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는 어떻게 우리의 삶을 바꾸는가
반대로 생각해보자
말은 누가 만들었는가
언어라는 것은 하나님이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 언어를 인간과 사용하지 않으시는가
현대 기독교 문화의 단정적인 문제는
하나님과 대화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듣기라는 특화된 기술로
혹은 예언하는 방법이라는 은사의 강화로
기독교 문화는 어느새 언어의 중요성
대화의 가능성을 닫아 버렸다
보수주의자들에게서 배우는 것은
반면교사이다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려고 하기보다는
무엇이 가짜인지만을 찾아내려는 모습 말이다
근본주의의 진정성은
정통주의와 통하게 되어 있기 마련인데
이상하게 성경으로 돌아가자고하면
이단이 나오고, 비본질이 나온다
그리스도와 동행한다고 하면
어떻게 그리스도와 대화하지 않을 수 있는가
동행에는 임마누엘의 특징인
대화의 가능성이 전제된다
대화가 어려운게 아니고
계시의 특별한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전제만 있어도
하나님과의 대화는 일상으로 내려 앉는다
케리그마라는 선포가
대화의 위상을 포섭하지만 않으면
파라클레오라는 일상의 언어로
하나님은 친근하게 대화하신다
그리스도와 걷는 삶의 기초는
그리스도와 시작하는 자연스러운 대화이다
신뢰의 본질은 바로
이 대화에서 시작한다
인간은 언어로 창조되었기에
언어로 구원을 받는다
언어는 믿음의 본질이며
대화는 신앙의 기초인 이유가 이것이다
로완윌리엄스의 이야기를
경청해보자
20150810_현대기독교연구원
김진혁 박사(옥스포드)_로완윌리암스
신뢰하는 삶,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들어가기
성공회의 신학이 주목을 받고 있다. 아마도 세상과 세속이라는 구분을 굳이 두지 않는 학제간의 자유로움 때문이 아닐까한다. 앞으로 10년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책이 될 것이다.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니케아신조와 교리를 가지고 '신뢰하는 삶'으로 정리한다. 성공회는 모든 역사를 인정하는 다양성의 측면은 발달했지만, 자신들만의 독특한 신앙은 오히려 발전시키지 못한 부분들이 있다. 다양한 신학적 입장들과 신학자들이 배출 되었기 때문에 반대로는 하나의 신학적인 강한 전통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윌리엄스는 교부학에 정통해 있다. 로완은 신기하게도 이단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리우스에 대해서 연구해서 인정을 받는다. 또한 정교회 신학에 강했다. 시간이 나면 라틴어로 교부들이 쓴 글들을 읽었다. 칼라너에게도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초기에 또한 칼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을 연구한다. 철학적으로는 헤겔과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았다.
아타나시우스, 아리우스
시대정신으로서 인간의 발견은 신과의 명확한 구분을가지고 왔다. 당시에 합리적이었던 아리우스의 입장에서 볼 때 신학은 선과악을 구별할 수 있는 지성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합리적이기 때문에 시대정신을 읽었다면, 아타나시우스는 오히려 비합리적인 부분이 강했기 때문에 시대정신과 반대로 간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시대정신을 판단하고 있는가?
질문, 표면
신학은 독일에서 시작해서 영국에서 꽃을 피우고 미국에서 망한다. 20세기에 존 스토트를 읽었다면, 21세기는 로완 윌리엄스다?로완 윌리엄스 개인이 대단하기 보다는, 그는 성공회 전통의 정수를 끌어 신학을 한다?로완 윌리엄스는 현존하는 최고의 조직 신학자이다? 로완윌리엄스는 논리적이지 않다?
로완윌리암스, 배경
1950년 웰이즈 스완지에서 태어났다. 스완지는 축구로도 유명하지만, 추하면서도 매력있는 도시이다. 스완지 대학교에는 비트겐슈타인이 교수로 있었다. 그의 사후에도 비트겐슈타인을 연구하면서 철학과 문학이 발달한 대학이 된다. 문학과 신학이 동등하게 전해지는 곳이 스완지라고 할 수 있다. 캠브릿지 옥스포드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가르쳤다. 1978년에는 성공회 사제 서품을 받았고, 몬머스 주교, 웨일즈 주교, 켄터베리대주교(2002)를 역임했다. 2013년 1월 케임브릿지 모들린 컬리지에서 35번째로 마스카가 되었다. 그해 6월 사우스 웨일스 대학교 총장이 된다. 신학의 일관성을 추구하고 깊은 개인적 영성과 정치적 활동이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보여준다.
비트겐슈타인, 로완
10대 중반 흐린 가을 오후 비트겐슈타인을 읽고 빠져들었다. 1960-70년대 신학계와 부조화를 겪게 된다. 비트겐슈타인(1889-1951)의 철학의 종겨적 성격을 발견하고, 러쉬 리를 재해석한다. 의미는 구체적 상호작용의 맥락에서 일어난다. 의미를 보려면 언어적 활동과 실천으로 나누어진다. 신학은 교리나 개념의 집합체가 아니다. 신학은 전례와 신앙생활의 구체적이고 육화된 패턴 속에서 드러난다. 신학은 개념 자체뿐만 아니라, 그 개념들이 '더 포괄적인 사회적 환경 속에서' '작용되는 방식'도 중요하다. 그리스도에 관련된 사상뿐 아니라 생각과 행위, 기도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에 대해서 말한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을 설명할 때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의 상호작용을 이야기하고 있다. 앎이라는 것은 인지적인 작용 이전에 우리의 실천속에서 드러난다. 신조라는 것도 상호작용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전통은 새로운 환경 속에서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한다.교리는 외우는 것이 아니라, 역사속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배워가는 과정인 것이다. 교리를 통해서 우리는 배움을 얻는 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성공회, 정교회
1975년 '블라디미르 로스키의 신학'이란 제목의 박사논문을 쓴다. 그러나 정교회 신학과 철학의 전반적인 연구를 한다. 로스키의 부정신학을 인식론적으로 한정짓지 않는다. 하나님의 타자성을 이야기하고 타자의 어색함을 고민한다. 어떻게 두 다른 주체, 인간, 전통이 의미를 공유할 수 있을까? 내가 매일 경험하는 타자성은 극복될 수 있는 것도, 절대화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로스키는 삼위일체론이라는 것은 인간 지성의 십자가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적 사고 방식의 십자가라고 할 수 있다. 신비라는 것은 하나님의 근원적인 신비이면서 찬란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 형상의 회복은 자기 비움의 주체들의 사회적 상호 교환망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타자의 근원적 낯섦이란 다른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작업이라는 뜻이다. 비트겐슈타인과 로스키는 로완의 초기 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근대의 자율적 주체라는 개념을 넘어설 수 없는 사상적 틀을 제공했다. 신앙이란 추상적 교리 체계를인정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되고, 몸을 매개로 이뤄지는 일상의 삶의 패턴을 가식 없이 인식하고, 이러한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사회적 관계망에 참여하고 헌신하는 것이다.
신뢰, 신뢰하는 삶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사랑을 보여주닌다. 추상적인 관념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보여주는 삶을 우리는 받았다. 스스로 완벽한 분이 왜 창조를 해야하는가? 그것은 상호관계의 존재론을 설명할 수 있다. 창조와 구속은 두 다른 사건이 아니다. 창조는 위험을 무릅쓴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전능도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인내하고 씨름하며 당신의 길을 일구어 가신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존재 증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신앙의 삶을 살았던 이의 살 냄새를 맡을 수 있다.
표면, 비극
왜 로완은 테러, 대량학살, 이혼, 약물중독, 시위 등을 주제를 다루는 것을 좋아하는가? 바르트적인 기독 중심론과 비극의 윤리적 우선성을 가지고 오기 때문이다. 도날드 맥키논이 이야기한다. 무의미한 세계 속에서 어떻게 의미를 찾을까? 이 답은 티에스엘리엇이나 셰익스피어가 표현한 사랑의 개념에서 찾는다. 트라우마와 원죄의 관계는 삶, 생명, 기쁨을 가로막ㅇ느 것을 배워간느 과정으로 설명한다. 스리스도 신앙의 불편함은 고통 속의 신의 침묵이 하나님의 지성소가 된다는 것이다. 비극의 패턴은 인내-좌절-재헌신으로 간다. 이것이 윤리적 부정신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
낯섬, 그리스도
예수그리스도는 피와 살로 만들어진 완전한 사랑이다. 그 분의 삶은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과 신뢰로 충만해진 삶을 보여주는 열쇠가 된다. 그 분의 삶 속에서 낯섦은 언어와 행동의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된다. 2중적 의미의 희생양으로하나님과 죄인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우리는 고민한다. 부활은 사랑의 질기고 단단한 끈기와 집요함을 보여준다. 제 8요일은 부활과 새 창조의 날이다. 그리스도의 새 영을 호흡하는 날이다. 결국, 로완의 신학은 성숙과 자라남과 인내의 인간됨을 지향하게 된다.
민네이션, 생각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성서, 세례, 성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러나 비트겐슈티인의 논리처럼 언어체인 안에서 실제로 행함이 없는 상태에서는 위의 제사들은 의미가 없다. 실제로 세례를 통해서 우리의 몸이 거듭나야 그 것이 진실로 언어가 된다. 진실로 파토스를 만들어 낸다. 로완은 비트겐슈티인을 통해서 공동체의 실재성 안에서 만들어지는 실체를 중심으로 신앙을 펼쳐나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긍정신학은 긍정문으로 시작해서 있는 것을 증명한다면 부정신학은 없는 것을 있는 것에서 분리해 냄으로써 있는 것을 더욱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로완은 교부철학이 가지고 있는, 교부신학이 가지고 있는 개념들을 현실세계에서 자유롭게 쓰고 있다. 우리는 어둠속에서 우리의 인식과 경험을 내려놓고, 새롭게 다가온 체험을 기다리게 된다. 계시의 세계에서는 우리는 어둡다. 알 수가 없다. 이러한 방식은 사실 부정의 신학의 출구이다. 따스한 어둠 가운데 우리는 계시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게 된다. 신비에 대면했을 때 나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부정성의 신학은 사실 성경적이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자기를 따르고 십자가를 지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나는 계속해서 나를 부인하고 내가 누리는 관계를 부인하고, 소유를 부인하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나서 이제 현실에 긍정이 오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예'가 된다. 인간성은 자기 비움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인간들의 공동체는 비우는 것에서 부터 시작된다. 창조는 자기 비움에서 부터 시작한다. 자기비움은 삼위 일체 안에서 3가지의 부정성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삼위 안에서 인간이 되신 예수님, 성자가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신다. 그 삼위가 이 땅에 내려오신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다. 하나님은 오히려 더 부요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더 비워짐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신다. 비워짐은 사실 더 큰 관계가 되는 시작인 것이다. 타자성의 철학은 레비나스에게서도 배울 수 있고, 몸의 현상학자 퐁티에게서도 로완 윌리암스의 신학의 비슷한 면모를 볼 수 있다.
참고_로완윌리엄스
세계 성공회의 대표인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57)는 대주교이기에 앞서 세계적인 신학자의 한 사람이다. 그는 2002년 캔터베리 대주교로 선출되기 전까지 옥스퍼드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다.영국 남부 웨일스에서 가톨릭 배경을 가지고 태어난 그는 성장하면서 성공회 신자가 되었고, 케임브리지대와 옥스퍼드대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신학자의 길로 접어든다. 특히 26세의 젊은 나이로 옥스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세계적 신학자로서의 면모를 일찌감치 발휘했다. 박사논문은 20세기 러시아정교회 신학자인 블라디미르 로스키를 연구하면서 삼위일체 신학을 주제로 썼다.그는 영국 학계를 통틀어 케임브리지대와 옥스퍼드대에서 동시에 정교수 자격을 획득한 유일한 사람으로 기록됐다. 학문적 안목이 탁월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고, 영성에 대한 관심도 높다. 그의 강의와 저서를 접한 사람들은 “빈 자리 없이 꽉꽉 채워져 있는 느낌을 받는다”고 평한다.영성에 대한 관심은 ‘기독교 영성입문(The wound of knowledge)’을 통해 기독교 영성사를 정리했을 정도로 조예가 깊고, 매일 30분씩 기도 시간을 따로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옥스퍼드대학 교수 시절 헨리 나우웬처럼 삶 속에서 신학을 실현하고 싶다고 피력한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그는 또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신학자이자 저술가이다. 수많은 신학적 분야와 교회일치 문제 등에 깊이 관여해 왔고, 철학과 신학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연구를 거듭해왔다. 특히 초대교회와 교부신학자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 교회사 연구를 통해 교부신학과 이에 따른 신학적 논의를 전개해왔다. 또 정교회와의 인연으로 현대 러시아정교회 신학자들과 대화를 시도하면서 개혁신학을 변호하기도 했다.그의 저서 ‘기독교신학'(On Christian Theology – 사진)은 신학적 입장을 잘 정리한 대표서로 조직신학에 대한 다양한 이슈와 논쟁에 대한 답변을 모은 것으로 유명하다.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이후는 다양한 사회 윤리적 이슈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신학자이자 사제이기도 한 그는 영성적 이해를 바탕으로 사제직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도 했는데, 그의 통찰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이해를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한성공회 주낙현 신부는 “사제직에 대한 윌리엄스 대주교의 시각에 자신의 사제직을 되돌아보게 됐다”고 말했다. 윌리엄스 대주교는 ‘현대문화 속에서의 그리스도인 사제직’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십자가 안에서 보이는 하나님은 자신의 ‘영역’ 수호를 거절한 분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스스로 영역 수호를 거절하는 인간의 삶 속에, 그리고 그 인간의 삶을 통하여 지극히 역설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은 존재한다. 이 삶 속에 하나님은 모든 순간과 생각과 행동에 침투하시며, 그 삶을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신다. 십자가 사건의 결과 더 이상 다시 닫힐 수 없는 하늘과 땅 사이에 어떤 열린 문이 마련되었다. … 이 공간 속에서 인간은 오직 주어진 것들에 마음을 열며, 하나님은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다만 멈추지 않는 사랑 안에 머무르신다. 그 사랑은 인간의 세계와 인간의 언어로는 오직 ‘상처입기 쉬움'(vulnerability)을 통해서만 상상할 수 있다. 예수의 행동은 이 공간과 문을 여는 것이었다. 사제직의 임무는 이 예수를 통하여 마련된 공간을 집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공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사제직이란 예수 안에서 신과 인간의 행동이 겹쳐진 그 공간에 자리잡는 것이다.”부인인 제인 윌리엄스 역시 신학자로서 인도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대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런던의 킹스칼리지, 세인트폴신학센터 등에서 방문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