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계약론에서 시작된 이기적 인간의 제도화
내 인생에서 몇 명, 천재라고 부르는 친구가 있다. 그 중에 한 친구의 이야기이다. 이 친구는 후생경제락을 전공했다. 그리고 대학생이었지만 '공동체에 이타적인 인간이 얼마만큼 증가해야 공동체의 부가 증가하는지'를 스스로 연구했다. 자칭 '이타지수 K'라는 상수를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적어도 100명중에서 30명은 이타성을 가진 인간이 있어야 그 공동체가 바뀐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대학은 졸업하기도 전에 그 상수를 발견했다. 공동체마다 정의는 다르지만 '혁신의 확산이론'에서 말하는 14%정도의 얼리어댑터가 있어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어느정도 공동체에 이타성을 가진 인간이 증가하면 공동체의 부는 오히려 줄어든다. 왜냐하면 이기적인 인간이 이타적인 인간을 이용해먹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친구가 발견한 것 그것을 감수하고 이타적인 인간이 더 많아지면 어떻게 될까였다. 그 결과는 이타적인 인간이 조금 더 많아지면 움푹패인 곡선이 다시 상승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타적인 인간이 공동체에 30%만 넘으면 공동체는 그 이후부터는 부가 증가한다.
이타적인 인간 탐구를 위해서는
이기적인 인간을 먼저 탐구해야 한다
살아가면서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에서 생각에 많이 남는 사람들은 이타적인 인간보다는 이기적인 인간이다. 이기적인 인간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는 이타적인 인간이 태어나는 것보다 더 흥미롭다. 왜냐하면 이타적인 인간은 구조적인 특성보다는 오히려 개인적인 특성이 더 높지만, 이기적인 인간은 철저하게 시대적이고 구조적인 산물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가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인 이유는 그 구조와 문화가 그를 그렇게 자라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이상 이기적인 인간은 계속 이기적인 인간으로 살아갈테고 머지않아 이기적인 인간들의 왕국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기적인 인간들이 만들어지게끔 셋팅하는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온다면, 그들이 깔아놓은 구조적인 복선들을 알아챈다면 아마도 나 스스로도 이기적인 인간에서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고민으로 오늘의 주제를 열어보았다.
이기적인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통해서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선택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기적인 인간을 정의하는데 있어서는 심리학적인 관점에서도 볼 수 있고 경제, 사회적인 관점 등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다. 일단 여기서는 정의를 해보고 다음장에서는 루소, 홉스, 로크와 연결해서 근대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인간의 이기심이 근대국가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기적인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사회가 가정하고 있는 인간관이면서 인간의 심리학적인 특성에서도 자연스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이기심이 인간 본연의 것인지 아니면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이다. 다양한 접근을 통해서 우리는 후천성과 선청성 사이에서 인간의 이기심의 좌표를 찍어볼 수 있다.
심리학적 접근
진화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에서는 인간의 이기적 행동이 생존과 번식을 위한 전략으로 설명된다고 본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유전자를 최대한 다음 세대로 전달하기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자기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 SDT)에서는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적 욕구(자율성, 유능감, 관계성)가 충족되지 않을 때,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본다.
경제학적 접근
합리적 이기주의(Rational Self-Interest)에서는 경제학에서 개인이 자신의 효용(utility)을 극대화하는 합리적 행위자로 가정된다고 본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에서 개인의 이기적 행동이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의해 사회적 이익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게임이론(Game Theory)에서는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와 같은 이론을 통해 이기적인 선택이 때로는 최적의 결과를 낳지 못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고 본다.
사회학적 접근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에서는 개인이 합리적인 경제적 동기에 의해 움직이며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한다고 본다.
호모 레시프로칸스(Homo Reciprocans)에서는 인간이 단순히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라 협력과 상호주의(principle of reciprocity)에 따라 행동한다고 본다.
철학적 접근
자연 상태와 인간 본성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는 인간의 자연 상태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state of war)이며, 본질적으로 이기적 존재라고 주장한다.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인간이 원래 선하지만 사회적 환경이 그들을 이기적으로 만든다고 주장한다.
객관적 이기주의(Objectivism)에서는 아인 랜드(Ayn Rand)가 이기적이라는 미덕(The Virtue of Selfishness)*에서 개인의 이익 추구가 도덕적이며,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이타주의는 부정적이라고 본다.
신경과학적 접근
도파민과 보상 시스템에서는 인간의 뇌가 보상 시스템(reward system)에 의해 작동하며,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행동을 할 때 쾌락을 느끼도록 진화했다고 본다.
공감 신경망에서는 이기적 행동과 이타적 행동 모두 인간의 신경 시스템에서 조절될 수 있으며, 특정한 사회적 조건에 따라 활성화된다고 본다.
윤리학적 접근
심리적 이기주의(Psychological Egoism)에서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며, 모든 행동이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윤리적 이기주의(Ethical Egoism)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본다.
로크(John Locke)의 철학은 근대 자유주의의 기초를 이루는 사상으로, 특히 ‘소유권’(property)에 대한 개념을 중심으로 개인주의(individualism)와 자유의 정당성을 강조한다. 로크에게 인간은 신에 의해 창조된 이성과 자유 의지를 지닌 존재로, 자연 상태에서도 일정한 도덕법을 따르는 존재이다. 그는 토마스 홉스와는 달리 자연 상태를 ‘전쟁 상태’가 아닌, 자연법이 지배하는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 상태가 완벽하지 않은 이유는 자연법을 집행할 권위가 개인들에게 분산되어 있어 분쟁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이에 따라 로크는 시민 정부의 필요성을 주장하게 된다.
로크는 소유권 개념을 단지 물질적 재산에 국한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self-ownership)까지 확장하였다. 인간은 자기 몸과 노동에 대한 소유자이며, 노동을 통해 자연을 변화시키고 생산물을 창출함으로써 사유재산이 정당화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노동은 재산의 기초”라고 단언하면서, 자연상태에서 누구나 공통으로 소유하던 자연물도 개인의 노동이 결합되면 개인의 소유가 된다고 보았다. 이는 근대 시민사회의 경제 질서, 즉 자본주의적 재산권 체계의 이념적 토대를 제공한다. 여기서 핵심은 ‘노동의 결과로서의 소유’가 정당화되면서, 타인의 권리와 경계를 설정하는 개인적 자유의 영역이 형성된다는 점이다.
로크의 세계관에서 인간은 이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자기 보존과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로 규정된다.
이러한 욕구는 공동체의 안전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계약적 정치 질서의 정당화 근거가 된다. 로크는 정부의 역할을 시민들의 생명, 자유, 재산을 보장하는 데 국한시킴으로써 개인의 권리를 우선시하는 자유주의적 정치 질서를 정립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기 이해에 기반해 행위하며, 권리 보장을 통해 사회적 질서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존재, 즉 법 앞에서 평등한 권리 주체로서의 ‘individuals’로 등장한다. 로크는 자유와 권리를 개인의 소유 개념과 밀접하게 연결시키며, 이기심을 부정하기보다 제도화된 틀 안에서 보호하고 제어하는 방향으로 개인주의를 정당화하는 철학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로크의 철학의 기반이 가장 잘 실현되는 곳인 미국은 그래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건국 초기에서부터 지금까지 계보학을 이룬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재산에 의해서 자신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가 정해지며,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하는 것은 '일확천금'이든 '부정한 방법'이든, '부동산 재벌'이든 상관없이 더 많이 가진 자가 더 많은 존경을 받는 구조가 된다. 이러한 구조가 고착화되어가는 과정에서 태어난 사람이야 이것이 무엇이 문제인지 혹은 그 전에는 어땠는지 알게 되지만, 이미 고착화가 진행되고 나서 태어난 사람에게는 그냥 기본값이 되는 것이다. 돈이 있으면 떳떳하고 남들 앞에서 자존감이 높아지지만 가진게 없으면 쭈그러들고 사회적으로도 의미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비단 미국만 그럴까? 이런 개인주의적인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인 한국에서도 당연스러운 '소유권' 중심의 개인주의는 '잘나가는 개인'만 사회 속에 남게 되면 다양한 사회문제를 만들어 낸다.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는 근대 정치철학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철저한 현실주의적 통찰을 제시한 사상가이다. 그는 '리바이어던'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고 자기 보존을 최우선으로 삼는 존재로 파악한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홉스의 핵심 개념은 ‘자연 상태(state of nature)’로, 이는 정치권력이나 법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인간들이 처하게 되는 극단적인 무정부 상태를 말한다. 이 상태에서 인간들은 생존을 위해 끝없는 투쟁을 벌이게 되며, 홉스는 이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표현하였다.
홉스는 인간이 이기적인 이유를 단순한 탐욕 때문이 아니라, 자기 보존을 위한 불신과 경쟁, 명예욕에서 비롯된 필연적 결과로 본다. 이는 인간이 ‘악’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위협하는 존재로 느끼는 자연스러운 본성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인간은 공감이나 도덕이 아닌, 오직 공포와 생존의 논리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따라서 도덕적 인간상은 자연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불안정하고 위험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발적으로 정치적 계약(social contract)을 맺고, 강력한 주권자에게 권리를 양도함으로써 안전을 보장받게 된다. 홉스에게서 ‘국가’란 이런 계약을 통해 성립된 강력한 ‘리바이어던’으로, 개인의 무제한적 자유를 제약함으로써 평화와 질서를 가능케 하는 절대 권력의 상징이다.
홉스가 묘사한 ‘이기적인 인간’은 공동체를 위한 윤리적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자기 보호를 위해 타인을 수단화하고 도구화하는 존재이다. 그는 인간 사이의 협력이 신뢰가 아닌 이해관계와 힘의 균형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는 개인과 국가 사이의 관계를 ‘신뢰’가 아닌 ‘통제’로 전제하며, 인간의 자유 또한 자연권이 아니라, 국가가 허용한 범위 내에서만 보장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홉스의 관점에서는 인간의 이기성이 정치 질서의 출발점이자 정당화 근거이며, 그 결과 근대의 individuals은 타자와의 근본적 불신 속에서 자기 보호를 위해 정치적 복종을 선택한 고립적 주체로 정립된다. 이는 공동체와의 유기적 연계보다는, 두려움 속에서 보호받고자 하는 불완전하고 의존적인 개인의 탄생을 의미한다.
현실주의 이론을 기반으로 하는 개인과 사회, 국가와 외교적 관계는 말 그대로 '힘에 의한 균형'을 중심으로 사회가 이루어진다. 개인의 정체성도 역시 이러한 보존과 힘의 역학관계를 통해서 만들어진다. 학창시절을 떠올리면 힘이 더 쎈 친구가 다른 친구들을 지배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오히려 그게 응당 맞는 것처럼 믿게 된다. 최근 유행하는 '약한 영웅'은 오롯이 한국사회의 문제를 드러낸다. 현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상'을 추구하거나 '도적적 자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왕따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는다. 이따금 엘리트로 태어나서 부모님이 소유가 많으면 현실적으로 더 우위에 서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은 학창시절을 보내고 사회에 나와도 똑같다. 현실주의가 만들어낸 정치는 결국 '다수의 힘'을 합하는 정치 정도로 협소하게 정의내린 다음 말그대로 '개싸움'을 한다. 과연 이게 맞을까? 다른 길은 없을까?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근대 자유주의 전통 속에서 독특하게 인간 본성과 자유의 문제를 공동체와 도덕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사상가이다. 루소에게 있어 인간은 본래부터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며, 자연 상태에서는 평화롭고 독립적이며 타인을 해치지 않는 존재이다. 그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이 이기적이고 타락하게 된 것은 사회적 불평등과 사유재산제도의 등장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특히 그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사유재산이 “이것은 내 것이다”라는 개념과 함께 시작되었고, 그 순간부터 사회의 부정의와 타락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루소는 인간의 이기심이 구조적인 제도와 비교의식 속에서 발현된다고 보았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자유 방임이 아니라 참여적이고 도덕적인 정치 공동체, 즉 공공선을 향한 의지가 구현되는 사회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은 ‘일반의지(general will)’이다. 일반의지는 단순한 다수의 의견이 아니라, 공동선을 향한 시민들의 집합적 의지이며, 각 개인은 자신을 넘어선 공동체의 선에 자발적으로 복속할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루소는 본다. 루소는 이를 “강제당하는 것을 통해 자유롭게 된다”는 역설적 표현으로 설명하였다.
루소에게 자유는 자기 욕망의 방임이 아닌 자율적 자기 통제이며, 이는 도덕적 인간으로서 공동체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때 실현된다. 인간은 혼자서는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없으며,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가운데 공공의 선과 정의의 규범에 따라 자아를 실현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루소는 인간의 이기성을 사회적 조건의 산물로 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정치 질서 즉, 공화주의적 시민 공동체를 제시한다. 그 속에서 individuasl은 단순히 자기 이익의 추구자가 아니라, 자율성과 도덕성을 통해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 형성된다. 이로써 루소는 근대 인간론 속에서 이기적 인간의 구조적 원인을 밝히고, 그것을 공공성과 자유의 재구성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이상적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인간은 언제나
개인주의와 현실주의 사이에 놓여 있다.
루소를 좋게 평가할 수 있지만, 루소의 인간관을 가지고 국가를 이룰 경우 주변의 현실주의 국가들이나 개인주의로 정치경제시스템을 만들어 버린 나라들에게 잡아 먹힌다. 제국주의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전 세계는 동물의 왕국이다. 그래서 대안으로 UN이나 유럽연합을 만들었지만 20세기 초에도 그랬듯이 '자본주의의 도전'으로 여러 연합들이 무너져내리고 있다. 이기적인 인간은 그래서 이 시대가 만든 것이면서도 이 시대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니 남은 선택은 '이기적인 인간'이 되거나 혹은 아주 간혹 가다가 '이기적이지 않아도 되는 조직과 사회, 국가와 세계질서'를 만들기 위해서 고민하는 것 뿐이다. 아주 어려운 길이지만 없는 것은 아니기에 이런 글을 쓴다.
이타적인 인간이 간혹 태어나기는 한다. 종교적인 신념의 과잉으로 태어나기도 하며, 법없어도 살 수 있을 정도의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믿음이 다른 곳으로 경로를 이탈하지 않고 20살이 넘어가면서까지 지켜지면 죽을 때까지 이런 길을 가는 사람들이 나온다. 이 세계는 현실주의와 개인주의 사이에서 모두를 '욕망'으로 가득한 미숙한 인간으로 만들기에 바쁘지만 아주 가끔씩 '어른'들이 나온다. 그리고 더더욱 가끔 이들이 정치를 통해서 새로운 제대를 설계하거나, 어떤 조직에서 아름다운 문화와 흐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신기한 것은 그런 사람이 1명이라도 된다. 그 한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아주 쉽게 마음을 열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그래도 나는 저런 삶을 살아볼려고'하는 다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한명도 없다면? 그럼 어떻게 하지? 어쩔 수 없이 이 글을 읽고 있는 이루가 결단을 해야 한다. 안창호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인재가 주변에 없다고 생각한다면, 너가 인재가 되어라!' 나에게, 우리에게 그 도전이 주어진다.
나는 아직도 이타적 인간이 되고 싶다
서론에서 다루었던 '이타적 인간 지수 K'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내게는 '김천재'인 그 친구가 부디 더 연구를 해주면 좋겠다. 공동체가 현실적인 인간이 많아질 수록 공동의 부는 더 줄어들어서 다른 나라들을 쳐들어가야만 생존할 수 있으며, 개인주의적인 인간이 많아질 수록 공동의 땅은 더 줄어들어서 다른 나라를 침공해야만 자신들의 욕망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어른'들이 더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 나는 아직도 '김천재'가 어른 같이 느껴진다. 작고 굵은 손으로 산식을 하나하나 설명해가던 때를 기억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공동체에 이타적인 사람이 많아질 수록 공동체의 부는 더욱 증가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정치를 하고 싶다. 아주 멀리 있는 이야기인 것 같지만, 인생은 어차피 잘살길 글렀다고 생각한다. 그럼 그냥 내가 가진 신념과 신앙을 가지고 죽을 때까지 밀어 붙이는 것이다. 이러다가 죽으면 애석하니 누군가는 기억해서 '이 의지를 계승해 주길' 기대하면서 이 글을 남긴다. 이제는 대안을 만들어낼 때이다. 어떻게 이타적인 인간이 나올 수 있을까? 다음 편에서 한번 고민해보고자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_1QAkZEqep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