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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Feb 19. 2024

영광의 무게가 만드는 리듬

여호수아서 머리말_메시지 성경

여호수아서에서부터 시작해 에스더서까지 이어지는 이 열두권의 책은 흔히 '역사서'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역사'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이, 이는 무엇보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일에 주목하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히브리 백성은 그들 내면과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시하고 거기에 전력으로 뛰어든 이들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 안에, 또 그들의 공동체 안에, 그리고 그들 안에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라는 그들의 믿음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 조상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 분은 그 모든 위대한 기적을 우리가 보는 앞에서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수없이 많은 길을 지나고 여러 나를 통과하는 동안, 그 분은 한 순간도 우리에게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 그분은 모든 민족, 곧 이 땅에 살던 아모리 사람과 모든 사람을 쫓아내셨습니다. 우리도 함께 하겠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예배하겠습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_여호수아서 24장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인생과 세상을 논할 수 없으며, 아무리 특별하고 신비한 체험이라도 이야기의 중심이 될 수 없다고 여겼다. 하나님은 천문학적, 생리학적, 심리학적 현상으로 축소될 수 없는 분이셨다.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언제 어디서나 그 분의 뜻을 이루시는 분, 사람ㅇ르 불러 일을 맡기시고, 믿음과 순종을 이깨우시고, 예배 공동체를 일구어 내시고, 자신의 사랑과 자비를 나타내시며,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셨다. 그런데 그 분은 이 모든 일을 막연한 일반을 향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과 더불어 - 곧 역사 속에서 - 행하셨다_메세지 성경 여호수아서 머리말




현상을 사는 인간은 언제나 현상 자체에서 일어나는 일을 순간순간 모두 인지하지 못한다. 아주 작은 것들이 남아 있는 기억의 파편을 연결하여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간다고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기억의 파편들이 하루하루 다 날아가버리고 오랜시간 희마한 조각 한 두개를 붙잡고 시간의 허무함을 이야기한다. 하루에 한 번이라도 흩어져버리는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시간은 결국 '해석의 시간'이다. 기독교에서는 다름 아닌 '묵상'의 시간이다. 묵상의 시간은 성경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보고 자신에게 일어난 '역사'를 돌이켜 보아서 하나로 엮어내는 작업이다. 그래서 언제나 묵상은 자아성찰이면서 내면의 고백이 될 수 밖에 없다.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내면의 목소리를 '셀프 텔러' self-teller라고 부른다. 자신이 어디에 있던지 무슨일을 당하던지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긍정적 반응'과 '부정적 반응'을 동시에 이야기하는 존재라고 한다. 그래서 긍정적 반응을 많이 하는 셀프텔러가 미래를 긍정적으로 만든다는 자기개발서들이 나오기도 한다. 기독교에서는 셀프텔러가 아니라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내면에 거주하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믿는다. 그러니깐 예수님을 나의 영혼을 구원하고 영원부터 지금까지 나의 모든 허물과 죄에서 구원하는 것을 넘어서 영원히 함께 산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한 가지의 일을 할 때도 의미의 해석에 있어서 나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을 서로 견주어 보고 그것을 종합하여 기억도 하고 미래에 선택할 수 있는 여지도 남겨 놓는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만 세상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은 '정교한 시계공'이 이 세상을 이론과 법칙으로 만들어 놓고 자율적인 우주의 작동원리로 인해 스스로도 개입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한편으로 실존주의의 관점에서는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 우선한다는 논리로 의미부여의 원인을 보이는 것에 한정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되면 보이지 않는 신의 존재나, 가치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연결해서 허무주의로 발전하기도 하고 모든 의미가 쪼개지는 포스터모더니즘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하나님이 내 안에 사신다고 믿으며, 그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사시는 것 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한다고 믿는다. 


살아계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단지 표현자체로만 귀결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시고 개인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셔서 함께 고민하고 아파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믿는 믿음의 표현이다. 그러니 믿음이라는 것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셨다'라는 것을 넘어서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신다'라고 하는 고백이다. 이 고백을 간단하게 '임마누엘'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표현이다. 어느날 성경의 역사가 개인의 역사와 만나는 날이 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경험이 나의 경험과 만나고 이른바 '지평 융합'이 일어난다. 나의 삶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역사가 하나로 융합되는 시간 말이다. 


여호수아서를 비롯한 역사서는 이스라엘의 이주의 역사이면서 하나님의 이끄심의 순간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실수와 죄악들도 드러나고, 인간이기 때문에 고민하는 것들과 집단행동의 문제와 정치적 오류로 인한 판단미스도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면에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떤 방식으로 인도하시며 구원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묵상의 시간'은 나의 기억의 파편을 끌어 내어서 성경 말씀 앞에 내려 놓고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의미로 엮어내는 시간이다. '쉐카이나'라는 단어는 영광이라는 단어고 영광이라는 단어는 '무게'라는 단어와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에 무게가 생긴다는 것이고 그것은 다시 우리의 삶에 리듬이 생긴다는 것과 같다. 


묵상을 하면서 하나님의 일들과 나의 인생을 엮어내는 시간동안 나의 인생에 무게가 생기고 다시 무게들이 일정한 혹은 변칙적인 리듬을 만들어 내면서 삶의 활력이 생기고, 인생의 즐거움이 생긴다. 리듬이 없는 인생은 무미건조하고 너무 가속화딘 인생이 된다. 영광의 무게가 없다면 우리의 삶은 몇 배속으로 돌려 놓은 영상의 흐름과 같아져버릴 것이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말씀이 오늘날 나의 인생과 만나서 새로운 도전을 만들어 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와 같은 방식으로 팔레스타인을 몰아내고 그 땅을 점령하라고 하는 시오니즘은 그 자체로 '세대주의'라고 생각한다. 그 때의 말씀이 오늘도 맞다면 왜 성경의 여러가지 절기부터 시작해서 율법은 안 지키면서 그 한가지만 적용할 수 있을까? 이후에 예수님을 통한 평화의 메시지는 전쟁을 정의롭게 정의하지 않는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묵상을 통해서 거할 공간이 생긴다. 

그 공간에 창조의 생기가 불어오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지고 나는 기도의 집이 된다. 그 기도의 집에서 오늘도 흘러나오는 소리들이 나의 인생에서 하나의 노래가 되어서 사람들과 만날 때도, 일을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새로운 의미를 준다. 의미를 잃어버린 세상에서,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만 같은 세상에서 새로운 노래가 울러퍼진다. 우리는 그 자체로 아름다우며 행위로도 말로도, 표정으로도 아름다움을 이루어갈 수 있는 존재라는 깊은 영혼의 무게가 리듬을 만들어 낸다. 살아계시다면 반응하실 것이고, 살아계시다면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으로 다시 성경 앞에 선다. 말씀 앞에서 나를 비추어 보고 올바르지 않은 것들을 돌이키고, 용기를 내어야할 것들에 한 발짝 앞으로 내딛는다. 여호수아서로 오늘 하루를 열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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