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예술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민네이션 Apr 23. 2023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 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 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_기형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자신의 한때

나도 저렇게 살 수 있었는데 하는 이의 변명은


다른 사람이 걸어온 길에 이리저리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소리와 같다


젊음을 욕망하는 이에게 다른 이의

아름다운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여름철 한기를 느끼게 하는 동굴 속

떨어지는 천장의 물방울과 같다


또깍 또깍

한기를 품은 물방울이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다 얼려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그 젊음에서 흘러나오는


생의 찬가를 입 막으려

자신이 자랑하던 것들을 길 위에


덕지덕지 뿌려댄다

다른 이가 걸어간 길이 안 보일 만큼.


조금은 후련해졌는지

다시 겸손을 찾고는 나이스한 자신을 칭찬하며


젊음을 노래한 이가 살고 있는

동굴의 문을 잠구어 버린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사람들이 아무리 그를 찾아도


그 어떤 이야기에서도 그를 찾을 수 없다

인생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이렇게


동굴 속에 가두어버린 이들이

변명처럼 드러내는 소리들.


이 소리들이 세상에 가득차게 되면

사람들은 점점 희망을 잃는다


어느새 길 위에서 중얼거리는 자신을

보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동굴 속에

가두어둔 죄로 인해서 이지만,


여전히 알아차리지 못하기에

먼 훗날 어느 날 오늘을 생각하며,


자신이 그르친 희망을

또 찾고 있을 것이다


인생은 그런 식으로 희망을 잃고

길 위에서 계속 중얼 걸리고 있는 것이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_민네이션


매거진의 이전글 나도 안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라는 것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