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아카데미
벌써 10년이 지났다. 철학아카데미에서 칸트철학부터 시작했다. 매일 저녁 철학아카데미를 다니면서 철학에 대한 공부를 새롭게 시작했다. 그때 당시에는 무슨 말인지 모르고 계속해서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최근에는 한나아렌트공부를 하면서 다시 칸트를 보게 되어서, 10년전 공부했던 것들을 다시 꺼냈다. 보니깐 브런치에서는 아직 게제를 하지 않아서 오늘부터 칸트리뷰를 올릴 생각이다. 칸트가 그어 놓은 선험적인 것과 물질세계 그리고 현상계의 차이 속에서 아렌트는 정신세계를 더하고 판단력 비판을 위치해 놓는다. 이 강의는 8회정도 진행한 박정하 선생님의 강의의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20140107_철학아카데미순수이성비판 2_순수이성비판 1리뷰들어가기
칸트철학의 본질은 무엇인가? 순수이성비판의 '물자체'와 현상세계의 연결점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칸트와 들뢰즈와 사이에는 헤겔과 프로이트가 있다. 정신세계와 물질세계 사이에서 이들이 만나는 지점을 찾아보자.
목차
칸트는 순수 이성비판에서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머리말과 서론)
머리말 : 칸트의 시대, 칸트계획 전체, 순수이성비판이란 무엇인가? 이성의 이론적 인식과 실천적 인식, 새로운 형이상학을 위한 사고방식의 전환, 비판의 분석적 부분이 증명한 내용, 이성의 실천적 사용을 위한 작업
서론 : 선험적 인식과 경험적 인식, 경험적 인식의 한계, 분석판단과 종합판단, 순수이성의 일반적 과제, 초월철학
p168 칸트는 자기가 사는 시대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우리 시대는 진정한 비판의 시대이고 모든 것은 비판에 붙여져야한다.
종교와 법칙수립은 이제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종교역시도 비판에서, 이성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critic의 의미 : 금을 긋다'라는 것이 비판의 어원이다. 금 바깥은 옳지 않고 금 안쪽은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의 자유롭고 공명한 검토를 통해서 우리는 비판적인 태도로 사물을 이해할 수 있다. 합리적인 검토작업이 비판의 핵심이다.
계몽주의시대에 칸트에게서 시대정신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비판'이다. 칸트의 시대는 아직 시민혁명을 거치기도 전의 매우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중세의 가을이었다.
p199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쓴 나이는 64세이다. 물론 10년정도 썼지만 완성한 나이는 노년의 나이이다.
칸트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제시하는 것이 자신의 목표였다. 지금에서는 철학이라는 것에서 형이상학은 고유한 것이 된다.
철학의 분류
철학은 인간'과 세계'의 문제를 다룬다. 물론 이 말에는 모순이 있기는 하지만.
서양철학 전통은 인간' 자체를 복잡하게 이해하고 있다.
인간은 진, 선, 미'로 구분하는 플라톤 전통에 따라서 구분하는게 서양의 전통이다.
진은 이성, 선은 의지, 미는 감성과 욕망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아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은 다르고 욕망은 타자에게서 오는 것이다.
문화는 사람의 활동중에서 질높은 활동이다. 문화적으로 볼 때 질높은 활동으로서 이성은 학문, 의지는 종교, 감성과 욕망은 예술이다.
인간, 혼의 3분법(플라톤의 철학법)
진-이성-학문-순수이성비판-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철학자-1우선수위
선-의지-종교-실천이성비판-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군인,경찰(수호자)--2우선순위
미-감성,욕망-예술-판단력비판-나는 무엇을 느낄수 있는가-생산자-3우선순위
칸트, 이성
칸트는 이성을 2가지 측면으로 나눈다. 이론과 실천이 바로 그것이다.
서양에서 사변적이라는 것은 매우 좋아한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론 : 이성을 사변적으로 이론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것이 바로 이론이성이다. 학문과 과학을 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있는 것, 주어진 것, 자연을 파악하는 능력이다. 이것이 크게 보면 자연 형이상학이다.
실천 : 선과 종교 도덕 문제이기 때문에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파악하고 옳은 것을 사회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윤리가 된다. 이것이바로 도덕형이상학이다.
이론,사변-학문,과학-자연 / 실천-종교,도덕-윤리
이성이 자연을 인식하고 학문과학적 작업을 할 때 이성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그 한계는 무엇인가? 그 한계 넘어에는 실천이성이 작동한다.
예를 들어 '신이 존재하는가?'와 '신이 존재하는 것을 믿는가?'는 다른 층위다. 존재하는가는 fact의 영역이기 때문에 이론이성이 사용되고 존재를 믿는가?는 종교도덕의 의지와 윤리의 문제이기 때문에 실천이성이다.
이런 입장에서 칸트가 보기에는 중세는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론이성의 영역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시간공간영역에 들어오지 않는 것을 이론이성으로 분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신, 영혼, 우주라는 것에서는 이론이성이 작동할 수 없다.
따라서 칸트가 보기에는 신,종교,영혼,우주의 중세 형이상학은 실천이성의 영역이다. 그러나 중세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칸트가 해야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구분이었다. 그래서 칸트의 작업은 새로운 형이상학이었다. 그 한계를 정하고 그것들의 바운더리를 정하는 것이 바로 근대철학의 특징이다.
칸트, 이원론
사실, 존재 / 가치, 당위'의 이분법으로 칸트는 자신의 철학을 밀고 나간다.
그러나 많은 철학자들은 존재나 사실에서 당위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칸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가치를 사실로 환원시키기 않고 가치의 문제와 사실의 문제를 엄밀하게 나눈다.
이론이성은 있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라면, 실천이성은 있어야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칸트는 이론이성과 실천이성 다시 말하면 자연철학과 도덕철학의 한계를 정하고 구분하기 위해서 순수이성비판을 썼다.
칸트는 윤리형이상학'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지만, 자연형이상학에 대한 책은 쓰지는 않았다.
철학구분
1. 존재론(세계) - 세계를 다루는 것2. 인식론(인간) - 앎의 문제를 다루는 것 3. 윤리학(인간) 4. 미학(인간)
사실 20세기 중반까지는 윤리학과 미학이 가치론에 편입되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위의 4가지로 분리된다.
p168
이 시대에는 또한 이성이 하는 주요한 업무는 자기 인식에 대한 이해였다.
하나의 법정'을 설치하여 정당한 주장을 펴는 이성과 월권을 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 바로 순수이성이다.
이성이 마땅히 해야하는 영역에서는 정당한 활동이 되고, 이성이 할 수 없는 부분-믿음, 도덕-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성에서 멀어져야 한다.
칸트가 보기에 신학이라는 것은 이성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학이라는것은 theology라는 거은 the신에 대한 이성적인 학문이라는 뜻인데, 칸트는 이것을 부인했다. 신의 존재는 믿음의 존재이지 이성의
faith'와 theology의 차이점음 무엇인가? faith는 스스로 믿는 행위라고 한다면, theology설득하기 위한 것이다. 타자가 중시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의 입장에서 신앙과 신학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신학은 그래서 타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칸트는 나중에 자신의 철학을 '합리적인 종교'라고 이야기하면서 실천이성을 이야기한다. 실천이성에 근거한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p169
순수이성이라는 것은 이성이론 일반을 경험으로 부터 독립해서 발생하는 모든 것을 주제로 한다.
이성이 경험에서 독립된 추론을 할 수 있는데, 그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p177
이성의 인식은 2가지 방식으로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
하나는 대상을 규정하는 것이고, 아니면 그것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인식은 규정이다. 그래서 인식은 항상 문장으로 표현된다. 분필'이라고만 이야기하면 그것은 인식이 아니다. 주어개념과 하나이상의 술어가 있어야 인식이 된다.
이론이성의 주요한 능력은 바로 규정하는 것이고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기에 문장으로 나타나게 된다.
현실화시킨다는 것은 있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실천이성이다.
칸트는 뉴턴의 자연과학이론을 진리로 믿고 있었고 수학과 과학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미 자신의 친구들이 과학과 수학 및 자연과학에서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해야하는 일은 새로운 형이상학을 만드는 것이었다.
민네이션 : 그렇다면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칸트의 논의에 의하면 실천실학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지만 있어야 하는 것들을 다루는 것인가?
p182 인식, 대상
이제까지 사람들은 모든 인식은 대상들을 따라야한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대상들에 관하여서 우리의 인식이 확장된다는 선험적인 시도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식은 대상들을 따르지 않는다. 대상들이 우리의 인식을 따른다고 가정해 본다면 어떻게 될까?
인식, 주관
인식은 주관과 객관이 있다.
자기에 대한 깨달음은 자신을 대상으로 놓는 것이기에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주관과 객관이 만나는 방식은 2가지이다.
주관이 객관을 따르거나, 객관이 주관을 따르거나이다.
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하면참이다 ' 아리스토 텔레스commonsense realism 이다.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도 마찬가지이다. 대상이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상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realism이라는 것은 주관이 객관에 따른다라는 것이고 ideralism은 객관이 주관에 따른다라는 것이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 인식이라는 것은 대상이 우리에게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형이상학이다. 인식은 주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새로운 철학은 바로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민네이션 : 그럼 객관이 주관을 따른다라는 것은 내가 대상을 인식하는게 아니라 대상이 나를인식하는 것이 되면, 독재나 전제정치로 발전할 수 있다.
분석적 비판
칸트의 책은 감성학, 분석학, 변증학이다.
감성학-감성 / 분석학-지성 / 변증법-이성'을 모두 순수이성이라고 한다.
철학은 말의 용법에 적응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변증학은 오류의 논리이다. 감성학과 분석학은 논리의 영역이다. 과학의 논리를 이성의 바깥으로 가지고 가는 것은 오류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변증학이다.
p188
공간과 시간은 단지 감성적 직관이 형식이고, 그러므로 단지 사물들의 실존적 조건이다.
공간과 시간은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의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인식되는 것이다.
우리는 순수이성 개념에 대응하는 직관개념이 발생하는가만을 고민하고 다른 개념은 인정하지 않기로 한다.
사물의 양에 대해서 쓸 때, 단수 혹은 여러개이다. 이 방식 외에 사물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여러개를 하나로 보면 전체이다.
순수지성개념은 하나 혹은 여러개라는 두개의 방식만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원초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사물 그 자체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오직 현상으로서의 대상으로서만 인식할 수 있다.
우리의 감각 속에 들어온 것 중에 지성의 작용을 통해서 파악한 것만 인식할 수 있다.
공간과 시간은 지성의 틀에 있지 않고 감성의 틀에 있다. 이러한 감성을 통해서 현상을 이해하는 능력이 지성인 것이다. 감성을 통해서 받아들인 직관은 현상1이라면 지성으로 인식한 것은 현상2라고 할 수 있다.
직관이 주어지는 경우 이외에는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어떤 인식도 없다. 사물 인식의 핵심요소는 직관이 주어져야하는 것이다.
순수이성개념은 주어지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있는 것을 인식하게 아니라 상상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인식의 대상은 현상이다.
가능한 이성의 사변인식을 순전히 경험의 대상에만 국한시켜야하지 않는가?
이러한 대상들을 사물자체로 인식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사고할 수는 있다.
p191
이성의 실천적 사용을 위해서 신, 도덕, 영혼의 문제를 다룰 수 없는 것이다.
사변이성의 월권을 빼앗아야만 신, 자유, 영혼을 받아들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변이성의 범주에는 도덕이성이 자리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칸트는 실천적 확장을 하려고 하는것이다.
'나는 신앙을 얻기 위해서 신,자유,영혼은 이론이성의 영역에서 폐기시킴으로써 실천의 영역으로 가지고 오는 것이다.'
칸트, 프레임
인식은 감성과 지성으로 나뉜다.
지성은 판단하는 것이고 규정하는 역할을 한다. 규정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념이 있어야 한다. 지성은 술어개념이 있어야만 알 수 있다.
감성은 직관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감각은 direct한 것이다. 바로 보이는 것이다.
상상과 인식의 차이는 주어진 것을 인식이라고 한다면, 주어지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우리 눈에 들어 올 때는 감각들은 한꺼번에 들어온다. 직관은 그래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직관은 시간과 공간의 영역 안에서만 존재한다.
지성은 대상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서 개념과 범주로 나눈다
감각들을 적절하게 묶어서 대상으로 규정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바로 지성이다. 그래서 지성의 작용을 통해서 사물을 인식하게 된다.
칸트, 직관론자
칸트는 사실 도덕직관론자이다. 모든 사람은 직관하면 무엇을 믿어야하는지를 결정하게 된다. 우리의 양식이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누가 옳은지는 선택할 수 없다. 판단할 수 없다. 가치의 싸움에서는 칸트는 할 말이 없다. 다만 답이 없다는 것을 중재할 뿐이다.
민네이션 : 그런 의미에서 칼빈의 방식은 칸트적으로 시작해서 칸트와 반대로 나간다.
칸트 철학요점 1) 주체의 확립
인식과 실천 양면에서 주체의 확립을 달성
주체의 능동적 활동을 부각시킴, 관념론
인식도 세계에 대한 주체의 능동적 작용으로 해석한다.
실천에서는 아직 자연에 대한 인간의 실천(노동)은 부각되지 못했다.
주체의기본성격 '계몽'에 대한 규정에 함춘된다.
주체의 발전과정 : 데카르트'유아론적 성격'-
칸트의 인식론도 주체의 확립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이론 철학은 인식의 주체가 가진 종합 작용을 탐구하는 것이다.
지적능력이라는 것으 종합작용이다. 주어지는 재료들을 종합통일해서 대상을 규정하는 것이다.
감각자료들의 종합, 통일성이 어디에 주어지는가가 문제이다.
주체가 부여하는 것은 실제의 기초이다.
칸트, 연결
종합한다는 것은 결합한다는 것이다. 결합해서 종합하면 규정하고 그것을 통일시켜서 개체를 인식한다. 다시 말해서 재료들을 묶어서 하나의 개체로 인식한다.
의식일반
인간이라면 세계를 보고 읽는 하나의 공통적 틀이 존재한다. 의식일반이나 초월적 통각이라는 것은 순수이성비판에서 하고 있는 주요한 작업이다.
선험적 틀의 내용
인식은 직관과 사유가 결합된 것이다.
인식에 관여하는 세능력이 있다.
감성은 직관능력이며 수동적이고 지성은 사유능력으로써 자발적이다.
이성은 좁은 의미에서 추리능력이다.
직관의 형식은 시간과 공간이며, 사유의 형식은 범주이다.
apriori
시간과 경험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개념자체도 선험적으로 주어진 하나의 틀이다.
경험에 앞서기 때문에 선험적이다. 경험 이전에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선험적이라는 말은 traszendental이라고 하는 초월성을 지칭한다. 칸트는 자기 철학을 초월적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요즘이야기로 하면 meta'라고 할 수 있다.
주관 자체를 메타인식하는 것을 초월적이라고 한다.
경험에 앞서 있으면서 경험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다.
주관의 선을 넘어서 객관의 영역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민네이션 : 염려라는 것은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것이 아닌 것을 보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렇다면 이 부분을 하나님의 영역 혹은 실천이성으로 넣어 놓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염려가 실천이성을 만나면 믿음으로 변하게 되고, 믿음으로 변하게 된 실천이성 안에서는 기도가 자연스럽게 된다.
aposteori
경험으로 부터 오는 것이다.
감각을 통해서 오는 것이 바로 아포스테로이라고 한다.
아프리오리이후에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초월적, 개념
초월철학 meta - 개체를 벗어나서 보는 것
선험적, 경험가능 taszendental -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게 해주는 관점
초월적 가상 - 개체를 벗어나서 상상하는 것
선천적'아프리오리' - 선험적'트렌젠탈'
선험정'아프리오리'-초월적'트렌젠탈
인식과 존재
초월적 의식이 물질재료까지 만들어 내지는 않지만, 존재자의 보편적 존재를 규정이 되기에 인간 이성은 '부분적으로' 현상세계의 창조자이다.
초월적 관념론 : 경험적 실재론이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대상, 시공간 안에서 직관 가능한 모든 것은 경험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들은 실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초월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현상일 뿐이다.
공간 : 서로 곁하여 있는 표상이다
시간 : 서로 잇달아라는 표상이다.
칸트, 오류
경험이 끼어 들면 모든 것이 우연성을 가지게 되고 오류를 낳게 된다.
신은 순수이성으로서 우연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순수이성이라는 개념은 경험을 전혀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신은 순수이성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선험적, 초월적이었는데 이 개념을 인간의 이성을 인식하는 개념으로 가지고 온다.
민네이션 : 이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의 다른 표현일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자체가 신이 된다는 인문주의의 선두주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미 주어진 것 초월적이라고 하는 인식하게 만드는 기본적인 셋팅인 틀을 transzendental 나누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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