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 찾아오는
해가 느리게 저녁노을을 만들면서 사라진다.
아스라이 찾아드는 어두움 가운데 가로등이 하나 둘씩 켜진다. 산등성이로 달빛이 스며들고 밤하늘에는 또렷한 별의 그림자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든다. 버스를 기다리는 그 짧은 찰나에 바람과 하늘과 별과 달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기 바로 전 버스에서 내릴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주섬주섬 교통카드를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하루가 끝날무렵 다시 하루가 시작되는 것 같다. 낮의 시간대와 밤의 시간대가 서로 교차하는 길목에 서 있으면 언제가부터인지 모르게 낯설게 느껴진다.
아벨리 노통브의 '오후 4시'라는 소설을 떠올렸다. 매일매일 찾아오는, 하루에 1번은 찾아오는 오후 4시의 사람. 나에게는 사람이 아니라 시간이지만 어느순간 4시가 아니라 5시로 늘어진 것을 깨달았다. 삶이 더 느려진 걸까 아니면 내가 늦어진 걸까. 10년전만해도 누가 알려주시도 않았는데 오후 4시만 되면 습관처럼 '나는 왜 살고 있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던지곤 했는데. 이제보니 그건 내가 지금 여기에 왜 서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멜랑꼴리해진 자신에 대한 질문이었던 것도 같다. 멜랑꼴리는 우울한 기운이지만 때론 감정을 넘어서 병으로 취급되기도 하던데. 어떤 사람은 도착증세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부침의 부침'이라고 하기도 했다. 생각과 몸이 서로 따로 놀아서 떠 있는 상태말이다.
멜랑꼴리는 그 상황에서 설명되지 않고 책임지지 않는 누군가에 대한 원망이나 아쉬움이다. 내가 왜 이 세상을 이렇게 살고 있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면, 내 마음 속에서 생각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질문을 던지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어떤 구분도 없이 삶을 살아내야 하는 이들에게 어김없이 다가오는 오후 4시의 정적과 질문. 나는 어느덧 그 4시를 넘겨서 5시가 되어서야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오히려 4시를 기점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게 아니라 5시를 시작으로 하루를 다시 시작하는 것 같은 기분 때문일 것이다. 오후 4시와 5시 사이에 나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곰곰히 자신을 돌아보고 물어본다.
생각보다 이렇게 살 줄은 몰랐지만, 그래 생각보다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냥 바쁜것도 아닌 내가 만든 희망도 아닌, 그렇다고 절망도 아닌. 누군가를 책임저야 한다는 부담도 아닌 누군가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마음도 아닌.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오후 5시가 시작되는 새로운 삶 속에서 배움을 이어 간다. 누군가는 '학벌'에 콤플렉스가 있다고 했고, 어떤이는 열심히 사니깐 좋아보인다고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삶을 보면서 잠깐 걱정과 안심을 하면서 마음 속에서 보내주곤 했다. 연민과 사랑으로 시작한 공부가 이제는 조금씩 희망과 기쁨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낀다. 누군가에게 항상 답을 구했던 때가 조금씩 지나고 어떤 이에게는 정답은 아니여도 해답을 내놓아야 할 때가 된 것도 같다.
오늘도 4시를 지나서
5시를 바라보면서 걸어간다.
그리고 뒤를 돌아서 다시 4시를 돌아본다. 내일 다시 4시가 도래할 예정이지만 지금 이 분위기, 감정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임에는 분명하다. 사람들은 말했다. 현재를 즐기라고, 현재에 충실하면서 살라고. 그런데 나는 그게 잘 되지 않는다. 항상 나의 삶은 4시와 5시 사이 어딘가에서 미끄러져 가는 것 같다. 희망도 아니고 절망도 아닌 것처럼, 미래도 과거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경계에서 미끄러져 가면서 살아가고 있다보니 생각도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여기저기를 흘러 다닌다. 흘러 다닌 이들의 삶은 어쩌면 그게 처음이지 마지막의 모습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주하는 인류'가 기본적으로 '유목민'의 본성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아직도 4시를 떠나서 5시로 가는 과정에 있다. 아마도 5시가 될 때쯤이면 이제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어느덧 7시가, 9시가 되어 있을 것이 뻔하다.
4시와 5시 사이에 찾아오는
손님을 기다린다
도래할 것들을 기다린다.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도래할 것 같은 존재들을 기다린다. 예감만 있지만 그래도 오늘은 어쩐지 그런 저녁이 될 것 같다. 멀이 부메랑처럼 마른 하늘에 날려버린 마음들이 5시가 되어가니 다시 하나둘씩 마음에 들어와서 박힌다. 뜨거운 열기는 식어지고 서운했던 마음은 가볍고 단단한 마음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의 눈물이 묻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어떤이의 하품섞인 지루함이 스쳐간 것도 같았다. 다시 마음을 부여잡고 한 걸음 밤을 향해서 걸어간다. 누군가에게 나는 희망일까 아니면 손님일까 혹은 예감일까? 누군가가 찾아올 갓 같은 밤 한 없이 마음을 열고 기다린다.
나의 루틴은 언제나 비슷하다. 4시와 5시를 지나면서 느껴지는 비루함과 절망사이 고개를 떨군 앞사람의 콧소리처럼 초침에 한발자국씩 앞으로 지나간다. 절망도 희망도 아닌 그 중간을 가로질러서 밤으로 그리고 내일로 간다. 언제나 반복되는 것들의 미세한 차이이기는 하지만, 그 작은 반복의 흔들림 속에서 나는 또 발견하고 예감한다. 이렇게 11시가 넘어간다. 새벽 4시가 도래할 것이다. 5시가 되기 전에 잠이 들어야 할텐데.
https://youtu.be/EFvhW2Le4wI?si=jpVviG3Em0zo4g1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