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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an 16. 2024

상자 안에 갖힌 사람들

언젠가는 나가야 한다

한 남자가 돈이 많은 부자와 내기를 했다. 1년동안 커다란 상자 속에서 버틴다면 그가 상상하지 못하는 모든 것들을 다 주겠노라고. 이 남자는 자신만만하게 콧노래를 부르며 자신에게 10채의 집에 버금가는 금액을 달라고 요구했다. 부자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봐! 젊은이. 돈은 걱정하지 말게나 자네가 원하는 돈의 100배도 줄 수 있으니. 그러나 언제라도 상자 속에서 나오고 싶다면 말을 해주게. 그러면 아무것도 없는듯이 계약을 파기할 수 있으니까." 


남자는 의기양약하게 말했다. 


"여보시오. 걱정하지 마시요. 내가 얼마나 고생을 하면서 인생을 살아간 줄 아시요? 그깟 365일 동안 이 상자 안에서 사는것 쯤이야 식은 죽 먹기요. 잔말 말고 내가 말한 돈이나 준비해주시오!" 


그리고 남자는 성큼성큼 상자 속으로 들어갔다. 먹을 것도 충분하고 이것저것 할 만한 것이 많았던 큰 상자 속에서 그 남자는 잠도 자고 밥도 먹고 책도 읽고 TV도 보다가 하루, 이틀, 삼일을 버텼고 어느덧 6개월이 지났다. 부자와 한 약속도 희미해져가고 6개월동안 사람들을 만나지도 못하고 대화도 할 수 없었던 남자는 저녁이 되면 울기 시작했다. 그뭄달이 뜨는 날이면 


'내가 왜 이런 약속을 한거지? 이 약속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어?'라며 속으로 스스로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 날이 되면 '아니야! 이정도야 앞으로 6개월만 더 버티면 나에게 어마어마한 대가가 주어질 거야. 인생은 이런게 아닐까? 바로 원하는 것을 위해서 지금을 희생하는 거지. 아무렴 그렇고 말고!'라며 마음을 추스렸다. 


그렇게 다시 6개월이 지나고 부자와 약속한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남자는 상념에 빠져서 이제는 식음을 전폐하고 자신이 살아온 지난 1년을 돌아보았다. 자신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지. 자신은 이 상자를 나간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자신이 결정한 것이기는 하지만 계약이라는 것이 이렇게 자신의 현재를 억누리고 있는지. 온갖 상상에 시달리던 그는 이윽고 결심을 했다. 


다음날 드디어 1년이 지났고 계약이 완료되는 날이 다가왔다. 그동안 그 남자의 울부짖음과 상념에 잠긴 소리를 들으면서 계약이 성사되는지를 궁금해하단 마을 사람들이 커다란 상자 앞으로 몰려 들었다. 그리고 상자를 열었다. 의기양약하게 문을 박차고 나올 것만 같았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 계약을 제안한 부자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남자의 행방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이 계약을 주최한 부자의 생각이 궁금했다. 더욱이 계약이 성사되는 날에 상자 앞에 나타나지도 않은 그 부자에 왜 그런지도 궁금했다. 


상자속에 갖힌 사람들_민네이션





40세까지 매일 격무에 시달리던 의사, 러시아의 몰락을 겪으면서 인생의 고민에 휩쌓인 안톤 체호프는 마침내 자신의 일을 내려 놓는다. 자신에게 아무런 미래도 약속해 줄 수 없는 결정을 내리고서 그는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 먹는다. 그리고 마치 무엇에라도 홀린듯이 소설을 써 내려간다. 그에게 알고싶었던 것은 하늘같은 차르가 무너지는 모습의 의미와 볼쉐비키 혁명으로 유혈이 낭자한 거리에 흥복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왜 그렇게 절망적이었는가였다. 쇠락해가는 시대적 분위기에 자신이 변변치 않게 아직도 살아있음을 한탄하면서, 스스로 그어 놓은 한계 안에서 자신은 왜 벗어나고 싶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체호프의 소설은 원래 '상자 속의 사나이'였고, 내용도 조금은 달랐다. 그런데 나는 이 소설을 읽고 10년은 고민을 한 것 같다. 과연 그 사나이는 왜 바로 전날 그 상자를 나와서 유유히 사라졌을까? 그리고 내가 덧붙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부자는 왜 그 마지막날 등장하지 않았을까? 그 부자는 알고 있었을까? 무엇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 사나이는 무엇을 몰랐던 것이고 어떤 것을 깨달았던 것일까? 


살아가면서 상자 속에 갖힌 이들을 수도 없이 마주친다


인간이 자발적으로 행동할 때는 '자율'적인 규칙을 정했을 때이다. 자율이란 스스로 규칙을 정하는 '자기조정적 존재'로써 인간이 자연스럽게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자신이 정했기 때문에 자신이 행동하는 것을 우리는 자발성이라고 한다. 그러니깐 다른 사람이 정한 규칙을 가지고 그 규칙안에서 자발적으로 움직여라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방식을 부정하는 방식이다. 인간은 어느정도의 지적인, 감성적인 수준이 되면 스스로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 안에서 질서를 만들어 간다. 시중에 넘쳐나는 자기계발서들이 하는 이야기는 바로 자율과 자발의 경계를 짓고 자신만의 원칙을 만들라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자발적이지 않다는 것과 스스로 정한 규칙이 아닌 다른 사람이 정한 대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마주치는 사람 중에 항상 자신이 정해놓은 규칙에 얽매이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방금 정한 규칙 때문에 다른 사람이 무엇인가를 바꾸자고 하면 절대로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논리적인 비약도 과학적인 근거도 없지만 그냥 자신이 방금이라도 정했기 때문에 절대로 바꾸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 사람과 가끔씩 소동이 벌어진다. 아주 조그만 권한을 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3시간씩 회의를 해야 하고, 그 회의의 결과는 그 사람이 스스로 정했던 규칙을 그냥 지키도록 방조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그 사람은 경험한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말 수를 줄이고 시야에서 멀어졌다. 그 사람은 또 다시 자신이 정한 규칙대로 맛있음 음식과 점심을 대접 그리고 한 개도 마음이 담기지 않은 찬사를 사람들에게 쏟아부었다. 사람들은 이미 마음이 식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는데, 여기서 그 사람은 몸시 화를 내거나 사람들은 원망하는 제스쳐를 보낸다. 



그 사람을 붙잡고 2시간씩 매일매일 일종의 상담을 하고 자신이 정한 규칙을 벗어나보라고 제안을 했다. 하지만 매번 돌아오는 것은 변명과 고집 때로는 불같이 화를 내는 그 사람의 태도였다. 결국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 점점 그 사람과 멀리하는 방법 밖에 없었던 것일까? 나도 여러 사람들과 똑같이 매번 마주쳐야 하는 그 사람에 대한 벽을 세웠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사람이 경계성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은 한번도 측정하지 않았지만, 여러가지 증상으로 볼 때 자신이 했던 말과 일을 잊어 먹는 경계성 지적장애(처음에는 자신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리플리 증후군'이라고 생각했다)와 자신의 감정의 경계를 알지 못하고 조울증의 경계를 왔다갔다하는 경계성 정서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어느순간이 되면 자신에게 비판했던 사람을 복수하고 기분을 푼 뒤에 다시 그 사람에게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잘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은 어쩌면 해리성 인격장애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집에 오면서 이상한 죄책감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누군가를 판단한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는 판단의 기준과 다른 삶을 살고 있어야만 가능하지 않나?라는 생각때문이다. 나 역시 해리성 인격장애는 아니더라도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양가감정은 어쩔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도 해본다. 얼마전 타계한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의 저서 액체근대에서 포스트모던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양가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양 극단을 달리는 마음의 근저에는 시대가 만들어 놓은 열등과 우열의 경계가 있고 그것이 삶을 살면서는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정해놓은 삶을 살고 싶다가도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기도 하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고 싶고 때에 따라서 내 맘대로 하고 싶은데 말이다. 이런 생각으로 집에 돌아오는 길은 달팽이 같은 생각들이 발목을 붙잡고 느리게 생각하게 만든다. 나도 막상 다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 같이 문제를 나가는 방법은 없을까?

결국 스스로 그 상자에서 나가야 한다


상자속에 들어 있던 남자는 왜 마지막 날 저녁에 스스로 나갔을까? 희미하게 기억나는 체호프의 소설을 읽어보니 이런 내용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몇 년동안 계속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마지막에 하루만 버티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데 왜 그랬을까? 너무 아깝지 않나? 시대에 잠겨 있는 관점을 조금은 접어 두고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본다. 자발은 자율에서 나오고 스스로 정한 규칙을 깨는 새로운 규칙이 등장할 때까지 우리는 자유를 얻을 수 없다. 자유는 언제나 새로운 규칙을 만들 수 있고 그 규칙을 지킴으로써 자유는 완성된다. 그리고 또한 자유롭지 않은 규칙들이 자신의 삶을 옭아맬 때 다시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 자신이 만든 상자가 작다면 그 상자를 부수고 나가야 한다. 데미안의 명언처럼 새는 알을 깨고 나가려고 한다. 알을 깨야만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 갑각류들은 자신의 두꺼운 갑옷을 깨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다. 


결국은 스스로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상자를 부수고 나가야 한다. 그리고 또 새로운 상자를 만들되 조금은 더 크고 넓게 만들어야 한다. 더욱이 자신이 만든 상자가 아닌데도 그 상자 안에 갖혀 있다면 말이다. 아마도 상자 안에 갖혀 있던 남자는 그 시간이 처음에는 무엇인가를 받는다는 즐거움에 누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자신이 무엇 때문에 사는지를 고민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서는 드디어 자신이 만들지 않은 상자라는 규칙을 깨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것을 할 수도 있고 안할 수 있는 자유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서는 아마도 그 다음부터는 자신이 규칙들을 만들어 가지 않았을까? 라크라캉은 '우리는 모두 타자의 욕망으로 산다'고 말했다. 이 세상의 언어를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언어 안에 녹아있는 욕망과 원함을 그대로 흡수하는 것이다. 언어를 접하는 순간 바로 우열의 어느지점에 위치하거나 같은 종류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비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욕망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스스로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은 '자유의지'다. 상자 속에서 나가는 순간 자유의지는 계속해서 자유롭게 의지를 사용해서 행동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자유의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행동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사랑은 오로지 자유가 충만할 때 의지가 인도하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자유롭게 자유로운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행동할 수 있는 의지가 생긴다. 사랑은 목숨보다 강하고 불같이 뜨거운 이유가 바로 자유의지로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양가감정을 부축이면서 다중인격을 만들어내는 이 상자 속에서 나가는 길은 결국 사랑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럴려면 자유로워야하고 자유로우려면 상자 속에서 나가야 한다. 위험을 무릎쓰고 모든 것이 사라지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럴 때 삶은 또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이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마다 더 넓은 세계로 초대받았다. 


부자는 아마도 알았을 것이다. 열려진 결말이긴 하지만. 그 남자가 반드시 그 약속을, 계약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혹은 지키는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닌가? 조용히 시대의 잡음을 끄고 내면에서 들려오는 인간 본연의 소리에 집중하면, 내가 진짜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내 마음이 정말로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이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자유가 필요하고 말이다. 결국 스스로 상자속에서 나가야 한다. 부자는 어쩌면 자신 스스로도 그 상자에서 걸어나온 사람이 아닐까? 돈이 많아서 부자가 아니라 마음이 넓어서 부자가 아닐까? 언젠가는 나가야 한다. 스스로 이 상자에서 걸어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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