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와 포용사이 태어나는 타자의 존재
'진리는 배타적이지만 진실은 포용적이다'
라는 문장을 정리하고 참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런데 오늘 깨달았다. 맞았다!
저 문장이 맞았다.
왜냐하면 진리truth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is'이고 내일도 'is'이고, 어제도 'is'가 된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오직 진리는 하나만 존재한다.
모든 것을 배제시키고 오직 한개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는 언제나 배타적이고, 진리는 논증할 필요가 없다.
논증이라는 것은 진실의 영역에서 나타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진실fact는 항상 변한다.
누가 보는가에 따라서 언제 보느냐에 따라서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fact라는 것은 현재에서 과거를 바꿀 수 있고, 과거에서 미래를 바꿀 수 있다.
하나의 관점에 다양한 현실fact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 정말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리인지 진실인지는
그것이 항상 'is'로 존재하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하나님은 time frame이 없으시다
그래서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하나님이시다
그 분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고
언제나 변화없으시다.
하나님이 변함없으시다는 것은 진리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진리 위해서 우리의 인생의 집을 짓는다
그러나 사람은 변한다.
스스로 진리가 되지 못한다
누가 보느냐에 따라서 언제 보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항상 변하게 되어 있다
진리는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자연스러운 것은 진리의 속성이 된다.
'진리는 배타적이고, 진실은 포용적이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버리시고, 하나님께 버림받으심은 진리가 된다면
진실 속에서는 모든 것들을 포용하는 기제가 된다.
타자를 받아들이기 위함 버림은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십자가를 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를 부정하는 것이 곧 진리를 이루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나를 부정하고 타자를 긍정하는 방식이 십자가의 진리이다.
그 때 일어나는 일들은 진실을 진리로 바꾸는, 진실과 진리가 일치하는 순간이 일어난다
번쩍하고 빛이 나는가 하면
홀연히 하늘에서 바람이 불기도 하고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부르거나
다 같이 뛰어노는 무정형의 공동체가 되기도 한다.
...
시간은 고민을 초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