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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Feb 13. 2024

신플라톤주의란 무엇인가?

플로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위-디오니시우스를 통해 살펴보기

0. 들어가기


중세에게 지고 있는 빚이 많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단어는 같은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을 상황이나 개념들이 한 장소와 시간대에 같이 있는 것을 말한다. 현대의 종교는 중세의 종교와 판박이와 같다. 현대 종교가 '전통'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살펴보면 '초대교회'라고 하는 예수님 당시의 고대근동도 있지만 실은 '중세시대'의 다양한 이론들이 정립된 것들이 많다. 플로티누스의 '일자론'과 같은 존재에 대한, 근원에 대한 고민들이 '신플라톤주의'라고 하는 이데아 속에 하나님의 존재를 상정했다. 그래서 '천국'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인간이 죽으면 어디론가 가는데 그것이 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가는 '회귀' 혹은 '상승'의 비유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이 벌써 1500년이나 넘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기도 하다. 이 정도 되었으면, 그러니깐 이정도의 '전통'이 되었으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 현대를 비판하는 기독교인들은 중세시대의 어떤 논쟁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계몽주의의 세계관에 대해서 유명한 목회자들은 중세시대의 힘을 빌려서 비판에 비판을 가한다. 어떤 개념을 가지고 온다는 것은 그 개념이 가진 가능성과 파급력을 포함해서 한계도 동일하게 가지고 온다는 말이 된다. 중세시대가 가지고 있던 한계는 제국주의의 시대 안에서 '제국의 논리'로 하나님 나라를 생각했던 것과 인간에 대한 신비주의적인 견해를 그대로 성경해석에 투영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연히 그 시대의 상황을 반영해서 그리스문화와 로마문화에 대한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시대를 넘어서 생각한다는 것은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기 전까지는 힘들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 현재를 지배한다_조지오웰


어쩌면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 1000년을 거슬러 올라가야할 수도 있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미 1000년전부터 하고 있던 생각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까? 이런 고민을 하다가 최근 철학아카데미에서 나온 '처음읽는 중세철학'에서 다루는 신플라톤의주의와 교부철학, 스콜라철학과 중세철학의 연결고리를 찾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오늘은 중세철학의 다양한 요소 중에서 '신플라톤주의'에 대해서 언급한 중세철학자들을 생각해보면서 오늘날 신앙의 테두리에서 '신'의 역할과 존재, 지위는 어떠해야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일단 중세철학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보자_design by minnation



1. 플로티누스 Plotinos 205~270_중세를 여는 신플라톤주의자


205년경에 태어난 플로티누스는 오늘날 이집트 지역인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철학자인 암모니오스 사카스로부터 철학을 사사받았다. 시대적인 혼란과 도적적인 어려움에 직면한 '인간 존재'와 '신의 존재'를 서로 연결하기 위해서 플로티누스는 고대철학과 기독교철학을 연결하여 중세철학의 금형을 만들었다. 플로티누스는 40세가 되기 전까지는 고대철학에 심취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닦았고 이에 대한 기록은 '엔네이아데스'라는 54편의 글과 연설로 사후 270년에 그의 제자 포르피리우스가 편집해서 남긴 것이 전부이다. 40세가 넘어서는 244년부터는 로마에 학교를 세우고 제자를 양성하며 참다운 삶과 진정한 앎이란 무엇인지를 탐구했다.


A.D 200년경에는 고대사상들이 이제 막 시작된 기독교 사상과 혼합되면서 다양한 변종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로마의 도덕은 타락할대로 타락해있었고 정치적으로는 제국의 잇몸이 흔들리면서 혼란스러운 사회가 되었다. 철학자는 언제나 동시대의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고 했던가?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플로티누스는 지성인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 고대철학의 정수인 '플라톤'의 철학을 재해석하디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 시대가 플로티누스를 신플라톤주의자 Neo-Platonist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플로톤 철학을 기초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접목시키고 이를 다시 기독교의 구원론과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플라톤철학과 신플라톤철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완전한 진리라고 할 수 있는 이데아와 모방의 세계라고 하는 현실의 세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가 아니면 분리되어 있는가이다.


신플라톤주의와 플라톤주의의 비교_design by minnation


플라톤주의와 신플라톤주의의 차이

플라톤은 이데아와 현실을 분리했고 이는 이원론으로 발전하지만, 신플라톤주의는 이데아와 현실이 연결되면서 분할된다.

플라톤주의에서는 이데아는 진짜이고 현실은 가짜이지만, 신플라톤주의는 이 모든 것들이 '일자 - 정신 - 영혼 - 물질'의 층위로 나누어져 있으며 일정한 위계가 존재한다.

플라톤주의에서는 이데아의 모방이 현실이지만, 신플라톤주의에서는 이데아의 가장 상층부에 있는 일자에서 유출되어서 흘러내린 정신이 영혼을 만들고 다시 영혼이 물질을 만드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유론이 범주론과 만나면서 태어났다.

창조하지도 않고 창조되지도 않은 '일자'에서 모든 것들이 유래되었다. 곧 근본실재 ultimate real라고 부르며 근본실재는 누구에게도 창조되지 않으면서도 창조하지도 않는다.  


신플라톤주의의 장을 열어 놓은 플라티누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지고 있던 형상 morphe과 질료 hyle로 이루어진 존재들의 가능태와 현실태의 실재를 비판한다. 그 이유는 완전한 제 1의 원인이라면 불안정한 형상과 질료의 결합이 아니라 아예 창조도 하지 않고 창조되지도 않는 '부동의 동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티누스의 '일자'라는 개념은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오직 그 자체로만 영원한 존재이다. 물론 중세시대이기 때문에 이러한 '일자'가 곧 '신'의 개념으로 발전하게 되지만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움직이거나 훼손할 수 없는 '일자'로서의 '신' 관념은 중세를 지나 근대종교에서는 기독교의 '하나님'이 지닌 완전함의 개념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일자의 생명력은 항상 아래로 흘러넘치기 때문에, 유출되어서 만들어지는 존재인 '정신' 혹은 '지성'이 탄생하게 되고 정신은 흘러넘쳐서 다시 영혼을 만들어 낸다.


일자에서 유출된 지성은 영혼을
만들고 영혼은 사물을 만든다

일자에 의해서 유출된 정신은 인간의 각 영혼으로 들어가기 전에 존재하는 정신의 개념들이 된다. '사랑, 진리, 온유, 환대, 깊음'과 같은 정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은 이미 영혼을 빚어재는 요소로서 정신 안에 만들어지고 있던 것이다. 세계의 영혼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은 인간의 정신을 유출하고 개별적인 영혼은 다양한 사물을 산출하며 세상을 구성해 간다. 플로티누스에 의하면 일자에 가까울 수록 선이며 사물에 가까울수록 악이 된다. 인간의 영혼은 언제나 정신과 물질의 결합인데, 인간의 영혼이 타락하여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추구하게 될 경우 인간은 악인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기독교의 구원론이 등장한다.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이 영혼이 자연과 사물과 같이 개별적인 것에 집착하여 의미를 잃지 않고 정신의 고귀함을 추구하여 언제나 도달할 수 없지만 경외하는 '일자'에게 다가가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이다.


플로티누스의 일자에 대한 사랑은 기독교에서는 '아가페'로 등장하며, 인간에 대한 사랑이 고귀한 정신으로 상승하는 사랑을 필리아로 표현된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이 물질과 육체를 탐할 경우 에로스로 전락하여 정신보다 물질, 전체보다 개별, 관념보다 구체적인 것에 집착하게 된다고 비판한다. 플라티누스에게 악은 일차적으로 물질에 끌리며 에로스에 머무는 것이 되며, 물질화되는 것이다. 물질이 곧 악은 아니지만 인간의 영혼이 물질에만 집착할 경우 그것은 악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기독교 세계관이 이야기하는 '방향'에 대한 논의도 도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조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방향이 잘못된 것이다. 그 말은 정신과 일자를 향한 방향이 아니라 물질에만 국한된, 이성적 질서의 부재가 바로 악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신플라톤주의 그리고 플로티누스의 논리는 여느 기독교 교단의 논리와 흡사하다. 물질만 추구하는 인간은 하나님이 아닌 '맘몬'을 숭상하고 있는 것이고 인간의 영혼은 파괴되어 간다. 일자를 향한 믿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아니라 집과 자동차, 사람과의 사랑에만 몰두하고 있는 현대 문명은 플로티누스의 관점에서 보면 악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플로티누스가 살아갔던 세상도 지금고 별반 다른 것이 없었다. 로마제국의 도덕적 타락과 제국주의 정치로 인한 권력의 남용이 만든 세상을 새롭게 정화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러한 문제들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일자'의 개념이 필요했고, 일자를 향한 온전한 정신적 삶만이 인간의 영혼이 타락하지 않은 길이었다. 이것은 그 당신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었고, 한국사회에서 교회의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권력작용'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_design by minnation



2.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 354 - 430_신플라톤주의의 완성자


중세의 철학자라고 하면 대중에게 가장 알려진 철학자는 바로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는 354년 알제리의 타가스테에세 태어났으며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에서 주로  활동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태어났을 당시에는 이미 기독교는 로마의 국가였고, 로마의 대부분의 시민들이 기독교를 주 종교로 삼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국가 종교가 되고 나면 종교의 허울만 남고 그 내용은 이전의 종교와 사람들의 기대가 하나로 합쳐져서 혼합된 세계관으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세계를 제패한 로마의 기독교는 여자들에게는 독실한 어머니의 상을 강요했고 아버지에게는 출세를 지향하게 만드는 전형적인 시민종교가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는 전형적인 독실한 기독교인 어머니였고 아버지 카트리키우스는 출세를 지향하는 소시민적인 삶을 살았다. 안정적인 가정에서 태어난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다우로스라는 튀니지 인근의 중소도시에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곧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카르타고에서 유학을 했다. 


당시 북아프리카 최고의 도시였던 카르타고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새로운 사람들과 토론과 언쟁을 주고 받으며 수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유행하던 마니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법학과 수사학에 뛰어났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의 논리가 기독교의 논리보다 세련되었다고 생각했고 마니교의 철학에 흠뻑 취했다. 특히 선과 악에 대한 마니교의 정의는 악한 존재들이 세력을 만들어서 우주적인 선과 싸우는 흡사 아마겟돈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었고 이를 무찌르기 위한 선한 세력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정의로운 세계관을 추구하고 있었다. 마니교 전통에서 '악의 존재'의 거대함은 곧 '선의 존재'인 하나님과 기독교의 세계관의 축소를 불러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띠라서 이후에는 마니교의 '악'에 개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관점을 옹호하며 악은 '선의 결여'로써 존재하지 않는 것 즉, 부존재를 주장하게 된다. 


카르타고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천문학, 의학, 지리학을 공부하며 수사학을 가르쳤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윽고 기독교 전통과 로마의 철학을 결합해 자신만의 철학을 만들어 간다. 카르타고에서도 배울게 없어진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로 건너가 수하학을 가르치며 교사로 일했고 로마의 시자이었던 심마쿠스의 도움으로 밀라노에서 수사학 교수로 임용되어 떠난다. 밀라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 되는 암브로시우스를 만나서 드디어 '신플라톤주의'를 접하게 되고이후 그리스도교와 플라톤주의를 정교하게 다듬어 자신의 철학을 정립하기 시작한다. 이후 히포의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면 자신의 곧통체와 교회의 지도자들을 이끌게 된다. 


도나투스파의 순혈주의 전통에 맞서서 거룩이란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땅에서는 거룩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에 배교한 이들을 정죄하는 것을 비판한다. 여기서 순혈주의란 인간은 도덕적으로 완전하며 윤리적인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다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논리였다. 그리스도 교회의 분열을 막기 위한 도나투스파의 논쟁에서 하나의 교회를 세우고자 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 관점에서 일자로 향하는 선함의 가능성을 열어 놓으며 펠라기우스와도 논쟁을 벌인다. 인간의 원죄를 부정하고 자유의지를 지닌 자유인으로서 인간은 구원을 자신의 의지로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 펠라기우스에 맞서서 무한의 신과 유한의 인간 사이에 구원은 오직 신으로부터만 온다고 반박한다. 신의 섭리와 은혜로 인해서 유한의 인간은 무한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신의 섭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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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년 히포의 목회자이자 신학자로 명성을 날리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로마의 멸망'은 하나님의 섭리가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 따라서 멸망한 국가인 로마를 변증하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굳건함을 증명하기 위한 변론이 필요했고 마침내 하나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이라는 '신국론'이 등장하게 된다. 신의 국가와 지상의 국가가 있는데 지상의 국가는 도덕의 타락으로 멸망할 수 있지만 신의 도성은 여전히 완전한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서 존속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죽을 때까지 히포의 도서관에서 교회의 도전과 하나님의 섭리를 반박하던 철학과 싸웠고 430년에  열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

세상이 유지되는 이유는 일정한 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체계는 위로부터 아래까지 '형태, 한계, 질서'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형태와 한계는 내적속성이며 질서는 외적속성에 포함된다. 

이러한 질서를 부여한 것은 태초의 신이며, 신으로 부터 사물은 창조되었고 신은 사물보다 초월해서 존재하는 보편자이다. 신은 무한하고 형태가 없으며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지 않아도 된다. 초월성의 전통은 이데아를 중심으로 하는 플라톤주의에서 왔으며 신의 섭리에 따라서 질서를 부여한다고 보는 것은 신플라톤주의에서 왔다. 

신이 부여한 질서는 수직적이며 이는 존재의 선함과 아름다움의 차이로 나타난다. 사물들 중에 가장 아픔답게 창조된 것은 천사이며 그 다음으로 인간, 동물, 식물, 광물에 이르기까지 차례대로 아름다움과 선함을 부여받았다. 

존재하는 것은 이미 선하며, 선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육체적, 지적, 영적 피조물이다. 인간에게서 최고의 것은 영혼이며 영혼의 탁월함은 자유, 자기동일성, 초월성의 특징을 갖는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선함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악함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아름답지만 한편으로 불완전하다. 신은 완전한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아름답고 완전히 자유롭다. 

악은 신의 반대방향으로 선택하는 것을 말하며 죄는 사물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사용에 있다. 

선하고 아름다운 신의 반대방향은 결국 없음이다. 인간은 왜곡된 의지에서 욕망을, 욕망에서 습관을, 습관에서 필연성으로 옮겨가며 결국 잘못된 선택에 자유의지를 사용하게 된다. 

인간 선택의 악한 경향성 원죄라고 보았으며 죄성은 공간적일 뿐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존재한다. 

불완전한 인간이 거룩한 영을 받아들일 때에만 비로소 선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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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티누스의 '일자'개념에서 확장하여 선함과 악함의 구분을 '자유의지'로 정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은 중세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이 되었다. 구조와 방향에 있어서 신이 만든 구조는 타락하지 않았지만 인간은 잘못된 방향으로 내려가 죄를 지었다라고 하는 워딩도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왔다. 또한 신의 통치와 관련해서도 신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을 서로 나누고 지상의 도성이 멸망해도 신의 도상은 영원하다는 '신국론'의 논리는 지금도 한국 기독교에서 설교나 찬양의 주된 내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중세에게 아직도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리고 중세는 여전히 우리 가운데서 빛나고 있다. 그것도 신플라톤주의의 빛이 말이다. 이후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은 독일 낭만주의의 대가인 헤겔에게는 변증법으로 발전하게 되고, 화란의 키에르케고르에게는 유신론적 실존주의로 확대된다. 모두 일자인 신과 사물의 관계설정을 자신들의 철학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에서 나온 철학들이다. 



3. 위-디오니시우스 Pseudo-Dionysius 5세기 ~ 6세기_그리스도교 신비사상과 신플라톤주의


디오니시우스는 신약성서 17장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의 제자인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의 위명을 빌려서 그리스도교 신비사상의 고전이 되는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 '위 pseudo'라고 부르는 것은 타인의 이름을 도용하여 원저자의 작품을 따라하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대부분 곧 사라졌다. 하지만 '위-디오니시우스'는 기존의 디오니시우스보다 더 유명한 작품들을 남겼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위'라는 의미를 붙여서 '위-디오니시우스'라고 부른다. 위-디오니시우스의 저작은 지금까지 '천상의 위계', '교회의 위계', '하느님의 이름들', '신비신학'이라는 표제가 붙은 4편과 서신 10편이 전해지고 있다. 위-디오니시우스의 철학은 신플라톤주의에 입각한 '유출과 회귀'의 순환론을 기반으로 한다.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도 영향을 주면서 독일 관념론과 신학까지 이어지는 철학을 제시했다. 


플라톤주의와 신플라톤주의의 차이는
일자 혹은 신과 사물의 연결이 가능하냐의 문제였다. 


신플라톤주의는 일자인 신으로부터 사물까지의 단계가 유출을 통해서 이어진다고 보고 있고, 이 둘 사이에 정신과 영혼의 관계를 상정한다는 것에 있어서 인간의 존재와 사물의 존재의 차이를 규정한다. 위-디오니시우스는 존재하는 것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마치 3차원에서 4차원으로 차원을 확장하는 것처럼 존재의 질서들이 서로 위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위계는 최초의 위치인 일자에서 유출되어서 순환하고 다시 회귀한다는 흐름을 만들어 낸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는 유출설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인간과 신은 절대 완전히 만날 수 없는 존재였지만 위-디오니시우스에서는 신플라톤주의가 확장하여 회귀하는 과정이 드러나는 것이다. 


존재의 선함의 궁극적인 원리인 '일자'에서 부터 지석이 유출되고 이것은 지성으로 만들어진다. 지성에서 유출된 일자의 본질은 다시 영혼으로 굳어지고 이러한 영혼은 인간 존재를 구성하며 다시 영혼이 흘러내려서 사물이 만들어진다. 플로티누스에게서 시작된 유출설은 시리아학파를 세운 이암블리쿠스Iamblichus에 의해서 우주적인 발생을 설명하는 순환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원리는 신플라톤주의의 마지막 주자라고 할 수 있는 프로클로스에 의해서 수학적인 엄밀성까지 확대된다. 프로클로스는 '모든 결과물은 그 근원 안에 머물다가, 그 근원으로부터 나와서, 그 근원으로 돌아간다'라는 명제를 신학원리에서 남겼다. 신플라톤주의는 마침내 근원에서 나와서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는 순환적인 존재론을 정립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일자'로 근원을 상정하는 헬레니즘 철학은 플라톤주의를 계승한 오리게네스의 업적이기는 하다. 오리게네스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간의 존재론적 간극을 말하는 그리스도교의 입장보다 신성한 인간 영혼간의 연결성을 강조하는 유출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4세기경 아타나시우스를 비롯한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무로부터 창조' creatio ex nihilo 교리를 중심으로 그리스도교 고유의 창조신학을 정립하고 혼란스러운 헬레니즘 신학을 타파한다. 창조주의 의지로 만들어진 것과 궁극적인 원리인 일자가 유출하고 생성된 세계는 완전 다른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물론 17세기 계몽주의 이후, 르네상스에서 다시 계승하여 허무주의나 애니미즘, 실존주의로 발전하기는 하지만 중세시대에는 신플라톤주의로 인해서 이러한 헬레니즘적 창조의 이해보다는 그리스도교의 창조신학이 민중들 사이에 자리잡았다. 


위-디오니소스의 초상화


위-디오니시우스는 이러한 구분이 이미 끝난 5세기 이후부터 활동했기 때문에 창조에 대한 정리에서도 '무로부터의 창조'를 받아들이며 사물에서 영혼으로, 영혼에서 지성으로, 지성에서 일자로 회귀하는 변증법을 사용한다.  '빛'의 메타포를 사용하여 신적계시 revelation에 의한 상향운동으로 일자인 신에게까지 다다를 수 있음을 정리한다. 이른바 관상적 상승 contemplative ascent의 경로를 해명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유출된 존재들이 방향을 돌려서 다시 상승해야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종의 비약이라고 생각했고 이러한 위-디오니시우스의 사상을 신비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주적인 존재론으로는 일자에서 유출된 지성이 영혼을, 영혼이 사물을 만들어낸다고 정리하면 되지만 그 이후에 사물이 다시 일자를 향해서 올라가는 과정은 빛을 비춤으로써 상승한다라고 하는 신비주의적 인식론 mystical epistemology으로 정리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위-디오니시우스의 신비주의적 존재론은 이후 토마스아퀴나스나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에까지 이어져 유출과 회귀의 순환적 구조를 도출하는 흐름을 만들어 낸다. 유출과 대비되는 상향적 회귀의 흐름을 만들어낸 것이다. 일자로부터 창조의 에너지가 하량적 유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위로 올라가는 상향적 회귀의 과정이 존재한다고 믿게 된 것이다. 신학적으로 보면 하나님으로 부터 만들어진 지성과 영혼이 만물 속에 가득히 머물 뿐 아니라 다시 하나님을 향해서 영혼이 충 만해지고 다시 지성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위-디오니시우스는 자신의 저서 '천상의 위계'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의 모든 비추임은 예비된 존재들을 향하여 다채롭게 흘러나오지만,
그럼에도 그 자체 안에 단순하게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비추임 받는 자들을
하나로 연합시킨다_천상의 위계 I, 120A



여기서 '비추임'은 영어로 enlightenment인데, 중세가 저물고 새롭게 시작된 17세기의 계몽주의를 표현하는 영어 단어도 같은 맥락임을 확인할 수 있다. 지성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일자인 신의 자리를 지우고 나면 인간의 영혼이 최고로 다다를 수 있는 지적은 지성이다. 따라서 지성을 깨닫는 영혼은 '비추임'을 받은 것이고 이것은 미몽에서 깨어난 계몽이 되는 것이다. 위-디오니시우스의 신비사상은 아래 그림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일자는 성상위 하나님으로 지성은 관념들을 가지고 있는 천사들로 영혼은 상징들이 모여서 만든 인간의 존재가 된다. 그러면 인간 아래 있는 피조세계의 만물은 그 자체로 영혼도, 지성도, 하나님도 머물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인간은 상징들 속에서 프시케인 영혼을 발견하고 다시 천사들의 도움에 의해서 관념들을 이해하고 깨달을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들이 쌓이면서 결국 영원한 일자인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향적 긍정의 길이 유출의 길이라면 상향적 부정의 길은 깨달음의 '빛'이 가득한 길인 것이다. 




0. 나오기


플로티누스에게서 시작한 신플라톤주의는 위-디오니시우스에게까지 오면서 다양한 변곡점을 겪고 또 구조화된다. 단순한 유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자로 회귀하는 과정에서 중세의 가을이 보이기도 한다. 인간이 결국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또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인간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부활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생겨나는 것이다. 단순한 길만 생긴게 아니라 그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도 생긴것이다. 최근 한국 교회에서는 '관상기도'라고 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하고, 오순절운동에서 더 나아간 신사도운동은 신적 계시에 의해서 예언도하고 방언도 하고 치유하는 은사를 발휘하기도 하는데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린다고 한다. 이러한 사상은 결국 신플라톤주의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신이 세상에 내려오기도 하고 우리가 올라가기도 한다는 것은 신플라톤주의 이전에는 생각해볼 수도 없었던 것이었다. 


신플라톤주의를 만든 사람들


플로티누스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지나서 위-디오니시우스까지 만만치 않은 생각의 흐름을 들려다 보았다. 현대의 철학은 어쨌든 중세를 이해하고 긍정하는 길로 가던지 아니면 니체와 같이 반대하고 새로운 '초인'으로 인간을 강조하던지 둘 중에 하나가 되었다. 심지어 무신론도 신플라톤주의에서 보자면 '일자'인 하나님을 못보는 인간들에게 '비추임'이 필요한 상태라고도 해석될 수 있다. 플라톤이 그 당시 암흑기의 정치와 도덕을 부활시키기 위해서 이데아와 철인통치를 이야기한 것처럼, 신플라톤주의는 로마시대의 혼란스러운 정치와 타락한 도덕을 회복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천상의 하나님을 땅으로 끌어내리고 다시 인간이 그 하나님과 함께 천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지금은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던 것들이 이러한 역사적 경로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책소개


중세철학의 주요 철학자와 핵심개념을 한 권으로 만나다!
국내 연구진들이 처음으로 소개하는 체계적인 중세철학 입문서

흔히 서양 중세를 ‘암흑의 시대’ 또는 지성적 ‘불모’의 시대라고 말한다. 교회의 권위가 이성을 억압하고 모든 학문이 신학에 매몰되면서 정신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발전하지 못한 시대라는 편견으로 인해 서양철학사에서 중세철학은 상대적으로 도외시된 측면이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고대철학에서 데카르트의 근대철학으로 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중세철학을 배제하는 광경이 낯설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중세에도 세계와 삶에 대해 사유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철학이 있었다. 그럼에도 중세철학를 이해할 만한 국내 연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고대의 사유가 왜 중세라는 종교의 시대로 전환했는지, 그리고 왜 근대라는 또 다른 시대로 나아가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 책은 그동안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고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중세철학의 주요 사유들을 알기 쉽게 소개하는 체계적인 입문서이다. 플로티노스, 아우구스티누스부터 토마스 아퀴나스, 오컴, 쿠자누스에 이르는 14명의 주요 중세철학자들의 핵심 개념을 강연 형식으로 알기 쉽게 풀어써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 특히 필자들은 어렵고 심도 있는 사유를 단순히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들의 철학적 사유에서 삶의 지침이 될 만한 것들을 뽑아내 당면한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쓰임’을 주고자 했다. 지금 여기에서 중세철학을 읽는 이유는 단순히 종교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기술문명으로 황폐화된 인간성을 회복하고 도래하는 AI 시대에 인간 사유의 한계와 방향성을 찾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물질과 과학문명으로 점철된 시대에 중세의 사유는 잊혀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요청되고 숙고해야 한다고 말한다. 중세철학에 관한 국내외 입문서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시각으로 중세철학을 재해석하고 소개하는 이 책은, 중세철학에 관한 교양서에 목말라 있던 국내 독자들에게 든든하고 충실한 입문서가 되어줄 것이다.



목차


머리말: 중세를 다시 읽다
중세로 안내하는 플로티노스?박남희
플로티노스, 그는 누구인가
플로티노스 사상의 특징은 무엇인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인가 지배 이데올로기인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설명하고자 했던 철학자?김장생
여행자로서의 아우구스티누스
존재의 법칙
인간과 자유의지
전능하고 선한 신과 악한 인간

최후의 로마인, 최초의 스콜라철학자 보에티우스?이세운
보에티우스의 사상적 배경
추방과 구금의 삶
보에티우스의 작품과 4학
《철학의 위안》, 인간과 행복한 삶을 묻다
《철학의 위안》, 르네상스에까지 영향을 미치다

위-디오니시우스, 그리스도교 신비사상과 융합된 신플라톤주의 철학?서종원
신학의 가면인가? 철학의 옷인가?
신플라톤주의와 그리스도교 신학
디오니시우스 신비사상의 구조
하향적 긍정의 길
상향적 부정의 길
긍정과 부정을 넘어 찬란한 어둠 속으로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서양 중세기에 녹여내다?김영철
서양 중세기에 철학을 열다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서양 중세기에 녹여내다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그리스도교 신앙에 접목하다
피조물의 반란, 창조주이자 근원인 하느님을 인식하다
자연 인식의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다

이성과 신앙의 접점을 찾았던 아비센나?서동은
고대 그리스사상과 이슬람신학의 만남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비센나
이 세상은 우연의 산물인가 필연의 산물인가?
신의 필연성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영혼은 불멸하는가?
떠다니는 인간 논증

안셀무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박일준
이성, 혼탁한 시대를 풀어가는 능력: 안셀무스의 생애와 서임권 투쟁
오직 이성으로만!: 이성의 시대로서 중세의 주창자 안셀무스
무한을 합리화하다: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이성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아베로에스, 서양 중세사상과 근대사상의 선구자?이부현
이슬람세계에 유입된 그리스문화: 신앙이 이성을 만나다
아베로에스, 철학은 신앙과 일치한다고 주장하다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 아베로에스, 서양 세계에 지성 개념을 전달하다
그 밖의 아베로에스 주요 사상은 무엇인가?

유대철학의 거인, 모세스 마이모니데스?최중화
마이모니데스와 아랍제국 시대
《미슈네 토라》 그리고 철학을 공부할 시간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아리스토텔레스주의+유대교 신앙
마이모니데스의 신 존재 증명
능동지성을 통한 예언과 계시에 대해
마이모니데스가 바라본 토라 공부=삶의 목적이 아닌 철학적 진리에 이르게 하는 도구
철학적으로 바라보는 유대교
마이모니데스가 미친 영향

토마스 아퀴나스, 실재론과 종합의 정신?이명곤
시대의 요청과 종합의 정신
존재에 대한 추구
유기체적 생명과 통합적 인간관
사랑의 윤리학과 인격의 완성
토미즘의 실재론적 영성

처음 읽는 철학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이상섭
신비주의자 또는 스콜라철학자?
철학과 신학, 신앙과 이성의 조화
신비적 합일과 행복론
유비와 일의성
영혼의 근저
초탈
영혼 안에서 신의 탄생

존 둔스 스코투스, 스콜라철학의 칸트?한상연
둔스 스코투스, 존재의 의미를 묻다
존재의 일의성 물음이 필요한 이유
존재를 존재로서 묻기
존재의 의미
형상적 구분과 양태적 구분

윌리엄 오컴의 근대로의 길, 논리와 경험 그리고 유명론?이경희
새로운 길, 근대로의 길via moderna
천재적인 능력의 소유자의 비극적인 삶
오컴 철학의 일반적 배경
논리와 언어
학문관과 지식론
형이상학과 존재론
인간과 도덕
오컴, 근대로의 길을 마련하다

유한과 무한 사이의 인간 정신, 니콜라우스 쿠자누스?김형수
중세에서 근세로 가는 길, 르네상스 시대의 탁월한 인물
존재의 철학에서 정신의 철학으로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아는 무지
모순과 대립이 하나로 합치됨
무한한 신비를 향해 있는 인간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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