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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ul 10. 2024

영성없는 진보

김상봉 선생님의 독서회를 다녀와서

대학시절, 잘 책을 읽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 권정도 읽었다고 하면 김상봉 선생님의 '나르시스의 꿈' 정도이다. 그러나 그 책에서 감명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감명이란 서양이 가진 '자기자신을 한 발자국도 나가보지 못한 존재'들에 대해서 기죽지 말고 서로 함께 만들어가는 서로주체성의 역사를 가진 한국의 주체성에 자긍심을 느끼자는 것에서였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고 잘 어울리지 않는 철학을 들여다보고 알지도 못하는 다양한 학자들을 만날 때 항상 메아리처럼 나르시스의 꿈이 들리기 시작했다. 최근 김상봉 교수님께서 '영성없는 진보'를 펴냈다. 여기서 진보는 정치권에서 진보도 있지만 역사와 물질의 진보라는 뜻도 있다. 오늘은 서울에서 선생님의 강연회가 있어서 찾아왔다. 모든 강의를 다 적지 못했지만 오늘 느꼈던 인사이트를 간단하게 적어 보았다.




이념이 사명과 만날 때


모든 정치적인 이벤트들은 언제나 이념과 사명이 연결될 때에만 가능했다. 자신의 개인적인 인생의 사명이든지 아지면 민족이 불러낸 역사적 사명이든 혹은 온 인류가 한번에 기운을 몰아 준 인류애적인 사명이든지 간에 언제나 사명은 이념을 찾아 다녔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념을 떠나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념이 없는 사명감이거나, 사명감이 없는 이념이 판을 칠 때이다. 이 두가지의 요소가 펼쳐지는 장은 다름 아닌 '정치의 장'이다. 정치는 언제나 일정한, 특수한 이념을 실현해줄 사람들을 필요로 했고 그 이념을 자신의 진정성에 담아서 사명으로 풀어낸 사람들은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념이 없는 사명은 허무하고 사명이 없는 이념은 실체가 없다.


온 세상이 하나의 우주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우주를, 이 하나의 집이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념이 역사적인 시점에서 역사적인 장소로 펼쳐질 때 우리는 그것을 '제국주의'라고 불렀다. 제국주의는 모든 것이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이념이다. 이러한 이념은 개별성을 배제하고 통일성을 강조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보편성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념이다. 그러나 세상은 분열되어 있고 사람들이 각기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면서 불의한 일들이 가득할 때 그 시간과 그 공간에서 사람들은 일종의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사명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사명은 곧 다시 이념과 만나서 제국주의는 실체가 되었다.


이념이 사명과 결합하지 못하면 공백이 되어 버린다


제국주의를 객관적으로 보면 자연스러운 이치라고 볼 수 있다. 이 세상을 지배하고 소유하는 사람들, 이 세계가 곧 나의 집이고 내가 다스린다고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감정을 무시했다. 감정을 무시하고 이성을 하나의 연결된 세계로 생각한 사람들은 제국주의 하에서 신음하는 수 많은 이들의 감정을 배제했다. 감정이 무너져서 산이되고 협곡을 이루고 동굴이 되어도 자신들이 생각이 만든 이념을 사명감으로 진행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자신의 감정도 사라졌다. 세계의 고통과 비참을 무시하는 이들은 곧잘 자신들의 선배들처럼 이성을 사용해서 도구화해버리고 자연스렇게 자신을 세계와 분리했다. 자연스러운 소외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이런 방식의 연결은 곧 제국주의와 같은 맥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근대를 지탱하는 것들


근대는 계몽주의의 시대였다.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확장하여 끝없는 무한으로 뻗어나가게 만들었다. 단지 이성이 생각이나 책에만 머무르지 않고 인간이 살고 있는 문화 속 곳곳에, 제도속 곳곳에 스며들었다. 역사의 핏줄과 같은 인간의 일상의 삶에 녹아든 계몽주의는 존재에 있어서는 물질만이 존재한다는 유물론, 보이는 것만이 존재한다라는 실증주의, 윤리학적인 측면에서 이익이 되는 것만 중요하다라고 하는 공리주의로 옷을 입었다. 오직 눈에 보이고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만이 살아 있다고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이런 계몽주의는 이전시대에 공유하고 있던 전체성을 모두 분해해 버렸고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해다. 계몽과 영혼은 함께 거닐수가 없었고 근대를 지탱하는 전체에서 축소된 이성은 자신이 이념을 실행시켜줄 사명있는 존재를 찾았다.




전체를 잃어 버리면 단체를 찾는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이유를 묻는다. 자신이 전체의 어느 부분에 속해있지 않으면 불안에 떨게 되고, 이 불안의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자신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찾게 된다. 그래서 전체가 아닌 단체를 찾게 된다. 19세기에는 국가주의, 20세기에는 파시즘의 시대가 바로 이러한 전체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찾은 단체의 일환이었다. 전체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단체를 참칭할 때 단체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의 단체를 전체로 만들려고 한다. 어떤 단체에 속한 사람이 그 단체에 정체성을 두면 자연스럽게 그 단체를 전체로 만들려고 한다. 종교가 가장 쉽게 범하는 오류이면서도 모든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의미를 묻는다.


그러나 이것 마저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모든 것이 의미를 잃어 버리고 전체 속에서 질식된 인간에게 남은 것은 여전히 달리고 있는 역사의 전차, 진보하는 물질문명 밖에 없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 열차에 올라타서 자신이 찾으려고 하는 길이나 의미를 찾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삶을 향유하기 위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허무주의를 이념으로 믿게 되었고 이와 함께 사명이 연결되면서 인간들을 허무에 빠지게 만드는 것을 사명으로 가진 사람들이 등장했다.


"선을 추구하되, 내가 추구하는 선에 도취하여 나 자신의 악덕을 잊어버리지
않을 것. 내가 행한 크고 작은 악을 늘 기억하여 겸손과 부끄러움을 잃지 말 것.
그리하여 선 때문에 도리어 악덕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있을 것."
<호모 에티쿠스> 중




자유와 연대 사이


인류는 모든 것에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했다. 자유라는 이념은 누구에게도 침해 받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권리에 대한 욕구를 실현하는 인간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처음에 이것을 고민하던 사람들은 현실을 직시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과 같은 존재로써 엄청나게 많은 이들이 자유를 추구하면서 권리를 누리고 싶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스럽게 '연대'한다.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고 자신들의 이상을 혼자서는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말이다. 연대는 그 자체로 좋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연대는 자연스럽게 외부에는 제국주의로 발전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간단한 이야기가 바로 그리스의 폴리스가 시작되는 원리이다.


제국주의의 시작은 홀로 주체성을 지키기 위한 여정이라고 볼 수 있다. 자기권리를 위한 투쟁의 역사가 곧 서양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의 역사가 발전할 수록 연대는 강해졌고 그 연대에 속한 단체, 국가, 조직, 민족들은 하나같이 자기권리를 위한 투쟁으로써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들이 연대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이성은 언제나 일정순간이 되면 몰락한다. 타락한다. 자유의 끝은 곧 타인을 위한 칼이 된다. 홀로 주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식으로 투쟁하는 역사가 곧 서양 국가의 역사가 된다. 그러면 혹시 다른 방식이 존재할까? 다른 방식으로 보는 것이 가능할까?


타인을 위한 고통이 곧 사랑이다

대학생 친구하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타인의 고통이 자신이 되었던 사람. 이 세계의 수 많은 고통이 전체로써 내 마음 속으로 들어 온 사람. 바로 존재 속에서 전체를 경험한 사람. 타인을 위한 고통이 곧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준 사람은 결국 우리 역사 속에서 '전태일' 밖에는 없다.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고, 자신의 몸에 불지는 전태일의 추락은 타인이 고통을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역사적인 헌신이었다. 타인을 위한 공동체라는 이념이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게 만들었고, 거대한 사회적인 문제에 자신의 몸을 던져서 역사의 균열을 낸 것이다. 그러니 영성이라는 것은 '이성'적인 판단이나 깨달음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감정'이 나와 분리불가능한 하나의 존재로써 자신의 것처럼 느껴질 때이다.


바로 이 때 인간은 이성의 단일성을 넘어서 전체로써 인간 전체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이렇게 분할되어 있을 때 전체로써는 절대 알 수 없지만 타인의 고통을 느낄 때에만, 그리고 그에 대한 응답이 있을 때에만 인간은 비로소 인간다워질 수 있다. 영성없는 진보의 시대에, 물질이 인간성을 말살해 가는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까?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우리 주변에 아파하는 타인에 대한 고통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힘이 있다면 타인의 고통에 다양한 방식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단지 '배워서 남주자'라는 것이라도 좋다. 배워서 남을 돕고 타인을 돕자라는 것도 좋다. 영성이 사라져버린, 다시 말하면 타인이 사라져 버린 시대에 사랑으로 영성의 불꽃을 되살려 보자.


끝.




만인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별과도 같은 것

만인의 입으로 들어오는 공기와도 같은 것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만인의 만인의 만임의 가슴 위 내리는

눈과도 햇갈과도 같은 것


토지여

나는 심는다 살찐 그대 가슴 위에 언덕에

골짜기의 평화 능선 위에 나는 심는다

자유의 나무를


그러나 누가 키우랴 이 나무를

이 나무를 누가 누가 와서 지켜주랴

신이 와서 신의 입김으로 키우랴


바람이 와서 키워주랴

누가 지키랴, 왕이 와서 왕의 군대가 와서 지켜주랴

부자가 와서 부자가 만들어 놓은 법이, 판검사가 와서 지켜주랴


천만에! 나는 놓는다

토지여, 토지 위에 사는 형제들이여

나는 놓는다 그대가 밟고 가는 모든 길 위에 나는 놓는다

바위로 험한 산길 위에

파도로 험한 사나운 뱃길 위에

고개 넘어 평짓길 황톳길 위에

사래 긴 밭의 이랑 위에 가리마 같은 논둑길 위에 나는 놓는다

나 또한 놓는다 그대가 만지는 모든 사물 위에

매일처럼 오르는 그대 밥상 위에

모래 위에 미끄러지는 입술 그대 입맞춤 위에

물결처럼 포개지는 그대 잠자리 위에

구석기 돌 엣무기 위에

파헤쳐 그대 가슴 위에 심장 위에 나는 놓는다

나의 칼 나의 피를


오 자유여 자유의 나무여


김남주_나의칼 나의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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