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쓰다 지우다 쓰다 지우다한 마음의 갈래
요즘들어 '차원'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다. 흔히 말하는 '레벨'이라고 하는 위계적인 질서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판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달려가는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레벨'은 위로 올라갈 수 있는가의 문제라면 '스펙트럼'은 옆으로 넓어질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그런데 '차원'은 같은 선상에 있지 않은 것이다. 언젠가 아인슈타인도 형질전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양이 한정적으로 차고 넘치면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고 보았다. 이것을 '사상의 지평면'이 달라진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 사람들, 이론들, 현상들, 집단들, 국가들을 본다. 근대화에 대한 욕구로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라기보다는 어떻게 저렇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이 들 만큰 완전 다른 차원에서 노는 사람들을 최근에 자주 만난다. 좋은 일이다. 나의 부족함을 깨달으면서도 또 나른해지지 않으니깐 말이다.
과학기술정책 수업을 들으면서 강의를 하시는 젊은 교수님이 있다. 아주 조용히 그리고 자근자근 학문을 하시는 스타일인데 학기가 시작될 때부터 무언가 다르다고 느꼈다. 그리고 중반이 넘어갈 수록 현상을 보고 해석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고, 결국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라는 것을 말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경제학을 기반으로 학문을 시작했지만 10년동안 컨설팅회사에서 여러 국책기관들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시간이 생길 때마다 이론과 방법론 공부를 했고 최근에도 기술가치평가 관련된 자격증을 땄다고 한다.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서 10년을 연구했는데 그 연구결과가 차원이 다르다. 모든 통계방법을 사용할 수 있지만 어떤 때에 어떤 방법이 적실성이 있는지 매의 눈으로 살피는 것을 보면서 나도 그 태도를 배우고 있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항상 물어보거나 질문을 던지는데 최근에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학문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접근방법을 제대로 안다는 거에요
어떻게 분석할지를 안다는 것은 분석하려는 대상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어떻게 접근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움직이는 것들을 관찰하려면 그 동선을 따라가야 한다. 이른바 행위자 네트워크를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움직이지 않던 것들이 갑짜기 움직이기 시작하면 어떤 충격이 가해졌는지 그리고 그 충격이 어디로 퍼졌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접근방법을 취해야 한다. 이렇게 다양한 사회현상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셀수도 없는 다양한 접근방법이 있다. 그래서 적절한 접근방법을 제때에 잘 사용하는 것이 전문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 멀었다. 방법론이 얼마나 있고, 언제 사용하는지도 모르니깐 말이다. 단순히 몇개의 회귀분석 방법과 매개분석 정도를 하는 수준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렇게 공부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차원이 다름은 단순히 방법론과 접근방법을 제대로 안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어떤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새로운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새로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새로운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단순히 사회현상을 잘 분석하기 위해서 통계방법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익혀서 무엇을 할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 하수와 고수의 차이가 있다면 바로 이런게 아닐까? 처음부터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방법은 자유롭게 시전할 수 있는 것 말이다. 그래서 다시 고민이 생긴다. 나는 왜 이렇게 새로운 분야에 발을 내딛고 아파하면서도 계속가야할까? 도대체 무엇때문에 나는 이렇게 괴로운 나날을 보내면서 이 밤의 끝을 잡고 있어야 하는가? 사람들은 쉬엄쉬엄하라고 말하고, 그러다가 단명한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비관주의적 예언자주의로 나에게 "그렇게 해서 아무것도 안 바뀐다"고 말한다. 그러니 그냥 평범하게 살라고 그것도 너의 욕심이라고 말한다.
다른 차원을 사는 사람에 대한 동경일까?
새로운 영역으로 넘어 온지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 수능 때 공부 열심히 하던 과학탐구를 다시 꺼내어 볼려니 벌써 20년 전이다. 과학은 과학이고 수학은 수학이지만 나랑은 상관없는 학문이었는데. 이제 다시 책을 펴들고 통계책을 꺼낸다. 파이썬대 손대야 하기에 하나하나 방학동안에 해야할 계획을 세운다. 이 영역에 있는 분들에게 나는 이방인이다. 까뮈도 아닌데 나는 이방인의 심경으로 조심스럽게 가장자리부터 앉아가면서 배우고 있다. 과학과 기술 그리고 정책이 한 곳에서 만나는 지점에서 나는 계속 서성이고 헤메이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공부하다가 보니깐 조금씩 동굴의 빛이 비취는 것도 같다.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고, 새로운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른바 '통섭'에 대한 희망이 생기는 것이다. 과학사를 들춰보고 기술이 사회를 어떻게 이끌어갔는지 면밀하게 돌아보고, 마치 공중에 붕 떠서 온 인류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타입랩스로 돌려보는 느낌까지 들 정도이다. 그래서 재미도 있고 힘들지만 이렇게 기록으로도 남길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폴리매스. 책 자체는 가볍지만 그 주제는 인사이트가 있었다. 폴리매스라는 책에서 얻는 인사이트는 예전에는 넓고 얇게 아는 사람과 좁고 깊게 아는 사람들을 일컬어서 제너럴리스트와 스페셜리스트로 분류했고 어느 한책을 선택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는 그런 분류가 중요하지 않다. 1만 시간의 법칙도 이제는 소용이 없다. 아주 단기간에 깊은 지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의 발달은 이전까지 쏟아부었던 시간들을 아껴주고 더 넓게 나아가도록 돕는다.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학습민첩성'이다. 어떤 분야에서 자신이 익혔던 '패턴'을 다른 분야에서 적용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빠르게 그 패턴을 적응시켜서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학습민첩성은 연습하면 가능한 영역이다. 폴리매스의 시초는 책에서는 레오나드로 다빈치로 본다. 레오나드로 다빈치는 일정한 학문의 패턴을 발견하면 그 패턴을 다른 영역에 적용해서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내고 그 패턴을 실제로 만들어 보았다.
폴리매스로 살려고 한다
그래서 그냥 폴리매스에 도전하기로 했다. 한 가지에 집중하라고 하는 사람들 말도 안 듣고, 여러가지를 가볍게 빨리빨리 처리하라는 사람들 말도 안 들을려고 한다. 그리고 더욱이 이 세상은 이대로 타락했으니 어쩔 수 없다라는 사람들의 말도 그냥 한 귀로 흘려 보내려고 한다. 그 대신에 최대한 다양한 패턴을 발견하고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할 수 있는 한 삶의 문제에서 대안을 만들어 보려고 한다. 이렇게 공부하기 위한 것은 '자유' 때문이다. 나의 자유를 이루는 것도 좋지만 아직도 삶에게 질질 끌려 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운명의 구렁텅이에서 나갈 수 없는 사람들의 자유 때문이다. 정말 사람들은 자유로울 때 '사랑'을 선태하기 때문이다. 정말 자유로우면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완전한 차원이다. 모두가 평화롭게 사는 것만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이 되어서 온전한 사랑을 해도 어려움이 없는 사회가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과학으로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이전까지는 정책으로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였고 이전에는 제도로, 그 이전에는 정치로, 그 이전에는 법으로였다. 계속해서 도전할 꺼다.
누군가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
반대로 누군가가 힘들면 나도 힘들다. 그것을 무시하고 살아가는 내내 내 마음은 썪는다.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을까? 다만 자신의 한계와 시대의 절벽 앞에서 언제 그 감성을 포기하는가에 달려 있지 않을까? 한국이라는 장소에서 2000년대를 왔다갔다하는 세대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눈이 내리는 평화로운 북유럽에 태어났다면, 여름바다 수영하기에 바쁜 이틸리아 나폴리에 태어났다면, 풍요롭게 뛰어놀기 좋은 호주에 태어났다면 아니면 부유층은 아니더라도 중산층 정도에만 태어났더라도 이런 생각을 할까? 사실 잘 모르겠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여기에 서 있는데 의미를 스스로 물어볼 때가 오지 않나? 인생이 어느덧 암흑으로 이불을 덮어버리는 시기가 오지 않나? 죽음이라는 것이 최종 관문이겠지만 살면서 힘든 시기를 지나는 이들에게는 항상 그 인생의 흑막이 덮이는 것은 아닌가?
사랑하는 인간은 자유롭고, 자유로운 인간은 사랑을 선택한다. 그럼 사람들이 더욱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과학은 어떤 일을 해야하는가? 사회를 면밀히 분석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분석의 결과를 정책으로 연결하고 정치로 연결해서 결국은 모두가 사랑해도 괜찮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게 아닐까? 차원을 넘나드는 사람과 그 사이에 막힌 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차이가 있더라. 결국 자신을 위한 목적은 한계가 온다. 공부를 해야하는 이유에도 한계가 있고, 공부를 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도 한계가 온다. 그러면 그 한계 안에서 어떤 패턴도 발견할 수 없고, 발견해도 써 먹을 곳이 없다. 지식에 저주에 걸리는 경우가 더 많아진다.
별로 없다. 이런 길을 가는 사람이. 그래서 희미한 미래의 등불이 가끔씩 비취일 때 열심히 방향을 찾아가야 한다. 이런 글을 미래에 혹여나 길을 잃어버릴 나에게 쓰는 이정표다. 혹시나 길을 잃어 버렸다면 왜 공부를 하는지, 왜 이렇게 한계에 도전하는지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이다. 거짓말같이 진실로 요즘도 내가 왜 이러고 있지라는 생각을 하다보면 이렇게 예전에 쓴 글들을 보면서 다시 방향을 잡는다. 예전에도 별로 없었고 지금도 별로 없지만 꾸준히 한발짝씩 걸어가보려고 한다. 마침 차원의 물이 열렸다. 이제는 다른 방법으로 그 차원을 걸어가야 한다. 나는 아직 배고프고 아직 배워야 할게 많다. 더 많은 이들이 환하게 웃는 날들이 반드시 올 것이다. 살아서도 안되면 죽어서라도, 몇 백년이 지나서라도 이루어질 꿈을 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