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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Sep 12. 2016

불안과 죽음

철학아카데미_조광제 선생님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해결하기 힘든 문제는 죽음이다


그리고 죽음이 만들어낸 불안을

해결해 보고자 역사는 지난한 여정을 시작했다


자신의 죽음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집단적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었고


국가의 죽음으로 개인의 죽음을 대신하려는

시도들도 엿보게 된다


존재의 근원에 존재하는 생명을

무로 바꾸어 놓으면, 인생은 결국 무로 돌아가는 여정이 된다


그러한 무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불안이 있으랴

그저 받아들이는 것밖에는, 그리고 현재를 최대한 누리는 것 밖에는


현재에 쏟아지는 과거와 미래의 의미들의

다발이 하이데거를 묶고 있다


현존재와 무 사이에서

인생은 어떻게 갈피를 잡을 것인가


고민과 고민

현상학과 후설, 그리고 레비나스까지 이어지는 여정


하이데거

들길의 사상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들어가기

하이데거는 1889-1976년까지 살면서 데카르트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인식론을 넘어서고자 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는 존재론자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칸트의 핵심비판은 가상으로서의 형이상학이었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이러한 형이상학적 주체는 데카르트에 의해서 vorstelung이라는 뜻으로 형이상학을 구분했다. vor는 앞이라는 접두어이고, stelung은 서있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다시 감각의 real함과 개념 그리고 이념의 ideal로 나눈다.

당연히 개념'concept은 감각으로 가는 real과 이념으로 가는 ideal로 나뉜다.

표상의 주체, 즉 생각하는 자아는 데카르트에 와서 의식'으로 규정된다. 다시 말하면, 주체는 의식이 와야만 성립하는 개념이 되었다.

18세기에 미쉘푸코는 이러한 주체앞에 서 있는 의식의 시기를 고전주의 시기라고 말했다.

19세기는 세분화가 일어나는데, 인식이 강화되기도 하고 약화되기도하는 여러 갈래의 사상들이 나온다. 요나스의 생명'의 개념은 인식론이나 존재론으로 아우를 수 있는 개념은 아니었다.

내포와 외면은 반비례한다.

인간은 외연은 1인데 내포는 무한이다. 외연은 하나로 정해지는 개체이지만, 그 개체가 가지고 있는 내포하는 속성은 무한이다. 모든 의미들이 수만가지 방법으로 생겨날 수 있다.

하이데거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라고 할 수 있고, 야스퍼스와 가브리엘 마르셀은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으로 굳세게 힘을 발휘하던 존재 물음을 깊은 망각 속에 빠뜨렸다는 진단에서 출발하는 책이 바로 존재와 시간'이다.

존재와 시간은 Sein Und Zeit1927년에 발표되었고 그의 나이 37세의 일이었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의 해명'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존재 개념은 오히려 가장 불투명하다'라는 유명한 문구가 나온다. 후설의 명증성과 비교해 보면 존재는 불투명하다고 하는 하이데거는 후설을 반박한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철학사에서 가장 먼저 제시한 '존재론적 차이', 즉 존재Sein와 존재자Seiendes의 차리를 생각하게 만든다.

존재는 모든 존재자들을 넘어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존재자에 대한 모든 가능한 규정성을 넘어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개념은 외연과 내포로 이루어진다. 외연은 개념이 적용되는 대상들이라고 한다면, 내포는 속성들이다.

존재자는 존재에 대한 기호다'라고 하이데거가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존재는 일체의 인식을 넘어서 있다.


존재자, 존재

신, 인간, 사물'이 존재자의 일반적인 포함관계이다.

존재자는 어찌 되었든지 존재한다.

ontologische와 ontische는 다르다. 전자는 존재론적'이라는 뜻이고, 후자는 존재적'이라고 할수 있다. 존재적은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방식이라고 한다면, 존재론적은 이러한 사물들, 존재들의 관계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사물이 사물과 맺는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바로 존재론적인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존재자는 우리가 인식해서 기호로써 표기할 수 있는 데 반해, 존재는 인식을 할 수도 없고 기호로써 표기할 수도 없다는 이야기이다.


서술어, 존재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와 속성으로 존재를 파악했다.

속성은 규정에 의해서 드러난다. 규정한다라는 말은 송성을 부가한다는 뜻이다.atribution라는 의미에서 determin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반문, 기호

그러나 하이데가가 이야기하는 존재'는 기호로 표현할 수 없다고 했지만, 이미 텍스트로 기호'라고 하는 것으로 표상된 것은 아닌가?

이에 대해서 하이데거는 존재는 지성적이고 과학적인 인식의 대상이아니라 이해될 뿐이라고 말한다.

이해는 인간의 삶에 이미 파고 들어와 있는 근본적이고 전체적인 조건이다.


현존재, 인간

하이데거는 인간이라는 존재자는 존재론적으로 다른 존재자들에 비해 탁월하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물음을 던지는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존재자,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물음을 던지는 존재자를 현존재Dasein이라고 한다.

하이데거에게서 이해'는 인간의 존재 즉 현존재의 존재를 전반적으로 떨어 울리는 어떤 힘과 같은 것이다.

그 울림으로서의 힘은 현존재인 인간이 거기 어딘가에 드러나 있다는 기분을 불러 일으킨다.

현존재가 스스로의 고유한 존재를 예감케 되고 자신의 존재가 어디에 걸려 있는지가를 예감케 하는 그런 느낌이다.


이해, 현존재

하이데거에게서 이해는 인간이 바로 자신의 존재를 기획해서 형성해 갈수 있는 근본적인 바탕이고 위력인 셈이다.

사람들은 질문하는 현존재에 의해서 자기이해를 가질 수 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의 정도에 따라서 사람들은 삶의 태도를 취한다.

인간 역시 수시로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론적인 불투명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하이데거 철학의 시발점입니다.


가다머의 해석학

기본적으로 체험하면 사람은 표현하게 되어 있고, 해석하면 이해된다'라는 가정을 가지고 간다.

그 다음은 리쾨르로 넘어간다.


본문, 텍스트

'존재와 존재구조Seinsstruktur는 모든 존재자를 넘어서 있으며, 한 존재자가 가지는 바 존재하는 모든 가능한 규정성을 넘어서 있다. 존재는 단적으로 초월이다. Sein ist das transcendens schlechthin

'다중적인 의미로 지시들이 발견될 수 있는 그러한 도구의 하나를 존재론적으로 분석해 보기로 한다. 그러한 도구를 우리는 기호에서 발견한다. '무엇에 대한 기호임은 그 자체 하나의 보편적인 연관의 양식으로 형식화할 수 있어서, 기호구조 자체가 모든 존재자 일반의 성격규정을 위한 존재론적인 실마리를 주고 있다.

'이해는 항상 울려퍼진다. 이해를 근본적인 실존범주로 해석할 때, 이 현상은 현존재의 근본 양식으로서 파악되다.

'이해는 현존재 자신의 고유한 존재가능의 실존론적 존재이다. 더욱이 이 존재는 그 자신에 있어서, 그 자신과 함께하는존재의 소이를 연다.  


현존재의 존재, 세계-내-존재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이 세계를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자신이 세계-내-존재In-der-Welt-Sein'이라는 것을 안다.

현존재의 존재규정들이 이제는 선험적으로 이해된다.


현존재, 실존, 본질

하이데거는 우리 인간을 현존재라 한다고 했다. Dasein

Dasein은 Sosein과 대비된다.

Sosein은 그런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이고 Dasein은 실제로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Dasein-Existenitia-hyle(질료) vs. Sosein-Essentia-Eidos(형상)

하이데거는 기존에 있던 개념설명을 자신의 방법으로 변화시켜버렸다. 그래서 많은 문제들이 만들어졌지만, 어찌되었든 자신은 자신의 설명체계를 만들었다.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실존은 바로 단적으로 거기에 있다는 현존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시간의 개념을 빼 놓고 현존을 이야기할 수 없다.


실존, 본질

현존재의 본질은 그의 실존에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현존재는 본질보다 실존이 앞선다고 한다.

샤르트르에게 전수되어 그 유명한 현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표현으로 정식화된다.

간단히 말하면, 인간 존재가 본래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없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존재를 기획해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기획과 선택이 각자 자기 스스로에게 성립하면, 본래성을 확보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자기 외의 다른 존재자들에 의거해서 성립하면 비본래성으로 추락한다고 한다.

실존철학이란 자기 자신이 자기존재를 기획해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철학이다.

현존재는 자기 자신에 입각해서 자신의 존재를 기획하고 선택하여 확보함으로써 본래적인 현존재가 될 수도 있고, 그 반대로 자기가 아닌 다른 존재자들에 입각해서 자신의 존재를 방기함으로써 비본래적인 현존재가 될수도 있다.

우리의 삶 속에 이미 바탕을 이루고 있는 근본조건이 바로 이해라는 것이다. 존재가 이해된다고 할 때, 그 이해의 방식은 존재가 무엇인가를 명백하게 알겠다라고 하는게 아니라, '존재가 가장 불투명하다는 것을 삶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라는 것이다.


현존재의 존재, 염려

불안이라는 기분이 낯선 두려움'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결국 섬뜩함까지 간다.

염려를 통해서 존재의 열림이 드러난다고 했다. 실존을 통해서 현존재는 존재로 드러난다. 존재한다는 존재론에서 시작해서 존재자들과 맺고 있는 실존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이 증명된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존재에 대한 실존론을 일반 존재론에 대한 기초 존재론이라고 한다.


불안, 세가지 근본범주

상황에 처해 있음 / 이해 / 빠져있음'이 바로 존재가 가지고 있는 불안의 세가지 범주이다

'현존재는 자기 자신 앞에 가져와지고 자신의 내던져져 있음 속에서 자신에게 열리다.'

불투명-불안-이해=실존'의 구도로 존재에게 남은 것은 불투명함을 인식한 불안의 존재가 실존해야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시간'이다.


신, 인간

전통적으로 신'은 존재와 본질이 일치한다고 말한다. 이미 존재하는 것과 지금 존재하는 것이 일치하는 것이다. 어제도 계시며 이제도 계시도 내일도 계시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완전체entelekeia로써 신학철학을 완성하고 이러한 존재는 신'과 이성'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무, 하이데거

무는 존재자에 대한 막연한 대립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에 속하여 있는 것으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존재 자신이 본질적으로 유한하며 또 무 안으로 진입되어 있는현존재의 초월 속에서만 자신을 드러내는 까닭이다.

존재자는 현존재이기 때문에 유한한게 맞다.

그러나 서양철학은 존재자는 현실에서 유한하지만 , 근본인 존재'는 유한하지 않다고 생각했다.(형이상학)

이것은 기존 서양철학이 가지고 있던 본질'의 무한성을 유한성으로 제한해 버린 결과이다.

무'라는 개념을 가지고 오면, 존재이든 존재자이든 유한성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을 무화작용이라고 한다.

존재자가 유한하다는 것은 존재자간의 외적인 관계에서 그러한 것이지만, 존재가 유한하다는 것은 무와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존재, 죽음

현존재-무/현존재-죽음'을 고려해야 한다.

현존재의 종말인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무연한, 어떤 그리고 그거한 무규정적인, 도저히 능가할 수 없는 가능성이다.

죽음은 현존재의 종말로서, 자신의 종말을 향한 현존재의 존재에서 존립한다.

본래적인 죽음으로의 존재는 현존재의 실존적인 가능성을 의미한다.

죽음은 존재자의 존재 속에서 존재자를 무화하는 무로 확장된다.

죽음은 나중에 다가올 순간적인 사건이 아니라, 현존재를 바탕에서 부터 근거 짓고 있는 여옥적인 사건인 셈이다.


결론

하이데거 철학의 시작은 불안이라고 하는 근본 기분이다. 이는 우리 인간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근거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하이데거에게 존재의 심연은 아무것도 없는 무'라고 할 수 있다.

평균성을 띤 현존재'인 인간은 불안을 도피해서 떠나고 싶어하는 존재이다.

'그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말 그대로 그들이라기보다 내 자신 속의 그들입니다. 내가 불안으로부터, 무근거로 부터, 무로부터, 죽음으로부터, 그 섬뜩한 불투명함과 나첨으로부터 도피한다고 할 때, 도피하고자 내가 실현될 곳은 일상적인 평균성을 띤 타인들과의 무차별한 관계 속입니다. 그럴 때, 그들인 나'가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한이데거는 이와같은 현존재의 존재방식을 비본래적이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이 아닌 비본래적 실존의 방식의 결과는 잡담, 호기심, 공공적인 애매함이라고 한다. 그럴 때 나는 존재자에게 둘러져 있다라고 한다.

하이데거 철학의 원동력은 나의 존재가 본래 근거가없는 절대적인 우연성에 입각한 것임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무인 존재가 열리는 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민네이션, 생각

존재하는 것들은 외연을 통해서 내포를 담고 있다. 어떤 것을 개념으로 갖는다는 것은 하나의 외연에 여러개의 내포를 어떻게 연결하는가에 달려 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 입장에서 보면, 신은 없고 모든 것은 나로 부터 시작한다. 일단 내가 있다. 그리고 내가 있는 곳에서부터 관계적 물음인 존재론적 고민을 하게 되고, 개념상 이해'를 통해서 그리고 존재자를 통해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다자인' 현존재는 바로 거기에 그 상황에 그 현상에 던저진 존재이면서도 끊임없이 고민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상황에 던져진 현존재는 그 상황에서는 그게 존재의 전부'인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 상화에 들어 있는 것 자체로 현존재는 존재가 규정된다.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현존재는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이데아와 칸트가 이야기하는 선험적인 것과 어떻게 다른가?

하이데거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완전히 사물과 다르다. 인간은 본질이 정해지지 않았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자신이 만들어갈 수도 있고, 비본래적으로 남이 만든 방식으로 형성되어갈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에게 자기형성적인 본래적 인간의 실존은 시간에 의해서 주어지는 역사 가운데, 세계 가운데서 Dasein으로 나타난다는 것인가?

지향성의 측면에서 의식의 지향성을 말한 훗설을 이어서, 하이데거는 존재의 지향성(본래적/비본래적)을 이야기 했고, 레비나스는 윤리의 지향성(자아-유한/타자-무한)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것을 꿰뚫는 해김은 이미 인간에게 주어진 것들 시간과 이성이다.

이전까지는 본질이 현존을 앞선다라고 생각했지만, 하이데거는 이것을 뒤집어서 현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내게 주어진 현존이 본질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했다. 이전까지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구조자체를 완전히 뒤바꾸어 버린 것이다.

하이데거에게서 '시간'개념은 그래서 현존재가 시간'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개념이 된다.

생각해보면, 하이데거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생각을 계속 이어갈 때 니체를 딛고 능동성과 수동성을 동시에 걸어가본 결과 나타나는 결과가 아닐까?

왜 하이데거는 나치의 전위철학자가 되었는가? 하이데거에게 주어진 현존재는 나치가 만들어 놓은 본래적 민족, 아리안들이 되는게 중요했었나?

하이데거가 생각하기에 불안'이라는 개념은 원래는 인간의 완전성과 안전성을 흔드는 개념인데, 오히려 이러한 불안이 인간의 실존을 증명해준다고 보는 것이다.

하이데거를 구제비평하여, 내 삶에 대입하고 해결할 수 있는 물음들이 있을까?

무라는 개념, 불안, 불투명성의 개념은 원래 소크라테스가 던졌던 인간 본연의 고민이 아닐까? 물론 서양철학은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하는방식으로 플라톤 철학을 발전시켰지만 말이다.

다시 여기서 베버의 종교사회학이 나올 떄가 되었다. 이러한 불안과 무로 인해서 인간은 자신의 인생을 의지의 표상으로 생각하거나, 자연의일부로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가 사회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에 따라서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생각의 방식이 달라진다.   

사멸성을 바탕으로 현존재를 규정하면 불투명성과 함께 무라는 가치의 평준화가 스스로를 실존하게 만드는 의지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탄생성을 중심으로 현존재를 규정하면 인간의 본질적인 조건은 노동으로 시작해서 작업과 행위로 점철된다. 아렌트는 자신의 나이많은 남자친구였던, 하이데거를 정면으로 반대하면서 탄생, 생명으로 부터 실존을 다시 정의한다.

 그리고 아렌트는 곧 이어, 시간의 개념으로 하이데거가 무의 개념으로 가져간 부분에서 부터 과거와 미래개념으로 되살려내고, 그것들을 변화시키는 현존재'Dasein를 현재를 변화시켜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게 만드는 존재beginner로 만든다.

그래서 인생은 끊임없는 시작이다.

비슷한 방식이지만, 레비나스는 다른방식으로 하이데거를 넘어선다.

하이데거가 생각하는 존재'를 규정하는 방식으로서의 이성을 과감하게 버리고, 이성이 아닌 감각'(이것은 하이데거가 사용한 타자 앞에 불안한 존재자가 아니라)으로 무한의 얼굴, 타자의 얼굴을 본다. 무'가 아니라 무한이다.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살아난다.

존재는 하이데거를 통해서 무로 귀결되었다면, 레비나스를 통해서 무한의 개념으로 살아난다. 타자가 살아나고, 내가 살아난다.

그것은 결핍이라는 죽음의 근본이 아니라, 충만이라는 생명의 무한으로 향한다. 지향성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진다.

하이데거의 지향성은 죽음인데, 아렌트는 생명이었고, 레비나스의 지향성은 타자의 얼굴 안에서 만나는 무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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