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랑시에르 '불화'_진태원 교수
자크랑시에르의 철학은 애매하다
애매하다는 것은 깊이의 경계가 다르다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어디까지
어느 깊이까지 생각을 짚어보는 걸까
목소리 없는 이들
몫없는 자들의 몫을 찾기 위해서는
국가에서부터 사회의 조목조목
구조와 연결되는 모든것을 바꾸어야 한다
아르케정치라고하는
진리를 정초하는 것에서
유사정치를 지나서
메타정치까지를 지나야만
랑시에르의 기획이 읽힌다
그래서 고민이다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
들어가기
정치철학은 철학의 한 분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철학이 정치의 역설 내지 스캔들과 마주친 것에 대한 이름이다. 정치에는 토대인 아르케arkhe가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정치는 부분들에 대한 모든 샘을 흐트러뜨리는 공동체의 한 부분의 공허한 자유 속에서 아무나와 아무나의 평등의 실현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정치의 비정치적 조건인 평등은 여기서 그 자체로 현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잘못의 모습을 띤 가운데서만 출현한다. 정치는 항상 자유 속으로 평등이 굴절되는 것을 통해 비틀어진다. 정치는 결코 순수하지 않으며 결코 공동체 및 법의 고유한 본질 위에서 정초되지 않는다. '정치는 평등과 법의 결합에 의해 아테네의 이소노미아isonomia의 경우가 이에 해당되는데, 이것은 단순히 법이 모두에 대해서 평등하다는 사실을 뜻하는게 아니다. 법의 의미는 평등을 표상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전체와 동일한 부분의 출현에 의해 공동체와 법의 지위가 변화될 때에만 존재하게 된다. p109~110
정치 토대, 정치철학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 도시 국가의 사람들과 자신의 차이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구호가 바로 이런 것이다. 진정으로 정치를 하라. 정치의 고유한 본질을 실현하는 것으로 정치를 하라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아르케를 정치에 토대로 삼아서 정치하라라고 이야기했다. 정치의 고유한 본질을 실현하는 것으로서 정치를 하라. 이러한 구호는 사실 확인과 진단을 가정한다.
사실, 확인
민주주의라는 형태 아래 정치는 자신의 원리내지 아르케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정치를 그것에 고유한 원리의 현실화로서 탄생하게 해줄 좋은 출발을 기다릴 필요 없이, 이미 거기에 존재한다. 데모스는 자신의 세가지 특성과 함께 이미 거기에 존재한다. 첫째는 인민이라는 이름을 위한 외양(출현)영역의 구성이다. 둘째는 전체적이면서 동시에 부분인 이 인민에 대한 불균등한unequal 셈calculate이다. 다른 부분이 가하는 잘못의 이름 자체를 들어 공동체 전체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역설적이다.인식론적으로 확인하는게 아니라, 인민에게 인정받으면 되는 것였다.
진단,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선행성은 민주주의의 순전한 사실성, 작위성이 된다. 아르케가 없기 때문이다. 좋은과 나쁨, 쾌감과 고통의 경험적 순환이라는 유일하는 규칙에 의해 규제된다.유일한 무규제성, 유일한 불평등성을 전제한다. 민주주의는 정의와 관련되는 한 계쟁의 극작술만을 제시할 뿐이다. 계쟁의 형식들 속에서 곤경에 빠진 정의 및 불평드으이 산술적 셈 속에서 무력해진 평등을 제시하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정치에 그것에 고유한 척도를 제시하지 못한다.
정치철학, 기회
정치철학을 창성하는 담론을 규정하는 원리는 다음 2가지이다.평등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정의는 잘못을 관리가 아니다. 정치는 항상, 잘못의 형상 속에서만 평등이 성립하게 만드는 간극 위헤서 작용한다. 정치는 치안 논리와 평등 논리의 마주침에서 작용하낟. 하지만 질문 전체는 어떻게 이러한 간극을 해석할 것인가에 놓여인다. 그런데 플라톤과 더불어 철학적 논쟁은 이러한 간극을 근원적 거짓의 징표로 만든다. 철학적 논쟁은 자기 자신의 원리의 실현이 아닌, 공동체 원리의 구현이 아닌 정치란 전혀 정치가 아니라고 공표한다.
불화, 정치와 정치철학
-참된 정치, 데모스의 통치
이렇게 되면 진리속의 정치 즉, 참된정치는 데모스의 통치와 대립하게 된다. 데모스의 통치에 종별적인 비틀림을,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순수 논리, 신적 모델과 소멸 가능한 모델 사이의 순수한 양자택일의 순수 놀리로 대체한다.
- 기하학적 평등, 산술적 평등
이렇게 되면 정의의 조화는 비틀린 정신을 지닌 엉터리 변호사들의 궤변으로 귀착된 잘못과 대립하게 된다. 도시국가의 영혼을 조화롭게 한느 데 적절한 코스모스의 비례로서의 기하학적 평등은 산술적 평등으로 귀착되는 민주주의적 평등에 대해, 곧 더 많은과 더 적은의 군림에 대해 대립한다. 정치의 진정한 본질을 실현해야 하며 정치철학의 기획을 시작해야 한다. 평등과 불평등 사이의 사유 불가능한 정치적 매듭과의 대면 속에서 정치철학 또는 오히려 철학자들의 정치의 기획이 정의된다. 그것은 정치의 진정한 본질을 실현하는 것인데, 민주주의는 이것의 외양만 산출할 뿐이다. 그것은 또한 민주주의적인 정치적 장치가 도시국가 공간의 핵심 자체 안에 설치한 이러한 비고유성, 곧 공동체의 자기 자신과의 이러한 거리를 제거하는 것이다. 요컨데 문제는 이러한 자기 자신과의 차이-정치는 여기에서 성립하는데-를 제거함으로써 정치의 본질을 실현하는 것이며, 정치를 제거함으로써, 정치의 '자리에서, 정치를 대신하여' 철학을 실현함으로써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 정치, 치안의 동일시
정치의 실현 속에서 정치를 제거하는 것은, 잘못 속에서 비틀린 평등 자리에 자신의 본성과 결부되어 있는 공동체와 좋은의 진정한 관념을 위치시키는 것은 우선 정치와 치안의 차이를 제거하는 것이다. 철학자들의 정치의 원리는 활동으로서의 정치의 원리를, 개인들 및 부분들의 몫을 정의하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 대한 규정으로서의 치안의 원리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폴리테이아, 개념
정체의 원리로서 폴리테이아 대 순환하는 나쁜 정체들의 형태로서 폴리테이아이를 구별해보자. 한편으로 폴리테이아가 존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폴리테이아이가 존재한다. 폴리테이아는 공동체의 일자가 잘못의 조합의 다자와 대립하듯이 폴리테이아이에 대립한다.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주의마저도 폴리테이아를 공동체의 졶은 상태로 이해하며, 민주주의는 이것의 일탈된 형태로 간주한다. 오늘날 좋은 공화국을 의심스러운 민주주의에 대립시키는 이들은 다소간 의식적으로 이러한 최초의 분리를 계승하고 있는 이들이다.
폴리테이아, 의미
폴리테이아는 사회의 부분들의 모든 활동 속에서 공동체의 원리와 목적이 표현되는 동일자의 정체로서 기능하는 공동체이다. 폴리테이아는 무엇보다도 한의 정체, 하나의 삶의 양식, 하나의 정치 양식으로서, 그러한 양식에 따라 폴리테이아는 자신의 법의 의해 규정되고 자신의 리듬에 따라 숨을 쉬고, 각각의 부분에게 그것에 고유한 기능과 좋음을 지정해주는 생명원리를 불어넣어주는, 하나의 유기체적 생명체로 살아가게 된다. 플라톤이 개념을 고안해낸 폴리테이아는 그 삶의 모든 발현 속에서 자기 자신의 내면성 원리를 실현하는 공동체이다.그것은 더 이상 잘못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간단히 말한다면 철학자들의 폴리테이아는 정치와 치안의 동일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p113~114
정치, 치안
정치와 치안을 동일시하기 : 철학자들의 정치는 정치와 치안을 동일시하다. 그것은 정치를 몫들과 기능들로 분배되는 일자의 정체로 만든다. 그것은 공동체의 법을 살아 있는 신체의 생활 방식 및 호흡 원리와 동화함으로써 공동체의 신체화한다. 공화국은 먼 옛날 사람들의 미덕의 복원이 아니다. 공화국은 민주주의가 철학에 대해 촉발한 논리적 문제, 몫 없는 이들의 몫이라는 역설에 대한 해결책이다. 치안을 정치와 동일시하기 : 정치와 치안을 동일시하는 것은 또한 치안을 정치와 동일시하는 것, 정치의 모방물을 구성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선의 이데아를 모방하기 위해 폴리테이아는 그것의 모방물이 대체해야 하는 나쁜 정치를 오히려 모방하게 되는 셈이다. 정치철학들은 몫없는 이들의 몫이라는 역설에 대해, 그러한 역설을 등가 기능으로 대체하든 아니면 정치를 부정하면서도 정치를 모방하여 그러한 역설의 모의물을 창조해내든 간에, 그 역설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 철학자들이다.
정치철학, 세가지 형상
아르케 정치archi-politique는 플라톤이 추구하는 정치이다. 유사 정치para-politique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홉스가 추구하는 정치이다.메타 정치meta-politique는 마르크스 정치라고 할 수 있다.
유사정치, 아리스토텔레스
좋은 정체는 과두귀족들에게는 과두정처럼 보이고, 데모스에게는 민주정처럼 보이게 만드는 정체다. 그리하여 부자들의 당파와 가난한 이들의 당파는 동일한 정치를 시랭하게 될 것인데, 이러한 정치는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이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중간계급이 수행하리라고 가정된 발견 불가능한 정치다.
진태원 선생님, 강의
결국 랑시에르는 데모스들의 토대없는 정치가 아니라 철학자들의 아르케가 있는 정치철학을 설명한다. 정치에도 평등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잘못의 모습'이라는 것으로만 존재한다. 잘못할 때만 평등이 일어난다. 이소노미아라는 단어로 평등과 법의 결합을 표현한다. 잘못은 이중적인 것이다. 잘못은 플라톤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관점에서는 데모크라시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주체화란 정체성을 부여하는 identification과 간극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정치철학의 기획이라는 토대가 없는 기존의 정치철학에 아르케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아르케 정치로써 폴리테이아를 만들어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치안을 정치화시키는 유사정치를 만들어 낸다. 아르케정치에서 소프로쥐네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순응적인 정체성을 지닌 존재라면, 랑시에르가 말하는 폴리프로그마쥐네는 자유로운 시민으로서 자신의 업무 외에도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아르케정치에서 플라톤은 정해진 계급이 다스리는 것이 좋다고 했던 반면에 유사정치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스리거나 다스림을 받거나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평등의 논리가 된다. 정치는 아르케가 없는 것이고, 철학은 아르케를 추구하는 것인데, 정치철학이라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이것을 연결하는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순을 결합한 것이다. 이것에 대한 평가는 어떤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유사정치에서는 권력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정치의 종별성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권력을 분배하고 그것을 누군가가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냈다. 그러힉 때문에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갈등이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권력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민네이션, 생각
아르케는 본질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모든 것들은 아르케가 있다. 정치는 아르케가 없는데서 시작하기 때문에 기존 정치는 부재한 것들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러난 논의에서 결론으로 철학자들에 의한 정치가 다르게 읽혀진다. 정치철학에서는 마이클왈저의 'thinking politically'에서 비슷한 논의를 들어볼 수 있다. 칼포퍼가 이야기하는 정치의 문제는 플라톤 철학이었는데, 그렇다면 왈저도 랑시에르도 같은 계열인가? 그렇다면 대립각이 나올 수 밖에 없다. 랑시에르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면, 현실정치는 정말 아르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데모스들이 다스리는 것이 매우 불합리하게 보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쳐도 랑시에르기 비판하는 것처럼 데모스들이 진리가 아닌 욕심에 의해서 정치를 한다고 해보자. 지금의 신자유주의 논리에 맞는 현대적 보수주의 형식처럼 말이다. 그럼 어떤 것이 좋은 정치 혹은 정치철학인가? 아르케를 판단하는 사람은 누구이고,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독사doxa라는 것이 진리라고할 때 포스트모던에서의 진리는 이미 해체되었는데 그럼 복고풍으로 돌아가야 하는가?그럼 남은 건 결국 정의'의 문제인데 마이클 샌델이 맞았는가? 방법론에 있어서는 샌델의 방법은 데모스의 정치가 아닌가? 더 들어가보면 랑시에르는 자유주의 전통, 칸트의 전통에 있는 것인가? 절차적인 방식보다는 플라톤의 인식론적 방법으로서의 엘리트주의에 더 가까워 보인다. 아무튼,이런 고민을 하더라도 말이다. 시스템 자체를 움직이는 데는 실재로 부지런함과 지혜와 지식이 동시에 필요하지 않는가? 이 문제를 데모스에 의한 정치를 어떻게 제대로? 혹은 잘 이끌어갈 것인가? 그런데 강의를 계속 들어보니, 랑시에르는 아르케정치와 유사정치를 넘어서 결국 메타정치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메타정치를 이야기한 사람은 마르크스였다. 그렇다면 메타 정치는 무엇인가? 호모사케르에서 아감벰은 떨어져 나간 데모스를 부활시키려고 했을까? 아르케정치의 요체는 노모스와 에토스의 일치에 있다. 법이 사람을 감싸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법만 바꾸면된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국가주의 혹은 보수주의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정치를 행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아르케가 있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사정치는 권력을 만들어내고 이것이 지금의 당의 문제가 된다. 정당의 문제가 되는데, 이러한 정당의 문제는 민주정, 참주정, 귀족정과 같이 순화정체가 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정체에 대한 셋팅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민네이션, 고민
아르케정치를 배우고나니, 칼포퍼를 통해서 비판했던 플라톤의 엘리트주의를 비판하는 나 역시 아르케 정치를 표방하고 있지는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인셉션'처럼 한번 깨어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것 역시 잘 구현된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메타생각을 가진다고 했지만, 한계가 있는 방식의 메타생각이었기 때문에 갇혀진 구조 자체는 넘어서지 못하는 메타생각이 아니었을까? 한국정치는 아르케정치와 유사정치 사이의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내가 추구하고 있는 비례민주주의는 그렇다면 어떤 정체를 추구하고 있는가? 플라톤의 아르케 정치와 유사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체제가 아닐까? 철학적인 배경은 그렇고 정치적인 배경은 권력의 탄생을 지나서 권력을 분배하는 것까지 나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생명정치는 분자생물학을 통해서 유기체적 생명이 가지는 것들을 정치로 가지고 왔는데, 이것을 가지고 오는 과정에서 플라톤이 추구한 자연주의의 한 부분을 가져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다시 살려야 하나? 아니면 포기해야 하나? 사회적인 것과 생명적인 것을 구분해야 한다.
20160308_철학아카데미
진태원_자크랑시에르 '불화'
7강_아르케정치에서 메타 정치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