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장 과학의 목표와 과학지식의 위상 feat. 쿠싱
지금까지 우리는 물리학의 역사 속에서 주요한 순간들을 살펴보았다. 사실 이번학기 가장 피하고 싶었지만, 안 들으면 넘어갈 수 없는 난제에 갖혔다. 과학철학. 특별히 물리학의 관정메서 과학사 안에서 일어난 다양한 논쟁들을 살펴보는 시간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과 소피스트들의 우주생성설, 톨레미의 지동설과 케플러의 법칙, 갈릴레이의 실험과 맥스웰방정식, 뉴턴의 물리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코펜하겐 분석과 데이비드 봄의 양자역학적 접근과 같은 논의들을 살펴보았다. 이해가 안되는 부분도 있고 추후 공부가 더 필요한 부분도 있지만 핵심은 많이 배웠다는 것이다. 성적도 잘 나올 수 없지만 그래도 고민한 것들이 앞으로 많은 해석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과학지식이 어떻게 다른 지식과 다른지 그리고 물리학은 그 안에서 어떤 층위에 있는지
리뷰하기 기준
물리학과 다른 자연과학이 어떤 연관성을 갖는가?
과학의 본성이란 무엇이라고 배웠는가?
과학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과학의 특징이 무엇이고, 과학적 지식과 비과학적 지식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현장에서 얻어진 관찰과 이론의 일치성이 높아질수록 그 과정에서 얻어진 지식은 독립적인가?
“아인슈타인은 ‘아마추어’ 철학자이지만,
말의 본래 뜻을 생각한다면 그는 ‘철학자’인 것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말이다”
_필립 플랑크
1918년 막스 플랑크의 환갑을 기념하는 베를린 물리학회에서 아인슈타인은 유명한 연설을 진행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첫째, 과학자는 시인이나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세계에 대해 단순화된 하지만 정확하고 지적인 그림을 창조 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둘째, 물리학의 특징은 수학적 정밀성을 철저히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자에게는 세계를 바라보는 일종의 결정론이 있으며 사람들에게더 쉽게 창조의 원리를 알려주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이 다른 종류의 학문과 다른 점은 물리학을 기반으로 보았을 때 '실제'와 '원리' 혹은 '도식'이 최대한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자가 수학적인 엄밀성을 가지고 현실을 최대한 드러낼 수 있도록 원리와 도식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론물리학자는 수학적으로 공식화되고 정말하게 취급될 수 있는 이상화된 모델들을 구성하여 사람들에게 '지식의 사회적 상'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 모델들은 결코 실재에 대한 완벽한 모델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모두가 인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수학적 세부사항을 모두 다룬다면 모델은 너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델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물리학적 대상을 예측할 수 있는 실재의 거울이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함할 필요는 없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통해서 현실을 예측할 수 있도록 실재를 반영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론물리학과 순수 수학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물리학적 모델은 물리적 실재와 일치해야 하는 사명을 가졌다는 것이다
물리학의 모델과 이론들이 점점 더 적은 수의 전제를 가지고, 점점 더 많은 실재의 현상을 조직하게 됨에 따라 모델과 이론들은 끊임없이 추상화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수식은 아인슈타인이 밝혀낸 것처럼 E=mc2이 되지만 복잡한 현상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실재론자였다. 물론 닐스 보어의 실재성 개념과 다르기는 하였지만 마하의 실증주의와 푸앵카레의 규약주의의 요소들을 통합하여서 자신의 이론들을 정교하게 만들었다. 아인슈타인은 이론물리학의 체계는 개념과 그러한 개념들을 연결짓는 기본 법칙과 그러한 법칙에 기초하여 만들어 지는 예측들로 이뤄진다고 판단했다. 체계의 구조는 인간 사고의 산물인 반면 관찰된 자연 현상은 이와 같은 이론적 구조의 개념과 관계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과학의 목적은 우리의 감각 경험을 통합하고, 최소의 가능한 전제에 기초하여 그것을 논리적 체
계에 투입하여 세계의 그림에 대한 통일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아인슈타인의 아이디어는 물리학을 관찰과 일치하는 예측을 연역할 수 있는, 논리적으로 간결하고 일관
된 일련의 공리 집합으로 특징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를 받아들이더라도, 과학적 이론의 연쇄가 어떻게 진리를 향한 진보를 나타내는가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사고를 더 확장시켜보면 최소 조건으로써 후속 이론이 보다 더 간결한 공리에 기초하여 이전 이론보다 더 많이 혹은 최소한 같은 정도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공리의 논리적 간결성에 대한 양적 준거를 마련하기는 어렵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엔 상당한 주관성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푸앵카레에의 규약주의에서보는 것처럼 어떤 것을 가장 유용한 것으로 선택할 것인지는 보편적인게 아니라 특수한 과학자의 주관적인 선택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닐스보어의 실재성 개념
닐스 보어의 실재성 개념은 고전적 실재론과는 다른 방식으로 양자역학적 실재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그는 상보성 원리(Complementarity Principle)를 통해 실재가 단순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측 과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고전 물리학에서는 실재가 관찰과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나 보어는 양자역학에서는 실재가 관측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전자는 실험 조건에 따라 입자로 나타날 수도 있고, 파동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따라서 실재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측정하느냐에 따라 드러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라고 본다.
보어는 실재성이 측정 가능성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실재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측정하는 방식과 실험 장비에 의해 규정된다. 따라서 실재의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물리적 현상을 기술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입장은 아인슈타인의 실재론과 대조된다. 아인슈타인은 실재가 관측과 무관하게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보어는 실재가 우리가 측정할 때 드러나는 방식으로만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다. 즉, 실재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방식과 측정 행위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어의 실재성 개념은 실험과 관찰이 실재를 규정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실재론과 차이를 보인다. 그는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의미가 측정 과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현상과 관찰이 실재의 본질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마하의 실증주의
마하의 실증주의는 과학적 개념과 이론이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요소로만 구성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물리학이 객관적 실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 감각 자료를 경제적으로 기술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실재는 감각적 경험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으며, 실험과 관찰을 통해 검증되지 않는 개념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마하는 뉴턴의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 개념을 비판하였다. 그는 이러한 개념이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없기 때문에 물리학에서 불필요한 요소라고 보았다. 따라서 물리학은 실재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확인된 현상을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설명하는 학문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과학 이론을 단순히 경험적 법칙의 집합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과학적 개념들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 경험을 정리하고 요약하는 도구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리학에서 사용되는 개념은 언제든 경험적으로 수정될 수 있으며, 실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현상을 기술하는 역할만 수행해야 한다고 본다.
마하의 실증주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뉴턴 역학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던 절대적 개념들을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배제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사고방식은 상대성 이론이 기존 물리학의 절대적 개념을 폐기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요약하자면, 마하의 실증주의는 경험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개념을 과학에서 배제하고, 감각 경험에 기초한 경제적인 설명만을 과학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푸앵카레의 규약주의
푸앵카레의 규약주의는 과학 이론과 개념이 절대적 진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선택하는 규칙과 관습에 따라 구성된다는 입장이다. 그는 과학적 법칙이 단순한 경험적 사실이 아니라, **여러 가능성 중에서 선택된 규약(convention)**이라고 주장하였다.
푸앵카레는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예로 들어, 공간의 구조가 경험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에 따라 채택되는 규칙이라고 보았다. 즉, 공간의 성질을 기술하는 기하학적 체계는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유용하고 편리한 방식으로 선택된 체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물리학의 기본 법칙이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지만, 그러한 법칙의 선택 자체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장 단순하고 유용하다고 판단한 방식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뉴턴의 운동 법칙과 라그랑주 역학은 같은 물리적 현상을 다르게 표현하지만, 어느 하나가 절대적으로 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푸앵카레의 규약주의는 과학 이론이 절대적 진리를 반영한다는 실재론적 입장을 부정한다. 그는 과학적 개념들이 경험적 데이터를 설명하기 위해 편리한 방식으로 채택된 규칙적 표현일 뿐이며, 다른 방식으로도 동일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과학 이론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규약적인 성격을 갖는다.
한마디로 말하면, 푸앵카레의 규약주의는 과학 법칙이 필연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능성 중에서 가장 편리하고 유용한 체계로 선택된 규칙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의 지식이 원칙적으로 모든 자연현상을 기술하는 것의 기초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양자역학이 나오고나서는 무한대로 그 가능성이 높아지지만 아인슈타인은 스스로 발견한 상대성이론과 특수상대성 이론을 바탕으로 이러한 자신의 주장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다른 과학에서 그것이 얼마나 가능할 수 있을까 몇가지를 살펴보자. 지질학의 ‘판구조론’ 같은 경우 지각체계의 구조적 변동은 역학 법칙을 따르겠지만, 실제로 그것은 너무나 광대하고 복잡해서 그런 법칙에 기초한 수학적 계산은 거의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학에서는 화학 법칙 대부분은 이미 확립된 물리학의 기본 법칙에 유도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서 생물학은 물리 → 화학 → 생물(살아있는 유기체)’로 연결되는데 있어서 물리학적인 이론과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과학에서 환원주의 프로그램
환원주의는 복잡한 현상을 더 단순한 구성 요소나 기본 법칙으로 설명하려는 과학적 접근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과학적 탐구에서 보다 근본적인 수준의 법칙과 원리를 통해 복잡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가정을 전제로 한다. 환원주의는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등 다양한 과학 분야에서 적용되며, 특히 자연과학에서 강력한 연구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고 있다.
환원주의 프로그램은 크게 방법론적 환원주의와 존재론적 환원주의로 나누어진다. 방법론적 환원주의는 복잡한 시스템을 더 단순한 요소들로 분석하는 것이 과학적 설명의 최선의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생물학적 현상은 화학 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화학적 과정은 물리학적 원리로 분석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존재론적 환원주의는 보다 근본적인 실재가 존재하며, 복잡한 현상은 더 단순한 실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입장이다. 이 관점에서 생명 현상은 물리·화학적 과정의 산물이며, 의식과 같은 심리적 현상도 궁극적으로는 신경과학적, 물리적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본다.
환원주의 프로그램의 대표적인 사례는 물리주의적 환원주의이다. 이 접근법에 따르면 생물학, 화학, 심리학 등 다양한 과학적 설명들은 결국 물리학의 법칙으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DNA의 이중 나선 구조는 생물학적 발견이지만, 결국 화학적 결합과 물리적 상호작용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환원주의 프로그램에는 한계도 존재한다. 생물학에서는 시스템 생물학이 등장하며, 단순한 요소로 분해하는 방식만으로는 생명 현상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또한 심리학과 사회과학에서는 비환원주의가 강한 입지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의식과 사회적 행동이 단순한 물리적 과정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환원주의 프로그램은 과학에서 중요한 방법론적 틀로 기능하며, 특히 자연과학에서 많은 성과를 이루어왔다. 하지만 모든 현상이 보다 근본적인 법칙으로 환원될 수 있는지, 아니면 새로운 수준의 설명이 필요한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과학철학에서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다.
환원주의 관점에서 판구조론 분석
판구조론(Plate Tectonics Theory)은 지구의 표면이 여러 개의 판(tectonic plates)으로 나뉘어 있으며, 이 판들이 맨틀 대류(mantle convection)에 의해 이동하면서 지진, 화산 활동, 산맥 형성 등의 지질학적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환원주의 관점에서 판구조론을 분석하면, 복잡한 지구 표면의 지질학적 변화가 보다 기초적인 물리적·화학적 과정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가정이 적용된다.
환원주의에 따르면, 판구조론의 핵심 개념들은 더 기본적인 물리적 원리와 힘(중력, 열역학, 유체역학 등)으로 설명될 수 있다. 판의 이동은 맨틀 내의 열 대류(convection current)에 의해 주도되며, 이는 열역학적 법칙과 유체역학의 원리를 따른다. 판의 충돌과 분리는 물리적인 응력(Stress)과 변형(Strain) 메커니즘에 의해 기술될 수 있으며, 지진과 화산 활동 역시 이러한 물리적 과정의 결과로 설명될 수 있다.
판구조론에서 일어나는 지질학적 현상들은 기본적으로 물리학과 화학의 법칙으로 설명 가능하다. 맨틀과 지각의 조성 변화는 화학적 상호작용을 따르며, 대륙판과 해양판의 밀도 차이는 물리적인 밀도 변화와 부력 원리로 분석될 수 있다. 화산 분출 과정 또한 화학적 반응과 열에 의한 용암의 점성 변화로 설명된다. 따라서 환원주의적 관점에서는 판구조론을 독립적인 이론으로 간주하기보다는, 보다 기본적인 물리·화학적 원리로 환원하여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환원주의적 접근이 판구조론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도 존재한다. 판구조 운동은 단순한 원인-결과 관계가 아니라, 여러 요인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비선형적 시스템이다. 또한 지질학적 변화는 수백만 년에 걸쳐 일어나며, 이를 개별적인 물리·화학 과정으로 환원하는 것이 쉽지 않다. 판구조론은 기후 변화, 생태계 변화, 해양의 흐름 등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이를 단순한 환원적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결론적으로, 환원주의적 접근법은 판구조론의 근본적인 원리를 물리학과 화학의 법칙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며, 실제로 맨틀 대류, 열전달, 응력-변형 관계 등의 연구에서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판구조론이 다루는 지질학적 현상들은 복잡한 상호작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단순히 물리·화학 법칙으로 환원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판구조론을 이해할 때 환원주의적 접근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복잡계적 관점을 병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공적인 과학지식을 추론하거나 보증할 수 있을까? 몇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는 순수한 직관을 통해서 연역적 방법이나 귀납적 방법으로 해볼 수 있지만 사실 이것은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뉴턴은 귀납을 긍정했지만, 귀추적 또는 가설-연역적 방식과 드러나지 않게 결합하기도 하였다. 명제의 참을 입증할 수는 없지만, 올바른 예측은 가설의 정확성을 보증한다고 여겨진다. 뉴턴 물리학은 실제 세계에서 너무나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고전 역학이 필수적이고 선험적으로 참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적 관점을 낳게 되었다. 반증주의를 포함해 이와 같은 주장 중 어느 것도 확실성을 보장하거나 법칙과 이론들을 선별해내기에 충분한 한 가지 도구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부가적인 지침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방법론, 준거, 구속조건들에 대한 이러한 논의 이후에도 우리에게 남겨지는 것은 하나의 도구 모음 상자로서, 도구들 각각은 발전하는 과학의 다양한 환경 속에서 어느 정도 유용하지만, 각각 혹은 그 조합이 과학의 ‘유일한’ 방법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과학 지식은 교정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전물리학(의 철학적 전제)에 대한 비판들
키르히호프의 ‘현상론적 방법론’: 물리학이 해야 할 일은, 모델이나 원리를 통해 인간의 정신에 선험적으로 필수적이거나 자명한 것을 이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연 현상을 완전하고 정확하고 단순하게 설명하는 것.
마하: 물리학의 법칙이란 현상에 대한 단순하고 편리한 요약. 사실적 지식은 어떠한 외부의 이론적 개념 없이 감각 경험의 실증적 자료에만 기초해야 한다는 실증주의적 준거를 발전시킴 → 뉴턴의 절대 공간 비판으로 연결됨
퍼스 : ‘실용주의’와 비엔나학파의 ‘논리실증주의’도 유사한 주장을 펼침
푸엥카레의 ‘규약주의’ : 물리학의 일반 법칙들이 관찰과 데이터를 간단하게 직접 요약한 것은 아니다. 즉각적인 감각은 추상적인 법칙들과 상당히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여기서 규약주의는 과학의 원리는 그 자체가 선험적으로 참이거나 거짓일 수 없는 인간 정신의 창조물이며, 그 원리의 일부는 실재에 대한 경험을 조직하는 데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뒤엠: 물리학 이론의 목적은 현상에 대해 ‘참된’ 이론적 구성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압축된 표상을 제공하는 것
예측이 경험과 일치할수록, 확증의 정도는 높아지는가?
과학에서 이론의 확증(confirmation)은 경험적 증거와 이론적 예측 간의 일치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확증의 정도를 정성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특히 확증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다. 예측이 경험과 일치할수록 확증의 정도가 높아진다고 볼 수 있지만, 어떤 경험적 증거가 얼마나 강하게 확증하는지를 결정하는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헴펠의 확증 역설은 논리적으로는 타당하지만, 실제 과학적 확증 과정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례를 제시한다. 또한, 과학적 확증의 문제는 단순한 경험적 관찰만으로 해결되지 않으며, 학문적 합의와 사회적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확증의 기준은 여전히 철학적으로 논의가 필요한 미해결 문제로 남아 있다.
헴펠의 논의: 확증의 역설
헴펠(Carl Gustav Hempel)의 확증 이론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확증의 역설(paradox of confirmation)이다. 이는 특정한 논리적 구조가 우리의 직관과 어긋나는 결과를 초래함을 보여준다.
헴펠의 논의는 다음과 같다.
가설: "모든 까마귀는 검다."
논리적 동치: "모든 검지 않은 것은 까마귀가 아니다."
경험적 관찰: "녹색 개구리는 까마귀가 아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녹색 개구리의 존재는 "모든 검지 않은 것은 까마귀가 아니다"라는 진술을 확증하며, 이는 다시 "모든 까마귀는 검다"라는 가설을 확증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녹색 개구리의 존재가 까마귀의 색깔에 대한 일반 법칙을 확증하는 사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는 과학적 확증이 단순한 논리적 귀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험적 증거가 실질적으로 관련이 있는지를 평가하는 기준이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경험적 예측과 확증의 정도
경험과 예측이 일치할수록 확증의 정도가 높아진다고 직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문제는 어떤 경험적 증거가 얼마나 강하게 확증하는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뉴턴의 중력 법칙에 따르면 "태양의 주위를 도는 행성의 궤도는 타원이다." 이때, 만약 우리가 어떤 천체가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 궤도를 돈다는 것을 관찰하면, 이는 뉴턴의 이론을 강하게 확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태양 주위를 돌 필요가 없는 어떤 존재도 이 이론을 확증하는가?
이 문제는 헴펠의 확증 역설과 유사하게, 어떤 경험적 증거가 가설을 확증하는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단순히 논리적 귀결만으로 확증의 강도를 평가하는 것은 직관적으로나 실질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
확증의 기준에 대한 논의와 지식사회학적 시각
과학적 확증의 기준은 여전히 논쟁 중이며, 이에 대한 다양한 접근이 존재한다. 베이즈주의적 확증 이론은 확률적 관점에서 증거가 가설의 신뢰도를 얼마나 증가시키는지를 평가하며, 과학철학자들은 다양한 확증 기준을 제안해 왔다.
지식사회학적 관점에서는 과학 지식이 단순히 경험적 증거에 의해 확증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과 학문적 합의 과정에 의해 형성된다고 본다. 과학적 이론은 실험과 경험적 데이터뿐만 아니라, 연구 공동체가 어떤 데이터를 확증의 근거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형성된다. 즉, 확증의 문제는 단순히 경험과 예측의 일치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합의와 사회적 요소에 의해 조정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지식사회학과 과학적 확증 문제
지식사회학은 과학적 지식이 단순히 객관적이고 경험적으로 확증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제도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고 유지된다고 본다. 이는 과학적 이론이 사회적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과학적 확증 과정 또한 사회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과학적 확증의 문제는 단순히 경험과 예측의 일치만으로 해결되지 않으며, 어떤 이론이 확증되었다고 평가되는 과정에는 사회적 합의, 과학 공동체의 규범, 연구 환경, 그리고 정치·경제적 요인이 영향을 미친다. 지식사회학적 관점에서는 과학적 확증이 단순한 논리적 귀결이 아니라, 과학 공동체 내에서 정립된 규칙과 사회적 맥락 속에서 구성되는 과정이라고 본다. 이는 과학적 이론이 경험적으로 검증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형성된 기준과 제도를 통해 확증의 의미가 결정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확증 기준의 사회적 구성 : 과학철학에서는 전통적으로 과학적 이론이 경험적 증거와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통해 확증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지식사회학적 관점에서는 어떤 증거가 유효한 것으로 간주되는지, 어떤 이론이 확증되었다고 판단되는지는 과학 공동체의 사회적 합의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토마스 쿤(Thomas Kuhn)의 패러다임 이론에 따르면, 과학은 점진적으로 누적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패러다임(paradigm) 내에서 연구가 이루어지며,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할 때 기존의 확증 기준도 변화한다. 즉, 어떤 이론이 확증되었다고 평가되는 방식 자체가 과학 공동체의 패러다임에 의존한다. 또한,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와 과학기술학(STS,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에서는 과학적 사실이 단순히 자연의 법칙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실의 실험 과정, 논문 출판 과정, 연구자들의 협력과 경쟁 등을 통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과학적 확증의 문제는 단순히 경험적 증거와 이론의 관계로 환원될 수 없으며, 어떤 증거가 확증으로 인정되는지, 어떤 이론이 과학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간주되는지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다.
확증 역설과 지식사회학 : 헴펠의 확증 역설(예: 녹색 개구리가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가설을 확증할 수 있는가?)은 논리적으로는 타당하지만, 과학적 실천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지식사회학적 시각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과학의 사회적 규범과 합의 과정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과학자들은 어떤 경험적 데이터가 특정한 이론을 확증하는 데 적절한지를 판단하는 사회적 기준을 가진다. 특정한 데이터가 가설을 확증하는지 여부는 단순한 논리적 관계만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과학 공동체 내에서 합의된 실천과 검증 방법에 따라 결정된다. 과학 지식은 연구자들이 실험을 어떻게 설계하는지, 데이터 해석을 어떻게 수행하는지, 동료 평가(peer review) 과정을 어떻게 거치는지 등의 요소에 의해 형성되므로, 확증의 개념도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과학적 확증과 사회적 권력 : 지식사회학에서는 과학적 확증이 단순히 경험과 예측의 일치로만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며, 사회적 권력과 제도가 과학적 확증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지적한다. 과학자들이 특정한 이론을 확증된 것으로 간주하는 과정은 연구비 지원, 학술지의 영향력, 정부의 과학 정책 등과 같은 사회적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과학적 논쟁에서 누가 더 신뢰받는 전문가로 인정되는지, 어떤 연구가 주류 학문으로 자리 잡는지는 단순한 경험적 검증을 넘어 사회적 권력 구조와 연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 연구에서 일부 기업과 정치 세력이 특정한 과학적 연구를 강조하거나 반대하는 방식은 과학적 확증 과정이 정치적·경제적 요소와 결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과학적 확증이 단순히 객관적 사실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 이해관계와 제도적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토마스 쿤(Thomas Kuhn, 1922-1996)은 과학의 발전이 단순히 점진적인 지식 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과학이 하나의 패러다임 아래에서 연구가 진행되다가, 변칙(anomalies)이 축적되면서 위기를 맞이하고, 결국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교체되는 과정이 반복된다고 보았다. 이를 통해 쿤은 과학이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변화하는 체계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은 과학이 단순히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과학과 혁명기의 반복을 통해 불연속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과학적 변화는 단순한 데이터 축적이 아니라, 과학자들의 사고방식과 연구 패턴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사회적·역사적 요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또한, 쿤의 이론은 과학이 절대적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각 시대의 패러다임에 따라 변화하는 체계임을 강조한다. 이는 과학철학뿐만 아니라, 지식사회학과 과학기술학(STS)에서도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패러다임의 개념
패러다임(paradigm)은 단순한 과학 이론이나 법칙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연구를 수행하는 기본적인 틀(framework)을 의미한다. 패러다임에는 특정한 세계관, 이론, 연구 방법, 문제 해결 방식 등이 포함되며, 과학자들은 이를 기반으로 연구를 수행한다.
예를 들어, 뉴턴 역학(고전역학)은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물리학의 패러다임이었다. 과학자들은 뉴턴의 법칙을 사용하여 자연 현상을 설명하고 연구를 진행했으며, 패러다임 자체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20세기 초,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뉴턴 역학은 더 이상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없게 되었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교체되었다.
정상과학과 패러다임의 역할
과학사는 정상과학기(normal science)와 과학혁명기(scientific revolution)로 나뉜다. 정상과학기 동안 과학자들은 패러다임을 공유하며 연구를 수행하고, 패러다임을 확장하거나 세부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한다.
정상과학기에는 과학자들이 기존 패러다임을 의심하지 않으며, 과학 교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패러다임을 주입한다. 연구의 목표는 새로운 이론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패러다임을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고 보다 정교하게 기술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세기 과학자들은 뉴턴 역학을 기반으로 천체의 움직임을 계산하고, 공학적 응용을 연구하는 데 집중했다. 뉴턴 역학 자체를 부정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었으며, 과학적 연구는 기존 패러다임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졌다.
변칙의 축적과 과학적 위기
시간이 지나면서 기존 패러다임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점점 더 많이 발견된다. 쿤은 이러한 현상을 **변칙(anomalies)**이라고 불렀다. 변칙은 현재 패러다임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실험 결과나 자연 현상을 의미하며, 초기에는 예외적인 현상으로 간주되어 무시되거나 기존 패러다임을 수정하여 해결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변칙이 누적되면서 기존 패러다임이 이를 해결하는 데 반복적으로 실패하면, 과학자들은 점점 기존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다고 인식하게 된다. 이때 과학은 혼란기(crisis period)에 접어들게 되며, 과학자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19세기 후반, 천문학자들은 수성의 궤도가 뉴턴 역학으로 정확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시 과학자들은 뉴턴 역학 자체를 의심하기보다는, "태양 근처에 보이지 않는 행성이 존재할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결국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뉴턴 역학을 대체하는 과학 혁명을 가져왔다.
과학 혁명과 패러다임 전환
기존 패러다임이 변칙을 해결하지 못하고 충분히 많은 과학자들이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면, 과학은 혼란기(crisis period)에 접어든다. 이 시기에는 기존 패러다임에 도전하는 다양한 새로운 가설과 이론이 등장하지만, 아직 명확한 대안 패러다임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후, 기존 패러다임보다 더 성공적으로 변칙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면, 과학자들은 점진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이 과정이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이다. 패러다임 전환은 단순한 이론의 수정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과정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정착되면 과학은 다시 정상과학기로 돌아가며, 새로운 패러다임 하에서 연구가 진행된다. 예를 들어, 뉴턴 역학에서 상대성이론으로의 전환,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 등이 패러다임 전환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과학의 발전과 절대적 진리 문제
쿤의 관점에서 과학은 점진적으로 절대적 진리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인 과학철학에서는 과학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정확한 설명을 제공하며, 궁극적으로 절대적 진리에 수렴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쿤은 과학이 단순한 누적적 발전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 변화한다고 주장하였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존 패러다임보다 더 많은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반드시 절대적 진리에 더 가까워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각 패러다임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연을 설명하며, 하나의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보다 더 "진리"에 가깝다고 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뉴턴 역학은 상대성이론에 의해 대체되었지만, 특정한 조건(낮은 속도, 약한 중력)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는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적용 범위가 달라지는 것을 보여준다.
과학 지식과 사회적 영향
쿤의 모델에서 중요한 점은 과학이 단순히 논리적·실험적 증거에 의해서만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 공동체의 합의와 사회적 요인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기존 패러다임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면 심한 저항이 발생할 수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자리 잡기 위해서는 단순히 실험적 증거뿐만 아니라, 과학자 공동체의 합의 과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과학 지식은 단순한 논리적·경험적 검증만으로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과정 속에서 형성된다.
다양한 과학에 대한 절충적 관점이 있다. 과학 활동의 특징에 대한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접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물리학에서 설명은 이론이나 법칙을 통해 일련의 현상을 설명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좋은 이론은 내적으로 일관되어야 하고 또한 논리적 모순이 없고, 올바른 결과가 있어야 한다. 물리적 실재와 일치하는 결과나 예상을 제시하고, 그 구조와 명제가 간단해야 한다. 가설연역적 방법은 (반증가능성을 통해) 이론을 판단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모델과 유추는 귀납을 통해 유용한 가설을 추측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과학의 진보와 지식의 성장은 점점 더 적은 수의 가정으로 보다 많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보다일반적인 더 추상적이면서 더 간단한 이론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과 과학 지식은 여전히 잠정적이라는 특성을 가지며, 역사적‧사회적 요인의영향을 받고 수정된다. 이론은 인간의 정신에 의해 구성되는 편리한 개념과 규약을 통한 실재의 표상을 제공한다.
또한 과학 이론의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현실세계에서 작동하는 과학활동에 대한 복합적 묘사와 연결할 수
있다. 일반적인 개념적 기반으로 본다면 과학의 실행, 방법, 목표의 3단계 위계구조로도 파악할 수 있다. 먼저 실행은 가장 낮은 단계로써 과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전 과정에 방향을 제시할 수 있도록, 수용된
과학적 방법들에 의해 안내되거나 지시받는다. 이 단계에서의 변화는 매우 익숙하고, 이 단계의 절대적 안정성을 지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방법은 상대적으로 실행 단계보다 안정적이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목표는 가장 높은 단계로써 마찬가지로 변화될 수 있다. 예를 들면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 → 현대 철학자로 목표가 바뀔 수 있다.
이렇게 세 가지로 결합된 요소들의 발전 속에서, 실행은 전형적으로 발전의 우선적이고 궁극적인 결정요인이다. 즉, 방법론과 목표에서의 새로운 혁신은 궁극적으로 성공적인 과학적 실행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는 불변적이고 완전한 과학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우연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과학의 본질을 특징짓는 단 하나의 합리성은 없지만, 그렇다고 실행-방법-목표의 네트워크 발전이 유용한 지식을 전개하는 데 충분한 일관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절충적인 관점은 합리적인 접근을 한다는 원칙 아래서 기존의 방식과 새로운 방식을 결합하여 만들어진다.
이로써 과학철학의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한 학기동안 천동설과 지동설로 시작해서 브라헤와 코페르니쿠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중세에 미친 영향, 뉴턴의 고전물리학에서 아인슈타인의 이론, 그리고 양자역학에서 데이비드 봄에 이르기까지. 과학사를 물리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과학이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지식을 생산하는 방식에 대해서 배우면서 또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배운 것 같다. 과학사회학이라는 학문을 시작한지도 벌써 2년이 다 되었다. 어느덧 박사과정을 수료하였고, 이제 이러한 이론과 철학을 사용해서 논문을 써야 한다. 2년동안 너무 즐겁게 배우고 사색하고 도전했던 시간이다. 학부에서는 국제정치학을, 석사는 정치외교와 공공정책을, 박사과정에서는 과학사회학을 접하면서 '전자정부와 시민참여'에 관한 STS적 접근으로 미래 한국정치의 새로운 지평면을 열어보고 싶다. 이제 배웠으니 비로소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 쿠씽의 고민과 사유의 깊이에도 놀랐던 시간이고, 어느정도 양자역학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에도 스스로 놀라웠던 시간이었다.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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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skhynix.co.kr/post/the-epitome-of-modern-phys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