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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과학일기

미국, 과학기술은 어떻게 해서 상업화가 되었나???

STS 과학사회학

by 낭만민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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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과학은 상업화를 하면 안되는가?


다시 말하면 과학은 과학기술을 판매하면 안되는가? 안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혹은 반대로 과학기술을 판매할 수 있다면 어떤 조건하에서 판매할 수 있는가? 그런 담론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담론들이 기반이 되어서 과학기술이 상업화가 되어서 국가간에 과학기술을 판매하고 전쟁에 사용하거나 각국의 과학기술의 발전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가? 신자유주의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난 이후의 시대에는 자연스럽게 '과학이 돈이 되는 시대'가 되었지만 불과 100년전만 하더라도 '과학기술'은 그 자체로 신성하고 순수한 인류를 위한 기술이었고, 누구나 기술을 공유해서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는 공유물이었다.


사실 과학기술의 상업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과학의 역사 안에서 다양한 담론이 존재한다. 보통은 3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혼돈의 시대, 선형모델, 모드1~2와 같은 구분의 시기였다. 혼돈의 시기는 기업들도 자유롭게 과학 기술을 개발하면서 소유권을 인정해주는 시기라면, 선형모델의 시기는 기초과학 발전에 따른 응용과학의 발전을 볼 수 있다. 또한 모드1~2는 대학과 사회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과학기술의 발전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러한 논의는 매우 낯설다. 왜냐하면 오랜기간에 걸쳐서 과학기술 개발을 위한 연구비 융통방식은 변화하였으나 이러한 변화를 만들어내는 과학거버넌스에 대해서는 집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을 만드는 사람들의 스텐스의 변화를 살펴보면 앞으로 어떤 변화가 예상될지는 그들의 구조적인 특징을 통해서 예측해볼 수 있따.


과학기술 상업화에 관한 담론

혼돈의 시대 : 자유기업의 시대, 과학의 소유권 인정을 기준으로 나눈다.

선형모델 : 기초과학의 후속 결과물로 응용과학을 위치시킨다.

mode1/mode2 : 대학은 독립적으로 지식을 생산한다고 보는 시기와 대학 및 사회와 정부는 상호작용을 통해 지식을 생산한다고 보는 시기로 구분한다.

반마르크스주의 : 반 마르크스주의적 역풍이 불어닥친 이후에는 과학기술 생산에서의 경제구조를 말하는 시도는 세계대전 이후 담론에서 사라지게 된다.


과학이 상업화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다양한 담론들이 출현했지만 사실 어느하나로 정리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과학거버넌스' 혹은 '과학공동체'의 관점에서 보면 상이한 집단들이 과학의 상업화에 대한 다양한 전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한 이론이 있는게 아니라 과학이 상업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역사적인 맥락을 살펴보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구성주의적인 입장으로 볼 수 밖에 없으며 상업적 입장과 공동체적 입장의 이항대립의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바라볼 수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3가지의 커다란 흐름으로 볼 수 있다.


과학의 상업화에 관한 역사적맥락 3가지_20세기

학계의 거물’ 체제(1890~제 2 차 세계대전) : 학계에서 소수엘리트에 의해서 상업화 진행

냉전 체제( ~1980) : 국가안보의 상황에서 국영과학시스템이 상업화로 발전

전 지구적 사유화 체제(1980 년 이후) : 신자유주의에 따른 상업화의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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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계가 주도하는 체제하에서 과학의 상업화


이른바 학계의 거물 체제라고 하는 시기이다. 기업 원칙에 따른 재단의 도움으로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 운영되는 엄선된 연구대학을 지원하였다. 미국의 대학 연구소는 민간기업의 지원을 받아 대학과 기업 양쪽에서 동시에 설립되었으며, 이러한 영향으로 미국은 다른 나라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높은 수준의 과학의 상업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접근은 하버드대학의 '시민인식론'으로 유명한 실라 재서노프의 연구에서도 잘 드러난다. 정부는 개발된 기술 및 상품의 독점을 통제하였으며, 기업은 반독재법에 대항하여 시장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지적 재산권 등의 간접적 영역으로 관심을 옮기게 되었다.


미국은 소수의 연구기관에 의해 개발된 기술 및 상품에 의한 독점에 대항하여 1890년 셔먼 반독점법을 시작으로 1914 년 클레이턴법으로 대항운동이 촉발되었다. 반독점 기소와 같은 법에 의해 시장을 직접 통제하려는 시도가 가로막히자, 기업은 시장을 통제하고 예견할 수 없는 사건들을 관리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지적 재산권, 기술표준의 부과 등과 같은 간접적 영역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발명과 혁신이 반독점소송에 맞서는 효과적인 방어수단이었으며, 특허 및 지적재산권이 20 세기 초에 경쟁을 통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최선의 수단으로 간주되었으므로, 대기업들은 이 시기 과학연구를 사내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이러한 예로 1919 년 미국은 독일 특허를 몰수해 매우 좋은 조건으로 미국 기업들에 사용허가를 내주는 일도 있었다.


발명은 개별 천재의 결실이 아닌 피고용인 수행하거나 발명한 것이면 무엇이든 고용주가 소유한다는 “작업장의 권리” 수립됨 재단의 선별적인 지원으로 대학실험실은 기업의 일부분이 되었으며, 정부의 균형있는 지원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1 세대 산업계의 거물들에 의해 설립된 재단들은 초반에는 궁핍하거나 가난한 학자들 개인에 대한 지원을 원칙으로 했으나, 1920 년대부터는 지속적인 프로그램에 대한 연구 기부금 제공한다. 분야 전체의 방향 전환을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기관의 설립 등에 대해 자금을 선별지원하였고, 이러한 노력은 결과적으로 대학의 연구실험실이 기업의 사업계획에 필수적인 부속물이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한편으로, 재단에 의해 치우친 연구 지원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1916 년 국가연구기금 (NRC)을 설립하였으나 정부의 연구자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 반대 및 적은 지원액으로 다양한 대학의 연구역량을 유지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산업연구소의 부상하는 계기가 된다. 미국의 대규모 실험실은 유럽과 달리 대학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 처음부터 위에서 보는 것처럼 기업 중심의 상업적인 기획이었으며, 두 갈래로 전개된 운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가지는 개별 천재의 신성한 능력으로 간주되어온 어떤 것을 관료화하고 산업화하려는 추동력이었고, 다른 한가지는 특수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학문적 사회구성체를 기업의 필요에 맞게 적응시키려는 견인력이었다. 간략하게 알아보았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서 미국의 과학은 학계가 주도하는 방식에서 기업이 주도하는 상업성을 띄게 되었다.



1914년 클레이턴법

클레이턴법(Clayton Antitrust Act, 1914)은 미국의 독점금지법 중 하나로, 기존의 셔먼법(Sherman Antitrust Act, 1890)의 한계를 보완하고 기업 간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 제정된 법이다. 이 법은 반경쟁적 기업 행위를 보다 구체적으로 규제하고 노동조합 활동을 보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셔먼법이 기업 독점을 방지하기 위해 제정되었지만, 법률이 모호하고 법원의 판결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면서 충분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기업들이 합병과 독점적 계약을 통해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는 사례가 증가하였고, 특히 철도, 석유, 철강 산업을 중심으로 거대 기업들이 시장을 독점하는 문제가 심각해졌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반독점 및 노동 보호 강화를 위한 개혁 요구가 커지면서 클레이턴법이 제정되었다.

클레이턴법은 기업 간 반경쟁적인 인수합병(M&A)을 금지하여 독점을 방지하였다. 경쟁을 줄이거나 독점을 형성하는 기업 인수는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또한 동일한 제품을 구매하는 고객에게 차별적인 가격을 책정하는 가격 차별 행위를 금지하였으며, 특정 기업이 경쟁사를 배제하기 위해 특정 고객에게만 낮은 가격을 적용하는 행위를 방지하였다.

기업이 고객에게 특정 제품을 구매하도록 강요하는 구속 조건 계약(Tying agreements)을 금지하였으며, 한 기업이 특정 공급업체와 독점 계약(Exclusive dealing agreements)을 맺어 경쟁사를 배제하는 행위를 제한하였다. 또한, 같은 업종 내 경쟁 기업들이 동일한 인물을 이사로 두는 것을 금지하여 거대 기업 간의 담합을 방지하고 시장 경쟁을 촉진하였다.

클레이턴법은 노동조합 보호 조항을 포함하여, 노동조합 활동을 독점금지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셔먼법이 노동조합을 기업과 동일한 방식으로 규제했던 문제를 개선하고, 파업, 보이콧, 평화적 피케팅(Peaceful Picketing) 등의 노동 운동을 보호하였다.

클레이턴법은 기업 독점을 방지하고 공정한 시장 환경을 조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반경쟁적 기업 합병과 시장 지배력 강화를 제한함으로써 경쟁을 촉진하였으며, 가격 차별 및 배타적 계약을 금지하여 중소기업을 보호하였다. 또한, 노동조합을 보호함으로써 노동권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클레이턴법은 집행의 어려움이 존재하였다. 기업들은 법의 허점을 이용하여 여전히 독점을 강화할 방법을 모색하였으며, 변형된 독점 전략을 통해 시장 지배력을 유지하였다. 또한, 연방거래위원회(FTC)와 법원의 해석에 따라 법 집행이 일관되지 않아 실제 적용이 제한적이었다.

클레이턴법 이후, 미국은 독점을 더욱 강력하게 규제하기 위해 추가적인 법률을 제정하였다. 1914년 연방거래위원회법(FTC Act)은 클레이턴법과 함께 제정되어 연방거래위원회(FTC)를 설립하였으며, 반독점법 집행을 강화하였다. 1936년 로빈슨-패트먼법(Robinson-Patman Act)은 가격 차별 규제를 더욱 강화하였으며, 1950년 셀러-케포버법(Celler-Kefauver Act)은 기업 합병 규제를 보다 구체화하였다.

클레이턴법은 반독점 규제를 강화하고 노동조합의 권리를 보호하는 중요한 법률이었다. 특히 기업 간 합병, 가격 차별, 독점적 계약 등을 구체적으로 규제함으로써 공정 경쟁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후 기업들이 법의 허점을 이용하면서 추가적인 반독점 법률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독점 문제는 중요한 경제적 이슈로 남아 있다.


실라 재서노프(Sheila Jasanoff)와 시민인식론(Civic Epistemology)

실라 재서노프(Sheila Jasanoff)는 과학기술학(STS,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분야의 대표적인 학자로, 과학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연구해왔다. 그녀는 과학적 지식이 단순히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다고 주장하며, 과학과 정책의 관계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시민인식론(Civic Epistemology)**을 제시하였다.

시민인식론은 한 사회가 과학적 지식을 신뢰하고 수용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즉, 각 사회가 과학적 사실을 어떻게 판단하고 받아들이며, 공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이를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대한 이론적 틀이다. 이는 과학과 정책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이 과학적 사실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방식이 문화적으로 다르게 형성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재서노프는 시민인식론을 통해 과학이 단순한 전문가들의 영역이 아니라 공공의 신뢰와 참여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았다. 그녀는 특히 과학적 논쟁이 민주적 거버넌스 속에서 어떻게 조정되고 정당화되는지를 분석하였다. 시민인식론은 국가별로 차이를 보이는데,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법적 절차와 전문가 토론이 강조되는 반면,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국가 기관과 공적 심의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개념은 과학기술이 단순한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구성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과학 정책이 공정하고 효과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시민 참여와 사회적 신뢰가 필수적이다. 재서노프의 시민인식론은 과학과 민주주의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탐구하는 데 중요한 이론적 틀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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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냉전체제에서 과학의 상업화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국제질서는 소련과 미국이라는 양극체제로 분할되었다. 이른바 냉전체제가 도래한 것이다. 냉전체제의 핵심은 끝없는 군비경쟁이었고 이는 과학기술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급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냉전 체제에서는 국가안보를 위해서 고등교육에 대한 군대 자금 지원을 시작한다. 이를 해 냉전시대에 적합한 실험실 형태 육성하고 확산한다. 체계가 점점 잡혀 가면서 국영 과학시스템으로의 구조화가 되어 간다. 미국은 양차대전 동안 거대한 팀의 구성을 목도하면서 실험실에 대한 이해방식을 바꾸는 과정을 이미 거친 후였다.


표면적으로 과학은 점점 거대 장치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군대는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전쟁이후 과학정책의 공백기에 대응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과학자들과의 접촉을 유지하고 발전시킨다. 핵무기를 개발한 오펜하이머와 맨하탄 프로젝트의 수 많은 과학자들이 그대로 군대와의 연결성을 갖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은 소련과의 군비경쟁에서 뒤쳐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기 때문에 군대의 자금지원이 과학조직에서 지배적인 고려로 계속 남아 있도록 관리했다. 미국 행정부는 냉전시대에 맞는 정책의 변화를 통해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기업과 대학에 대해서 냉전체제에 맞게 과학이 수행되는 방식을 수정하도록 강제하였다.


하지만, 체제의 변화가 이전 세대의 경험과는 정반대로 과학과 상업은 서로 섞여서는 안 된다는 교조에 가까운 확신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새로운 냉정 체제에서 가장 명백한 변화는 정부가 과학에 대한 자금지원과 관리에서 세번째로 큰 행위자로 끼어들어 군대의 후원 하에 비밀스러운 산업정책을 운영함으로써 기술개발 영역에서 승자와 패자를 고르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한편, 유럽의 경쟁 기업들 중 상당수는 전쟁으로 곤경에 빠졌으나, 미국 기업의 힘과 영향력은 커지고 있었으며, 군대자금의 유입으로 기업연구소는 대학과 좀 더 유사한 방식으로 재편되었다.


이른바 산업체 과학은 여전히 제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수행했던 많은 기능들인 일상적인 검사나 제품의 향상 등도 도맡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 다부문화되고 복합화된 밀리터리 회사들은 각각의 부문이 그 자체로 수익의 중심이 되어야 하며, 모든 부문에 적용가능한 기준에 따라 회사 내에서 자금을 할당할 거라는 방침을 정하였다. 시장에서도 기업의 수익을 요청하면서 동시에 냉전에 필요한 기술개발 역시 요청하였다. 이부분에서 군대자금은학문적 과학지배를 넘어 산업체 과학 내지 상업적 과학의 많은 부분을 재조정하는 효과를 가지고 왔다. 군대 자금을 끌여들인 외부 수입의 흐름 확보를 통해 기업연구소를 군사 기업과 조화시킬 수 있었다.


국방부는 기초와 응용연구의 혼합 비율을 제어할 수 있는 간접비 관련 규정으로 기업연구소가 대학과 유사한 방식으로 재편되도록 만들었다. 군대가 미국 과학정책의 총사령관이 되겠다는 계획적인 고려와 의도를 가지진 않았으나, 엘리트 과학자들을 잡아두기 위해 다양한 방법의 자금지원을 하면서 새로운 실험실의 형태를 발명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예를 들어 보자. 산업적 규모의 원심분리기, 우라늄 농축 연구, 핸퍼드 부지는 민간기업에 위탁하였다. 오크리지, 로스앨러모스, 아르곤, 브룩헤이븐은 보통 2차 세계대전 전후로 만들어져서 국립연구소로 운영되고 있다.


한편 학생도 교수도 없는 대학 캠퍼스와 비영리의 산타모니카 해변 휴양지를 결합시킨 랜드(LAND)도 있다. LAND (Los Alamos National Laboratory's LAND project)는 학생과 교수 없이 운영되는 독특한 연구 환경을 조성하는 개념으로, 국립연구소의 연구와 비영리적 공공 공간을 결합한 실험적 프로젝트이다. LAND는 기존의 대학 캠퍼스처럼 학문과 연구가 이루어지는 공간이지만, 전통적인 교수-학생 관계 없이 운영되며, 연구원과 과학자들이 공동으로 연구하는 개방형 연구소에 가깝다. 또한, 산타모니카 해변과 같은 비영리적 공공 휴양지의 개념을 차용하여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교류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기존의 연구소나 대학과 차별화되며, 특히 대형 과학 프로젝트나 국방, 에너지, 기후 연구와 같은 분야에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촉진하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목표이다.


항공우주, 전자공학, 미사일 개발 등 중대한 영역 R&D에 대한 상업적 수행을 하는 랜드와 같은 방식이 있는가 하면, 연구의 최전선에서 우위를 유지하는 데 강력한 국가적 이해가 걸려 있다고 믿어지는 분야는 군대서 R&D 보조금 지급하는 경우도 있다. 연구인력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생활방식 및 연구의제의 자율성을 약속함으로써 군사연구와 비군사연구 등 두 부류의 시스템이 발전하였고, 군사연구에 엘리트 인재들이 집중되어 이다. 냉전 체제 아래에서 군대가 과학의 관리에 직접 관여한 영역들에서 지적 재산권을 현저하게 감소시키는 정책을 취하였다. 1946 년 ‘원자에너지법’같은 경우 정부는 군대가 지원한 연구에서 나온 특허권을 정부가 갖고 거기서 나온 발명은 비독점을 전제로 특허사용료를 받지 않고 미국 기업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1946년 ‘원자에너지법(Atomic Energy Act of 1946)’은 미국에서 원자력의 개발과 사용을 규제하기 위해 제정된 법으로, 맨해튼 프로젝트 이후 원자력의 민간 및 군사적 활용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최초의 법률이다. 이 법은 맥마흔 법(McMahon Act)이라고도 불리며, 핵기술의 민간 통제를 강화하고, 원자력 개발을 미국 정부의 독점 하에 두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법에 따라 미국 원자력위원회(AEC, Atomic Energy Commission)가 설립되었다. AEC는 원자력 연구와 개발을 관리하는 독립적인 정부 기관으로, 원자력의 군사적 및 민간적 활용을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는 이전까지 군이 주도했던 핵 연구를 민간 기관으로 이관하는 중요한 결정이었다. 또한, 이 법은 핵기술의 기밀 유지를 강력하게 규제했다. 핵무기 및 원자로 개발과 관련된 모든 정보는 미국 정부의 독점 하에 두었으며, 동맹국을 포함한 외국과의 핵정보 공유가 금지되었다.


이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과 핵 개발을 협력했던 영국과의 관계가 일시적으로 악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1946년 원자에너지법은 민간 부문의 원자력 연구를 엄격히 제한했다. 민간 기업과 연구소가 독자적으로 원자력 연구를 수행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원자력 발전소나 방사선 관련 연구도 미국 정부의 허가 없이는 진행할 수 없었다. 이 법은 핵무기 개발 및 확산 방지를 주요 목표로 삼았다. 핵기술이 다른 국가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는 조치를 포함하여, 미국이 핵무기 개발을 독점하고, 국제적으로 핵확산을 통제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이후, 1954년 원자에너지법 개정(Atomic Energy Act of 1954)을 통해 민간 부문의 원자력 이용이 허용되었으며,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 촉진되었다. 1946년 원자에너지법은 냉전 초기 미국의 핵정책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초가 되었으며, 이후 미국과 영국, 캐나다 등 서방 국가 간의 원자력 협력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 2 제공자 규칙’ 국방부는 중요 무기 시스템이나 군사기술에 관한 지적 재산을 제2의 경쟁회사에 양도해 어떤 단일 생산 회사의 성쇠가 병목이 되지 않도록 활동했다. 이러한 정책은 군대의 규정들과 합쳐져 회사들이 지적재산권 확보 및 특허권 침해 소송 등의 행동을 자제하고 자체적인 사내연구소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하도록 유도하였다. 이는 국가안보의 기치하에 기밀 분류와 비밀주의에 에워싸인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과학이라는 모순적 체제였다. 냉전 체제에서는 소수의 사립대학들 지원하던 모습을 넘어서 학문적 과학에 대한 지속적인 보조금 지급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극명한 대조를 이루기도 한다. 민간재단의 경우, 지속적으로 대학에 대한 보조 프로그램을 운영하였으나, 1950년 재단을 조세 대피처로 활용하는 것에 대한 단속이 시작되었다. 또한 연방정부 지원에 필적할 수 없는 규모라는 한계에 의해 과학 관리에 관한 야심을 축소하기도 하였다. 예를들어, 포드재단은 1960 년에 NSF 보다 많은 지원을 제공하였으나, 1970 년에 학문적 과학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였다.



국립연구소 활동

오크리지 국립연구소(Oak Ridge National Laboratory, ORNL)는 테네시주 오크리지에 위치한 국립연구소이다. 1943년 맨해튼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설립되었으며, 초기에는 우라늄 농축과 핵물리학 연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세계적인 슈퍼컴퓨터를 운영하며, 재료과학, 에너지 혁신, 생명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특히 원자력과 신재생에너지 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고성능 컴퓨팅을 활용한 시뮬레이션과 AI 연구에도 주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커민스(Cummins)와 협력하여 고온에서도 우수한 성능을 발휘하는 새로운 강철 합금을 개발하였으며, 이는 엔진의 내구성과 효율성을 크게 향상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식물과 토양 모니터링을 위한 자율 로봇 시스템을 개발하여 바이오에너지 농장 및 자연 생태계의 데이터를 자동으로 수집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이러한 연구는 지속 가능한 에너지 생산과 환경 보전에 기여하고 있다.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Los Alamos National Laboratory, LANL)는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에 위치한 국립연구소이다. 1943년 맨해튼 프로젝트의 핵심 연구소로 설립되었으며,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했다. 현재는 국가 안보 연구를 비롯하여 고에너지 물리학, 플라스마 물리학, 양자컴퓨팅, 생명과학 연구 등 다양한 과학기술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특히 핵무기 안전성 및 비확산 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미국의 국방 및 우주 연구에도 기여하고 있다.

아르곤 국립연구소(Argonne National Laboratory, ANL)는 일리노이주 아르곤에 위치한 국립연구소이다. 1946년, 미국 최초의 국립연구소로 설립되었으며, 원자력 에너지 개발을 위한 연구를 수행했다. 현재는 원자력뿐만 아니라 배터리 기술, 나노기술, 생명공학, 환경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첨단 재료과학 연구와 슈퍼컴퓨팅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지속 가능한 에너지 연구를 위한 혁신적인 기술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브룩헤이븐 국립연구소(Brookhaven National Laboratory, BNL)는 뉴욕주 롱아일랜드에 위치한 국립연구소이다. 1947년 설립된 이후 입자물리학과 가속기 연구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세계적인 입자가속기인 상대론적 중이온 충돌기(RHIC)를 운영하며, 기본 입자와 우주의 기원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또한 방사선 연구, 신소재 개발, 환경과학 연구에서도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으며, 의료용 방사선 치료 기술 개발에도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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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지구적 사유화 체제하에서 과학의 상업화


다음으로 전 지구적 사유화 체제에 대해서 알아보자. 전지구적 사유화 체제는 다른 말로는 신자유주의 체제라고도 할 수 있다. 기업의 재구조화, 공공자금지원의 축소 및 반독점법 정책의 약화에 따른 R&D 활동의 국제화가 이루어지는 시기가 도래한다. 1970년대 말의 석유위기와 경제 침체기 동안 국제 경쟁국들에 대해 우위를 상실했다는 확신과 함께 기업 부문의 재구조화 진행하게 되었다. 챈들러식 기업의 조직구조 개선작업은 기업 내부의 다각화의 후퇴를 예고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및 NPM체제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이전까지 냉전체제에서는 학계가 주도하는 상황에서 군사적인 부분과의 연계를 추구했다면 새롭게 바뀐 전지구적 사유화 체제에서는 오히려 기업과 군대, 행정이 통합되어 경쟁력을 중심으로 발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예를 다양하게 살펴보자. 먼저는 국제지적재산권연맹 결성한 것이다. 미국의 표준과 수위에 맞춘 지적재산 보호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모두에게 강제하였고, 무역 자유화와 해외투자 보호를 명목으로 각국 정부들이 자기 영토 안에 있는 기업체들에 대한 규제상의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특권을 약화시킴으로써 미국의 제조업이 저임금 국가로 이전될 수 있도록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현금 부족으로 곤란을 겪던 정부는 기업과 군대, 학계에 대한 자금지원을 줄였고, 군대는 임무와 직접 관련이 없는 프로젝트에 대한 자금지원을 줄이도록 압력을 받았다. 이러한 흐름에서 결국 1970 년대 들어 행정부가 지원을 약속한 상당수의 정책을 철회하려 시도들이 증가했다. 같은 시기 (1975 년 이후에는 미국 고등교육 입학생 수는 증가를 멈추었고, 대학원 입학생 수 유지를 위해 많은 과학 관련 학과들은 외국인 학생들의 비율을 늘리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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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도는 긍정적으로는 미국 대학도시의 편협한 분위기를 전환하고 세계적인 시각을 갖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유익한 영향을 미쳤지만, 부정적으로는 국가건설의 목표에 봉사한다는 냉전기의 교육 정당화가 본질적으로 파산했음을 드러는 것이었다. 역설적 현상은 챈들러의 조직 모델에서 기업들이 벚어나고 있는 시기에, 대학은 챈들러적인 방향의 개혁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예를들면, 합리화와 비용절감 명목으로 부문을 나누거나 직책을 증가시키는 상픙부 중심의 관리 위계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종신재직권을 가진 교수를 임시직 노동이나 시간강사로 대체하였으며, 이렇게 변화된 대학을 새롭게 재편된 기업과 좀 더 일치시키기 위한 정치적 시도가 나타났다.


1980년 바이-돌법은 대학과 소기업들이 연방의 R&D 자금을 가지고 해낸 발명에 대해 권리를 보유하면서 독점적인 특허사용 허가를 협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 먼저 대학들은 1968 년 이래로 개개 기관별 특허협정을 통해 연방정부가 지원한 연구에 대한 특허를 사안별로 허용받고 있었으며, 1983 년 바이-돌법이 의도한 수혜자인 대기업까지 확장 적용되었다. 바이-돌법 외에도 기업들이 자기 제품을 지배하고 통제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협동연구에 관여할 수 있도록 제도 및 법률을 수립하였다. 1980 년 스티븐슨-와이들러법, 1984 년 국가협동연구법, 1989 년 국가기술이전법이 줄줄이 발의되었고, 1982년에는 특별 연방순회 항소법원도 설립되었다.


일사불란한 지적 재산권 강화는 반독점정책의 약화를 수반하였다. 이 모든 방향성의 누적 결과 미국 기업이 재구조화됨과 동시에 전 지구적 사유화 체제 내에서 사내 기업연구소의 상대적 몰락과 기업연구의 외주 관행 확산이라는 과학 조직의 변화가 일어났다. 군대가 기초과학의 조직과 자금지원에서 철수하자 반 자율적인 기업연구소는 회사의 수입원이 되지 못하게 되면서 반챈들러식 운동과 대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 전체 R&D에 대한 연방정부 지출의 비율은 1960년대 말 이후 계속해서 줄어든 반면, 산업 부문에서 유래한 지출의 비율은 증가함으로써 1980년을 전후해서 연방정부의 비율을 추월하게 되었다.


이후로는 점점 더 많은 연구에 대한 자금지원이 기업의 테두리 바깥에서 수행되었다. 지적재산권의강화, 국내의 반독점약화와 기업정책에 대항할 수 있는외국 정부의 능력 약화, 연구위탁을 낮은 임금과 약한 규제의 환경으로 이전시켜 규제차익을 추구할 수 있는 능력, 저비용으로 실시간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 재구조화를 기꺼이 받아들여 돈을 대는 기업 측에 연구에 대한 통제권을 넘겨줄 의향이 있는 대학 부문의 존재 등이 기업의 대대적인 연구 외주를 용인해준 조건들이었다. 전 지구적으로 사유화된 연구의 많은 새로운 제도들은 대학 부분 그 자체의 외부에서, 특히 현대 기업의 변형과 재편에서 나온 부가적 결과로 먼저 개척되었고, 그 후에야 대학에 강제되었다.


정리해보면, 현대 과학의 사유화 원인은 바이-돌법과 같은 법령의 법적 인가 제공이 아닌 과학의 관리와 자금지원의 연계망에서 나타난 더 큰 변화에서 찾을 수 있었다. 과학자 혹은 과학자 공동체 전체가 개방적인 공공과학을 얼마나 많이 보존하고 싶은지를 선택할 수 있고 나머지는 민간 부문에서 담당하도록 맡길 수 있었다. 전지구적 사유화 체제의 제도적 구조가 자리잡고 나면 공공과학 그 자체의 특성과 본질은 돌이킬 수 없이 변형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셀레라와 공공자금으로 운영되는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 사이의 경쟁관계와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챈들러식 기업조직구조 개혁

챈들러식 기업 조직구조의 개선과 기업 내부 다각화의 후퇴는 신자유주의 및 신공공관리(NPM, New Public Management)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였다. 이는 기업과 공공조직이 운영되는 방식의 변화를 반영하며, 특히 대기업의 구조 조정과 효율성 강화의 흐름 속에서 나타났다.

앨프레드 챈들러(Alfred D. Chandler)는 대규모 기업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다각화(Diversification)와 M-Form(다분화 구조, Multidivisional Form, M-형 조직)을 강조하였다. M-Form 조직은 기업이 여러 사업 부문으로 나뉘어 독립적으로 운영되면서도 중앙에서 전략을 조정하는 방식이다. 챈들러는 "구조는 전략을 따른다(Structure follows strategy)"는 명제 아래, 기업이 다각화를 통해 성장하면 조직 구조도 이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신자유주의 및 신공공관리(NPM)의 영향을 받아 기업들은 챈들러식 조직 구조를 개선하고 변화시키기 시작하였다. 기업들은 비핵심 사업을 정리하고 핵심 역량(Core Competency)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조직을 운영하였다. 과거 다각화된 대기업들은 일부 사업 부문을 매각하거나 독립시켜 조직을 슬림화하였다. 또한, 수직적 통합을 줄이고 협력업체, 아웃소싱, 전략적 제휴를 활용하는 네트워크형 조직(Network Organization)을 도입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기업의 계층 구조를 단순화하고 의사결정 권한을 현장으로 이양하는 탈중앙화(Decentralization)와 유연한 조직 운영을 가능하게 하였다. 신자유주의적 경제 원리에 따라 기업 내부의 조직을 축소하고, 외부 시장과 계약을 통해 필요한 자원을 조달하는 방식이 선호되었다. 결과적으로, 대기업들은 내부에서 다양한 사업을 운영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비핵심 사업을 구조조정하거나 분사(Spin-off)하고 글로벌 공급망을 활용하여 비용을 절감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신자유주의는 자유 시장 경쟁을 강조하며, 기업 내부 비효율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이에 따라 대기업들은 내부 다각화를 축소하고, 외부 협력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경쟁력을 강화하였다. 공공 부문에서도 신공공관리(NPM)의 확산으로 정부 기관과 공공 조직이 더 이상 내부적으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지 않고, 민영화(Privatization), 아웃소싱(Outsourcing), 성과 중심 관리(Performance-based Management) 등을 도입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대표적 사례로 GE(General Electric)는 다양한 산업(가전, 금융, 항공, 에너지 등)에서 사업을 운영하는 대표적인 다각화 기업이었으나, 2010년대부터 신자유주의 경제 원리에 따라 핵심 사업 중심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하였다. 금융 사업(GE Capital)과 가전 사업을 매각하고, 항공·에너지 분야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또한, IBM은 2021년 IT 서비스 부문(Kyndryl)을 분사하여 클라우드 및 AI 중심으로 사업을 재편하였다. 공공 부문에서도 영국과 미국은 공공 서비스 제공 방식을 내부 조직 중심에서 외부 민간 기업과의 계약 형태로 변화시키면서 내부 다각화 전략을 축소하였다.

챈들러식 조직 구조는 20세기 대기업 성장의 주요 전략이었지만, 신자유주의와 NPM의 확산으로 인해 기업 내부 다각화는 후퇴하고, 조직은 보다 유연한 형태로 변화하였다. 기업들은 핵심 역량 중심의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외부 계약 및 네트워크 조직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운영 방식을 개선하였다. 공공 부문에서도 정부 조직의 슬림화, 민영화, 성과 중심 관리가 강조되면서 내부 다각화 모델이 약화되었다.

결과적으로, 챈들러식 기업 조직 구조는 신자유주의적 시장 논리에 따라 변형되었으며, 오늘날 기업들은 보다 유연하고 효율적인 네트워크 기반 구조로 변화하고 있다.


1980년 바이-돌법(Bayh-Dole Act, 1980)

1980년 바이-돌법(Bayh-Dole Act, 1980)은 미국에서 연방 정부의 연구 자금 지원을 받은 대학, 비영리 연구기관, 중소기업 등이 연구 결과로 개발한 특허의 소유권을 가질 수 있도록 허용한 법이다. 이 법은 연구 성과가 산업으로 이전(Technology Transfer)될 수 있도록 촉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까지 미국에서는 연방 정부의 자금을 지원받아 수행된 연구 결과물(특허 포함)은 정부가 소유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연구 성과가 실질적으로 활용되지 못하는 문제를 초래했다. 정부 소유 특허의 대부분이 사장되었고, 기업들은 이를 활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 결과, 연구 성과가 상업화되지 못해 혁신과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80년 미국 상원의원 바이(Birch Bayh)와 하원의원 돌(Bob Dole)이 공동 발의하여 바이-돌법이 제정되었다.

바이-돌법의 핵심 조항은 연방 연구 자금 지원을 받은 기관(대학, 비영리 연구기관, 중소기업)이 연구 결과물(특허)의 소유권을 가질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또한 연구기관이 해당 특허를 민간 기업에 라이선스할 수 있도록 하여 연구 성과의 상업화를 촉진하였다. 정부는 특허가 활용되지 않을 경우, 다른 기업이나 기관에 이전할 수 있도록 하는 마칭 라이츠(Marching Rights) 조항을 포함하였으며, 연구기관이 미국 내 제조업체에 우선적으로 라이선스하도록 규정하여 국내 산업 발전을 도모하였다.

바이-돌법의 시행 이후, 대학과 연구기관의 기술이전이 활성화되었다. MIT, 스탠퍼드, 하버드 등의 대학은 기술 이전(Technology Transfer) 전담 부서를 운영하며 기업과의 협력을 강화하였고, 연구 성과를 특허화하여 산업에 적용하는 사례가 증가하였다. 또한,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한 벤처기업과 스타트업이 급증하면서, 바이오테크, 반도체,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미국의 기술 경쟁력이 강화되었다. 특히 생명과학 및 제약 분야에서는 대학 연구를 기반으로 한 기업들이 설립되면서, 바이오산업의 발전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바이-돌법은 미국 경제와 기술 혁신을 가속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연구 성과의 산업화가 활발해지면서 경제 성장과 일자리 창출이 이루어졌으며, 지식재산권(IP) 기반 경제 구조가 강화되었다. 미국은 이 법을 통해 글로벌 기술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후 여러 국가가 이를 모델로 삼아 유사한 정책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바이-돌법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일부에서는 대학의 연구가 공공의 이익보다 기업의 이익을 우선시하게 되는 문제를 지적하였다. 연구 결과물이 특정 기업에만 독점적으로 제공될 경우, 공공 연구가 사유화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돌법은 지식기반 경제 시대의 핵심 법안으로 평가되며, 현재까지도 미국 혁신 시스템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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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구적 전망을 위한 제안


이제 좀 더 전 지구적인 전망을 향해 생각해보자. 유럽 및 아시아도 전지구적 사유화 체제와 비슷한 경향을 보였다. 유럽의 전후 국가건설과 자체 연구역량 양성은 미국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유럽부흥개발계획과 함께 유럽을 복구하려는 움직임은 미국의 입김이 작용할 수 밖에 없었다. 독일에서 대학 실험실은 산업연구소보다 시기가 앞섯으며, 다른 사례들에서는 동시에 건설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1914 년 네델란드 내틀랩에서는 최고의 과학자들로 강의를 조직하고 실험실 자체 과학자들의 학회 참여와 학술논문 발표를 장려함으로서 학문적 환경에 혁신을 가하였다.


세계 최대 규모의 입자물리 연구소인 유럽핵물리연구소는 냉전이 절정에 달했던 1954 년 유럽의 물리학을 이전의 위대한 모습으로 재건하고 총명한 두뇌들의 미국으로의 유출 경향을 역전시키기 위해 창설되었다. 다양한 ‘국가혁신체제’들이 과학의 상업화라는 상대적으로 균일한 선진 초국적 모델로 수렴하는 것과 유사한 모습들을 유럽의 과학발전 과정에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유럽의 기업은 각자의 챈들러식 기업의 황혼기를 경험했으며, NATO 와 개별 회원국의 군대는 과학의 관리자로서 이전 수준의 적극적 역할에서 후퇴하였다. 기업R&D 의 외주는 전지구적 현상이 되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전 지구적 사유화 체제에서 줄어든 연방정부의 자금지원과는 반대로, 유럽의 과학기술은 미국에 뒤쳐졌다는 통상적인 인식에 대응해 유럽연합은 연구제도의 재편을 촉진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경제발전이 유럽의 쟁점이었으므로, 과학기술정책은 혁신정책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지식의 생산-전유-활용-소비의 연쇄라는 관점을 채택한 것은 그 자체가 전 지구적 사유화 체제가 만들어낸 결과로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의 CNRS, 독일의 막스플랑크연구소 같은 국립연구소들은 대학에 입지를 내주었고 경제 및 사회와 연계를 촉진하거나 갱신하도록 장려되었다. 이러한 변화들은 신자유주의 정부들의 예산 긴축과 사유화 프로그램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한다. 전 지구적 사유화 체제는 유럽에서 기업, 정보, 교육의 동맹관계 변화와 함께 급격하게 변형된 과학 지형도를 만들어 냈다.


새로운 과학의 사회적 계약은 돈에 상응하는 가치에 대한 요구와 유사한 시장유주의적 주제들로써 영국에서 시작되어 대륙으로 확산되었다. 영미철학의 전통이라서 그런지 미국의 기업방식은 영국의 과학연구 방식에서도 드러났다. 예를 들면, 연구실적평가 결과에 따른 연구자금 할당으로 영국의 연구활동을 더 상업적인 방향으로 재조정하는 방식이 있었다. 이어서 초국적인 과학의 상업화 모델 수립하였다. 독일은 최고 수준의 학생과 학자들이 다른나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위해 미국 방식의 엘리트 대학 10 곳을 만들고 경쟁력과 질적 향상을 위해 투자할 계획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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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일본은 1990년대 침체기에 접어들자, 전후 일본의 경제적 성공을 가져왔다며 칭찬의 대상이 되었던 과학관리 시스템이 일본 경제의 정체를 설명하는 요인으로 쓰이기도 했다. 대학에 기술사용 허가사무국의 개설을 장려하였다. 1998년 법률 및 일본판 바이- 돌법이라 할 만한 1999년 법률을 제정하여, 새로운 상업적 창업기업에 참여하는 공문원에 대한 제약 완화 등 수많은 세계화 장치들을 도입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연구의 사유화를 향한 실험들은 미국의 사례보다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예를 들면, 2004 년 4 월의 중대조치를 통한 국립대학의 민영화로 독립적인 공공기업으로의 변화가 이에 속한다.


중국의 사례를 살펴보자. 중국의 많은 대학들은 이미 국가의 시장개방 정책의 압력 하에서 창업기업의 육성을 서둘어 왔고, 이 과정에서 국가 예산의 긴축과 대학 자금지원의 급격한 감축을 불러왔다. 즉, 발달된 과학기술에서 미국 체제의 장점이라고 하는 것을 모방함과 동시에, 정부 지원의 양을 제한하고 그에 수반된 관료제를 축소하려는 노력이 전 지구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STS 이외의 분야에서의 과학의 구조적 속성에 관한 분석은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사용한 공공재의 개념에서부터 현대의 지식생산양식의 변화를 다룬 mode1/mode2 및 삼중나선 이론으로 발전하였다.


냉전 기간 동안 많은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 거시적 규모에서 과학의 구조적 속성을 분석하였고, 그들은 지식을 다른 어떤 상품과 동등한 하나의 물건 생산처럼 다루었고 ‘공공재’라는 분석적 구성물을 이용하였다. ‘공공재’라는 고안물은 신고전파 경제학의 전통 내에서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개념적 시도 중 하나였다. 하지만, 공공재의 개념이 과학의 경제학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거나 효과적인 도구가 되지는 못하였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개념은 냉전 기간 동안 미국에서 과학연구에 아낌없이 주어진 공공 보조금을 정당화하기 위해 종종 인용되었지만, 실제로는 주로 과학 자금지원의 군사적이고 국수주의적인 동기로부터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리는 역할을 하였다.


기업조직과 학문적 과학이 서로 맞물리고 겹쳐지는 복잡한 방식에 적용되지 않았다. 지식을 대체가능한 물건으로 다루는 것은 과학을 세속의 정치경제를 초월하는 활동으로 그려내는 지배적 관점과 충돌하게 되었다. 결국, 공공재 이론은 지식생산의 일부분을 사유화하는 것이 불편하고 비효율적이라고 주장하는 데 그쳤고, 과학연구의 제도가 상품화에 의해 중요한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손상되거나 타락할 거라는 주장을 담지는 못하였다. 1990 년, 두 그룹의 학자들이 지식생산양식에서의 변화를 탈대학 내지 혁명적인 종류의 과학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논의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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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1/mode2 및 삼중나선 이론

(mode 1/mode 2) 약화된 대학 구조, 과학 분야들이 가진 힘의 전반적인 쇠퇴, 내부 지도 시스템으로서 동료 통제의 약화, 학제적 연구팀의 부상, 자족적 연구소의 쇠락 등가 같은 현상을 지적함

하지만 지식이 여전히 물건이자 제품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고, 저자들이 오늘날의 발전에 대해 다소 긍정적인 입장을 취해온 것도 마찬가지 였음

(삼중나선, 3H) 산업체, 정부, 대학의 세 개 부문과 이들 간의 상호작용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대학이 제2의 학문혁명을 겪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게 다뤄짐

첫번째 혁명은 교육기능에 연구기능이 합쳐진 것이었고, 두번째 혁명은 두 가지 기능과 경제발전이 조화를 이루게 된것임

교육, 연구, 상업화의 모든 요건을 수행할 수 있는 ‘기업가 대학’의 발생을 그려내면서, 삼중나선의 제도적 구분을 흐려놓음

Mode 2 와 3H 는 세상에 대한 신조합주의적 전망의 정당화를 모색하는 저자들에게 편리한 큰 들을 제공해주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지만, 대다수의 STS 학자들은 역사로서도, 동시대의 과학정책으로서도 부족한 점이 많다고 보았음

(mode 2) 논증가능한 경험적 요소가 결여되어 있음

(3H) 다양한 국가와 문화권에서 과학정책과 교육의 문제에 대한 구체적은 연구를 장려해왔지만, 이러한 구체적 연구가 합쳐져 일관된 분석으로 이어지지 못함

Mode2와 3H 모두 과학 자금지원과 과학조직의 현대적 발전에 대해 선명한 이전/이후 접근법을 취하면서, 이를 만능의 교의로 부풀려 궁극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을 지역의 고등교육 하부구조와 정부가 조직하는 과학연구 역량에 포괄적으로 강제하였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를 서투르게 모방해 결국에는 어떠한 시장화된 과학이라도 필연적으로 자유를 증진시키고 선택의 폭을 넓히고, 확대된 참여를 촉진하고, 전반적인 복지를 향상시킨다고 단순히 가정할 뿐이었다.

STS 에서는 새로운 과학경제학에서 말하는 경제적 토대가 항상 과학연구의 조직과 관리를 형성해왔다는 점을 받아들이지만,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시장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하게 구축된 ‘사상의 시장’은 어디에서도 존재한 적이 없다.


0. 나오기_신자유주의와 STS


칼폴라니는 정치경제학자이다. 정치경제학이라는 것은 하나의 학문으로 현상을 설명할 수 없을 때 나타나는 혼종적인 분야를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가지의 관점을 가진 학문들이 서로 연결되어서 설명하는 방식에서 나온다. 특히 정치-경제간의 원인과 결과로 볼 때 원래는 정치가 경제를 결정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반대로 경제가 정치를 결정하고 나아가서 사회, 종교, 문화, 외교, 의료를 지배하는 현실을 만들어낸다. 오늘 우리가 알아본 것처럼 '과학'영역도, '과학 기술'도 예외가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150년전 유럽을 배외하련 유령과 다르게 실체를 가지고 화폐라는 옷을 입고 전 세계의 시장을 돌아다닌다.


칼폴라니는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시장의 자기조정'이라는 문제라고 한다. 시장은 그대로 두어도 자기 스스로 조정하여 자정작용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는 정신주의적 자연주의와 연결되어 있는데, 우리의 정신이 만들어낸 이론을 비인격적인 제도나 사물도 그렇게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상상력 혹은 허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예언적인 이론은 '실행'을 통해서 실제로 이론적으로 혹은 머릿속에만 있던 이데올로기를 실현해버린다. 실현이 되는 부분과 아닌 부분을 구분하고 '할 수 있음의 없음'을 선포해야 하는 부분이 시장 안에서는 모두 '상품화'가 된다. 상품으로 구분되는 순간 가격이 매겨지고 가격이 매겨지면 '팔린다'는 생각이 입혀진다. 그러면 '과학기술'이 상품화가 되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과학은 '팔리기 위해서 만드는 기술'이 되어 버린다.


80년전 오펜하이머는 '전쟁을 위한 과학'이 맞는가?라는 생각을 했다면 오늘날은 '시장을 위한 과학'을 하는 것이 맞는가?라는 질문이 제시된다. STS는 어떻게 보면 이런 질문을 다양한 층위에서 계속 던져야 한다. 메타 전문성을 가지고 시장을 만들어내는 경제학과 경영학과 연계하되 그 안에서 경계를 지우고 과학의 특성을 잘 지켜나가야 한다. 과학의 독립성은 잊어 버린지 오래고 과학은 언제나 기업에 속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STS의 도전은 혁신적이고 때론 이방인과 같이 낯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의 사회적 구성이론, 과학지식사회와 같이 다양한 도전들이 필요한 때이다. 과학의 상업화는 학계의 거물체제를 통해서 시작되었고, 냉전체제를 넘어서 전지구적 사유화체제인 신자유주의로 발전하였다. 어쩌면 칼폴라니의 분석과 반대로 거대한 역전환이 일어나야 할 수도 있다. 다른 대안을 만드는 시도전들이 필요하다.


과학의 상업화에 관한 역사적맥락 3가지_20세기

학계의 거물’ 체제(1890~제 2 차 세계대전) : 학계에서 소수엘리트에 의해서 상업화 진행

냉전 체제( ~1980) : 국가안보의 상황에서 국영과학시스템이 상업화로 발전

전 지구적 사유화 체제(1980 년 이후) : 신자유주의에 따른 상업화의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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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mzU7cBBJ5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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