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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y 04. 2023

어느 푸은 저녁

기형도


  1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 가는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 무방하지 않은가

나는 그것을 본다

 

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 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 본다

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

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 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

누군가 천천히 속삭인다, 여보게

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

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들을 숨기고 있는가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느낌은 구체적으로

언제나 뒤늦게 온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

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2

 

가장 짧은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결정들을 한꺼번에 내리는 것일까

나는 까닭 없이 갸우뚱해본다

둥글게 무릎을 기운 차가운 나무들, 혹은

곧 유리창을 쏟아버릴 것 같은

검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

낮은 소리들을 주고 받으며

사람들은 걸어오는 것이다

몇몇은 딱딱해 보이는 모자를 썼다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 가는

나는 그것을 습관이라 부른다,

또다시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라, 감각이여!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투명한 저녁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든 신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어느 푸른 저녁_기형도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서 본다는 건

어떤 것을 의미할까


우리가 사는 인생에서 푸른저녁은 얼마나 될까

어그러진 얼굴에서 나오는 노오란 빛은


얼마나 지나야 푸르른 빛의 미소로 바뀔까

밤마다 푸른 빛을 지켜나서 빨간 빛으로 걸어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저녁 뉴스를 가득 메운다

어떤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조금은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인생이란 것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을까

모두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과


모두가 못보는 것를 보는 사람들 중에서

누가 제대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느 노오란 저녁을 걷는 중에 밤나무처럼

검고 붉은 눈동자를 한 사람들을 만난다


눈물이 흐르지 않는 눈동자에는 어느새

시력도 힘을 잃어갔나보다


같이 푸르른 저녁을 어느날 걷다가 만나면

소리내어 울어도 된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우리는 그렇게 누군가의 포옹이 그리워지고

마음 둘 곳을 찾고 있는 것이다


어느 푸른 저녁을 걷다보면

가끔 보이는 이들의 미소에서 마음이 쓸어내린다


느낌은 언제나 뒤늦게 온다

무엇인가를 잡으려고 이렇게 글로 박아 놓는 시간도


언제나 뒤 늦게 오는 시간과 의미를

감정과 마음을 잡아놓는 것이다


어느 푸른 저녁을 생각할 때

한 사나이가 절벽에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심연의 깊이에 빠져 있는 해석하지 못했던

단어를, 기억을, 이미지를 꺼내 보는 것 같다


심연의 가장자리까지 나아오지 못하고

해석되지 않은 무의식 속에서 허우적되는


이야기를 꺼내 본다

우리의 삶은 이렇게 깊이가 있는가?


마음을 꺼내어 본다

우리의 길은 이렇게 다양한가?


나는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해석할 때의 눈빛을 본다

한 없이 깊어지는 그들의 눈빛을 만나면


어느새 인류에 대한 희망이 생긴다

생각하고 생각하는 사람들 곁에서


나는 어떤 푸른 저녁을 예감한다

나는 그 속에서 뒤늦게 나마 희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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