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읽는 프랑스현대철학
사회문제를 연구하는 분들과 함께 매주 토요일 아침마다 처음읽는 프랑스현대철학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샤르트르, 레비나스, 모리스 블랑쇼, 롤랑 바르트를 알아보았고 이번주는 알튀세르를 할 예정이다. 보통 철학아카데미에 나온 책의 내용에 그동안 수업을 들었던 내용으로 정리하는데, 이번 알투세르 부분은 너무 재미있어서 글쓰이인 최원 선생님의 '라캉 또는 알튀세르'라는 책을 기본으로 정리했다. 라캉과의 연결고리와 호명이론 및 이데올로기의 장으로써 국가시스템에 대해서 줄기차고 고민한 결과를 정리해본다.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마르크스주의와 구조주의를 결합해 독창적인 사상을 제시한 인물이다. 그는 20세기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혁신적인 기여를 하며 특히 이데올로기와 주체 형성에 관한 이론을 통해 현대 철학, 정치학, 사회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알튀세르의 철학은 기존 마르크스주의와 구조주의의 이론적 경계를 넘어, 인간이 사회 구조 안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규정되는지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생애와 배경
루이 알튀세르는 1918년 알제리 비르망드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프랑스로 이주했으며, 뛰어난 학업 성적으로 주목받아 프랑스의 명문 고등사범학교인 파리 고등사범학교(Ecole Normale Supérieure)에 입학해 철학을 전공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에 포로로 잡히는 경험을 겪었고, 이는 그의 철학적 여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후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면서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에 관심을 두게 되었으며,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보다 과학적이고 구조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알튀세르는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많은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수업은 학문적 깊이와 날카로운 비판적 분석으로 유명했으며,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를 중심으로 한 철학적 논의가 확산되었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평생 동안 정신 질환을 앓았고, 말년에는 이를 극복하지 못해 안타까운 결말을 맞았다.
학문적 업적과 철학적 접근
알튀세르의 철학적 접근은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와 차별화되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그는 인간의 의식이나 주체성보다는 구조적 요인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 현상을 설명하고자 했으며, 이를 ‘과학적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르며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와 거리를 두었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를 사회와 역사적 현상을 설명하는 과학적 방법론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대표 저서 중 하나인 ‘자본을 읽자’(Lire le Capital)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분석하는 작업으로, 기존의 마르크스 해석에서 벗어나 구조적, 과학적 접근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조명했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으로 재정립하기 위해, 인간 의지보다는 경제적, 정치적 구조가 사회 변화를 결정짓는다고 보았다.
주요 이론
알튀세르의 철학에서 특히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이데올로기와 주체 형성이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단순히 허위의식이나 지배 계급이 대중을 억압하기 위한 도구로 보지 않았다. 대신,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자신을 특정한 방식으로 인식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강력한 기제라고 주장했다. 이 관점에서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사회적 가치나 신념 체계가 아니라, 개인이 사회 속에서 자신을 특정한 주체로 이해하고 살아가게 만드는 메커니즘으로 보았다.
이 개념을 보다 구체화하기 위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Ideology and Ideological State Apparatuses, ISA)라는 논문에서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장치(ISAs) 개념을 제시했다. ISAs는 교육, 종교, 가족, 법률, 미디어 등과 같은 사회적 기관들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작동하여, 사회 구성원들이 특정한 가치와 규범을 내면화하고 이를 통해 자신을 주체로 인식하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그는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을 호명(interpellatio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는데,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 “호명”하여 그들이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개인이 스스로를 "시민"이나 "노동자"로 인식하게 되는 과정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규정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알튀세르는 기존 마르크스주의의 인간주의적 해석을 비판하며 반휴머니즘적 마르크스주의를 제안했다. 그는 인간의 자유 의지나 개별적 주체성을 중시하는 인간주의적 관점을 거부하고, 인간이 아닌 사회적 구조와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짓는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그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인간 중심적 해석을 벗어나고자 했다.
또한 알튀세르는 구조적 인과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와 역사가 단일 원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구조적 요인들이 상호작용하며 형성된다고 보았다. 사회 구조는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요인들이 서로 얽혀 있는 복합적 체계이며, 이 복합적인 요인들에 의해 역사가 전개된다고 설명했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가 단순히 사회적 현상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본주의 사회의 재생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교육 시스템, 종교, 언론, 법률 등은 이데올로기를 통해 사람들이 사회 구조에 순응하도록 만들며, 이를 통해 사회가 유지되고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이 개념은 마르크스주의의 "상부구조" 개념을 확장하여, 경제적 토대가 아니라 이데올로기가 사회 유지와 재생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알튀세르의 이론은 이후 많은 학문 분야에 걸쳐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이데올로기와 주체 형성에 관한 그의 연구는 철학, 사회학, 문화 연구, 정치 이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용되고 연구되었다.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해석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철학에도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알튀세르는 '맑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를 통해서 꾸준히 이데올로기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고 1971년에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라는 논문에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론을 정립한다. 최근에 한국에서는 '재생산에 대하여'라는 유고작이 나왔고 영미권에서는 '휴머니즘 논쟁'으로 발간되었다. 알튀세르가 이러한 저작들에서 제시한 주제는 '이데올로기적 호명 테제'이다. 이데올로기에 사로잡인 개인은 부르는 행위인 '호명'을 통해서 주체가 된다는 내용이다. 누군가 길을 지나가다가 '거기 학생!'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네?'라고 대답하는 순간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학생이라는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주체로 구성'된다는 부분이다. 주체로 구성되기 전에, 그러니깐 호명되기 전에는 그저 개인일 뿐이었는데 호명에 의해서 타율적인 방식으로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호명이론은 '구조주의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구조주의는 개인의 자율성이나 자유가 주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나 사회와 같은 커다란 구조가 주체를 설정하고 구성한다는 논리이다.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적인 방식으로 구조주의를 이야기 하기 전에 샤르트르와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을 통해서 이미 프랑스 사회는 자율적인 주체를 상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유주의 혹은 실존주의 전통이 풀지 못한 숙제가 있었는데 바로 '인간의 판단 오류'였다. 인간은 합리적인 주체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에서 자유로운 결정을 해야 하는데 역사는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흘러갔다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주체들이 자율적인 존재라면, 왜 그들은 지배자들이 퍼뜨리는 잘못된 생각에 그토록 쉽게 설득당하는가?'라고 물어 본다면 자유주의적인 전통에서는 이 부분을 설명하기 어렵다. 반대로 구조주의 전통에서는 '만약 인간이 타율적인 존재라면 저항이나 반역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힘들다.
이러한 상대적인 딜레마에 대해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강조한 알튀세르의 호명이론은 상당한 논쟁을 불러왔다. 알튀세르의 주장은 사실 '구성'된다에 있다. 인간이 그러한 선택을 하는 것은 미리 설정된 '주체성'에 근원에서 오는게 아니라 호명되는 순간 구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에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알튀세르의 호명이론에 대해서 소위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냐 대학에서 활동하고 있는 라캉주의자들이 논쟁에 뛰어든다. 한국에서는 다양한 분야에서 소개되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이 바로 슬로베니아학파를 대표한다. 이외에도 믈라덴 돌라르, 테리이글턴이다. 이후에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으로 에티엔발리바르까지 살펴볼 것이지만 여기서는 호명이론에 대한 슬로베니아 학파의 질문에 대해서 정리해보자.
슬로베니아학파의 호명이론 비판
슬라보예 지젝 : 에데올로기가 주체를 구성한다고 인정할지라도 이데올로기가 완전히 주체를 장학하지는 못한다. 이데올로기는 항상 공백void를 남기고 그 공백이 진정한 주체의 핵심이다. 다시 말하면 이데올로기의 여집합이 주체의 핵심이다. 이러한 공백에서 나오는 주체성이 저항과 반역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러한 주체성이 없으면 호명은 불가능하다.
믈라덴 돌라르 : 주체 이전의 주체가 중요하다. '호명당하는 주체'는 이미 호명에 반응하는 주체성을 내포하고 있다. 의례를 행함으로써 나중에 오는 이데올로기적 믿음 뿐 아니라 개인이 이 무의미한 의례를 행하기로 애초에 동의할 때 필요한 믿음이 있는데, 알튀세르의 호명이론은 바로 이러한 부분을 놓치고 있다. 주체에 앞선 주체가 필요하다.
테리이글턴 : 호명을 인지하고 화답하는 주체의 행위는 주체의 능력이다. 개인이 호명당하는 순간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였다가 다시 주체를 갈아탄다. 무의식 안에 이미 주체가 놓여져 있다. 구성되기 위해서는 요소들이 필요하듯이 무의식 속에서는 이미 주체성의 근본요소들이 녹여져 있다.
상징계와 이데올로기
추후에 나오겠지만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이나 '허구의 세계에 대한 환상'정도로 이해하면 더 깊은 생각을 하기 힘들다. 오히려 자크라캉의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의 논의를 가지고 오면 이야기할 수 있는게 더 많아진다.
일단 상상계와 상징계의 연결을 이데올로기로 보자. 그러면 이데올로기의 공백은 실재계가 된다. 이데올로기는 항상 공백인 실재계에 대한 징후 혹은 독해가 된다. 그렇게 보면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상징과 상상이 어떻게 연결되어있는지를 볼 수 있고 실재의 변화가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대체하는지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른바 패러다임의 논의에서도 이런식의 이데올로기적 이해를 가지고 한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이 나올 때 발생하는 패러다임 쉬프트 역시 이 도식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호명이론은 호명하는 순간 기표가 상징계에서 상상계를 호출하고 그 순간 요소들을 불러 모은다. 그러면 상징계에서 호출된 상상이 다시 상징계로 송출된다.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 보는 인코딩과 디코딩도 같은 논리적 구조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인셉션이라는 용어는 '시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기체나 그런 것을 들이마시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셉션은 이 두 가지 뜻을 결합해서 관념을 들이마심으로써 주체가 시작된다는 의미에서 주체의 '기원'을 그 말에 부여하고 있다. 슬로베니아 학파의 호명이론에 대한 반박은 결국 호명되기 이전부터 호명의 요소들이 주체 안에 있었기 때문에 호명에 반응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알튀세르는 정신분석학자인 르네 디아트킨이라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호명이론에 대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설명한다. 여기서 알튀세르는 호명이론에 관한한 라캉의 이론과 자신이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알튀세르는 슬로베니아학파의 주장을 '목적론적 관념론의 환상'이라고 비판했다. '무의식'이라는 측면에서 호명되기 이전에 이미 주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무의식에서 어떻게 주체가 형성되었는지 설명해야 하며, 그렇게 하다보면 무의식 이전에 또 주체가 이미 있어야 한다는 방식의 순환논증이 계속된다. 주체를 만들어내는 그 프레임은 이미 주체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와 같다. 누군가를 비판하려고 할 때 그 비판의 기준들이 내 안에 이미 있었기 때문에 비판이 가능한 것처럼, 주체가 탄생하려면 그 요소들이 이미 주체 이전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체가 등장하는데 있어서 그 기원의 기원을 타고 들어가보면 결국 '동일성을 기반으로한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자신'이라는 전제로 가게 된다. 이에 대해서 알튀세르는 탄생이라는 단어보다는 오히려 돌발이라는 단어로 주체의 탄생을 설명한다. 일정한 원인이 일정한 결과를 만들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우연성'에 의한 효과로써 몇 가지 요소들이 어떤 계기를 맞이하여 갑자기 돌발하게된 것이다.
탄생과 돌발의 구분
1965년 발간된 '맑스를 위하여'과 함께 출간된 '자본을 읽자'에서 이러한 개념을 '사회효과'society effect'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사회효과는 이미 주어진 발생학적 프레임에서 탄생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라는 장 안에서 구성요소들이 우발적으로 돌발하여 만들어지는 것을 말한다. 탄생이라는 프레임은 탄생을 위한 기원과 그 기원이 추구하는 방향성이 있어야 하지만, 돌발이라는 것을 우발적이고 자율적이면서 때론 충동적이기까지 하기 때문에 그 원인을 물을 필요가 없다. 사실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한나아렌트 역시 이와 동일한 방법을 취한다. 전체주의의 기원은 영어로 origin이 아니라 elements로 쓰여져있다. 그러니깐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전체주의가 기원하고 있는 원인을 찾을 것 같지만, 한나아렌트는 역사의 어떤 순간에 상황과 주체들의 움직임이 맞는 우연적인 결과로 전체주의가 돌발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한국어로 옮기면 탄생이나 돌발이나, 기원이나 요소나 같은 말 같지만 그 내용과 영향력은 완전히 다르다.
이런 방식으로 알튀세르를 읽어보면 슬로베니아 학파의 논리는 전혀 의미가 없이 날라간다. 탄생을 말하면서 이야기한게 아니라 돌발을 이야기하는 우연성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돌발과 우연성이 기본적으로 인간의 주체성 안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기표와 기의'의 우연성에 기인한 것도 같으며 인간의 인생이 사실 자율성과 우연성의 결합으로 만들어지는 '사건'의 연속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탄생의 프레임으로 다시 말하면 '주체효과'라고 할 수 있고 영어로는 subject effect라고 부른다. 이는 사회효과가 요소들이 결합된 독특한 방식을 연구한 것이다. 이에 반해서 '사회효과'는 social effect라고 부르고 요소들이 결합된 독특한 방식을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흐름이라면 이제 '과잉대표, 과잉결정된' 최종심급이라는 표현도 이해가 가능하고, 이것 역시도 우발적으로 만들어지는 효과임을 알 수 있다.
주체효과를 통해서 자신의 기원을 '탄생' 이전으로 놓는 작업은 태어난 아이들에게도 혼란을 준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 일정한 장소가 있었고 거기에서 준비되어서 이 시간에 이들과 만난 것이라고 하는 혼란은 결국 과거로 계속해서 소급해 들어가다가 '영원성'에 대한 존재론을 만나게 된다. 자신이 영원히 존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환상은 알튀세르가 보기에는 이데올로기적 주체에게는 매우 근본적인 것이다. 추후 라캉과의 논의에서 더 자세하게 보겠지만 환상과 상징의 이러한 콜라보는 커다란 환상 가운데서 실재를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라캉은 '주이상스'라고 하는 자신이 진정으로 욕망하지만 피하고만 있었던 존재와 맞닥드리는 정신분석학으로 접근한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오히려 주체 내부로 들어가지 않고 외부로 나와서 국가장치인 학교와 종교, 사회의 다양한 요소들과 만나면서 주체화된다고 말한다. 호명은 이렇게 짧은 일시의 구성된 주체성이고 주체는 여기서 우연적인 효과를 필연성으로 가지고 가서 '영원한 주체'로 환원해 버린다. 그러면 결국 주체효과에 의해서 주체는 호명이후 자신의 주체성 속에서, 자신의 영원속에 갖히게 된다. 이것이 그 유명한 크레모니니의 '욕망의 등 뒤에서'에서 보여주는 이데올로기에 갖힌 주체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그림에서 거울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주체를 볼 수 있다. 이데올로기의 바깥은 없다. 없도록 환상이 제한한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는 사유를 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해서 탄생한 이데올로기적 주체는 국가장치의 작동의 흔적을 지우고, 이데올로기의 바깥을 지우고, 자기에게 강제된 동일성의 흔적을 영원성으로 투사함으로써 무엇에든지 자유로우면서도 신념을 가진 존재로 자신을 셋팅한다. 이러한 주체효과의 자연스러운 구조는 자신이 구조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자신처럼 생각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든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자신과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들을 '틀렸다'라고 말하고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바깥은 없다. 그러니 이데올로기의 바깥에 존재하는 타자도 없으며,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이해할 수 있는 타자만 자신의 친구를 삼거나 노예로 삼을 수가 있다. 이것이 이데올로기의 무서운 자기확증편향이다.
한국에서 유독 유명한 슬로베이아학파의 수장 슬라보예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RSI로 이해하면서 실재와 상징 그리고 상상계로 구조화한다. 사실 라캉에 대한 독해는 다양한 관점에서 이루어지지만 지젝의 라캉에 대한 독해는 RSI를 기반으로 결여와 충동을 이해하고 있다. 보통은 RSI보다는 욕망의 그래프로 상상계와 상징계 그리고 실재계를 나누지만 RSI의 구조로 보면 3가지의 범주 안에서 동시에 결여되어 있는 부분이 보이기도 하고, 상징계와 상상계가 실재계와 거리를 두게 되면서 일종의 '공백'을 드러내기도 하는 좋은 구도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슬로베니아 학파는 라캉의 RSI구조를 기반으로 해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를 오독하는 경우가 보인다.
라캉이나 알튀세르 역시 이데올로기가 환상이라는 상상계와 언어라는 상징계의 교집합에서 여전히 공백으로써 외부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이데올로기가 우리가 상상하과 환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의 결합이라고 보았을 때 영화나 소설, 시나 사진 등은 항상 실재에 대한 갈망이고 벌어진 일이나 벌어질 일에 대한 예건이나 기억이다. 다시 말하면 이데올로기는 항상 실재의 공백을 통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깐 실재가 등장하는 순간 이데올로기는 여지없이 허물어져 버린다. 반대로 실재가 등장하지 않아야만 환상이 깨지지 않고 그것을 언어로 하게 되는 경우 신화가 되거나 영웅담이 된다. 마치 환상 속의 이상형을 그리워하다가 실제로 만났을 때 느끼는 허탈감과 같은 것이다. 공포영화도 마찬가지로 공포의 대상이 실제 속에서 등장하지 않아야만 공포가 계속 유지된다.
이것을 이데올로기의 기원이라는 관점에서 일조의 주체의 '배꼽'이라고 부르고 실재의 타자와 연결하려는 노력으로도 볼 수 있다. 라캉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배꼽이 주체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고 있기 때문에 '내적 외부' 혹은 '외적 내부'라고 불렀고 이를 extimate하다고 표현했다. 항상 이데올로기가 외부의 실재를 공백으로 남겨두기 때문이다. 라캉이나 알튀세르나 이렇게 이데올로기적 주체가 공백의 주변을 끊임없이 배회하면서도 실재의 징후를 찾고 있고 또한 지시하고 있다는 부분에서 비슷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실재'를 무엇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라캉과 알튀세르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 놓는다.
라캉은 실재를 잃어버린 기표로 보았고,
알튀세르는 사회적 전체이자 계급적 적대로 보았다
라캉에게 실재는 마치 아이들에게 언어라는 상징계와 거울을 통한 환상계가 들어오는 순간 미끄러져가는 공백과 같다. 이 공백은 항상 욕망의 구조로 되어 있는 원한 관계에 있다. 이러한 욕망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어린시절 처음에 언어를 받아들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욕망이다. 그래서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백이고, 항상 실재는 변화하기 때문에 머무르지 않는 욕망이여서 공백이다. 그리고 이 공백을 마주하기가 무서워서, 두려워서 돌아가는 주체의 한계를 욕망의 그래프로 그렸다. 그러니깐 라캉에게 실재는 절대로 닿을 수 없는 욕망의 핵심이면서 자신의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유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알튀세르에게 실재는 주체의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내부에 놓여진 구조이다. 이 구조에서 주체는 오히려 공백이 된다. 배경에서 텅 비어 있는 주체는 배경이 이데올로기 장치를 통해서 구성해가는 대상이 되어 버린다. 알튀세르에게는 그래서 이러한 복잡한 계급구조의 관계와 적대의 구조에 순종하는 인간을 먼저 정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가능해지는 것은 당연히 이데올로기효과에 의해서이다. 이데올로기의 상상계과 상징계의 연결 속에서 인간은 순종하고 자신을 자리지우고,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게 된다. 주체의 내부에 이미 이데올로기적 구조가 그 주체를 감싸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만 보면 주체는 '구조'의 결과이고, 거대한 외부세계에 대해서 내면의 세계는 아예 작동을 안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곧 다시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조에 놓여진 인간은 어떻게 그 구조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어떻게 저항과 반역을 할 수 있을까?
이데올로기적 주체는 이데올로기가 시작된 소실점, 공백, 내적오부 혹은 외적 내부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눈치를 챘을 수도 있지만 라캉이 말하는데로 상상계와 상징계의 연결이 이데올로기이며 이 이데올로기는 내부적 공백으로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반면, 외부적으로는 사회의 어떤 부분에 공백의 위치를 놓는다. 쉽게 말하면 라캉은 내면의 무의식에서 그 공백을 찾고, 알튀세르는 인간 외부의 사회적 장치들에서 그 공백을 찾는다. 그리고 이것은 '실재계'의 향연을 말한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리얼하게 느끼고 경험하고 체험하고 마음먹고, 반응하는 실재계가 바로 공백의 핵심이다. 내면으로 들어간 라캉에게 이 실재는 잃어버린 기표가 된다. 우리가 매번 살아가는 일상에서 하나의 기의에 기표는 계속해서 미끄러져 간다. 그리고 그 기표가 자신의 이름을 찾을 때까지 계속 멈추지 않고 미끄러져 간다. 그러니깐 그 어떤 욕망도 실재계에서는 채워질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다.
알튀세르에게 실제는 실재계 내에서 존재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그 구조는 사회적인 전체 구조이자 계급적대의 구조이다. 이러한 실재계는 마치 상처가 난 부위에 피가 계속 흘러내리고 고이듯이 실재계 안에서 구조가 만들어내는 상처는 계속해서 이데올로기를 생산한다. 그것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상이면서도 지금 자신이 처한 구조에 대한 해방으로도 볼 수 있다. 이데올로기가 잃어버린 지점 혹은 이데올로기가 잉태된 소실점에서 발견하게 되는 실제의 총합은 '실재계'로 볼 수 있으며 인간은 이러한 실재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한탄하고 부정하고 싶으면서도 어떻게 하면 희망을 잃지 않을 것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국가장치들 그리고 이러한 실제를 움직이는 최종심급들은 구조를 더 고착화시키면서도 더 많은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다. 다음 절에서 이야기하겠지만 그래서 알튀세르에게 사회적인 적대구조나 갈등의 주제는 이데올로기가 가져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지점이 된다.
실재는 또한 중충결정되어 있고, 과잉결정되어 있는 다층적 원인구조를 가지고 있다.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역사적 조건 등 다양한 층위의 요인에 의해서 실재는 구성되어 있다. 단순하게 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가 아니라 실재의 다양한 측면들이 상부의 이데올로기적 구조를 구성하고 그 이데올로기가 다시 하부의 구조를 움직이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다양한 원인에 의해서 하나로 정리될 수 없는 현실은 결국 어떤 요소가 가장 먼저 작용하거나 가장 깊숙히 관여했다는 과잉결정의 문제를 낳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계급적대와 사회적 문제들이 중층적으로 존재하는 시공간에는 그 시대가 공유하는 다양한 이데올로기가 존재하고 그 중에서도 과잉결정된 선택을 지지하는 이데올로기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외적 실재를 움직이는 방향성과도 같으며,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졌다면 다른 결과를 낼 수 밖에 없다는 이데올로기효과를 낳기도 한다.
알튀세르의 논의를 따라가다가보면 인간은 언제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데올로기 장치들에 의해서 지배당하는 것 같다. 지배당하는 만큼 누군가 자신을 호명할 때 자신있게 '네!'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어떤 지점에서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거슬러서 주체가 움직일 수 있을까? 그러니깐 호명이 없이도 자신을 돌이켜서 새로운 주체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과연 그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그것은 바로 '실재'의 등장에 있다. 실재를 상징계와 상상계의 공백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데올로기에 쌓여 있는 사람에게 실재의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을 발견하기까지는 아주 힘이 들지만 이것을 깨달은 순간부터는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는 것은 결국 공백 속에서 실제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간단한 해답을 얻는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는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공백 속에서 사라지는지를 보여준다. 브레히트의 극에는 항상 줄거리를 만들어가는 행동들이 무대의 가장자리에서 일어나고 무대의 가운데는 텅 비어 있다. 꽤 오랜시간 중앙이 비어 있는데, 연극이 끝날 때쯤 관객들은 결국 자신의 인생 속에서도 그렇게 분주하게 만들었던 일상이 원래는 가장 자리에 있었고 자신이 진정 고민해야 하는 것들이 중앙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실재이다. 마치 이단종교에 빠진 사람이 어느날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가족이었음을 깨닫는 것처럼, 자신이 믿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허구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실제에서 실재를 만날 때 비로소 타자를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이 주인이 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붕괴시는 것은 실제적인 행동이다
그러니깐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행동하는 것, 실제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누군가를 만나는 것과 같은 것들이 바로 이데올로기를 붕괴시키는 힘이다. 이데올로기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사람들이 계속해서 무대의 가장자리에 관심을 쏟게 만들어야 하고,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지 못하도록 만들려고 한다. 그리고 활동가 혹은 운동가는 그 반대로 무대의 텅빈 중심에서 무엇인가를 외치고 깃발을 들며, 움직이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이데올기의 중앙에는 더 큰 구멍이 생기고 결국 이데올로기가 찢어진다. 아주 작은 루머나 거짓말이 실제를 만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그 공백을 발결하려면 결국 이데올로기 안에서 찾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의 중심에서는 항상 갈등과 투쟁의 장소이며 환상을 넘어선 실재의 대결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알튀세르는 참 신기한 사람이다. 기존의 논의들을 모두 받아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깥으로 투사하면서 이 사회의 계급적대와 사회문제를 관점을 돌리는 방식은 위에서 언급한 브레히트의 소격효과과 비슷하다. 그래서 알튀세르효과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같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이면서도 사회 속에서 개인이 투쟁과 반역을 할 수 있는 공백 혹은 여백으로 '행동'과 실천을 놓았으니 말이다. 국가장치들이 사회의 구조를 이루면서 사람들을 이데올로기로 세뇌시킬 때조차 알튀세르 효과는 그 사회의 구멍, 여백, 공백을 찾아내어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게 만든다. 어쩌면 마르크스가 꿈꿨던 미래도 이러한 후배들이 자신이 염원하던 현실의 변화를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지 않고 새로운 변수로 만들어주기를 바랬던 것은 아닐까? 이 글을 쓰는 나 역시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역시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