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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학일기

폴틸리히의 '존재의 용기' 읽기

존재와 용기_현대기독연구원

by 낭만민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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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현대기독연구원에서 폴틸리히의 책들을 읽는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하신 김동춘교수님과 함께 존재의 용기, 프로테스탄트의 시대, 문화의 신학을 읽는다. 오늘은 첫 시간으로 '존재의 용기'를 읽는다. 폴틸리히는 한국교계에서는 '실존주의 철학자이며 자유주의 신학자'로 읽혀진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틸리히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라고도 볼 수 있다. 신이 존재하지만 그 안에서 다시 존재의 의미를 찾고 그 존재가 살아가는 시대와 그 존재가 만들어가는 문화에 대해서 글을 쓰고 접근하고 있다. 특히 오늘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틸리히 신학을 찾아보려고 한다. 이름도 좀 특히한데 '존재의 용기'라는 말이 어떤 것일까? 일단 오늘부터는 틸리히의 신학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틸리히는 불안이라는 질문에서 용기라는 해답으로 전개하지 않고, 용기를 먼저 말하고, 불안으로 넘어간다. 신기한 구조이기도 하다. 먼저 답을 하고 혹은 먼저 '정답'을 말해 놓고 그것이 발현되지 않는 현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틸리히는 용기와 불안의 주제를 심리학적, 역사적, 철학적 설명을 거친다음, 신학적인 대압으로 결론짓고 있다. '존재의 용기'는 불안과 무의미에 처한 인간 상황에 대한 질문을 존재에의 용기를 통해서 응답하고 있다. 사실 이 책이 나오는 시기가 1952년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인간성이 말살되고 이성의 빛이 사라진 현실에서 필요한 것은 '용기'였다. 더욱이 근본적으로 용기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가진 속성 중에서 '용기'가 아니라 자신의 안에 있는 실존적인 '용기'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으로 부터 그것이 온다는 것이 실존주의 철학자라는 생각이 든다.)


존재의 용기의 주제

인간은 비존재의 위협가운데 서 있다. 비존재의 위협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것을 말한다.

즉 서양의 개념으로 보면 '무', 'nothing'이며 인간이 '유'에서 '무'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비존재와 무라는 실존적인 상황에서 인간은 두려움이나 불안, 절망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이 존재를 긍정하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의 힘이 바로 이책, 존재의 용기이다.

존재의 요기의 핵심주제 : 불안과 용기이다. 불안과 용기는 양극적으로 상반된 대립 개념이다. 용기는 불안을 극복하는 개념이며, 불안은 존재에의 용기 이전의 상태이다.

키워드 : 존재, 비전재, 불안, 무의비, 정죄, 자기긍정, 용납, 참여

대칭관계 : 비전재와 무 - 존재와 존재의 힘, 불안(운명과 죽음, 죄의식과 정죄, 공허와 무의식) - 용기, 존재의 용기의 길 - 자기긍정 / 용납 / 참여


존재의 용기 목차

존재와 용기 : 용기의 존재론

존재, 비존재, 불안 : 불안의 존재론

병리학적 불안, 생명력, 용기 : 심기학적, 종교적 불안의 존재론

용기와 참여 : 일부로서 존재하려는 용기

용기의 개별화 :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

용기와 초월 : 용납됨을 용납하는 용기, 신학적 존재에의 용기


존재의 용기의 전체 윤곽

용기의 존재론 : 용기란 자기긍정이다.

불안의 존재론 : 죽음, 정죄, 무의미에서 오는 불안의 3가지 형태(운명과 죽음, 죄의식과 정죄, 공허함과 무의미)

자기긍정의 용기 : 용납, 참여



1. 틸리히는 왜 용기를 제시하는가?


틸리히에게 용기는 왜 중요할까? 더욱이 용기와 존재론을 연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장에서는 용기의 철학적인 개념을 다루고 있다. 먼저 틸리히는 '인간 상황에 대한 분석을 위해 유용한 개념은 그리 많지 않다고 말한다. 용기가 인간상황을 분석하는 유용한 개념으로 신학적, 사회학적, 철학적 문제들이 다 같이 관련되어 있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용기라는 개념을 강연 주제로 정했다. 이 책은 강연을 모아놓은 책이기도 하다. 틸리히에게 용기란 '무의미와 불안이라는 현대의 가장 절박한 위기를 점검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틸리히는 이 책에서 불안의 3가지 형태를 규정한다.


틸리히가 말하는 불안의 3가지 형태

운명과 죽음의 불안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

공허함과 무의미의 불안


용기는 일반적으로 두려움ㅇ르 극복하기 위한 마음의 능력이다. 용기란 인간 내면의 감성적, 정서적, 심리적 문제로 이해된다. 이런 읨에서 용기란 두려움을 극복하는 영웅적 태도나 의지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용기란 죽음이나 죄책감, 무의미함과 같은 존재를 위협하는 힘들, 즉 비존재의 위협을 극복하고 존재의 힘에 근거하여 용납하는 자기긍적이다. 따라서 틸리히는 용기를 옳은 행동과 결연한 의지 등을 의미하는 윤리적/도덕적 문제만이 아니라 존재론적 문제로 본다. "용기는 윤리적 실체이지만, 인간 실존의 전 영역에, 그리고 궁극적 존재 그 자체의 구조 속에 뿌리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용기를 윤리학적으로 이해하려면, 먼저 존재론적으로 고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용기는 존재의 힘이 필요하다.
인간안에는 존재와 비존재가
동시에 존재한다.
용기라는 힘은 비존재를
초월하는 힘이다

틸리히는 존재의 용기를 통해 용기의 개념 안에 담긴 '도덕적 개념'과 '존재론적 개념'을 하나로 묶으려고 한다. "인간의 행위와 가치판단의 문제로서 용기는 도덕적 개념이다. 또한 한 개인의 존재에 대한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자기 긍정으로서 용기는 존재론적 개념이다" 틸리히가 말하는 용기는 자기긍정으로서의 용기이기도 하다. "용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긍정, 즉 자아가 자신을 긍정하려는 것을 방해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는 자기긍정이다." 또한 "용기는 비존재의 사실에도 불구하고 행하는 존재의 자기긍정이다" 그런데 자기긍정으로서 용기는 긍극적으로 어디서 오는가? 이것이 핵심이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다. 존재의 힘은 하나님이다.


용기의 철학적 개념들

플라톤과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용기: 귀족주의적 용기(aristocratic courage). 고통과 죽음에 용감하게 맞서는 것으로 고귀한 것을 위하여 행동하는 용기다. 용기는 덕이다. 용기는 칭찬받을 일을 행하며 멸시당할 일은 거부한다. 용기는 자신의 참된 본성, 내적 인 목표 혹은 생명력을 긍정하는 것이다. 용기는 아름다움과 선이다. 용기는 고귀한 것이다. 자기 존중을 통해 존재론적 우월성을 의식하면서 자기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 용기다.

아퀴나스의 용기: “자연적인 마음의 능력은 성령을 통하여 초자연적인 완전함으로 올라간다”. 자연과 초자연, 자연과 은총은 층층적 상승을 통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스토아의 용기 : 로고스와 자연법: 만물속에 우주의 이법으로서 로고스가 산재되어 있으며, 인간은 로고 스(이성)에 따라 살아가야한다. 운명과 죽음을 수용하는 삶의 태도: “인간은 운명과 죽음을 스스로 짊어진 신적 존재에 참여 함으로써 운명과 죽음의 불안을 정복했다”. → 죽음의 긍정과 동시에 삶에도 긍정. 죽고자 하는 용기와 살고자 하는 용기이다. 스토아적 용기는 존재론적 의미에서 그리고 도덕적인 의미에서 존재의 용기다. 스토아적 용기는 자기긍정의 존재론적 용기다 - 고통과 죽음을 초월하는 용기-스토아주의는 운명에 대한 불안을 내면의 평정심과 이성의 지배를 통해 대응하는 용기였다.

스피노자의 용기 : 자기긍정은 스피노자 사상에서 중심요소다: 존재에 참여하는 모든 것들의 본질적인 행위는 자기 긍정의 표현이다“ 코나투스(conatus)는 무엇인가를 향한 분투로서 존재의 본질과 존재의 힘인데, 이것이 자신 의 활동력을 긍정하고 확립하게 한다. 자기 긍정이 곧 덕성이다. “용기란 모든 사람들이 이성의 명령대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분트하련은 열망”이다. 타인에 대한 사랑은 자기긍정의 결과이다. 덕성과 자기긍정은 같은 것이다. “자기긍정은 신적인 자기 긍정속에 참여하는 것이다”. “모든 특정한 존재, 더 나아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는데 사용하는 능력이 곧 신의 능력이다” 마음의 감성은 영혼의 영적 및 지적 사랑이며, 이러한 감성은 신적 자기애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의 용기 :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 니체와 마찬가지로 틸리히에게 힘은 중요한 요소이다. “권력에의 의미지라는 표현은 생의 자기 긍정을 자기 보존과 발전을 포함하는 생”이다. “권력에의 의지는 궁극적인 실체로서의 의지에 대한 자기 긍정이다”. 생이란 존재의 힘이 자신을 실현시키는 과정이다. 그럼으로써 생은 생을 부정하는 요소를 극 복한다. 용기는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생의 의지이다. 니체에게 덕은 자기긍정이다. “용기가 자기 자아의 긍정인 이상, 그것은 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긍정이 덕성이며 용기인 자아는 자기 자신을 능가하는 자아이다‘.



2. 존재, 비존재, 그리고 불안


이제 어느정도 틸리히의 신학을 이해했으니 존재론과 불안의 개념에 대해서 더 살펴보자. 불안의 존재론을 살펴보자. 불안은 존재자가 자신에게 있을 수 있는 비존재를 인식하는 상태이다. 불안은 비존재에 대한 실존적인 인식이다. "실존적"이란 비존재에 대한 추상적 인식이 아니라 비존재가 자신의 존재 일부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란 뜻이다. 죽음에 대한 잠재적인 인식의 다름 아니다. 또한 불안은 유한성이다. 유한성은 인간으로서 느끼는 인간의 본질적인 불안이다. 누구나 느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불안은 인간존재라면 누구나 느끼는 비존재적로 떨어질 수 있는 것을 뜻한다. 존재의 빛을 가리는 것이 바로 불안이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두려움이라는 것은 대상이 있는 두려움이라고 말한다. 어떤 대상에 대해서 느끼게 되는 두려움과 공포를 설명한다. 그리고 반대로 불안은 어떤 대상이 없는 것이여서 결국 존재론적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게 되는 존재론적 불안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가 무너질까봐 두려워지는 불안과 같은 것이다. 누군가 자신을 공격할 때 그 사람에 대해서 공포를 느낄 수 있고, 이러한 두려움은 결국 불안의 개념으로 발전하여'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불안을 느끼는 층위가 조금은 다르다. 그것은 운명과 죽음의 불안,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 공허함과 무의미의 불안이라고 할 수 있다.


불안의 3가지 형태

운명과 죽음의 불안 :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궁극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죽음을 통해 결국 자신의 존재가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자신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떤 운명을 살아야 하는지 선택할 수 없다. 또한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한계를 직시할 때, 존재 자체가 무로 돌아갈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이 불안은 존재의 지속 자체에 대한 심오한 위협을 반영하며, 존재가 무너질 수 있다는 실존적 공포를 동반한다.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 : 인간이 자기 존재의 결함과 도덕적 부정당함을 자각할 때 생긴다. 인간은 자신이 도덕적 기준에 미치지 못하거나, 존재의 본래 목적에서 벗어났다고 느낄 때 죄책감을 경험한다. 이 죄책감은 단순한 심리적 느낌을 넘어, 자신의 존재 자체가 궁극적으로 거부당할 수 있다는 깊은 정죄의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존재의 가치를 스스로 부정하는 고통이며,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게 만드는 비존재의 강력한 형태이다.

공허함과 무의미의 불안 : 특히 현대 사회에서 두드러진다. 전통적 가치 체계와 신념 체계가 무너진 시대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상실할 위험에 직면한다. 의미 없는 삶은 존재의 목적을 부정하며, 인간은 내면의 공허함과 무의미성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 불안은 존재의 의미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는 공포이며, 인간 존재의 정신적 기반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힘이다.


불안의 시기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고대문명 말기에는 존재론적 불안이다. 즉 죽음과 운명에 대한 것이다. 마치 루돌프 오토가 말한 '누미노제'같은 것이다. 존재에 대한 불안이 사후 세계에 대한 방어막으로 혹은 연결점으로 스핑크스를 만들고 제의적인 물체들을 만들었다. 중세 말기에는 도덕적 물안이 찾아온다. 루터의 불안으로 볼 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거룩하신 자비하심과 죄용서함을 받을 수 있을까"이다. 그래서 루터의 이러한 불안은 예정교리와 죄의식과 정죄에 대한 불안으로 발전하게 된다. 시대적으로 보면 루터의 이러한 불안은 유명론과 연결되어서 '말뿐이라고 하지 않고 진짜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종교개혁까지 진행된다.


근대 말기에는 정신적인 불안으로 공허함과 무의미의 불안이 발생한다. 이것은 일종의 실존주의와 연결된다. 불안의 등장은 항상 시대 말엽이라는 점을 집중해야 한다. "불안은 의미와 권력과 질서의 기존구조가 붕괴될 때 보면화 되었다." 틸리히는 '흔들리는 터전'이라고 하면서 존재자체가 흔들리기 때문에 존재는 실제 존재하는 것을 붙잡으려고 한다. 이것은 '무의미'의 시대가 오면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의 의미가 없어지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자신이 예배하는 것이, 자신이 믿는 신에 대한 믿음이 '의미' 없음으로 바뀌는 것이 얼마나 불안한 것인가? 한국 교회는 80년대까지만 해도 주술의 시대와 결을 같이 했다. 무속과 신앙이 비슷한 상태로 존재했었다. 성령의 은사라고 하면서 불안을 날려 버리는 기제로써 방언이나 예언과 같은 능력이 발휘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가 지나가면서 정신적인 불안이 찾아왔다. 80년대가 죽음의 불안에서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으로 넘어갔었다면 이제는 공허함과 무의미의 불안으로 바뀌면서 이전에 하던대로의 처방은 무용해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3. 그러면 어떻게 불안을 극복할 수 있을까?


폴 틸리히는 인간 존재가 본질적으로 비존재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고 진단했지만, 동시에 그 비존재의 위협을 무력화할 수 있는 힘으로 "존재의 용기"를 제시했다. 존재의 용기란 단순히 살아남으려는 본능적 의지가 아니라, 존재를 위협하는 비존재를 직시하면서도 존재를 긍정하고 받아들이려는 실존적 결단을 의미한다. 틸리히에게 있어 존재의 용기는 불안의 극복을 위한 단순한 심리적 위로가 아니라, 존재와 비존재의 긴장 속에서 존재 자체를 자기 긍정하는 깊은 영적 행위이다. 틸리히는 이 존재의 용기가 인간이 직면하는 각각의 불안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이라고 보았다.


운명과 죽음의 불안을 극복하는 존재의 용기는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과 죽음의 불가피성을 직시하면서도 그 안에서 존재를 긍정하는 태도이다. 틸리히는 인간이 죽음을 피하거나 무시하려는 대신, 죽음을 존재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았다. 죽음은 비존재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이지만, 존재의 용기를 가진 인간은 죽음의 불가피성 속에서도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삶의 가치를 긍정한다. 운명의 필연성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삶 속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수용하고, 유한성 안에서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 나갈 때 진정한 존재의 용기를 실현하게 된다. 즉, 죽음이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향해 열려 있는 삶 속에서 존재는 더욱 치열하게 자기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을 극복하는 존재의 용기는 인간이 자신의 결함과 도덕적 실패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수용하는 것이다. 틸리히는 인간 존재가 완전할 수 없으며, 누구나 존재의 왜곡과 죄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존재의 용기를 가진 인간은 죄의식에 압도되어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한계를 직면하면서도 자신이 본질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믿는다. 이는 틸리히가 말하는 "무조건적 수용(the acceptance of the unacceptable)"에 해당한다. 인간은 자신의 죄에도 불구하고 신적 존재(하나님)에게서 무조건적으로 수용된다는 사실을 신앙을 통해 경험할 수 있다. 이러한 신앙적 차원의 수용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와 정죄의 불안에 사로잡히는 대신, 존재 자체를 긍정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


공허함과 무의미의 불안을 극복하는 존재의 용기는 인간이 외부의 확고한 의미 체계가 무너진 상황 속에서도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고 존재를 긍정하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전통적 가치와 신앙 체계가 붕괴함에 따라 많은 이들은 공허함과 무의미에 빠진다. 틸리히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인간이 반드시 외부에서 주어진 의미에만 의존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오히려 존재의 용기를 가진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서, 존재 그 자체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생성할 수 있다. 그는 이 과정을 "본질과 존재의 일치"로 설명했다. 인간은 무의미의 심연을 직면하면서도, 존재 자체에 내재된 의미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그 가능성을 현실 속에서 새롭게 열어갈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무의미의 불안을 넘어서 존재의 깊은 의미를 재발견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틸리히가 말하는 존재의 용기는 단순한 자기암시적 긍정이 아니라, 죽음, 죄, 무의미라는 실존적 비존재의 위협을 정직하게 직면하고, 그 위협에도 불구하고 존재를 긍정하는 깊은 결단이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 존재(Ground of Being)인 하나님 안에서 자신이 이미 수용되고 있다는 신앙적 인식 속에서 가능해진다. 인간은 자신을 무너뜨리려는 비존재의 힘을 넘어설 수 있는 존재로 부름 받았으며, 존재의 용기를 통해 비존재의 심연 속에서도 존재를 고백하고 삶을 계속해 나간다. 틸리히에게 이 존재의 용기는 곧 인간 실존의 가장 숭고한 표현이며, 절망을 넘어서는 참된 신앙의 길이다.


개별화와 참여

틸리히는 자기긍정의 주체는 자아임을 강조한다. 자기긍정의 주체는 개별화한 자아다. 자아로서 자아의 긍정이 이루어지려면, 개별화된 자아가 요구된다. 그 자아는 “분리되어 있고, 자아 중심적이며, 개별화되어 있어 비교할 수 없고 자유 로우며,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자아이다”

개별화된 자아가 “비존재에 대항하여 방어하며 비존재를 떠맡음으로써 용감하게 긍정”한다.

불안의 본질은 자아상실의 위협을 느끼는 것이며, 구체적인 위협에 대한 의식이 두려움의 본 질이다.

“자기 긍정의 주체는 중심잡힌 자아이다. 중심잡힌 자아는 개별화한 자아이다”

이 자아가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다(courage to be as Oneself).


집단적 사회와 준집단적 사회

원시사회, 중세시대와 봉건사회 : 참여의 철학“ 보편적인 것이 개별을 압도하고, 전체가 개인보다 현실성을 지닌 사회다.

고대세계의 개인의 죄의 발견은 종교와 문화의 개인화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발판이었다.

교회의 전통, 성례전, 교육, 권위를 통해 불안과 절망의 위협에 대한 대책을 제시했다.

죄의식의 불안, 의심의 불안은 원시적인 집단주의와 차이점이 있지만, 일부로서 존재하려는 용기의 표현이다.

유명론에서 궁극적 실체로서 개인에 대한 강조 – 중세적 참여 체계의 붕괴.

성인들의 공동체 : “종교개혁과 르네상스에서 일부로서 존재하려는 중기적 용기(준집단주의적 체계)는 끝이 났고, 그로 인하여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에 대한 물음들이 전면으로 등장하게 되 었다”.


일부로서 존재하려는 신집단주의적 표현

이성의 자율과 기술문명의 발전 이후 등장. 국가적 형태나 전체주의적 방식.

종족중심의 집단주의: 나치즘. 형연, 영통의 신성화.

공산주의: 일부로서 존재하려는 신집단주의적 표현

민주적 체제순응주의에서 나타난 일부로서 존재하려는 용기: 청교도, 복음주의, 경건주의 운 동에 존재했던 죄의식, 체제 순응주의.



4. 하이데거와 폴틸리히가 말하는 존재론의 차이


요즘들어서 하이데거와 실존주의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그래서 기존에 있는 책과 다르게 틸리히과 하이데거를 비교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같은 독일 사람으로서 폴 틸리히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깊이 수용했지만, 동시에 근본적인 비판적 수정도 진행하였다. 하이데거가 존재(Sein)와 신(Gott)을 철저히 구분한 데 반해, 틸리히는 존재 자체를 곧 신(하나님)으로 보았다. 이 점은 두 사상가 사이의 가장 본질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하이데거에게 '존재'는 종교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 실존의 조건 속에서 열리는 의미의 장이었다. 그는 존재를 신적 실체로 동일시하지 않았고, 오히려 전통적 신 개념을 해체하려 했다. 하이데거는 철저히 "존재 그 자체에 대한 물음"을 통해 철학을 갱신하고자 했으며, 신을 존재자들 가운데 하나로 다루는 것을 거부했다. 신은 하이데거 철학에서 침묵하고 있으며, 존재는 철저히 인간 실존과의 관계 속에서 열린다.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존재이면서도 인격신의 개념이 아닌 것이다.


반면 틸리히는 존재에 대한 하이데거의 통찰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존재를 철저히 신학적으로 재해석하였다. 틸리히에게 존재는 단순한 '있음'의 열림이 아니라, 모든 존재자들이 의존하고 근거하는 인격적으로 소통이 가능한 "궁극적 존재(Ground of Being)"였다. 그는 존재를 인간적 의미 체계의 결과로 보지 않았고, 오히려 존재 자체가 신적 근원성을 지닌다고 보았다. 즉, 틸리히는 존재를 하나님과 동일시한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존재자(beings among beings)가 아니라, 존재자들을 존재하게 하는 "존재 자체(the power of being-itself)"라는 점에서, 하이데거와 근본적으로 길을 달리했다. 틸리히는 이를 통해 하이데거가 멈춘 지점, 즉 존재에 대한 무신론적 열림을 넘어서, 존재를 신학적으로 통합하려 했다.


특히 틸리히는 하이데거가 인간 실존의 조건으로서 죽음과 무를 직시하는 데서
멈췄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경계 조건이었지만, 틸리히는 죽음의 위협을 넘어서 존재를 긍정하게 하는 힘, 즉 은총(grace)을 강조했다. 하이데거에게 존재 긍정은 인간의 실존적 결단에 의해 가능하지만, 틸리히에게는 궁극적 존재가 인간을 먼저 받아들였다는 신학적 선언 없이는 진정한 존재 긍정이 불가능하다. 틸리히는 인간이 죽음, 죄, 무의미라는 비존재의 힘 앞에서 스스로 존재의 용기를 가질 수 없으며, 오직 존재의 근거 자체가 부여하는 은총을 통해서만 비존재의 위협을 넘어설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실존주의와 다르게 유신론적 실존주의 관점을 가진다고 본다. 물론 잘못 읽을 가능성이 있지만, 틸리히 역시 '존재자체'를 이야기하면서 신과의 거리는 직접적인 '대화'를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한 틸리히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인간 중심적(anthropocentric)일 수 있다는 점도 간접적으로 넘어섰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현존재(Dasein), 즉 인간의 존재 구조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틸리히는 존재를 인간 실존을 넘어서는, 모든 현실을 포괄하는 신적 기반으로 보았다. 존재는 인간 실존을 통해 경험되지만, 인간을 넘어서는 신적 차원을 본질적으로 내포한다. 이 점에서 틸리히는 존재를 인간적 조건에만 한정하지 않고, 신적 근원성과 구원의 가능성까지 열어 놓았다. 결론적으로 틸리히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문제의식을 깊이 수용하여 인간 실존의 근본적 불안과 비존재의 위협을 이해했지만, 존재를 신적 근원으로 해석함으로써 하이데거를 넘어서려 했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신을 구분하여 철학과 신학을 나누었다면, 틸리히는 존재와 신을 통합하여 존재론을 신학의 언어로 재구성했다. 따라서 틸리히는 하이데거를 이어받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신학적 인간학과 구원론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던 것이다.


강의를 듣고 집으로 가는 중. 땅거미 지는 봉천동이 웬지 존재들의 용기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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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틸리히의 철학으로 들어간다. 실존주의에 대해서 고민하던 차에 이제 실존주의 철학까지 들어간다. 1950년대는 틸리히가 말한대로 죽음을 넘어서기 위한 불안이었다. 일단은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러나 1980년대가 지나면 전 사회적으로 기독가 부흥하면서 죄책감이 화두였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가 부흥한 이유도 있었다. 죄책감는 결국은 구원의 문제로 연결되면서 종교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을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밀양‘이다. 죄책감에서 해방된 인간에 대한 정죄의식. 그리고 2000년대가 넘어가면 의미와 무의미의 시대가 온다. 자신이 무의미한 존재가 되면 어떻게 하지? 이런 불안의 역습은 한국 사회에서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틸리히의 신학이 오히려 잘 현실을 잘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오늘은 이렇게 마치고 앞으로 5주나 더 지속된다고 한다. 틸리히에 대해서 제대로 공부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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