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규_희망도 절망도 아닌 하루
희망도 절망도 아닌
사랑도 미움도 없이
홀로 걷는 저녁길
느린 발걸음에
덜어내지 못한 하루의 무게가
깊고 어두운 밤
못다 이룬 행복이
환한 달빛에 부서져 반짝이네
시간은 언제나 그 자리에
날 앞서가지만
그래서 소중한 순간인 걸
넌 알려주었지
멀어진 날들의 끝에
남겨진 하나의 기억
영영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되었네
사랑도 미움도 없이
사랑도 미움도 없이
의미를 찾아 헤매다
지친 발걸음이
잠시 의미 없이 쉴 수 있다면
행복은 언제나 그 자리에
날 앞서가지만
그래도 소중한 순간인걸
나 이젠 알아
긴 바램의 끝에 쉽게 사라진 약속
이젠 닿을 수 없는 꿈이라 해도
희망도 절망도 아닌
희망도 절망도 아닌
멀어진 날들의 끝에
남겨진 하나의 기억
영영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되었네
긴 바램의 끝에 쉽게 사라진 약속
이젠 닿을 수 없는 꿈이라 해도
희망도 절망도 아닌
사랑도 미움도 없이
https://www.youtube.com/watch?v=_f72BsnEYNg&list=RDvky-xO75dQU&index=2
실존주의 신학자였던 폴 틸리히는 '존재'라는 단어를 역사의 시작부터 사람들이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신학이 찾아오기 전까지 '존재'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였고, 단지 존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가진 힘이 중요했다. 자신들이 섭렵할 수 없는 존재의 힘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하는 동굴벽화나 노래, 인신제사나 부적과 같은 것들이 존재를 잠재우려고 했다. 이러한 두려움의 근원은 '생명과 죽음'이었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재시점의 자신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던 인간의식을 드러낸다. 그래서 생명을 연장시켜주거나 지켜주는 '존재'에 대한 관심과 자신과 마을 공동체를 파괴하는 존재의 힘이 '죽음'까지 몰고오지 않도록 하는 노력들이 '신앙'이 되었다. 틸리히는 이러한 고대의 '두려움의 역사'는 곧 '생명을 연장하고 죽음을 이겨내는' 존재들이 용기를 내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말한다.
존재의 두려움은 죄악이었던 시대
시간이 지나서 '신학이 유행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중세시대를 지나면서 '존재'의 불명확성은 '신은 곧 하나님'이라는 전제로 대치되었다. 존재는 확실하게 자신을 드러냈고, 존재와 만나는 길은 '죄와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노력으로 정리되었다. 고해성사가 중요한 죄책감을 덜어내는 행위가 되었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죄책감에 시달리다 보니 면죄부에다 가격을 부여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 앞에서 죄인으로 살게 되었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미래의 자신의 자리를 돈으로 사는 일까지 발생했다.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죽음과 생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죽음 이후에 존재하는 내세에 대한 '죄와 죄책감'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해진 것이다. 존재는 사라지지 않고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가거나 영원한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세에 대한 두려움'은 곧 신앙으로 극복되는 것이었다.
틸리히는 이러한 분석 이후에 현대에 와서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사실 이러한 설명 때문에 틸리히는 '실존주의 신학자'로 오인받기도 한다. 그러나 실존주의에도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있기 때문에 명확하게 실존주의 신학자로 이야기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신이 존재하고 그 신의 의미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쉽게 말하면 유신론적 실존주의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펴본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식이 신과 내가 연결되어 있는 그 '관계'에서 푸는 것이 유신론적 실존주의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샤르트르와 같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은 '존재 혹은 본질' 자체를 부정하고 '실존'하는 세계에서 보이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 현시점의 관계들을 중심으로 인간을 규정한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현상 속에서 끊임없는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의미'를 찾아가는 존재라고 규정한다.
현대의 절망은 무의미
틸리히는 현대 사회가 '의미'를 중심으로 존재의 두려움을 극복하려 했다고 설명한다. 고대에는 '죽음'이, 중세에는 '죄'가, 현대에는 '무의미'가 존재의 두려움인 것이다. 그래서 현대에서는 죽는 것도 두렵지 않고, 죄 따위에 집중하지 않고, 나와 '의미'있는 것이 무언인지를 따지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내 인생의 최고의 것이 된다. 의미에 연결되는 주된 방식을 '주의'로 연결하면 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같은 것들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무의미를 극복하기 위한 방식으로 현대 정치체제는 끊임없이 새로운 '주의'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떤 진영에 서게 되면 그 정체성으로 '의미'의 공동체를 만든다.
비슷하게 자신이 속한 그룹이나, 조직, 회사나 동호회가 자신에게 의미를 주는 것이라면 그것이 자신들의 정체성이 된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존재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식인 '의미지움'의 결과이다. 의미가 있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죽음이 두려운게 아니고 내세가 두려운 게 아니라 '의미없이 죽는 개죽음'이 가장 두려운 것이다. 틸리히는 이러한 상황들을 분석하면서 역사 속에서 수 없이 반복된 '두려움'을 극복해 가는 방식의 마침표를 찍는다. 그것은 바로 '존재의 용기'이다. 인간은 그렇게 두려움에 대한 방어기제를 작용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인간이 절망으로 치닫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용기'를 낼 수 있는 존재로 보는 것이다. 인간은 사실 어디서나 무의미, 죽음, 죄와 맞서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존재이다.
우리의 삶이 그렇다. 무의미의 사막을 건널 때도 언제나 자유의지가 작동하여 새로운 방향을 설정할 수 있고, 의미가 없는 것들도 뚫고 나갈 수 있다. 반대로 죄와 허물이 가득한 세상에서 자신이 죄 속에 머물러 있다고 하더라도 한번에 그것들을 뒤집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회심'이라고도 하고 '회개'라고도 하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은 가던 길을 돌이켜 의인의 길로도 갈 수 있다. 반대로 '죽음'에 대한 공포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맞설 수 있고, 때론 그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위해서 희생하기도 한다. 인간은 역사를 통해서 본 것처럼 이런 존재이다. '존재의 용기'를 낼 수 있는 존재, 절망 속에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존재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그래서 이 본질이 실존을 이끌어 간다.
희망도 절망도 아닌 하루를
한 걸음씩 걸어가는 이들에게 응원을
깊고 어두운 밤에
못다 이룬 행복을 열망하는 이들에게 기도를
시간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겨지더라도
소중한 순간들이 지탱해 온
인생의 의미를 품고 나가길
영영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되어 버린
절망의 계곡을 빠져나올 수 있는 이들이길
지친 발걸음 속에서도
선한 잠을 자고, 아름다운 숨소리로 잠이 들길
희망도 절망도 아닌
사랑도 미움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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