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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Sep 22. 2016

성경과 해석

어떻게 보는냐가 믿음을 결정한다면


모든 것은 해석학이다

시간 위에 있는 존재는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누구라도 어떤 세계관 안에서

해석의 틀이 존재한다


그래서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서

사물을 보고, 기억하고, 상상하는게 달라진다


성경은 그래서 더더욱

해석학의 영역의 왕좌에 앉아 있다




들어가기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구약과 신약은 어떤 언어로 쓰여 있는가? 어떤 문화권에서 사용하고 있는가?사용되는 언어와 함께 문화를 반영하는 텍스트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석을 할 것인가?결국은 있는 것들은 모두 해석의 문제에 다다르게 된다.그렇게 볼 때 불트만과 바르트의 해석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루돌프 불트만, 1884 -1976

1. 해석학과 주관성


불트만 이전의 계몽주의적 해석학은 "해석학은 해석학적 '규칙들'이다, 신칸트주의의 영향으로 보인다."라고 할수 있었다.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의 해석학은 "해석학은 이해의 기술이다"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기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삶 자체를 통해서 경험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이다라는 것이다.불트만은 이러한 두가지 흐름 모두를 수용하려고 했다.하지만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에게 중요한 개념이었던 '객관성' 혹은 '가치중립성' 등은 인정하지 않았다.불트만도 초기에는 자유주의신학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바르트와 함께 연구하면서 시대정신의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하나님나라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연관성과 차이점에 대한 회의를 시작하게 된다.불트만은 자신의 학자적 배경을 중심으로 기존의 신학자들에 대한 회의감을 느낀다. 기존의 신학자들은 국가이데올로기로서의 종교, 낭만주의적인 접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신칸트주의와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은 형식과 감정이라는 측면에서 주고 받는 측면이 있다.


2. 탈신학학화, Entmythologisierung


신학의 저자들도 역사적으로 조건화 된 존재이다.내가 음악을 이해할려고 관계를 가지고 있을 때 나는 이해할 수 있다.신약의 저자가 의도한 것은 실재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었다.신약의 저자들의 소위 객관적 언어도 단순히 표현의 신화학적 형태였을 뿐이다.신화의 뒤편에서 사유되는 실재하는 신약은 케리그마(복음의 선포, 증언)인 것이다.신약의 원래 메시지는 케리그마이지 해석되어야 하는 신화가 아니다.공관복음의 언어의 실제적 목적은 묘사나 기록이 아니라 증인이다.따라서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최상의 방법은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진리 대신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말 걸기를 이야기하는 것이다.사실상 신약의 탈신화하하려는 우리의 급진적인 시도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도 바울과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와 완전한 평행을 이룬다.아니 어쩌면 인식론의 영역에서 이 교리가 논리적 결론까지 밀어붙인 결과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이신칭의의 교리처럼 탈신화화하라는 우리의 시도는 모든 거짓 안전장치를 파괴해 버린다.진짜 안전은 모든 안전장치를 버림으로써만 발견되는 것이다.불확실한 역사적 사실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예수의 생애에 대한 신학은 잘못된 것이며 이런 신학은 우리를 육신을 따른 그리스도로 인도한다.원시 신화에 대해 신앙을 유지하려면 현대인들은 지성을 희생시켜야 하는데 이는 신약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요구되지 않았던 지점이다.따라서 이는 추가적인 장애물이다. 성경을 거부하는 것과 묵시문학에서 파생되는 성경적 섹뎨관을 거부하는 것은 아주 다른 것이다.


3. 신 이해, 역사성


하나님은 인지적 지식의 영역 바깥에 존재한다.하나님은 객관적으로 주어질 수 없으며 인식체계 너무에 존재한다.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의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건과 우리 자신을 시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십자가 처형을 경험함을 의미한다.만약 우리가 신약의 객관화하는 표상들을 따른다면 사실상 십자가는 신화적사건으로 이해될 것이다.하지만 신약 안에서 조차 십자가는 그것이 말한다고 가정되는 바를 절대로 이야기 하지 않는다.


4. 불트만은 자유주의 신학자가 아니다.


불트만은 십자가의 신화적 성경 안에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자시느이 피를 흘른 희생양 개념을 포함시킨다.


불트만, 해석학


문제의 형태로 고정된 모든 삶의 표현을 이해하는 기술이다.텍스트에 대한 생산적 질문을 위해서 해석자에게는 탐구자의 삶 가운데 기반이 되는 관심이 필요하다.이해에 대한 전제는 '텍스트에서 표현되는 주제와 해석자 자신의 삶 사이의 관계이다.'해석자에게 자신의 주관성에 대해 침묵하고 개별성을 소멸시키라는 요구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불합리한 발상이다.


민네이션, 생각


해석의 문제에 직면하지 않으면, 우리는 은유'의 차원에서만 성경을 보게 된다.불트만에 오면서 계몽주의적인 시각들이 해석학의 문제로 내려앉게 된다.불트만은 주로 책보다는 논문을 많이 썼다.리차드헤이스의 'Reading Backword' 역시도 이러한 시도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해석의 문제는 항상 중요한 테제가 된다.실제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보통은 설교) 두가지의 흐름이다. 신칸트주의적인 경향으로 형식적인 묘미를 살리는 것과 은유를 사용하여 텍스트를 낭만화시키는 낭만주의적인 기법이다. 두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되면 일단 신칸트주의적인 경향으로 흐르면 설교는 매우 지루해지고 이성에만 치우키게 되며, 낭만주의 경향은 좋은 말은 많지만 남는게 하나도 없는 것이 된다.그렇다면 나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대부분의 민족주의는 제국주의로 이어지는 시대에서 불트만은 자신들의 선생들의 관점을 어느정도는 수용하지만 '주관성'을 강조하는 방식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불트만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신칸트주의적인 관점에서 불트만이 실증주의적인 세계관을 성경해석학으로 가지고 왔다라고 한다. 하지만 불트만이 이야기하는 탈신화화의 개념이 '주관성'이라는 현재와 만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이런 비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트만을 읽어보면 오히려 불트만은 반대로 이야기를 한다. 성경과 나와의 관계처럼, 성경의 저자와 성경의 관계 그리고 나와 성경의 저자와 관계를 고민해보게 되면, 누구라도 주관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이야기한다.결국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이제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서 인간을 볼 때 인간의 인식을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불투만이 이야기하는 신화는 흔히 말하는 그리스로마 신화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유비'라고 할 수 있다. 실제를 이해하는 방식을 넓히기 위해서 사람들이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비유는 시대적 환경을 가지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처럼 어디에서나 통용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케리크마'라는 것을 강조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유비를 왜 하게 되었는가?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비가 가진 과거성을 걷어내야 하고, 목적을 드러내기 위한 케리크마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트만을 제대로 읽지 않으면 자유주의철학자들로 치부하며(오히려 불트만은 이를 비판했지만) 불트만은 성경을 버리라고 했다라는 잘못된 오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칼 바르트, 1886-1968

1. 바르트는 절대적 타자이신 하나님의 초월성을 전제로 거룩하고 무한하신 하나님과 타락하고 유한한 인간 사이의 간극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성서를 접근한다.


나에게 시스템이란느 것이 있다면 그것은 키에르케고르가 '인간의 시간과 하나님의 영원사이의 무한한 질적 구분이라고 부른 무엇이다.이러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내게는 성경의 주제와 하나 안에서 철학의 종합이다.철학자는 인간 지각의 저 위기르 제일운동자라고 부른다.성경은 같은 교차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바라본다.기록된 말씀으로서의 성경과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의 전통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어떤한 접근도 불가능하다.즉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모든 주석과 신학적 성찰을 선행한다.모든 성서 해석의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나타나신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만 계시된다.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직접적으로나 일의적으로 말할 수 없으므로 예라는 은혜와 아니라는 심판과 위기 혹은 타자성의 변증법적 과정을 겪게 된다.이러한 변증법적 과정은 신앙의 유비를 필요로 하며 신앙의 유비는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우리는 심리학과 역사의 환상으로부터 깨어 일어나 성경을 향해 돌아선다.나의 유일한 목적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다.물론 어느 누구도 텍스트에 무엇인가를 더하지 않고는 그것으로 부터 의미를 일으키지 못한다.


2. 계시로서의 그리스도와 해석자 사이의 직접적인 만남의 사건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는 존재론적으로 하나님 말씀인 것이 아니라 사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이것이 먼저 정립될 때 우리 자신의 삶의 자리나 텍스트의 역사성, 문체, 저자의 의도, 본문의 구조 등의 이해 역시 의미를 가진다.바르트에게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 자신의 삶의 자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는 성서가 증언하는 그리스도를 밝히 드러내기 위한 문학적, 신학적 해석에 전념한다.해석자는 성서 텍스트 자신이 말할 수 있도록 철저히 그 앞에서 자신을 종속시킨 채 귀를 기울여야 한다.그에 따르면 말씀 자체가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말한다.텍스트가 주체이며, 해석자는 객체다.바르트는 해석의 단계는 관찰expliatio, 성찰meitaio, 전유applicatio의 3단계로 구성된다.특별히 전유의 단계에서 바르트는 해석자가 성서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가 해석자를 사용한다고 주장한다.바르트가 말하는 전유란 해석자의 전제와 물음까지도 성서의 주제에 종속시키는 것이다.해석자는 텍스트에 순종하고 겸손히 귀를 기울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진정한 동시대성을 획득한다.바르트가 목표로 삼았던 것은 자기 시대를 위한 신학적 주해였다.독자는 새로워진 믿음과 순종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신학적 내용이다.


3. 바르트의 신학적 해석학에서 성령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성령의 매개로 인하여 과거의 예수 그리스도와 오늘날 우리 사이의 역사적 거리를 초월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오직 성령 안에서 우리와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동시대성이 현실화된다.


4.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증언이며,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준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안에서 인간에 의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말씀들에 직면하고, 동시에 이 말씀들 안에서 그리고 그 말씀들의 매개체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들어 안다.인류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 찬양을 행하는 행위자이다.그 인류는 성경의 독특성을 인식할 수 있다.왜냐하면 성경을 통해 성령은 인간으로 하여금 교회의 주로서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는 모세와 선지자, 복음 전도자의 사도들을 통해 전달된 말씀에 반응하도록 하기 때문이다.하지만 계시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증언으로서의 성경에서 그 표현을 찾을 수 있으며 동시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성경에서 우리는 '인간의 음성으로 쓰인 인간의 언어'와 만나는데 이 인간의 언어를 계시를 증언하고 있다.


5.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를 위한 것이다.


성경해석학은 일반해석학을 통해서는 그 자체로 구술될 수 없다.하지만 우리는 모든 역사적 특수성 안에서 인간의 언어를 통해 말씀을 전달 받는다.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이며 신앙의 유비는 그것의 신비와 어둠과 빛 속으로 끌여 들어간다.우리에 의해 이해된 것이 우리를 붙잡아 준다.교회는 이 증언을 성경의 일부로 확증하거나 정립한다.그러므로 성경은 교회에게 주어진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하지만 성경이 계시에 대한 증언인 반면 정경, 즉 구약과 신약은 교회를 통해 인정을 받는다.교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바르트, 해석학


바르트의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을 타자화시켰다는 것이다.무한과 유한 사이에서 존재하는 인간의 대해서 '절대적 타자'라는 개념을 발견한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바르트는 신학적 배경으로 가지고 왔다.하나님의 계시는 바로 우리 신앙과 믿음의 기준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계시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존재의 유비'라고 하는 개념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야기하는 것으로 무한과 유한의 존재적 차이가 어떻게 이해가 가능한가? 결국은 그 가운데 공통점으로 존재하는 것을 보면 된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니님은 타자이며 계시에 의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존재의 유비를 인정하는 자유주의신학자(다시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브르노와 결별하게 된다.말씀이 실존이 아니라 말씀이 사건으로서 실존이 된다.바르트는 자기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신학적 주제'를 부활시키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바르트의 목적은 교회 자체를 활성화하고 시대 속에서 교회의 목적들을 발견하기 위한 작업들이었다.이 부분이 불트만과 바르트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바르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신앙의 내적의미만을 너무 강조했다고 하고, 불트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신앙의 외적 의미를 너무 비판했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누가 이 모든 것들을 알 수 있는가? 칼빈인가?이런 식의 접근은 당연히 신칸트주의 혹은 낭만주의 편에서 이야기가 되어 지는 것이다.


민네이션, 생각


우리는 십자가를 지셨다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의해서 발생하는 해석학의 문제로 인해서 신앙의 깊이를 경험하게 된다.더 나아가 십자가는 예수님께 무엇이었는가?라는 관계성을 살펴보고, 그렇다면 그 십자가는 이제 나에게 무엇인가?라고 고민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더 깊은 질문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들어간다. 존재와 타자 안에서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질문의 크기에 따라서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진다.바르트와 불트만이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것은 바로 근본질문으로, 근본어로 계속해서 침잠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비판과 평가도 그 깊이에 따라서 다가가는 질문의 수준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바르트가 이야기하고 있는 '절대적 타자'라는 개념은 레비나스의 철학에도 등장한다. 절대적 타자는 결국 절대적 하나님이다. 우리가 타자와 관계를 맺는 방식은 오직 사랑 외에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밖에는 없다'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해석학적 관점을 가지고 올 때 일단은 신학적인 관점 자체만을 가질 것인지 아니면, 비트겐슈타인의 이야기처럼 철학적 언어까지도 포함한 객관적인 관점을 가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그런 의미에서 불트만은 외적으로는 신학자체만의 언어를 가져야 한다는 '주관성'을 강조하게 된다.공격적인 기독교가 문제가 되는 시대이다. 진화론을 공격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두려움의 다름 아니다. 두렵기 때문에 무너질 것 같아서 무엇인가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그러나 진리는 그런게 아니다.




20160125_현대기독연구원

박성철_성경과 해석학 그리고 정치

3강_불트만과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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