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 뱅크, 신학과 사회이론제 3장 사회학1: 말브랑슈에서 뒤르켐까지
계속해서 정치신학을 공부하고 있다. 함께 읽는 사람들과 영국의 신학자 존 밀뱅크의 '신학과 사회이론'을 한주씩 한장씩 보고 있다. 신학이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세속이라는 개념도 다시 보고 있다. 근 1000년을 다시 돌아보면서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고 시간과 공간이 어떻게 분할되는지를 알아보는 시간이다. 사실 지금까지 공부한 것들 중에서 가장 어렵고, 재미있는 작업이다. 역사를 메타인지를 가지고 돌아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뒤르켐과 베버 그리고 칸트에서 짐멜까지 돌아보는 과정에서 세속화와 계몽주의, 과학화와 과학주의를 다루어 본다.
https://brunch.co.kr/@minnation/3381
권위주의는 과연 본능적인 것일까?
신학자 보날의 관점 사회가 존재하려면 가부장적 주권 혹은 군주적 주권이 있을 때 가능하다라고 말한다. 그래야 개인적 의지를 하나로 묶어주는 통일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을 견지하는 사람들은 '리더십'에 대해서도 '권위주의는 역사적으로도 존재할 수 밖에 없는 필요악'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보날에 의하면 사회가 보존하려면 삼원체적 관계에 토대한 위계적 권력논리에 순응해야 한다는 논리인데 여기서 삼원체계는 다음과 같다.
삼원체적(tradic) 논리
사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삼원체제가 존재한다.
원형으로서 삼원체계는 사회체계를 구성하게 된다. 즉, 신플라톤의처럼 원칙이 있고 이것이 적용된 결과도 원칙을 일반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삼원체제적 논리의 핵심은 권력, 관료. 신민이란 이치가 기본적인 사회적 셋팅이라는 것이다.
삼원체제라는 원리가 나. 너. 부모로 적용된다.
삼원체젠느 군주, 행정관, 신민으로 발전한다.
사실 이러한 삼원쳊체계의 핵심은 하나님, 사제, 신자 관계를 말한다.
보날, De Bonald(1754-1840)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정치가로 보수주의 대표적 인물. 그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과 가치에 맞서 군주와 교회의 권위를 옹호했다. 그는 기독교와 가족, 성직자, 직업에 대한 전통적인 가치와 규범을 중시했으며 이런 가치들이 인간 삶과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는데 중요하다고 주장함. 인간은 유기체적인 존재이며 질서와 규율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
그는 자유주의나 민주주의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증폭시키고 사회의 안정성을 해치므로 비판적 입장.
〈정치·종교 권력론 Théorie du pouvoir politique et religieux〉(1796)의 집필
〈자연법과 사회질서 Essai analytique sur les lois naturelles de l'ordre social〉(1800)·
사회적 사실의 변형
마르크스가 헤겔을 뒤집어 놓았던 것처럼(맑스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을 역사 변증법으로 뒤집었다) 콩트도 보날을 그렇게 뒤집어 놓았다(콩트는 보날의 보수주의 정치관을 뒤집었다).
사회가창조와 계시의 직접적 산물이라는 보날의 주장을 콩트는 뒤집어 놓는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보날은 중세시대에도 존재하던 사회의 개념을 신학의 관점에서 합리화시키고 있다고 콩트는 보고 있다. 따라서 세속이라는 영역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제거하러면 콩트의 관점에서는 사회가 스스로 기능하고 존재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생시몽은 신을 중력과 동일시했다
생시몽은 신=중력과 같은 존재였다.
중력은 자연법칙의 과학적 설명인데 바로 이 중력의 법칙을 신으로 간주함. 따라서 과학을 종교화함.
과학이라는 종교위에 세워진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사회/새로운크리스턴뎀(new Christendom)
생시몽은 누구인가?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의 바탕을 마련한 중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주요저작인 〈새로운 그리스도교 Nouveau Christianisme〉(1825)에서 인간의 형제애가 산업과 사회의 과학적 조직화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어느 제네바인이 동시대인에게 보내는 편지〉(1803)에서 생 시몽은 과학자들이 사회질서 속에서 사제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정치권력을 가진 유산계급이 무산계급에 맞서 기득권을 지키는 유일한 길은 지식의 진보를 후원하는 것이라는 논리도 전개했다.
〈새로운 그리스도교〉에서 종교가 "가장 가난한 계급의 상태를 가장 빠르게 개선한다는 대의를 향해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으며, 이밖에도 유럽의 왕들에게 군국주의와 권력유지에 몰두하는 일을 그만두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서 진정한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보날: 사회는 계시의 산물이다."에 반드하는 콩트의 담론
콩트는 사회학과 실증주의의 창시자이다. 이전까지는 세속적인 사회이론이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학을 실증주의의 관점에서 만들어 냈다.
콩트는 인간사회의 발전단계가 3가지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신학적 단계 – 과학적 단계 – 실증적 단계'로 발전한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발전의 마지막단계는 실증주의로 정의된 사회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열의 논리가 나온다.
모든 종교적 신념은 사회학보다 못미친다고 보았다.
중세 유럽역사는 영적 권력과 세속권력 간의 분업에 의한 사회다. 그러나 영적 권력은 항상 위계적 수위권을 누리게 된다. 콩트는 교황권같은 제도가 실증적 단계를 예고하는 신학적 선구형태라고 생각했다.
“실증의 시대가 도래하면 사회는 교육과 노동분업을 지도하는 과학적 이론과 새로운 세속의 영적 권력에 의해 인도될 것이다”
실증적 시대가 신들의 추상적 개념과 ‘부정적인’ 자연권 이론으로 축소시키는 형이상학의 시대가 지나간 후 어떤 면에서 신학적 시대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콩트가 보는 사회의 구성
원시종교와 같은 종교는 사회적 유대감을 진작시킨다. 종교의 사회적 기능은 결국 사회성으로서 종교의 역할이 제시된다. 종교는 그 자체로 필요에 의해서 생긴것이다. 사람들을 모이게 만들기 위해서 창조된 것이다.
실증적 종교는 일종의 탈신비화된 물신숭배다. 왜냐하면 실증적 종교는 사회적 현실속에서 인간성에 대한 숭배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콩트는 언어와 종교간의 유비가 있다고 주장한다.
뒤르켐이 보는 사회의 구성
종교를 사회적 요인으로만 환원할 수 없다.
종교가 과학으로 진화한 상태에서도 여전히 종교로서 존속한다.
콩트는 타율성을 주어진 것으로, 즉 신적 계시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인간 존재는 자신이 복종할만한 상위권력을 필요로 한다.
즉 실증주의자인 콩트도 종교의 기능을 인정하고 있다.
뒤르켐의 콩트해석의 문제
콩트의 실증주의적 순수성은 탈자유주의적 정치전망을 촉진시킨다.
콩트주의는 나중에 가톨릭주의로 복귀한다.
콩트주의에서 무신론적 가톨릭주의가 출현하게 된다(악시옹 프랑세스 Action Francaise).
악시옹 프랑세스
프랑스 혁명 당시 앙시앙 레짐(구체제)를 추종하던 세력들이 여러 번 왕정으로 복귀하려는 반동을 시도했던 왕당파 정치세력과 가톨릭 극우 세력을 가리킨다.
그러나 1890년대 들어 프랑스가 공화정 국가로 정착하면서 이런 세력은 약화되었으나 반유대주의의 상징적 사건인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왕당파와 가톨릭 극우 세력들은 악시옹 프랑세스를 결성하여 드뤼피스와 그를 변호하는 사람들을 국가 반역자나 스파이로 몰아세웠다.
악시옹 프랑세즈는 민족주의 감정이 팽배했던 제1차 세계대전 뒤에 활동이 절정에 이르렀다. 특히 파시즘이 득세하자 이 단체는 극렬한 파쇼 단체가 되었다. 2차세계대전 이후 이 단체는 거의 사라졌다.
뒤르켐 사상의 이해
뒤르켐 사상은 보수주의와 가깝기보다(친연성) 신칸트적 자유주의와 공화제적 사회주의이다. 그런데 후자의 사상(공화제적 사회주의)이 사실은 뒤르캠의 사상에 엿보이는 연맹주의적이고 조합주의적 요소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 사상이 우파에서 좌파진영으로 옮겨갔다.
이보다 앞선 세속적인 18세기 원시공산주의적 사상가들은 자연법적 토대로부터 평등과 공유 재산권의 개념을 도출시켰다.
뒤르켐은 자유주의를 실증주의로 포섭했는데, 이것은 뒤르켐이 루소의 일반의지의 절대주권을 옹호하는 루소의 견해에서 나왔다. 일반의지의 절대주권이란 한 주체적 개인이 타자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은 한, 그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고전적 자유주의의 입장).
또한 뒤르켐은 칸트가 루소의 시민적 도덕을 선험론적으로 재구성한 것을 자기의 사상으로 포함시키는데, 여기서 <칸트의 일반의지>란 정언명령적 규범에 의한 비인격적이고 절대적인 명령을 말한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정언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을 완전히 결정된 존재가 아니라 자유로운 존재로 유지해야 한다는 논리에서 기인한다. 뒤르켐은 칸트의 정언명령을 시민적 질서속에 근거지음으로써 칸트(의 정언명령에 근거한 일반의지)를 루소(의 일반의지)에게 돌려보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밀 뱅크는 뒤르켐의 신칸트주의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칸트주의는 실증주의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칸트주의는 실증주의의 이원론(도식/내용)를 보완할 뿐 아니라 실증주의 전통에 따른 세속화와도 관련을 맺는다.
칸트적 선험주의는 실증주의 신학에 뿌리를 둔 여러 환상을 혼합시키고 있다.
실증주의적 세속화는 사회학을 칸트의 비판철학을 관학적 방식으로 번역한 것이므로 그것은 실증주의를 자유주의적이고 부정적인 에토스에 조화되는 형식주의적 방향으로 변형시키는 경향이 있다.
왜 희생 개념이 등장하는가?
사회적 사실을 성스러움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사회학이 종교사회학을 지향해 왔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사회학이 희생에 대한 담론으로 성립되었다는 것을 간파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계몽주의는 비이성(무이성 unreason)을 낙인찍었다. 비이성을 광기의 일탈이거나 아니면 그것을(비이성을 낙인찍는 일) 합리를 향한 점진적 진전으로 묘사했다. 그런데 반계몽주의에서 인간 역사를 통털어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비이성을) 광기의 일탈로 낙인찍을 수 없다.
조제프 드 메스트로는 이 현상을 희생의 관행이라고 관찰한다. 그는 모든 문화권에는 희생적 대속(대리)(sacrificial substitution)이란 관념과 관행이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성으로는 이 희생적 대속을 이해할 수 없다. 합리적 이유없이 성별된 사람이나 짐승을 봉헌물로 바쳐진다. 그런데 이 희생적 대속은 전쟁과 폭력에서 희생의 현상과 연결되어 있다.
기독교는 희생적 대속을 타락의 결과 때문에 모든 고통은 징벌과 대속(유화(宥和) expiation)으로 간주한다
흄과 같은 근대의 합리주자들은 희생(희생양 제의)이 신을 달래기 위한 봉헌물로 이해될 수 있지만, 범죄에 대한 속죄의 대속물로 볼 수 없다고 보았다.
피에 의한 구원은 전쟁에서 발생하는 무고한 죽음을 어떤 선을 가져오기 위한 효력을 지닌 우주적 의례라고 본다.
형벌적 정의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신이 제정한 필수 보상을 구현한다.
보날도 메스트로처럼, 십자가를 사회, 정치적 질서 배후에 감추어진 실재였다고 주장한다.
메스트로의 사회이론
메스트로는 봉헌, 즉 파문(anathema)은 무엇인가를 몰아내고 거부하는 것이며 대속이란 용어는 개인에 대한 윤리적 재성별이 아니라 성스러운 물건이나 사람에 대한 축출을 의미한다는 말한다.
성스럽다는 말은 거룩함과 속됨을 동시에 의미하며 사회적 관계성에 부여된 신성함은 오직 대속적 공포를 끊임없이 부추킴으로써 유지될 수 있다. 보존을 위한 축성의 행위에도 거부와 축출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 대속적 희생에는 폭력이 동반한다.
뒤르켐, 메스트로는 로버트슨 스미스처럼 희생제의를 합리화하는 것을 거부한다. 희생제의는 결코 속죄의 효과를 지닌 것이 아니라 원시적 방식으로 성스러운 것에의 “참여”를 수반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희생제의는 원시종교의 사회적 연대와 관련되어 있다.
희생제의는 공동체적 참여일 뿐 아니라 개인적 봉헌이기도 하다. 희생의 가장 내밀한 의미는 정언명령이며 그 명령안에 개인의 의지는 “사회”라고 이름지어진 그 자신의 법에 스스로 종속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희생과 속죄이론
희생은 속죄를 위한 “애도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성스럽다’(sacer)는 형용사에는 순수함/불순함이 모호하게 함축되어 있다. 그 모호함은 자기 희생적 죽음에 따른 균열에서 보여진다.
희생제의에서는 봉헌과 함께 피흘림도 있는데, 이는 상호간에 분노가 폭발하여 서로 상처를 입히다가 급기야 죽음의 사건으로 이어지는 광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168 희생물의 봉헌과 피흘림에는 죽임의 폭력이 동반한다).
그러므로 희생제의에서 죽음은 공동체에 위협이 된다. 따라서 희생제의의 현존은 “사회적인 것”에 부정적 정서를 표출함으로써 애도의식은 속죄의 효과를 낸다. 이 점이 뒤르켐이 볼 때 희생제의 과정에서 애도가 개인적인 감정만이 아니라 부족적 의무인 이유라는 것을 설명해 준다.
뒤르켐에 따르면 희생제의의 봉헌을 통한 대속은 신화가 의례에 결합된 것이다. 즉 신화적 설명과 제의적 실행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대속적 희생이야말로 사회적인 것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희생적 대속(대리)은 사회적 연대성 혹은 사회성을 보여주는 의례다.
범죄와 그에 대한 처벌은 객관적이고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메스트로/뒤르켐): 범죄는 그것이 지닌 기능성과 보편성의 측면에서 볼 때 원시종교의 희생과 속죄제의처럼 “사회적 혈액순환”에 해당한다.
그러나 뒤르켐은 희생제의에 대한 자연주의적 설명을 거부하는데, 그 이유는 희생제의는 “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희생제의에서 두르켐의 위침를 파악하기 위해 3명의 사상가와 관련성을 살펴 볼 수 있다.
1). 퓌스텔 드 쿨랑주(뒤르켐의 스승) : 종교적이고 신화적이다.
2). 로버트슨 스미스 : 원시적 희생제사는 자연현상에 불과하며 계시종교와는 구분된다.
3). 가톨릭 전통주의자 피에르 시몽 발랑슈 : 원시계시와 예수의 새로운 계시를 날카롭게 구분한다. 그리스도교의 피흘림없는 희생의 표상과 그리스도교 시대의 조화론적 진보(?)의 가능성을 강조
뮈토스와 발량슈
발랑슈의 어거스틴 두도성 해석을 하면서 밀 뱅크는 그리스도교가 고대의 뮈토스를 교체하고 새로운 뮈토스를 확립시켰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교는 신화와 역사를 이어주는 논리적 연결고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새로운 도시의 설립자로서 그 도시의 설립은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이야기와 다르게 원초적 살인과 원초적 희생과 추방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유래를 희생자에게 찾는 다는 것이다”
Pierre-Simon Ballanche, La Ville des Expiations(속죄의 도시), 1981.
발랑슈는 가인이 처한 시민적 운명은 가인 자신의 성스러운 폭력에 의한 경륜을 영속화함과 동시에 그것을 억제하는 것을 시사한다고 보았다.
가인의 범죄에 대한 발량슈의 해석
발량슈는 조화란 대립의 역사를 “대항역사적” 방식으로 해독하는 상이한 신화/역사(myth/history)에 따른 것으로 보았다.
뒤르켐은 상징적인 대속적 고통에 관한 신화에 매어있는 반면(따라서 그는 그리스도교적 이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발량슈는 속죄를 죄로 인한 해로운 결과를 자발적으로 감내하는 것으로 해석함.
밀 뱅크는 이에 대해 “희생과속좌와 범죄 및 전염에 대해 뒤르켐이 언급했던 내용을 수용하는 것은 과학적 견해들을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는 것일 뿐 아니라 오히려 예수의 복음과 행적에 나타난 가르침을 궁극적 진리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는 것으로 해석한다.
영국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유럽이라서 그런가? 이들이 가진 철학과 신학의 유산은 이전의 고민들을 딛고 더 깊이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중세시대를 지나면서 사회에 대한 이론들이 만들어지는데, 이러한 이론들은 언제나 '세속'이라는 개념을 어떤 것을 매꿀 것인가였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제거한 상태에서 다시 하나님과 같은 존재를 창조해야했던 계몽주의자들은 때론 '지성'으로 때론 '의지'로 때론 '감정'으로 그 자리를 매꿀려고 했다. 그리고 원래 하나님이 없었던 것처럼 만들려고 하는 다양한 논리들을 개발한다.
희생양 이론도, 사회유기체설도 모두 신학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음을 밀뱅크는 폭로하고, 급진정통주의를 시전한다. 그것은 다시 성경으로 신앙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후에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넘어가면서 주구장창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밀뱅크가 원했던 것은 '신적직관'이었다. 신이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 놓는 것이다. 언제나 신학은 철학을 빌려서 신적 직관을 이해하는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전세가 역전되어서 철학이 신학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자신을 앉혀 놓은 격이다. 이러한 전복적인 사태에서 밀뱅크는 급진적으로 다시 신의 직관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