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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Feb 02. 2019

타자로서 자기 자신

아트렉쳐 연재시리즈_레비나스와 리쾨르 사이

0. 들어가기


나는 언제 타자가 될까? 이런 고민을 시작하게 되면 불현듯 떠오르는 영화와 애니메이션들이 넘쳐난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은 항상 영원한 현재를 살 수밖에 없다. 영원한 현재에서 과거를 해석하거나, 미래를 예상하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은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는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된다. 시간 위의 존재는 그 시간 안에서만 그 존재를 갖는다. 그 말은 과거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고 미래에 닥쳐올 ‘나’도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뜻일 것이다. 더 나아가서 나라는 주체를 좀 더 확장해 보면 실제로 다른 이들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는 ‘다른 사람이라는 타자가 볼 때 나’는 어떤가?라는 고민도 하게 된다. 오늘은 이러한 기본적인 고민들에서 시작해서 여러 철학자들의 고민과 작가들의 작품을 만나보자.



1. 타자, 관점


인간이 스스로를 '타자'로 보게 될 때는 언제일까? 자기 자신이 낯설어지는 때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까? 오직 인간만이 자신을 떠나서 타자의 시선에서 자신을 볼 수 있는 관점의 이탈을 경험할 수 있다. 역사 속에서 많은 예술가들이 이러한 화법으로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표현해왔다. 유명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서는 어느 날 일어난 주인공 그레고리가 벌레로 변신해 있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편치 않은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엄청나게 큰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Als Gregor Samsa eines Morgens aus unruhigen Träumen erwachte, fand er sich in seinem Bett zu einem ungeheueren Ungeziefer verwandelt."


인간의 관점이 바뀌기 위해서는 존재론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내가 저 사람이 되었다거나, 내가 벌레가 되었다거나, 내가 곰이 되었다거나 하는 존재론적 변환이 있어야 한다. 아래에서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5p라는 인식 방법에서 살펴보면, 가장 아랫부분에 전제하고 있는 가정이 바뀌는 것에서 다른 관점이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아’라는 존재는 과거나 미래가 되면 ‘다른 존재’로 인식되어야 한다. 또한 내 몸을 벗어난 다른 사람이라는 존재에서 발생되는 관점에서 타자성은 조금은 다른 이야기이지만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보게 된다.  


타자로서의 자기자신을 보기 위해서는 ‘전제’하고 있는 존재론이 달라져야 한다.

재밌는 사실은 모든 회화는 이렇게 자아를 근원으로 삼든지 아니면 타자를 근원으로 삼던지 ‘타자로서의 자기자신’이라는 관점에서 묘사와 데생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다른 것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타자성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2. 리쾨르와 레비나스


우리의 고민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다가가기 위해서 해석학의 대가인 폴 르쾨르와 타자성의 대가인 레비나스의 이야기를 조금 해보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리쾨르는 인간 내부 안에서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보게 하고, 레비나스는 타자의 관점에서 ‘자기 자신’을 보게 한다. 구체적인 이야기 이렇다.


리쾨르의 경우에는 관념철학에서 시작하는 데카르트의 코기토에서 시작한다. 생각하는 존재인 코기토라는 주체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유명하다. 관념의 존재가 존재 자체를 긍정해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생각하는 주체가 만나게 되는 여러가지 현상들에 대해서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이론과 관점ㅇ르 받아들인다. 생각하는 주체는 지속적인 생각의 준비물들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의식은 항상 어느쪽으로든 방향성이 있고, 우리의 시선은 항상 무엇인가를 보고 있기 때문이고, 우리는 어디서든 냄새를 맡고 있고, 우리는 무슨 감각이듯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현상적으로 계속 발생하고 생각을 가진 인간은 이것을 해석한다. 해석하는 인간은 자신이 해석한 것들을 ‘이야기’를 통해서 밖으로 표출한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꺼내는 동시에 이야기하는 주체가 된다. 자신의 과거와 미래의 자신을 ‘타자’로서 바라보면서 과거에는 어떤 위치에서 이런 행동을 했고, 미래에는 누구와 이런 행동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타자와 자신이 어떤 관계를 맺는지, 그리고 어떤 것이 원인이 되어서 타자나 자아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를 연결시킨다. 이야기하는 동시에 주체가 탄생하고, 이러한 이야기는 온전히 ‘해석’의 영역을 거쳐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해석을 거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서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 파에 놓여 있는 핸드폰이 나랑 어떤 관계인가?라는 것은 ‘내가 1달전에 얼마를 주고 핸드폰을 구매했고, sk 할부약정으로 얼마를 내고 있으며 핸드폰 안에는 나의 사진이 있고...이런 연결성은 이야기로만 가능하다. 이런 이야기는 텍스트로도 존재할 수도 있고 동영상으로도 재생될수도 있고, 지금 당장 말하는 것으로도 재현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이야기는 해석이고 그 해석은 계속해서 글이나 동영상, 회화를 통해서 재해석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고갱_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고, 어디로 가는가


현상학의 대가인 하이데거의 유태인 제자였던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스승의 현상학이 가지고 있는 ‘자아중심성’을 넘어서기 위해서 ‘타자 중심성’을 주장한다. 기존의 철학은 ‘존재론-인식론-윤리론’으로 구성되지만 레비나사이것을 뒤집어서 ‘윤리론-인식론-존재론’으로 바꾸어 버린다. 기존의 철학에서는 ‘내가 있고,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 있고, 그 세상은 어떠해야 한다’라는 것이라면, 레비나스의 철학은 ‘세상은 어떠해야하고, 그걸 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인식해야하고, 그런 주체는 이것이다’라는 식으로 전개된다. 그렇기 때문에 레비나스를 윤리의 철학자 혹은 타자성의 철학자라고 한다. 내가 있기 전에 이미 타자가 있었고, 그 타자가 나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자아는 내가 있었고 내가 해석을 하고 그 해석에 따라서 타자가 어떤 존재가 된다인데, 레비나스는 그 이전에 타자가 존재했고 나는 그 타자를 우선해서 생각해야 하고, 타자에 대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리쾨르와 레비나스는 어떤 의미에서는 ‘타자’성에서 조금은 다르지만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타자를 상정해 놓고 나를 본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물론 이외에도 재밌는 주제는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샤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자신의 앞에 타자가 등장하는 순간 나의 의식은 이미 타자에게 나아가 있기 때문에 나의 의식은 타자 때문에 ‘무’가 된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푸코, 들뢰즈, 마르크스와 같은 현대 철학자들은 모두 타자와 나의 어떤 관계를 상정하고서 사회와 국가, 문화와 제도를 이야기한다.


3. 리쾨르, 의식과 무의식


조금 더 깊숙히 들어가보자. 우리의 의식 속 깊이로 들어 가보자. 우리는 무엇인가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해석을 하기 위해서는 기억의 어떤 부분에서 그 당시의 이미지와 감정을 꺼내야 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의 연결과 감정들의 연결이 하나의 쌍을 이루면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여기서 이야기에 표현되지는 않지만 그 이야기가 존재하게 만들어주는 내면의 존재가 있다. 프로이트가 등장할 시간이다. 인간은 의식과 무의식이 존재하고 대부분의 의식적인 부분은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이라면, 무의식이 진정한 나의 존재이다. 그리고 무의식은 욕망이 가장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프로이드의 이론에서 보면 해석하는 주체가 의식적으로 자기의 이야기를 하는 순간에도 그 이야기의 배경과 장면장면에서는 무의식들이 뒷받혀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의식과 무의식의 측면에서 리쾨르의 이야기를 꺼내보면 지금 나는 ‘의식’적으로 내가 기억하고 있는 자아이다. 그런데 어떤 시점에 내가 했던 행동들은 의식적인 행동만은 아니었다. 무의식적인 행동도 있었고 그 무의식적인 행동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의도적인 걱과 비의도적인 것이 존재한다. 욕망이라는 무의식이 의식으로 올라오면서는 다른 옷을 입지만 그 행동의 동기는 ‘욕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욕망하는 주체로서 기억을 다시 재구성하게 된다. 무의식이 가지고 있던 일종의 ‘의도’가 표현된 의식을 다시 해석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리쾨르가 말하는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은 욕망하는 주체로서 자기에 대해 '다시 보기'가 될 것이다. 물론 무의식은 욕망만 있는게 아니겠다. 프로이트가 아니라 크리스테바와 같은 철학자들은 무의식의 영역은 ‘사랑’이라는 대상과의 관계가 밑받침되어 있다고 말한다. 어찌되었든 의식과 무의식의 차원에서 보면 타자로서의 자기자신은 무의식이 의식에 대하여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4. 타자로서 자기 자신, 여러 주체


1) 자아상, 타자로서 자기 상상


자신을 그린다는 어떤 느낌일까? 자신이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자신을 그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프로이트나 라캉이 이야기하는 거울단계의 어린시절의 '주체'가 형성되던 시절부터 자신이 온전히 인식한 '자화상'을 그려내는 인생의 시간까지, 인간은 매번 그렇게 자신을 새롭게 인식한다. 타자의 관점에서만 자화상을 그릴 수 있다. 그러므로 자화상을 그리는 내내 그는 타자가 되어 있다. 타자성이 충만할 때 무엇보다 자신의 객관적인 모습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 역시 '타자로서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 '자신감'의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타자가 되어서 오브제가 되어 있는 자기 자신을 볼 때 인간은 새롭게 자신을 해석해 나간다. 역사상 많은 작가들이 그렇게 자신을 타자의 관점에서 그리곤 했다. 그러니깐 타자로서 자기자신의 관점은 누구나 가능한 것이다.


2) 배우자, 타자로서 한몸


부부는 일심 동체이다. 결혼하여 한 몸이 된다. 한 몸이라서 '자기'라고 부른다. 타자로서 자기자신은 바로 자신의 배우자이다. 실제로 타자이지만 자기 자신이다. 레비나스는 타자성의 완전한 실천을 배우자에게서 찾는다. 자기이면서 자기가 아닌 존재, 그래서 함께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자지만 다른 시간대를 깰 수 있는 존재들. 시간 위의 존재는 존재끼리 붙어 있으면 같은 시간대를 살 수 밖에 없다. 이것은 공간안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한 약속의 의해서 같은 시간대를 사용하게 되는데, 이 때 시간은 그 연결된 공동체 안에서만 객관적이고 그 그룹을 제외한 곳에 대해서는 주관적이다. 타자로서의 자기자신읜 부부의 삶은 멀리 있거나 가까이에 있거나, 하나의 시간대를 동시에 살아간다. 그래서 타자로서 자기 자신이 된다.


타자이었다가 자기 자신이 되는 배우자, 그러나 완전한 타자이다.


3) 자녀, 타자로서 자기 자식


타자로서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이 태어난다. 그리고 그 태어난 생명은 또 타자로서 자기 자신이다. 자신의 연장이다. 그러나 완전히 새로운 주체이다. 처음에는 자기 자신인줄 알았다가 완전히 타자성을 가지고 자신의 곁을 떠나간다. 타자로서 자기 자신은 이렇게 완전한 타자가 되어서 떠나간다. 자녀들이 자신에게서 타자로 떠나갈 때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자신의 부모로 부터 그렇게 떠나왔음을 알게 된다.


자기 자신이면서 완전한 타자인 자녀들


5. 자기로서 타자


재현representation은 항상 과거의 기억들로부터 다시 꺼내는 작업이다. 그런데 현재presentation를 지나가면 재현은 모두 자기의 기억이기는 하지만 이미 타자이다. 과거의 나는 내가 아니라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던 타자이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을 꺼내는 순간마다 '자기로서 타자'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현상학적으로 인식하는 인간은 영원을 현재를 살기 때문에 과거에서, 미래에서 자기자신을 찾을 수 없다. 과거에서도 자기로서의 타자가 있는 것이고 미래에도 자기로서의 타자가 있는 것이다. 현재는 타자로서의 자기자신을 살아가고 미래와 과거에서는 자기로서의 타자를 살아간다. 이러한 시간의 변증법에 따라서 회상과 예감은 회화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도래할 것들과 이미 도래한 것들 사이에서 어느 시점에서 어떤 감정과 이미지를 사용할 것인가는 타자로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떠오르는 것들이다.



0. 나오기


미술사 전체를 돌아보기로 하고서는 약간의 우회로로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생각해보았다. 다음 시간에는 미술사 전체를 나누어서 관념의 세계와 실재의 세계로 나누고 그것을 매개해주는 상징으로서의 회화와 시각예술을 살펴보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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