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슬라브볼프_배제와포용
현존하는 최고의 신학자라는 평을
듣고 있는 볼프의 글은 매우 어렵다
일단 영어자체도 어렵지만
모국어가 아닌 볼프에게 영어는 이상한나라의 앨리스 같은 느낌이랄까
스스로가 외부인으로 존재하면서
배제를 당하고 또한 어떻게 그렇다면 타자를
포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볼프는 오랜시간이 지나서
배제와 포용이라는 단어를 그리스도에게서
찾아냈다
인간이라는 보편성을 가진 그리스도가
존재라는 보편을 창조한 하나님과 만난다
그리고 그 지점은 십자가이다
십자가에서 배제와 포용이 일어난다
배제된 역사와 민족과 타자가
포용안으로 들어온다
배제가 배제되면서
혐오가 혐오된다
보편성과 특수성이
그리스도와 만나서 십자가에서 다시 시작한다
모든 것은 프랙탈이다
작은 것이 큰것과 같은 길에 있다
특수성도 사실은
보편성의 방향성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은 하나님의 삶이다
여러가지 볼프의 생각의 꼭지
한번 만나보자 어렵지 않은 표현들로.
들어가기
전체를 아우르는 내러티브로부터 도출된 주제들과 성경 본문의 내적 풍성함 사이의 복잡하고도 예측 불가능한 역도성이다. 그리고 이 풍성함은 가장 중요한 하나의 내러티브나 하나의 단일한 주제, 혹은 어떤 불변하는 '체계'로 결코 환원할 수 없다. 우리는 배제와 포용이 현실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가를 고민하게 된다. 오늘은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 속에서 배제와 포용은 어떻게 문화적으로 작동하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떤 포지션을 가져야 하는지를 성경적으로 따져 보고자 한다.
공모, 문화
에드워드 사이드는 '문화와 제국주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도나 알제리를 지배하던 시기에 관리들은 그 민족이 지배를 받는 혹은 열등한 인종이라는 관념을 당연하게 여겨 왔지만 내가 존경하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예술가들 중에서 이 관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칭송할만한 예술 작품과 학문적 성취가 명백히 그리고 숨김없이 제국의 통치 방향과 연루되어 있다고 말한다. 니체가 이야기 한 것도, 예술가들이나 학자들이 권력의 비위를 맞추는 문화의 속성에 대해서 비판했다. 선교사들 혹은 기독교도 전파되는 과정에서 문화가 가지고 있는 식민지성과 우열주의를 무의식적으로 전파한 측면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공모 자체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그 속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행동 양식이다. 우리는 주변의 문화를 너무나 편안하게 느낀 나머지 그 문화가 지닌 많은 악은 보지 못하며, 그 결과 그 악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는 커녕 그 악을 우리 나름대로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한양심을 가지고 제공한다. 우리와 함께 이런 흉내내기에 가담하기를 거부한느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종파주의자라는 낙인을 찍는다. 자신의 인종적 문화적 공동체적 주장 안에 갇혀 화해의 사역이라는 복음의 소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자 하는 진정한 열먕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종적 갈등을 합법화'하는 역할을 한다.
거리두기, 소속되기
우린느 무엇으로 부터 돌이켜야 하는가? 우리는 기독교 공동체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교회는 교회가 자리잡고 있는 문화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볼프는 이에 대한 답을, 문화로부터 거리두기와 문화에 소속되기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감으로써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상황이 결국 종교적 정체성과 문화적 정체성의 구분을 가능하게 할 것이며, 그에 따라서 타자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가 결정될 것이다.
떠나라, 거리두기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아브라함의 믿음과 떠남에 대해서 고민해보자. 아브라함은 떠나기로 했다. 모든 가문과 모든 문화의 하나님이신 그 분께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 자신의 문화적, 가족적 관계를 끊고 조상의 신들을 포기할 수 있었던 용기가 아브라함의 혁명이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물려받은 문화적 관계에 빠져드는 대신 거기로부터 빠져나오는 것과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을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하나이심은 하나님의 보편성을 내포하며, 보편성은 모든 문화에 대한 초월성을 요구한다. 주어진 문화 속에서 기독교가 이방인으로 남아 있는 것을 불평하하는 것은 실수일 수 있다. 아브라함처럼 이방인의 정체성은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라는 정체성 이전에 아시아인, 일본사람, 미국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가진 정체성성의 핵심은 충성의 대상을 전체적으로 교체하는 것이다. 베드로를 부르실 때 '그물'이라는 경제적 조건과 아버지라는 가족의 범주를 버리고 떠나야 했다. 떠남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정체성의 필수 요소이다.
아브라함 스타일, 비판
오늘날의 분위기 속에서 아브라함 식의 떠남은 서로 대립하는 양 진영으로 부터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한편은 너무 목표지향적이고, 너무 직선적이며,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다고 비판한다. 다른 한편은 너무 현실로부터 떨어져 있고, 너무 초연하며, 어떤 의미에선느 지나치게 급진적이라고 비난한다.
첫번째 비판, 들뢰즈
들뢰즈와 같은 포스터모던 사상가들에게로 부터 첫번째 비판이 나온다. 그의 사상을 표현하는 방식은, 그가 하나의 철학 프로그램을 향해 떠났다고 말한다. 들뢰즈에게 유목이란 용어는 핵심적인 철학적 범주로서 가능하다. 들죄는 도달할 목적지가 없는 것처럼 출발 지점도 없다라고 강조한다. 도착지는 언제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신이든 인간이든 떠남을 지시할 안정적인 주체조차도 없다. 이런 입장에서 탈영토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경험은 다른 의미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명백한 목적이 있었고, 떠나는 지점과 도착할 지점이 명확했다.
페미니즘, 아브라함
아브라함의 떠남과 아들 이삭의 번제 사건을 통해서 페미니스트들은 초월성이 아니라 내재성의 측면에서 관계망 안에서 자신을 머물게 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회복이라고 주장한다. 즉, 아브라함은 너무 목적지향적으로 여정을 떠나고,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를 다시자신의 정체성 안에 머물게 하는 방식이 공동체 안에 포함시키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진짜로 그럴까? 진짜로 관계의 장 안에 머물러야 할까?아브라함의 떠남은 관계성의 부인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정주하지 못하고 떠도는 외로운 근대적 주체가 아니다. 아브라함은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묶여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부르심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유목민 공동체에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 유랑민족의 비전을 제시해 준다. 그럼 이러한 아브라함 - 예수 그리스도 - 사도바울'의 이야기에서 어떻게 이러한 떠남이 의미를 가지게 되는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버리지 않고, 바울
왜 혈통의 육체성으로 부터 믿음의 순전한 영성으로, 민족성이라는 특수성으로 부터 다문화성이란느 보편성으로, 땅의 지역성으로부터 세계의 포괄성으로 이동한 것일까? 그러나 사도바울은 아브라함과도 많이 다른 정체성, 상황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깨어진 순간, 그 안에 특수성으로 자리잡고 있던 민족적 정체성과 종교적 정체성이 보편성으로 확장된다. 비로소 만유의 하나님과 선택된 민족사이의 인지부조화가 해결된 것이다.
바울, 특수성과 보편성 사이
하나님의 보편성과 하나님의 계시에 내포된 문화적 특수성이 만들어 낸 긴장을 해소하는 방법은 한 분이신 동시에 구체적인 종교들의 이면에 숨어 있지 않으신 하나님 속에서 찾아야 했다. 유대인인 바울이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신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본질적인 문제를 만들어낸 것은 이 한분, 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다. 이 하나님은 유대 민족이라는 구체적인 사회적 실체와 특수성과 연결되어 있었다.
톰라이트, 언약의 쟁점
볼프는 톨라이트의 '언약의 쟁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사도바울이 아이러니하게 접하고 있던 지적 특수성과 보편성 사이의 고민을 어떻게 해결해 주었는지를 말해준다. 첫 째, 바울은 한 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토라를 상대화한다. 즉, 토라 안에 있는 특수성으로 자리잡던 선민사상을 해체시킨다. 둘 째, 바울은 평등을 위해 혈통을 폐기한다. 약속은 믿음에 의한 것이며, 은총에 따라 주어진다. 셋 째, 바울은 이 땅의 모든 가문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받아 들인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시며,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다 다 그분 안에서 하나다.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긴장에 대해서 바울의 해법은 독창적이다. 하나님의 한분이심은 하나님의 보편성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보편성은 인류의 평등을 함의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보편성의 개념은 추상성을 너무 발전시켜서 오히려 존재하는지 않하는지 모르게 될 수도 있는 단점이 있다.
보편성, 몸
보이어린'의 비판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일원론을 이야기함으로써 다원론은 해체되고 차이는 이제 배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 말도 일리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특수성, 다원성의 근본은 몸'이다. 신체자체가 이미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제 반전이 일어나는데, 이렇게 까지 이야기를 진행하다가 보면 보편성은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이 부분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라시기 전까지다. 바울이 그 속에서 온 인류의 통일성을 추구하고자 한 일자'는 몸과 분리된 초월성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시다. 일치의 원리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이름은 십자가 위에서 고통당하신 육체를 지닌 인격체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한 몸이 되며, 그 몸은 성령 안에서 가능해진다. 성령 안에서 다양성이 존중된다. 바울 식의 보편주의는 어떤 함의를 지니는가? 각 문화는 그 자체의 문화적 특이성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으서의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으로 부터 벗어나 그 둘 중 어느쪽도 아닌 새로운 인간이 되어야 한느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문화도 그 자체의 종적 신을 유지해서는 안된다. 종교는 탈민족화되어야 하며, 그렇게 할 때 민족을 탈신성화할 수 있다. 모든 문화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자신의 몸을 모든 민족을 위한 집으로 내어 주신 그리스도에 대한 궁극적인 충성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문화를 버리지 않은 체 자신의 문화를 떠날 수 있다. 떠남은 더 이상 공간적 범주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살고 있는 문화적 공간 안에서 일어날 수 있다. 참된 기독교적 떠남은 단지 거리두기에 그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현존의 차원을 지닌다.
거리두기, 소속되기
거리두기와 소속되기는 모두 필수적이다. 거리두기 없는 소속은 파괴적이다. 소속없는 거리두기는 파괴적인 거리없는 소속으로 변질된다. 문화에 대한 거리두기는 그 문화로 부터 도피로 퇴보해서는 안되고, 문화 안에서의 생활 방식이 되어야 한다.
문화, 보편성, 공교회성
성령이 오셔서 우리 안에 하시는 일은 우리의 좁아진 자아를 깨뜨리고 그가 만드신 세상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그리고 절대 이제 혼자 생각할 수 없다. 의도적으로 성령을 멀리할 수는 있으나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의 내면 안에서 초월자이신 그분이 함께 계신다. 보편적 인격은 이제 보편적 공동체를 요구하신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문화에 대해서도, 타자에 대해서 보편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의 결혼 문화에 대해서 하나의 경우의 수로, 특수성으로 받아들이면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결혼을 할 땐 그 문화가 아니라 우리안에 보편적 인격을 만들어내고 보편적 인격을 만들어내신 하나님의 문화로 실천하게 된다. 새창조의 성령에 의해 만들어진 거리두기의 기능 중에 하나는 '모든 문화 속의 악에 대한 심판'을 요구하게 된다. 악을 극복하게 되는 가정은 자신 안에 보편적 인격이 자리잡으면서 보편적이지 않은 악을 쫓아 내야 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자신의 문화 속에서 악에 대한 싸움은 공교회적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나치 정권에 맞서 싸우는 투쟁에서 바르멘 선언은 교회들에게 '다른 모든 주인'을 거부하고 '우리가 들어야 하며, 살든지 죽든지 신뢰하고 순종해야 할 한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께 충성을 바치라고 촉구했다.
토론, 나눔
조준모 교수님의 '당신은 예배자'라는 곳에서 누구라도 자신이 예배하고 있는 대상이 있다. The begining is everywere. We exist in a circle. 우리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그리고 우리가 속한 문화는 이방인을 가만히 두지 않은 문화가 된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겪었던 고민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온다. 나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매일의 삶에서 나는 '자기부인'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가?
민네이션, 생각
학예론'에서 루소가 이야기한 것처럼 문화가 가지고 있는 타락, 엔트로피의 법칙을 여전히 니체와 에드워드사이드도 비판하고 있다. 문화는 정말 이렇게 타락의 길로만 가게 되는 것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는 도대체 누가 만드는가?전도하는 방식 가운데 숨어 있는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나는 나의 정체성을 너무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삶을 규정해 가는 것은 아닌가? 다시 나를 돌아보는 자기부인'의 과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종교적 정체성과 사회적 정체성이 겹칠 때 우리는 우리와 이질감을 갖게 되는 그룹들을 배제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 정체성이 부족할 때 우리는 계속해서 그 정체성을 추구하려고 한다. '세상은 너로 인하여 정결하게 되고, 세상은 너로 인하여 ....' 아직 우리는 포기할 수 없다. 우리가 불안해 하는 것은 대부분 들뢰즈가 가지고 있던 방법론 때문이었다. 출발지점도, 도착 지점도 없는 것 말이다. 프로이트를 들뢰즈가 비판하고, 들뢰지를 볼프가 비판한다. 그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된 들뢰즈의 비판은 사실은 자본주의의 대안을 내 놓지 못하고 있다면, 볼프의 비판으로 자본주의의 대안이 나올 수 있을까? 시작할 때 많은 이데올로기들이 작용하는데, 그것은 지뢰와 같이 누군가가 그 고민에 이르렀을 때 문제가 되거나 회복이 되는 식의 장치들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생각하고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낙담하지 말라. 그것은 체제 속에 시스템 속에 남겨 둘 수 있다. 보편성으로 갈 수록 차이의 정치는 힘들어진다. 그럼 어떻게 하지? 칸트처럼 보편적인 가장 기본적인 것은 상정한 후에 그 다음에 비율적으로 특수성을 수용하는 방법으로 가야하는가?
참고 1. 알랭바디우, 사도바울
‘유물론적 해석’ 선두 철학자 바디우
차별·차이 넘어선 ‘보편적 개별성’ 에 주목
기독교 세계의 실질적 정초자 사도 바울을 유물론적·급진적·혁명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철학적 시도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최근 유럽 철학의 뚜렷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기독교 보수주의의 규범을 만든 사람이라는 바울의 오래된 이미지를 뒤집어 인간해방을 위해 싸운 혁명 투사로 재탄생시킨 이론적 작업의 선두에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사도 바울>이 있다. 1998년 이 책이 출간된 뒤 바디우의 관심을 비판적으로 이어받은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남은 시간>(2000년)이 출간됐고, 다시 슬로베니아 출신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죽은 신을 위하여>(2003년)에서 바울을 새롭게 해석했다. ‘바울 3부작’이라고도 할 이 책 가운데 지젝의 저작이 지난해 우리말로 옮겨졌고, 이번에 바디우의 저작이 우리말로 나왔다.
1937년 생인 바디우는 질 들뢰즈(1925~1995) 이후 프랑스 철학계를 주도하는 생존 학자들 가운데 맏형 뻘이다.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에 대립해 보편성·주체·진리와 같은 전통적인 철학적 주제를 사유의 과녁으로 삼아 작업해왔다. 낡은 주제를 우리 시대의 조건들 속에서 생생한 문제로 부활시키는 것이 바디우의 목표라고 해도 좋을 것인데, <사도 바울>에서 그의 그런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사도 바울〉
이 책에 드러난 바디우의 심중 생각은 2000년 전의 인물인 사도 바울을 현대의 투사로 되살려내는 것이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자본주의의 제국주의 질서에 맞서 볼셰비키당을 이끌었던 혁명가 레닌의 상을 이 열성적 전도자에게서 찾아내는 것이다. 바울과 레닌이 연결된다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는 <자본>을 쓴 마르크스와 연결된다. 이 책에서 바디우가 특히 주의 깊게 분석하는 것이 바울의 텍스트(편지들)인데, 그 텍스트들은 조직이 처한 구체적 상황에 개입하는 일종의 투사적 문건들이라는 점에서 레닌의 글들과 닮았다.
예수와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던 바울은 막 등장한 이단(기독교)을 열정적으로 박해한 바리새파 유대인이었다. 서기 33~34년께 기독교 박해라는 사명감에 들떠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그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계시체험을 했다. 개종과 회심을 불러온 그 체험을 통해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부활했음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바리새파 유대인 사울은 기독교 사도 바울이 되었다.
그 계시체험이 말하자면,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이다. 길 위에서 우연히 신의 목소리가 난데없이 자기 안으로 들이친 것인데, 여기서 그는 진리와 소명에 눈뜨게 됐고 자기 자신을 주체로 일으켜 세웠다. 그때 진리란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사실이고 소명이란 그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는 일이다.
바디우가 강조한는 것은 바울이 차별 없는 평등을 이 진리의 핵심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성별이든 민족이든 신분이든 진리에 참여하고 진리를 공유하는 데는 조금도 장애가 되지 않았다. “할례를 받거나 받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갈라디아서 6장 15절)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갈라디아서 3장 28절)
그 점이 베드로 중심의 ‘유대-기독교인’과 바울의 차이였다. 당시 베드로가 이끌던 초기 기독교는 할례받은 사람, 곧 유대인만을 개종 대상으로 삼았는데, 바울은 오직 ‘진리’만을 앞세움으로써 기독교가 유대 울타리를 뛰어넘도록 했다. 바울은 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참여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신의 자식이 된다고 선포했다. 어떤 특권도 어떤 지배도 허락하지 않았다. “특권을 부여받은 모든 것들에 대한 반란자”가 바울이었다.
바울의 선교운동은 오늘날로 치면 혁명가들의 전위운동이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교회=당을 조직하고 세포를 만들어냈다. 조직 건설은 진리를 전파하고 실천하려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교회의 조직화가 역사의 시련을 견뎌내는 과정에서 거의 필연적으로 자기목적화하고 권위주의화했다는 사실에 있다. 진리를 실천하려는 운동이 진리를 배반하는 과정이 되고 만 것이다.
이 배반에서 벗어날 길은 없을까. 바디우는 직접적 해답을 제시하는 대신에 바울이 보여준 ‘보편적 개별성’의 차원에 주목한다. 진리의 보편성은 개별성과 특수성을 뛰어넘을 것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모든 차이와 차별을 초월해야 한다. 그러나 그 보편성이 차이의 억압이나 부정이 되어서도 안 된다. 차이가 보편을 부정하지도 않고 차별을 용인하지도 않는 차원을 바디우는 ‘보편적 개별성’이라고 지칭한다. 진리를 깨닫는 주체로서 개인의 개별성이 훼손되지 않으면서도 그 개인들이 모든 차이를 넘어 보편적 진리의 지평에 나란히 서는 것, 이것이 보편적 개별성이다. 바울의 텍스트는 바로 그 차원을 보여준다고 바디우는 말한다.
참고자료_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20150906_일요독서모임
배제와 포용_미라슬라브볼프
1장, 거리두기와 소속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