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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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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Sep 25. 2016

구원과 보편

칼바르트 교회교의학_신준호 교수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과 같이

누군가로 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들이


우리의 접근성을 막고

새로운 관점과 신앙을 멈춰 버리는 일이 생긴다


칼바르트가 대표적인 경우이고

칼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이 없는게 한국의 현실이다


직접 칼바르트를 전공하고 돌아오셔서

칼바르트 신학의 정수를 듣고 나니 점점 흥미가 생기고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항상 고민하던 구원과 창조 그리고 보편

우리의 구원이 단지 우리를 위한 것인가


칭의론과 신정론 같은 아포리아들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해결이 되는가


고민하고 물어봐도 아무도

이야기 해주지 못했던 것들을


보물찾기 하듯이

조금씩 찾아가는 느낌이다


칼바르트의 신학을

교회교의학으로 만나보자




20150706_현대기독교연구원

김준호_칼바르트 교회교의학

그리스도의 수난


들어가기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은 첫번째는 낮아지신 하나님 - 두번째는 높여지신 하나님 - 그리고 한 하나님 안에서 빛이신 예수님 - 그리고 그 예수님의 역사성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심판당하시는 심판자'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심판자 - 심판당한 심판자 - 심판자체'로 오신다.


수난, 능동성


예수의 수난의 비밀은 능동적, 활동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능동이고 활동으로 수난을 받아 들이셨다. 수난을 받아 들이는 것은 능동태'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계획되어 있는 수난(p351)을 예수님은 어떻게 받아들이시고 그 길을 걸어갔는가? 예수의 고난은 하나님 자신의 고난이었다. 문제는 고난의 크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고난을 당하시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보편적 상황'이 변경되었다. 그것은 멸망에서 구원으로 바뀌었고,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상황이 시작된 것이다. 이전까지 모든 인생과 앞으로 살아갈 모든 인생의 생명의 근본적인 전제가 바뀐 것이다. 수난의 의미는 바로 이러한 보편적 상황의 변화에 의해서 화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화해는 멸망과 구원 사이에서 분리되어 있던 인간의 기본적인 위치가 바뀐 것을 의미한다. 멸망에서 구원으로 옮겨지면서 하나님과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다. 심판당하신 심판자'의 고난과 부활은 완전히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


그리스도, 고난


능동적 활동'이라는 의미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길이라는 뜻이다. 보편적 상황의 변화'라는 의미로 모든 인간의 상황은 알든 모르든지 바뀌게 되었다. 구원은 이미 주어졌고,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이지, 구원을 받았는지 못받았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영원한 죽음, 육체의 죽음


육체의 죽음만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으로 들어가는 인간의 보편적인 상황을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바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함께 육체의 생명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만인 구원설'을 바르트가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중심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수난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행동과 연결되어 있다.




민네이션, 생각


인간이 살면서 경험하는 고난'과 수난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한 고난의 문제가 어떻게 복음으로 연결되는가?예수님의 죽음과 수난으로 우리의 모든 고난과 수난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돌입한다. 심판자 자신이 스스로 심판을 담당함으로써 그 결과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졌다. 인간이 회복되고, 새창조가 되면 일어나는 일은 선악과 이후의 상황이 완전히 새로운 보편적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선악을 판단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더이상 능력의 범위를 선악판단까지 발전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도 사랑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된다. 그리스도의 시간, 이스라엘의 시간, 한국의 시간 개념은 각각 다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불트만, 바르트


불트만은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자체는 불가지론으로 보고 그것이 우리에게 의미로 다가올 때만 진리라고 했다. 이에 대해서 바르트는 이것을 반대하고 우리가 이해하든 못하든, 의미를 부여하든 못하든지 간에 객관적으로 존재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실이 우리에게 이미 다가와 있다고 이야기 했다.신정통주의를 자유주의로 치부해버리기에 불트만과 바르트의 차이를 통해서 볼 수 있듯이 너무 큰 오류가 있다. 초대교회에서는 예수님의 고난을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순환, 고난


하나님 자신이 등장하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등장하지 않아도 육체의 죽음은 해결될 수 있다. 하나님이 자신이 꼭 필요했다. 하나님이 등장하셔서 객관적인 창조가 다시 일어난다.


화해, 회복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과 화해되었다. 예수님의 거룩한 피 안에서 생명의 길이 열렸다. 그가 우리대신 고난과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우리가 처한 고통과 죽음의 원천을 해결하셨다.고통의 원천을 다루지 않고, 현상만 다룰 때 끝이 없어진다. 원천을 제거하지 못하면 현상의 치유는 영원하지 않다. 원천의 문제가 해결되면 비로소 우리의 악과죄와 악마와의 전투는 끝이 난다. 죄의 제거가 바로 화해의 시작인 것이다. 죄자체를 비존재, 즉 무로 던저 버리게 됨으로써 죄는 존재하지 않게 되고 결국은 극복되었다.


죄, 죽음


죄의 삯은 사망이다. 인간의 인생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수난당하기 이전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가? 성경에서는 우리가 저주와 원수된 상황에 놓여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죄가 예수님의 수난에서 제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죄의 처참함과 정도의 깊이는 하나님 자신이 등장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볼 때 알 수 있다.


고난, 충족


죄 자체를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종결하였다.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기 때문에 우리의 고난은 끝났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이제 우리가 그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하나님되심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게 아니라, 우리의 죄가 아니라 죄자체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것이다.


칭의, 그리스도


그래서 우리 자신이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회복시키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깐 우리의 의가 바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본적인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신론적 실존주의적인 입장에서 자신의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을 너무 작은 범위로 소급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혹, 누가복음


예수님이 광야에서 당하셨던 고난을 돌아볼 때 바르트는 누가복음에서 이야기하는 광야의 유혹을 중심으로 이야기 한다. 자기확신'을 증명하라는 마귀의 유혹은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시험이었다. 자기가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자기를 확신하는 것,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경건한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다. 오직 한 분 예수님만이 경건한 인간이이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칭의를 받는 것이다. 자신이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자신의 우상화로 빠진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도 이런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자기 확신에의해서가 대부분이다.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지만, 구원의 결과는 행위로 나타난다. 자기 확신을 구원의 확신으로 둔갑시킨 신앙의 결말은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을 의지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지고 오는 것이다.


겟세마네, 심판자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옮겨 달라'고 했던 것은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능동적인 고난의 참여가 일어나기 전에 예수님의 주저하심?을 볼 수 있다. 사단은 비능동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게 된다. 결구은 악은 사라지게 되고, 사단의 사단됨은 그리스도 안에서 소멸한다. 그리스도가 이긴 것이 아니라 사단의 사단성이 소멸된 것이다. 민네이션 :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 무저갱으로 떨어진 사단을 어떻게 설명하지?




민네이션,생각


신앙'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인가?대부분 교회 목사님의 설교, 해석관, 인생관, 물질관, 교회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목사님들의 관점은 어린시절과 청년시절의 경험과 신학교시절의 학 및 활동에 의해서 경로의존성을 가지고 수확체증하게 된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멈춰진 신앙의 시계가 성도들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성도들은 또 다시 이러한 순환을 거쳐서 소위 믿음이 좋아지는 것을 교리적인 탄탄함으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신앙을 그런게 아니다. 삶은 그런게 아니다. 우리 스스로 정한 기준은 항상 주관적이다.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는다고 해도 그것은 주관적이다. 마찬가지로 주관적인 해석학을 신학이라고 한다면 신학을 객관적이라고 하는 것도 참 웃긴 일이 아닌가? 칼빈이 왕도 아니고, 완전한 인간도 아니지 않는가? 이해할만하다라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교리에 비추어봐야 진리인지 알 수 있다라고 하는것은  잘못된 것이다. 바르트의 이야기는 더 많이 있지만 신정통주의를 자유주의신학으로 등치시키는 사람들의 관점을 존중하여 더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바르트 안에서, 화해론 안에서 신정론도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이 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나는 실존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었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 즉 진리이다.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의로움, 칭의 논쟁은 바르트 안에서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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