이 있고, 현상에서 정신으로 들어가는 정신분석학이 있다. 전자는 헤겔이고 후자는 프로이트다. 리쾨르는 이 사이를 파고 들어서, 현상 속에서 해석하고 있는 존재를 밝혀낸다.





프로이트의 꿈은 일종의 텍스트요, 해석학은 텍스트 해석인 정신분석을 중요하게 본다. 말하자면 정신분석학이 상징철학 안에 들어오는 것이다. 상징철학은 근대의 의식철학을 수정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주체를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의 추상적 반성을 수정하기 위해서는 무의식을 말하는 프로이트를 거쳐야 한다_p19


프로이트로 부터 남겨 진 것, 우리의 무의식에 쌓여 있는 현상의 텍스트들, 노래와 음악,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림과 감정들. 이 모든 것들을 텍스트가 되어서 의식에 띄워져 있다가 저녁이 되면 꿈의 무의식으로 들어 간다. 무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간 텍스트들은 하나의 이미지나 글자, 감정에 붙어서 상징이 된다. 상징은 계속해서 들어오는 현상의 텍스트들을 사로잡아서 질서 세우고 범위와 정도를 더 강화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희망'이라는 상징이, 어떤 이에게는 '민족'이라는 상징이 더 깊이를 가지게 된다. 리쾨르는 상징철학으로써 정신분석학을 해석한다. 상징이 어떤 방식으로 해석되는가?에 따라서 해석 이후의 실천이 달라진다. 의식철학은 상징 이전에 상상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정신으로, 의식으로 정리된 이론과 논리의 구획에서 상징은 새롭게 배치된다. 그렇지만 상징철학은 상징을 중심으로 의식이 배열된다. 그래서 의미가 나타내는 효과가 달라진다. 상징없이 추상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데카르트는 사실 상징 안에 자신이 포섭되어 있었음을 몰랐던 것이다.


프로이트의 구분, 의식과 전의식 그리고 무의식 사이에서  자아와 초자아와 이드가 공존한다는 생각이다.


의식은 과제다. 의식차원에서 아는 나는 내가 아니다. 무의식이 만들어낸 텍스트를 해석해야 한다. 해석의 결과를 의식하는 의식이 진짜 나이다. 적어도 그것이 나의 내용이다. 자신을 곧받로 의식하는 의식의 확실성은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의식이 의식에 주목하지 말고 말에 주목해야 한다. 말로 말해진 것에 주목해야 한다. 분석 작업은 결국 내담자의 꿈이나 다른 말을 분석가가 해석하는 것이다. 텍스트해석이요, 상징의 해석이다.


의식은 항상 무엇에 대해서 있을 때만 의식이다.


현상학자들이 밝혀낸 것은 의식과 시선은 항상 지향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식이 의식 자체를 지향할 때는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의식 자체의 논리와 구조를 보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의식으로 돌아가서 의식을 정의 한 후에 의식에서 뻗어나오는 것들은 이미 의식의 지배된 프레임을 갖는 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말'과 '상징'에 주목한다. 말은 항상 무엇에 대해서 존재했던 의식이 자리잡은 터이고, 상징은 그 말이 등가교환으로 바꾸는 물건과도 같다. 그러니깐 사람들은 말을 하면서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드러내고 그 말에는 항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상징들이 의식의 포섭된 것들을 교환한다. 해석학은 바로 이 말을 해석하면서 의식을 들여다 본다.


정신분석학자들, 프로이트와 아들러와 라캉 등등


정신분석이 해석학에 들어오는 것은, 그 것이 결국은 말을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충동과 본능을 말한다. 감추어져 있는 충동을 의식하게 하는 것이 정신분석이다. 그러나 충동과 본능이라는 생물학적 에너지를 직접 들여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대변하는 표상을 본다. 리비도는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에너지이지만, 무의식이 그것을 심리 에너지로 바꿀 때는 이미 표상과 연결된다.


말을 꺼내기 위해서 우리 내면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미지와 충동, 본능과 감정을 꺼내기까지 말은 다양한 출처들을 길어 올려서 의식의 표면에 널어 놓고 시대와 현상이라는 햇빛에 말렸다가 자신이 입을 수 있어서 자신을 입증해주는 옷만 말로 한다. 이 옷을 훔쳐 오는 것이 표절이고, 옷이 덜 말랐다면 말하는데 냄새가 나는 것이고, 옷에 무엇인가 묻어 있으면 애매한 의도가 섞여서 얼룩이 생긴 것과 같다. 어떤 옷을 입었는지가 그 사람의 생각과 스타일과 오늘의 감정을 말해주는 것과 같이, 그 사람이 꺼내는 말은 그 사람의 내면, 특히 감정과 본능의 어느 지점을 보여 준다.


 

우리는 어떤 옷을 입듯이, 말을 한다.


정신분석학은 이 지점에서 인간의 본능을, 무의식의 구조를 본다. 허언증이나 조현병, 강박이나 도착증과 같은 것들은 '자신의 말'이 아닌 '무엇인가 피해가고 싶은 것'들과 마주하여 제대로된 등가교환의 대상을 못 찾았을 때 일어난다. 그러니깐 앞에 있는 것이 '얼음'이다라고 말하고 싶은데 얼음이라는 대상이 너무 차갑고 시려서 '물'이라고 대답하는 현상들이 정신분석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분석의 방법이 바로 '해석학'의 재료가 된다. 한 사람을 해석하고, 현상을 해석하고, 사건을 해석할 때 우린 그 안에서 행위했던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해석한다. '표상'으로 드러난 것들을 '재현'해 봄으로써 우리는 '표상' 이전에 표상으로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해석하는 것이다.




표상은 말 이전의 말이다. 언어의 성질을 띠고 있다. 밑에 있는 욕망은 억압되었을 때 말하고 싶어 한다. 현실 원칙에 막혀 있지만 다른 모양으로 욕망을 실현한다. 거기에 표상이나 정서와 같은 텍스트가 형성된다. 그러므로 무의식을 알아내는 정신분석은 곧바로 충동과 본능으로 가지 않고, 표상을 해석하면서 알아낸다. 결국 무의식은 해석 안에서 해석을 통해 의미를 지나게 되는 것이다_p 19


무의식 자체를 알아 내는 방법은 없다. 무의식의 주인 자체도 잘 모르고, 그것을 분석하는 사람도 사실 다 아는 것이 아니다. 라캉은 그래서 정신분석은 학문으로서 '이론'이 되면 안된다고 말한다. 오히려 '정신분석 임상'이 맞다는 것이다. 오롯이 자신의 무의식을 자신이 분석하는 것, 그것이 라캉의 도전이었다. 프로이트의 딸인 안나프로이트는 프로이트의 단서들을 마치 메두사처럼 발견되는 즉시, 이론으로 만들어 벌렸다. 그래서 현대에는 그렇게 많은 정신병, 소시오패스, 정신장애의 병명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표상은 말 이전에 존재하는 말이다. 다른 방식으로 하는 언어이다. 그 사람의 표정과 소리와 떨림과 동작들은 모두 표상이다. 표상은 말하고 있다. 나의 기분, 나의 감정, 나의 의도, 나의 생각. 해석학은 이 표상을 해석하면서 무의식을 본다. 그래서 결국 의식과 무의식이 합쳐진 '인격으로서 자아' 개념을 제시한다. 이 인격으로서 자아를 이끌어 가는 것이 바로 '의지'이다. 이 의지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오롯이 자신의 의지일 때 '자유의지'라고 부른다.


https://brunch.co.kr/@minnation/1210


앞으로 계속 살펴보겠지만, 리쾨르에게는 그래서 '이야기'가 중요하다. 이야기 속에서 무의식과 의식이 하나가 되고, 다른 사람이 나를 상담해주듯이 자신의 의식이 무의식을 상담하면서 하나의 '인격'으로 통합되는 과정이 바로 이야기이다. 그래서 '주체와 이야기'에서 리쾨르는 이야기가 가지는 정체성과 사회 속에서 '자기'의 개념을 '인격'으로 통합시켜서 말한다.


https://brunch.co.kr/@minnation/1189


덧,


항상 리쾨르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글'로 표현해주신 감신대 김선하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나의 틀린, 혹은 다른 해석에도 나만의 해석을 응원해주시는 모습에서 나는 리쾨르철학의 근본을 본다. 언제나 좋은 강의는 그 철학자의 방법론을 써서 가르치는 교수법일 것이다. 또 배우고 또 느끼고 또 성장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중국은 철학이 있는가?_펑유란, 쉬프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