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밀뱅크_정치경제학은 신정론이자 경쟁의 법칙
원래 있던 것들이 사라지고 나서, 다시 그것을 회복해야 한다는 관점은 보수주의이다. 원래 좋았던 지점이 있고, 그것을 지금은 잃어 버렸기 때문에 회복해야한다는 것이다. 지켜야할 것들이 사라진 이후에 새롭게 다시 지킬 것을 만들면 된다는 논리는 진보주의이다. 이전 것들이 지나가고 새로운 것들이 와야 한다는 진보주의는 그래서 도전적이면서도 전통과는 담을 쌓기도 한다. 요즘의 한국 사회에서는 교회나 성경, 믿음이나 진리는 자칫하면 '시대착오주의자'들이 행하는 도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말이다. 만약 이것이 진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보수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만약 잊어 버린 것, 잃어 버린 것이 있다면 어떨까? 그리고 그 관점에서 보면 한참이나 본질에서 벗어난다고 지적한다면 어떻게 될까?
중세를 지나서 '종교'에서 멀어지기 위한 전략으로 '세속'이라는 개념은 먼저는 공간에서 세속화를 추구하면서 '신'을 모든 공간에서 몰아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머지 않아서 개인의 시간 속에서 '신'을 몰아내기 위해서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이 '신'이 아닌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자유주의 기획을 한다. '공백'을 만들기 위해서 몰아내기를 시작했다면, 이제 그 공백에 무엇을 채워 넣을 것인가? 다시 말하면 '섭리'의 관점에서 지배와 통치가 이루어지는 '바실레이아'(통치권)를 다른 방식으로 채워넣어야 했다. 그러니깐 홉스는 리바이어던 이라고 하는 '인공물'로써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방식으로 공백을 매우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정치경제학의 시작이다. 초기에는 그 기초를 만드는데 있어서 기본은 성경에서 찾지만, 그것을 확장하는 논리는 인본주의적인 요소를 갖는다.
공백을 매우기 위한 전략으로 '규칙성'에 집중하게 된 경로가 바로 근대의 정치경제학의 역사이다. 규칙성은 머지않아 국가운영에 도움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유용한 '제도'로 설계가 되었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제도설계'는 합리주의 전통에서는 홉스식의 국민국가였고, 마키아벨리에게 의하면 '군주론'을 확고하게 만들기 위한 '공화주의'였다. 그러한 체제를 만들고 나서는 '운영방식'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그래서 다시 공백상태에 있는 운영방식을 '새로운 정치과학'이라는 방식으로 과학적인 방법론에 의해서 정치적 방향을 제시했다. 원인으로서의 투입과 결과로서 산출이라는 정치과학 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경제학과 사회학은 '사회과학'의 범주로 분산된다. 그러나 여전히 그 공백을 다 매우지 못하기 때문에 가끔씩 '신'의 존재론을 끌어와서 인간과 사회, 공동체와 관계, 개성과 계약에 대한 인과관계를 형성하였다.
새로운 정치과학은 창조, 곧 새로운 세속 공간의 설립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홉스식의 정치학이 최초의 절대적 출발점들, 즉 의식적으로 제약을 맺는 당사자들이 본래 어떤 의지를 가졌는지, 군주적 통치자가 가진 본래의 의지는 무엇인지를 가졌었는지, 군주적 통치자가 가진 본래의 의지는 무엇인지에 대해 다루었자면, 마키아베릴식의 정치학은 군사, 정치적 비루트가 지닌 단명하고도 비극적인 숙명을 논의하면서, 그 비루트가 이따금씩 운명에 따른 부침을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취급하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정치경제학은 섭리, 즉 상황이 절묘하게 보존되는 과정에 관심을 기울였다. 정치경제학은 천부인권의 전통과 인문주의 전통의 계속자였지만, 격정과 욕구를 윤리와 상관없는 방식으로 통제하는 것이 어떻게 가틍한지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_94p 밀뱅, '신학과 사회이론'
인간을 '호모파베르'라는 도구적 인간으로 규정하고 나면 인간이 작위에 의해서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제도를 만들게 된다. 이러한 제작활동은 '인간의 자기활동'을 기반으로 인격성을 부여하는데 이것이 바로 '법인격'이라는 법인의 자격이 된다. 정치경제학은 존재하는 것들을 관찰하면서 그 결과를 통해서 사회와 국가를 증명해 낸다. 이를 통해서 기존의 섭리 개념으로 설명하던 것들이 인과성의 개념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지난한 과정 속에서 섭리개념을 전략적으로 초반부에 가지고와서 설명하던 방식이 바뀐다. 다시 말하면 섭리와 성스러움을 이야기한 그룹이 '세속적'이라는 이유로 정치와 경제를 '하나님의 통치'에서 몰아내면서 스스로 자유를 부여받는 것이다. 그러니깐 스스로 하나님을 몰아낸게 아니라 교회들이 알아서, 믿는이들이 알아서 자신들의 공간을 제약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교회 다니는 사람이 어떤 모임에 갔다가 너무 돈이야기, 집이야기, 정치이야기, 투자 이야기만 하지만 '거룩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다시는 그 모임에 안 것과 같다. 그 이야기는 그러한 모임에서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하나님의 다스림은 없다'라고 전제하고 있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스스로 공적인 자리에서 멀어짐으로써 스스로 '성스럽다'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이유를 그들은 '탈윤리적'이다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이다. 자신이 거룩하기 때문에 그 그룹에 안간다라고 하는 논리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 그룹을 '탈윤리적'인 모임이라고 치부하는 것과 같다. 스스로 물러나기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안한 기독교인이 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세상이라고 하는 집단이 더 클까봐 말이다.
탈윤리화는 탈신성화와 같은 이야기이다. 신학정치론에서 스피노자가 말한 것처럼, 교회가 가지고 있는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정치를 펴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어느정도 흐른 후에 '예속'에서는 벗어났지만 그 공백을 매우는 것이 매우 어려워진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이 없는 방식으로 윤리를 만들어야 했다. 왜냐하면 윤리가 없다면 사회는 혼란해지고, 국가는 타락과 살인, 방화와 약탈로 가득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홉스가 말한 것처럼 '만인의 투쟁'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공권력'을 실행하려고 하면 다시 윤리적인 근거를 묻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윤리적인 기준을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가지고 와야 했다. 다음과 같다.
근대적 윤리적 전통 형성하는 방법
시민권 : 시민적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덕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다.
스토아주의 : 자연법과 같이 '자연'이 이미 가지고 있는 역사적으로 증명된 자연의 이성을 가지고 온다.
공리주의 : 인위적 덕성과 자연적 덕성을 나누고 공리주의와 인본주의로 발전시킨다.
시민법 전통 : 로마법 전통을 근거로 해서 공화주의적 전통을 부활시킨다.
도덕감정론 : 합리성이 아닌 '공감'을 중심으로 도덕을 끌어낸다.
공화주의 : 공론장을 통해 공화국의 기준을 만들고, 모두가 선서한다.
마키아베리즘 : 운명의 장난을 맞서서 싸워줄 절대군주로 부터 도덕을 이끌어낸다.
애덤스미스 : 자연적 덕성을 끌어내어 경제학의 합리적 기초를 만든다.
자유주의 : 인간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연적 상태에서 기초한 도덕을 규칙으로 만든다.
근대적 윤리적 전통은 장소와 시간의 결합에 따라서 달라졌다. 공동체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곳이라고 하더라도 공동체가 어떤 전통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달라졌다. 브뤼노 라투르는 '우리는 한번도 근대인인적이 없었다'라고 하는 책에서 아래와 같은 도식을 만든다. 인간이 하나님을 몰아낸 이후에 처음으로 한 것은 '자연'과 '인간'을 구분하고 인간의 윤리적 책임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책임에 맞는 권한만큼 국가와 사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브뤼노는 한번도 우리는 이렇게 분할된 세상을 산 적이 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자연과 인간은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깐 정치경제학을 국가관의 하나로 본다면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이 도덕경제철학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의 운영의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 '윤리'를 만들어내고 '책임'을 강조하게 된다는 것이다.
언제나, 여전히 논란의 대상인 애덤스미스가 가진 윤리는 어떻게 등장하는지 살펴보자. 스미스는 덕성을 전체적으로 다루지 않고 인위적 덕성이 작용하는 범위를 정치경제학적으로 한정했다. 스미스는 순수한 자애는 비의존적인 존재인 하나님께만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적절함'이라는 이익지향적인 덕성은 인간에게 적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적절함이란 검약, 근검, 신중함의 습성들, 자원에 대한 소비의 자세가 포함된다. 자기이익을 중심으로 애덤스미스는 윤리를 정렬한다. 다른 사람을 위한 자애는 자기이익 보존을 해치는 행위가 되며 이것은 개인적인, 가족적인 세계에 국한시켜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스미스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자애에 기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이익에 기반하게 되는 것이다.
애덤스미스가 보기에 본성적으로 모든 인간으로 우선적으로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도록 되어 있다. 비록 이것에 대한 실제 사례를 이제는 계약에서가 아니라 전쟁과 폭력적 협상이나 또는 교역과 같은 평화로운 협상을 통해서 진행되는 자연적 과정에서 찾을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홉스와 로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공공의 이익이라는 것이 생명, 산, 계약과 같은 가적 이익을 보장하는 데 주로 국한되어 있음은 여전히 사실이다. 이렇듯 흄과 스미스가 모두 당연시하는 내용은 바로 정의는 위와 같은 소유권이 침해되는 것에 대해서만 부정적 관심을 가질 뿐이이라는 것과, 아울러 선행의 부작위가 아닌 그러한 침해의 행위만이 처벌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느끼는 감정이야말로 인간적 격정에 따른 자연적 성향의 표출이라는 것이다. p102
이러한 스미스의 논리는 제임스 스튜어트에게서 본원적 축적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이후에 등장하게 되는 자본주의에서 '자기형성적 자기보존'의 윤리를 만들어내게 된다. 사람들이 헷갈리는 부분은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에서 자애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인데, 사실은 미스는 그러한 자애는 가족에게서만 할 수 있고 사회 속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깐 이것을 국가수준으로 확대시켜서 정치경제학으로 발전시키면 스미스주의는 오히려 홉스에 대한 대응이 된다. '만인의 만인의 투쟁'을 막는 방식으로 정치경제학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시간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