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진솔한 고민과 그에 대한 반론
30대의 고민이 다르고 40대의 고민이 다른 것 같다. 항상 고민만 했던 것 같은데 요즘에는 더 큰 고민들이 길을 가다 멈추게도 만들고 심장을 두근거리게도 했다고 머리를 멈추게 하기도 한다. 나는 왜 이럴까? 왜 이렇게 고민이 많은 걸까? 지식의 저주에 걸린 걸까? 아니면 그야말로 성인ADHD에 걸린걸까? 그래도 계속 쓰고 또 되내이고 다시 고민하고 그러다보면 무엇이라도 하고 있지 않을까? 오늘은 그럼 어떤 고민일까?
나는 한병철의 글을 좋아한다. 2010년 독일을 비롯해 전세계를 뜨겁게 달군 '피로사회'는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이전까지 우리는 '면역체계'와 같은 세상에 살았기 때문에 적과 아군을 나누고 안과 밖을 나누었던 전투를 해왔다면 피로사회에서는 자기 스스로가 자신의 적이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감독관이 된다는 것이다. 말그대로 성과를 내기 위한 기계로 바뀐 인간은 누가 보고있지 않아도, 누가 재촉하지 않아도 스스로 에너지를 발산하다가 결국 무너진다는 것이다. 성과로 얼룩진 자본주의의 참상을 '피로사회'라는 단어로 잘 표현한 한병철의 책을 보면서 '더 열심히 살아야지'라는 생각보다는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인가?'라는 다른 방식의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자본주의의 가스라이팅에 스스로를 불태우고는 번아웃이 되어서 아무것도 못하는 자신을 수도 없이 봐 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민은 정말 '자본주의'는 나쁜 것일까? 이런 거다. 내가 너무 '자본주의'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지거나 어릴적 어려운 형편의 원흉이 자본주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에 모든 짐을 옮겨놓은 걸까? 주변에 보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없이 자신의 인생을 충분히 누리고 최대한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삶을 투자하면서 사는 이들을 본다. 어쩌면 어릴적에 만나던 사람들과 지금 만나는 사람들이 달라져서 인것도 같다.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고 좋은 차와 좋은 집 그리고 그럴싸한 결혼식장에서 남 부럽지 않게 걸어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주눅이 들거나 조바심이 나기 보다는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이런 질문을 던진다.
불현듯 친한 동생한데 연락이 왔다. 그 동생이 하는 말인양 자신이 정말 좋아했던 형이 갭투자를 해서 부동산으로 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그 형은 누가 아무리 꼬셔도, 자본주의의 허상을 붙잡고 출세하거나 투자아닌 투기를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소식을 들으니 너무 속상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동생은 이렇게 나에게 전화한 이유가 '형 그러니깐 형은 그러면 안되요? 알았죠?'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 뭐. 나는 아직 성공하지도 않았고, 돈도 많이 벌지도 않았고, 공부한다고 으스대지도 않으니깐 다행인데. 나도 만약에 그렇게 되면 어떻게하지? 사람의 인생은 장담할 수 없잖아? 이런 고민을 해본다. 그러면서 다시 슬며시 집어 넣었던 '자본주의'에 대해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비트코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주식이라도 해서 돈을 벌면 되는데 왜 이렇게 어렵게 사는지. 시민단체에다니면 주식투자 하면 안되는건가, 부동산으로 이득 좀 챙기면 안되는건가? 이런 고민을 해본다. 사실 많이 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런식으로 살면 결국은 겨우 삶을 살아갈텐데 그럼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을 해볼 뿐이다. 어떻게 보면 새로운 돌파구로써 새로운 수익이 없으면 결혼을 한다는 것은 무리이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교육을 시킬 자신이 없어지는 것은 매한가지다. 살펴보니 여성들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는 괜찮은 사람이 없어서이고, 남자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는 경제력이 부족해서라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렇게 되지 않을려면 나는 지금까지 내가 쓴 글이나 모았던 지식을 자본으로 바꾸는 노력을 시작하면 될까? 살짝만 해도 사짜 느낌 나는 사람들보다 잘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마음 속에서 떠오른다.
한병철이 최근에 쓴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라는 책은 이러한 나의 고민을 한방에 날려 버렸다. 왜냐하면 내가 이렇게 고민하는 과정이 바로 오늘날 혁명이 사라져버린 이유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이야기했던 공산주의에서 '공유'라는 개념은 자본주의에 와서는 '공유경제'로 바뀌었고, 이제는 얼마나 '공유'를 많이했는가가 자본으로 바꿀 수 있는 소유의 원천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은 '죽음 충동'을 가지고 있는데, 프로이트가 말하는 리비도는 성에 대한 충동 뿐 아니라 죽음에 대한 충동을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충동은 죽음을 진짜로 원하는게 아니라 죽음으로 부터 멀어지기 위한 충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깐 '죽음'을 인지했기 때문에 충동이 생기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지 않나? 나 진짜 죽어!라고 하는 사람마다 죽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경계가 없어서 죽음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죽음충동은 죽음을 인식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헤프닝이다.
한병철은 이 책에서 죽음충동을 느끼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실제로 죽음을 실행하기 위한 자살이 아니라 죽음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한 편으로는 다른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 자체를 잊기 위한 소비와 소유이다. 다른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보면 '나르시시즘' 그러니깐 나를 더욱 사랑하는 방식으로 다른 이의 존재를 지우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나르시시즘을 이용해서 소비를 증대시키는 것의 이면에는 사실 '죽음 충동'을 소비라는 개념으로 살짝 바꾼 것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인간이 죽음 충동을 느끼는 이상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러니 혁명은 이미 물건너 갔다. 인간의 충동이 원래 이러니 자본주의가 내다 파는 상품으로 나르시시즘과 소비를 위한 상품들은 찰떡같이 인간의 영혼에 붙어 있을 수 밖에 없다.
죽음을 받아들이면 죽음충동이 없어질까?
그래서 다음 고민이 생긴다. 이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했던 고민인데. 그럼 인간의 죽음 충동을 느끼지 않고 죽음 자체를 받아 들이면 어떻게 될까? 죽음이 두렵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이런 고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고민을 하는 순간 '욕망'이 내면에서 멈춰버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으면 죽는거고, 살면 사는 거지. 그런데 살 수 있으니깐 사는 거고, 죽을 때가 되면 죽겠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내면에서 충동이 멈추버린다. 이거슨 어떻게 보면 프로이트를 새롭게 해석한 자크라캉의 논리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욕망하면서 산다. 그런데 그 추구하는 바는 사실 자신안에 없기 때문에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추구하는 것을 잘 들여다 보면 자신이 원래 추구하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욕망이다. 그래서 그 욕망 자체를 직시하면 다른 이의 욕망은 어느새 멈춰 버리고 부서져 버린다. 라캉은 말한다. 그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고.
그렇다. 그럼 나의 욕망은 무엇일까? 다른이의 욕망이 아니라 나의 욕망은 무엇일까?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지 않으면, 누군가와 비교해서 잘살고 잘누리고 있어보이는 허세가 아니라면. 나의 욕망은 과연 무엇일까? 더욱이 죽음을 마주하고 난 중학교 2학년때 이후에는 죽음은 나에게 어떤 충동도 주지 못했는데 말이다. 죽음이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을 뭉크의 '불현듯'이라는 작품을 보면서도 공감했는데 말이다. 그래서 생각해보니 나는 욕망이 별로 없다. 누군가에게 돋보이고 싶은 욕망 때문에 20대 초반에는 별에 별짓을 다 했지만 막상 주목받고 나면 부끄럽고 내세울게 없는 자신이 초라해졌다. 내세울 것이 없으니깐 그런것 같아서 열심히 공부도 하고 이것저것 능력치를 끌어 올리고 있는데 사실 그럼 더더욱 주목 받고 인기 있는 것이 부담이 된다. 피곤해지는 삶인 것이다. 마치 버트란트 러셀이 '행복의 정복'의 맨 앞에 써 놓은 '부자들은 행복하지 않은데 왜 사람들은 부자가 되고 싶어할까'라는 문구처럼.
아 이러다가 밤을 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계속 써보자. 아무튼 욕망이 멈추는 곳에서 나는 무엇인가 새로운 욕망이 생겨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 결혼도 머뭇거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누구와 결혼할지 모르겠지만 또 그 사람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나를 보면서 스스로 처량하다 느낄까봐서.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욕망' 자체를 컨트롤하거나 욕망이 없는 사람을 만나면 어떨까 이런생각도 해보지만. 대부분 욕망을 숨기거나 꺼트려놓는 척 하고 마음 속에 넣어 놓고 있어서 어느순간 살아나는 것을 보기에 쉽지 않다. 마음을 옮기기가. 그래 맞다. 이건 변명이다. 또 친구들은 '그건 너가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그래.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 어떻게 사람을 만날 수 있어'라고 하는 것 혹은 반대로 '그래 그럼 너는 편한대로 그렇게 평생살아. 그렇도 나쁘지는 않지' 이렇게 말한다.
만약 인간이 영생을 산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이 죽었는데 다시 부활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럼 죽음 충동이 사라지고 오히려 죽음을 받아들이면서도 죽음 이후를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내가 꾸는 욕망의 유통기한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고민으로 이어진다. 한병철은 그의 책에서 항상 '비타 콘텐플라티바'라는 '관조적 삶'을 강조했다. 이러한 현상과 멀찍이 떨어져서 관조하고 관상하는 삶을 동경하라는 것이었다. 사실 '하라고'는 안했고 그렇다고 했다. 그러나 플라톤의 시장의 우상처럼 누군가 권위있는 사람이 말하면 진짜 그렇게 해야할 것 같은. 아무튼 한병철은 오늘날 사들의 마음 속을 헤집고 나와서 그것으로 글을 쓴다. 현상을 분석하지 대안을 내지는 않는다. 그도 엄밀히 보면 사회학자 이면서 철학자이기에. 나는 그래도 다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럼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하지? 만약 내가 영원히 산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어떤 것을 추구해야할까?
매일밤 성경을 1시간씩 읽고 모든 고민을 하나님께 맡긴 후부터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무엇인가에 이끌리듯이 사람들을 돕고, 말도 안도는 사랑을 하며, 내가 쓴 돈이 아깝지 않고 나의 인생의 시간을 들이는 것도 한계가 없었다. 배워서 남주자라는 슬로건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고,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퍼주는 나무가 되었다. 이러한 모습에 감동한 친구들을 20명이나 전도했던 적도 있고,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기도 했었다. 나는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세요! 그럼 모든 일이 풀립니다'라는 식으로 말하려는게 아니다. 어떻게 보면 내 고민의 끝에 결국 '영생'이라는 것이 남았고, 이것을 인식하고, 믿으면서 사는 것이 자본주의를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니깐 소비주의나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고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것이 나의 고민의 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깐 나의 고민은 결국 믿음이 부족했던 것이었다. 믿음이 부족했던 이유는 다른 사람과 비교했기 때문이고 그 비교함이 결국 나에게 스스로를 사랑하라라는 욕망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빨리 무엇인가를 '교환'해야 한다는 재촉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이런 생각이 든다. 그런데 교회도 다니고 영생도 믿는다면서도 자본주의가 아니면 못사는 친구들은? 아무리 그래도 38평 강남아파트에, 벤츠정도는 끌어야 하고, 디올 명품백은 몇개 정도는 있어야 하고 생긴것도 꿀리지 않게 성형이나 시술은 아무런 문제가 안된다는 친구들은? 이만큼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면서 골프도 치고 해외여행도 자주 나가고 아무런 문제없이 행복하게 사는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런 친구들이 주변에 정말 많은데 관계를 끊어야하나? 아니면 소위 말하는 믿음을 가지라고 하면서 전도 혹은 회개를 촉구해야 하나?
인생 망했다
그래서 결국 인생 망했다. 대한민국에서 행복하다는 조건으로 살기에는 이제 인생은 망했다.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는 대한민국을 살지만 완전히 다른 삶의 질서로 사는 수 밖에 없다.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며, 오른 뺨을 맞으면 왼뺨을 돌려대고,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벗어줄 수 있는 그럼 바보멍텅구리같은 삶의 질서 말이다. 당연히 이렇게 사는 것은 어렵고 힘들다. 그런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명언을 빌리자면 '사랑은 오직 전이'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다고 하니, 결국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하나님읠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 밖에는. 어쩌면 고민의 끝은 다시 사랑으로 돌아온다. 그러면 욕망이나 죽음충동이 불러일으켰던 '나를 사랑'하는 것과 '다른 사람과 경쟁하며 이기는 우월감'에서 오는 만족감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걷고 넘어진 사람을 세워지고, 절망에 빠진이에게 희망을 전하며, 앞으로 태어날 다음 세대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제도와 문화를 물려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삶으로 바뀌게 된다.
어떻게 보면 새사람이 된 것이다. 이전에 가던 길을 가지 않고 완전히 내가 할 수 없고 갈 수 없는 길을 가기로 한건.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렇게 믿음이, 마음이 생기면 '길'이 보인다는 것이다. 머뭇거리던 희미한 오솔길 앞에서 선명한 구불구불한 길이 보인다는 것이다. 안개가 걷히고 희마한 발자국들이 깊게 패인체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용기를 내서 걸어갈 볼까. 그러니 나는 다시 그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야 겠다.(경준아 전화 받을 거지?) 한병철씨에게도 작별을 고해야겠다. (그러나 책이 나오면 계속 사서 읽을께요.) 김어준씨도 그렇고, 유시민씨도 그렇고 주식투자, 부동산 갭투자 안해도 잘 살았다고 하니 나도 한번 해보지 모. 그냥 돈이 없어도 잘 살아보고, 되도록이면 배워서 남주려고 했던 것들을 돈으로 바꿔서 잘살려고 노력하지 말고. 조금 멋지고 잘생긴것처럼 꾸면서, 뭔가 있는 것 같이 행복하게 해줄 것 같이 보여서 결혼하자고 하지 말고. 이 길을 쭉 걸어가보려고 한다. 고민으로 시작된 글이 어느덧 다시 나로 돌아오는 길이었구나 한다.
사실 요즘 고민은 이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급변하는 시대에 AI윤리와 신뢰성은 어떻게 만들지? 정치적인 문제에서 가장 큰 문제는 '공천제도'이고 이러한 '공천룰'을 어떻게 바꾸지? 주변에서 성인ADHD인 사람과 경계성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이들을 대하지? 리더라고 하는 사람들이 심지어 매니저도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데 들이 받아야 하나? 남들을 이용해 먹는 사람들을 보고 나는 어떻게 해야하나? 주먹이라도 날려야 하나? 이제 학기 시작하는데 무엇부터 공부해야하지? 매주 만나는 초등학교 친구들에게 더 잘 전달하기 위해서 메타인지 방법론으로 책을 써야할 것 같은데 무엇보터 시작해야하지? 내일 있을 AI 스터디에서 발제를 해야하는데 어떤 책을 하지? 리더십 강의를 5시간이나 부탁받았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하지? 이번년도 캄보디아, 베트남, 미얀마로 일하는 동료들을 인솔해서 다녀와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동기부여가 되고 만족감이 생길까? 마음에 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이런 글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머 이런 고민들이다. 아주 자질구레한 것부터 거대한 것까지. 그러니깐 잠을 못들고 있는 것이다. 피로사회가 맞나보다. (나는 원래 3시에 자고 8시에 일어난다. 그러니 이제 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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