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와 이태원 사태 그리고 모든 죽음에 대하여
나의 사진 앞에서 울지 마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잠들어 있지 않아요
제발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나는 천개의 바람 천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가을엔 곡식들을 비추는 따사로운 빛이 될게요
겨울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눈이 될게요
아침엔 종달새 되어 잠든 당신을 깨워 줄게요
밤에는 어둠 속에 별 되어 당신을 지켜 줄게요
나의 사진 앞에서 있는 그대 제발 눈물을 멈춰요
나는 그곳에 있지 않아요 죽었다고 생각 말아요
나는 천개의 바람 천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나는 천개의 바람 천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천개의 바람이 되어_임형주
그리스도인이 된지도 어언 30년이 지났다. 그 동안 성경을 완독하기도 하고 방언?이라고 하는 언어도 경험해보고 환상을 보기도 하고, 성령을 체험하기도 했으며 선교로 10개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도 그런 경험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견디기 힘든 순간에도 하나님을 만난 감동과 은혜로 이겨낼 수 있었고 자존감이 바닥이 되었을 때도 미래의 희망을 기대하면서 버티고 버티었다. 신앙이라는 것이 항상 좋은 일들만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믿음의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이 더욱이 사랑으로 나를 감싸 안아 준다면 아무것도 없어도 행복하고 즐거웠다. 사는게 왜 이모양일까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하나님으로 부터 충만히 감싸는 영적인 감각으로 그래도 살아야지라는 다짐을 해 본다.
오늘 아주 차이가 많이 나지만 한동 동문의 소천 소식을 들었다.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는 소식은 언제 들어도 가슴이 무너지고 무슨 위로라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힘들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고통 속에 살다가 죽어가는 이들의 민낯을 만날 때면 나의 얼굴이 시멘트 바닥에 긁히는 것 같이 아프고 시리다. 나는 아직 살아 있지만 아직도 이스라엘에서는 생사를 가르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고, 북한에서는 수 많은 사람들이 비명횡사를 한다. 한국에서는 교통사로든 살인이든 방화든 사고든 사람들이 죽어가고 요즘들어 더욱 자주 황급히 엠뷸란스가 도로를 가로 지르는 광경을 본다.
아름다운 시간과 즐거운 사람들, 기뻐하고 가슴뛰는 사건의 이면에 누군가는 슬퍼하고 아파하고 마음을 가눌 수 없어 쓰러지는 이들의 모습을 본다. 나만 행복하면 안될 것 같은 안타까움에 숨이 막히기도 한다. 스쳐가다가 '천개의 바람이 되어 '라는 곡을 들으면 2014년 4월의 트라우마가 온통 인생을 감싸 버린다. 팽목항이 할머니댁 근처라서 몇 번을 갔었다. 단원고 학생들의 영정사진 앞에서 할 말을 없었다. 그냥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몇 분을 앉아서 마음을 추스리다가 돌아왔다. 이렇게 안까운 죽음이 있을까? 넘실대는 진도 앞바다의 물결들이 야속해 보이기도 했고 이 일을 방치하던 꾸몄던지 간에 누군가는 책임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꼭 이 일을 밝히고 유가족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달래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늘도 스치듯 이 노래를 들으면서 다짐한다. 반드시 책임을 묻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만들어야 겠다.
작년 10월 29일에는 제주도에 있었다. 대학원에서 필드트립으로 제주도를 방문했고 흥겹고 즐거운 레크레이션과 불멍으로 더 없어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웅성웅성대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이태원 참사가 터진 것이다. 앰뷸런스들이 정신없이 왔다 갔다하고 이태원 그 좁은 골목길에 끼여서 울고 있는 희생자들의 얼굴이 여지 없어 공개되었다. 인간으로서 인간이 비참해지는 장면을 본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만든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들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고 2014년의 일들이 다시 머릭속을 가득 매웠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도 일에 대한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았다. 안타까운 죽음의 이면에 남은 사람들의 눈물이 가슴속으로 떨어졌다.
영혼의 그늘이 있다면, 그 그늘에 담긴 눈물은 강이 되어서 영혼의 바다로 흘러 간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흘린 눈물은 마르지도 않고 계속해서 영혼 속에서 흘러나와서 영혼의 강물로 흘러간다. 울음이 그치지 않은 갈대 속에서 마음은 산란하게 흩어지고 길을 잃은 영혼들은 그림자로 바뀌어 버린다. 허무하게 인생을 마감한느 사람들과 태어나도 한 마디로 하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한 생명들과 불의의 사고 인생을 마쳐야 하는 사람들. 국가의 무관심과 폭력에 의해서 이름이 지워진 사람들과 역사의 무게에 눌려서 땅속으로 짓이겨진 사람들. 그 사람들의 목소리가 오늘밤은 마음 속에 메아리가 되어서 울린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이 메아리가 멈출까. 아니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슬픈 멜로디는 어디서 멈출 수 있을까? 정부와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다가 문득. 기독교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뭐 하고 계셨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만 행복하면 되나? 이런 질문들을 야유에 섞어서 허공에 띄워본다. 자신들만 행복하고 자신들만 안락하게 이 어려운 세상을 향유하면 그만인가?이런 생각도 든다. 수 많은 대형교회들에서 자신의 아름다움과 성공을 뽐내는 사람들과 동네에 작은 교회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어.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하자'라고 하는 성도들의 목소리도 들린다. 그러면 그만인가? 기독교는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행복이 없는 종교도 아니다. 모든 죽어 가는 이들에 대한 책임이 만약 하나님께 있다면 그 책임은 믿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있는 것이다.
말해봤자 뭐하냐?라고 할 수도 있지만. 시대의 아픔과 어려움을 외면하는 종교는 그 어디서나 사라지게 되어 있다. 역사가 증명한다. 그 좁은 우물 안에서 '기독교'라고 말하면서 스스로의 행복을 누리고 있는. 그러니깐 내일 주일학교를 준비하면서 예배 설교를 열심히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이 죽음'에 대한 책임은 없는 것인가? 나도 안다. 나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하고 또 피하지 않을까를 고민한다. 신앙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이면서도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이자 불만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하나님은 뭐하고 있었는지, 아니 이걸 의도했다는 것은 아니어도 왜 방치하는지. 이런 고민들을 오랫동안 해 왔다. 보수적인 기독교에서는 '그건 하나님의 뜻이 있어'라고 할테지만 그러한 대답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다.
사실 이런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불현듯 찾아오는 죽음의 공포와 함께 길을 걷던 이들이 이제부터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서글푸다. 세상은 왜 이런 식으로 밖에 안되는 걸까. 왜 전쟁은 막을 수도 없고 살인은 멈출 수 없으며, 사건사고는 미리 방지할 수 없을까? 근원적인 물음이면서 사람들에게 그리고 하나님에게 돌아오지는 질문을 던진다. 다만 한가지는 나에게 하는 소리다. 그럼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내가 던진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나는 모든 것을 대답할 수 없다.
그렇지만 한가지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이 사건들을 막아보고 이미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만들고 나역시도 책임을 지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두가 할 수 있는 한가지는 계속해서 죽을 때까지 기억하는 것이다. 절대로 잊지 않고 이 세상을 살다가 이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불의의 사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들이 남긴 꿈을 기억하고 그들이 남긴 미소를 간직하고 그들이 남긴 말들을 기록하는 것이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같이 일이 일어날 때 다른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기억할 때마다 계속 하나님에게 물어볼 것이다. 왜 이렇게 하셨어요? 그럼 이렇게 하지 않을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7B0f8epubc
https://www.youtube.com/watch?v=lcdg9s8dyfU
https://www.youtube.com/watch?v=FlYU-onkvu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