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다시 제주여행
1. 일상을 떠나 제주로
제주로 가는 비행기는 항상 구름 속을 걷는 것 같다. 예전에 키아누리브스 주연의 구름속의 산책이 생각나는 여행이 시작되고 있었다. 박사과정 1학기는 그렇게 쉽지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낯선 것들의 천국이었다.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가 많이 않던 내게, 출연연구소에서 일하는 이들과 연구와 논문을 쓴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면서 평소에 만나볼 수 없는 사람들과의 조우였다. 일주일에 3번 학교에 가야한다는 것도 큰 부담이었으니 갈 때마다 '나는 누구, 여기는 어디'이러고 있던 나를 발견했다. 지칠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그래도 생각난 김에 제주로 향하는 길이었다. 이번여행의 컨셉은 무조건 힐링이었다.
총 3일의 여행을 예정했는데 첫째날은 가성비가 좋은 서귀포 근교 위미항의 '코업시티 하버뷰'에 숙박했다. 7만원 이하로 오션뷰를 볼 수 있는 몇 안되는 호텔이다. 늦은저녁에 비를 뚫고 도착한 하버뷰 정경은 몽환적이면서도 첫날임에도 피로를 모두 씻어줄 만큼 이국적이었다. 10시가 넘어버린 탓에 주변 식당들이 문을 닫았는데 마침 치킨집이 밤늦게까지 하고 있어서 들어갔다. 제주 위트에일이 위트있게 3병을 먹으면 맥주잔을 준다는 말에 일단 3병을 시키고 다소 비싼?느낌의 세트메뉴를 시켰다. 배정남을 닮은 쉐프?같은 사장님이 신나게 요리를 하고 있었는데 뒤태만 보아도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리고 조금 있으니 나온 고급요리들의 향연!! 직접작은 전복요리와 소라요리 그리고 방금 위미 앞바다에서 딴 과일까지! 즐겁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이어졌다. 사장님은 알고보니 1000억대 자산가였다. 물론 지금은 아니라고 하지만 어린시절 한창 동경하던 HOT가 입던 '유나이티드 워커스'의 대표였던 것이다. 그 이후에도 디자인 및 다양한 회사들을 경영하면서 한시대를 풍미했는데 지금은 해탈하고서 위미항에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신다고 한다. 그냥 운영하는게 아니라 삶을 즐기고 있는 것이 여력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이런 생각들을 하는데 사장님을 보니 정말로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그렇게 사장님과 대화를 하면서 웃고떠들다 보니 벌써 12시가 다 되었다. 사장님은 서비스라면서 제주위트에일 유리잔을 아예 박스로 주셨다. 다음에 또 올 것을 예비하는 몸짓이었다.
저녁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더니 어느새 아침에는 맑게 게이고 근처 백반집에서 먹는 아침은 꿀맛이었다. 뭐니뭐니해도 음식은 '간'이 아니던가? 된잔국과 돔 그리고 계란말이와 마당에서 바로 뽑은 상추로 아침을 만끽했다. 그 다음으로 간 곳은 위미항에서 갈 수 있는 '서연의 집'이었다. 누구라도 잊을 수 없는 조정석과 수지 그리고 낭만적인 제주도 별장이 이야기가 고스란히 카페로 바뀌어 있었다. 코업시티 하버뷰를 나오면 걸어서 10분 정도만 가면 서연의 집에 도착한다. 건축학개론에서 주인공들이 마지막에 내려와서 살게되는 집이 결국 카페가 된 것이다. 한가한 차장가에서 음료를 마시면서 건축학개론의 낭만을 떠올리는 아침이 참 행복했다.
마치 통과의례처럼 제주에 오면 항상 들리는 곳, 김영갑 선생님을 뵈러 두모악에 들렸다. 선생님은 루게릭병으로 돌아가셨지만 선생님이 제주를 다니시면서 밀도있게 남겨 놓은 사진과 구름 그리고 갤러리의 온기가 여실히 느껴지는 시간들이었다. 다시 비가 조금씩 흩날리는 아침에 갤러리를 돌아다니면서 선생님이 보신 바람의 방향을 쫓고 있었다. 갤러리에 가면 뒤쪽에 무인카페가 있는데 무인카페에 혼자 가서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이번에도 혼자서 앉아서 음악을 듣는데 그렇게 평온할 수가 없었다. 휘어진 나무들이 마치 고흐의 그림들 같았고, 선생님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인간의 정신의 깊이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의 낭만의 범위는 어디까지 넓어질 수 있을까? 셀수 없는 고민의 연속에서 하나 둘씩 그 의미를 발견하는 시간들이었다.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는 나의 모습이 힐끔힐끔 보이고 흩날리는 빗속에서 바람의 얼굴이 살짝히 드러나는 것 같았다. 사람이 낭만이 없으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낭만이란 보이는 현실 세계에서 보이지 않은 미래와 꿈을 보는 것이다. 현실과 이상이 조화로워지는 그 시간이 바로 낭만적이 되는 시간이리라. 그렇다면 나는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두모악갤러리에서 걸어서 5분만 내려오면 제주도에서 가장 좋아하는 카페 덴드리가 있다. 그리스 산토리니에서 튀어나왔을법한 덴드리는 들어가는 길부터 제주 감귤로 둘러쌓여 있다. 마침 수국의 계절이라서 물을 머금은 수국들이 반겨주었다. 여유있는 음악과 조화로운 인테리어 속에서 향기있는 차를 마시면서 기획을 하고 미래를 꿈꾸보는 일은 너무 즐겁고 아름다운 일이었다. 잘 안되던 기획도 여러가지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역시 사람은 자연과 친해지고 공동체와 섞이며 자기자신과 화해해야하는 법이다. 여행은 그런 의미에서 이 모든 것을 회복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시간도 느리게 흘러가고 서 있는 땅에서도 나를 붙잡지 않는 자유로움을 선사하려고 노력하였다. 어떤 친구는 여행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찬사가 넘쳐서 읽기 힘들다고 하던데, 쓰는 사람은 이미 지난 일인데도 이렇게 좋은데 어쩌겠나.
역시 우도로 넘어갔다. 사실 오면서 계획을 한게 우도를 가기 위한 서귀포로 늦은 숙박, 아침에 갤러리에 들렸다가 성산포에서 차를 가지고 배를 타고 들어가서 1박을 하는 것. 오후 4시즈음 천진항으로 들어가는 배를 잡아 타고 선상에 올랐다. 아침까지 내리던 비는 깨끗하게 물러가고 태극기가 휘날리고 구름들이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는 오후 우도에서 나오는 사람들과 인사하며 우리는 우도로 들어갔다. 항상 우도를 가는 배에서는 뒤로 남겨지는 성산포와 제주를 보면서 상념에 빠지곤 하지만 오늘은 상념대신 낭만과 여유를 챙겨왔다. 바람부는 선상에서 아무런 생각없이 햇빛을 만끽하는 시간들이 너무 행복하고 즐거웠다. 형용사를 쓰지 않으면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우도에 6시쯤 되면 해가 지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잔치가 시작된다. 지는 태양과 바다가 만나면서 황금물살이 펼쳐지고 고독의 시간이 찾아온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 우도 등대로 올라가는 능선에 앉아서 시선을 멈춘다. 한시간동안 같은 자리에서 부는 바람과 지는 태양과 흘러가는 구름들과 함께 보냈다. 왜 그렇게 애타게 힘들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고,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을까? 이렇게 조용한 곳에선 그런 고민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사람은 언제나 현상을 살고 기억하면서 해석한다고 하지만, 너무 현상에 파묻힌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어두워진 시간들 속에서 다시 이야기 꽃이 피었다. 벌써 1999년부터 지금까지 20년 넘게 우도 통닭을 운영해오신 사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도의 별미인 양념치킨을 맛있게 먹었다. 오묘하고 절묘한 맛으로 항상 우도를 갈 때마다 즐기는 맛인데 여전히 오늘도 그 맛을 지켜주었다. 어스름한 저녁밤길을 걸으면서 돌아오는 길 낭만으로 충천한 마음 속에는 시인들의 구절이 흘러 넘치고, 옆방에서는 중년의 남성과 여성들이 밤이 새도록 지나간 노래를 부르면서 잠들 줄을 모른다. 여행이란 이런 것이 아닌가?
다음날 아침에 우도를 한번 둘러보고 사람들이 이제 막 우도여행을 시작할 때 나왔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성산일출봉이었다. 어릴적이야 말타는 사진이며 유채꽃이면 유명한 성산일출봉의 이미지만 상상 속에 있었지만 금년에는 벌써 두번째나 성산에 도착했다. 높이 올라갈 필요 없이 등산로 입구에서 성산을 올려다보면서 사진도 찍고 걷기도 하고 구경도 했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모든 사진들이 아름다운 사진이 되었다. 성산에서 해녀의 집 구경도 하고, 멀리 우도도 바라보면서 시원한 광경이 기분 좋았다. 이어서 우리는 산굼부리로 향했다. 지금은 억새가 없어서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이제 막 자라나는 억새를 보면서 우리의 인생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도, 나도 이제 막 자라나는 것 같아서 아무도 봐주지 않지만 나는 그 어느때보다 무력무력 자라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산굼부리로 가는 길에 빛의벙커에 들렸다. 평소 세잔을 비롯해서 인상파 화가들을 좋아했기 때문에 세잔의 그림이 무한반복되는 빛의 벙커는 꼭 한번 와 보고 싶었다. 들어가자 마자 음악과 세잔의 그림들이 묘사되고 지금 내가 어디있는지도 모를만큼 황홀한 광경이 펼쳐졌다. 빛의 향연에서 생각의 향연으로 이어졌고 한참을 한 곳에 앉아서 관람을 했다. 빛의 벙커를 나와보니 건너편에 커피숍이 있었는데 2층에서 바라보는 광경은 정말 너무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마치 유럽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말이다.
마지막 숙소는 애월근처의 스탠포트호텔앤리조트였다. 우연히 인스타를 보고 풀빌라여서 예약하게 되었는데 말 그대로 가성비가 끝판왕이었다. 넓은 수영장에 미온수가 하루종일 흘러나왔고, 자쿠지도 따로 있어서 온수욕을 하면서 티비도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마지막의 피로가 풀리면서 수영도 하고 이야기도하고 영화도 보고 가벼운 티타임도 가졌다. 제주의 마지막 밤이 그렇게 정점을 향해서 치닫고 있었다.
애월근처에 있는 리조트를 나와서 아침에 '애월 더 선셋'으로 향했다. 애월 바다가 아름답게 자리한 곳에서 아침 브런치를 먹으면서 푸른애월바다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이라서 그런지 아쉬움도 있었지만 맑고 화창한 하늘이 앞으로 열려진 미래와 같이 느껴져서 즐겁게 먹고 신나게 사진찍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제주여행을 하면 갈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들고 또 언제나 다시 가고 싶은 그런 생각이 든다. 지친 일상에서 다시 활력을 얻고 새로움을 얻어서 열정적인 일상을 만들리라 생각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벌써 1달이 지나긴 했지만 생각하면서 사진들을 보고 추억해보니 다시 힘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낭만을 잃지 말아야지. 그런 생각으로 다시 여행갈 수 있는 시간들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