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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학일기

프로테스탄트의 시대_종교와 문화

폴틸리히 강독_프로테스탄트의 시대

by 낭만민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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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매개의 신학이다


틸리히의 문제의식은 기독교의 영원한 진리가 시대 속에서 잘 들려지고 있는가?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의 진리인 '케리그마'가 어떻게 하면 인간이 처한 상황 속에서 응답하는 방식으로 전할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 그래서 틸리히는 2가지 형태의 신학에 대해서 비판한다. 첫 번째는 초자연주의 신학에 대해서 비판한다. 초자연주의 신학의 대표주의자라면 '칼 바르트'라고 할 수 있다. 칼 바르트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위기' 가운데 있다고 보고 신 앞에서 심판 앞에 놓여 있다고 본다. 칼 바르트가 등장하기 전인 19세기 이전에는 '심판'을 강조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인간은 위기상황 혹은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일치와 조화의 관계였다. 이 때가 바로 일치유형이 나오게 된다. 자유주의 신학으로 발전하게 되는 과정을 말한다. 역사 속에서, 종교 속에서, 사회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일치신학'이다.


바르트는 이러한 일치신학을 반대하면서 하나님과 인간을 먼저 분리하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는 신학을 펼친다. 틸리히가 보기에는 이것은 '초자연적인 신학'이다. 인간과 하나님을 분리하고 인간이 처한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틸리히는 반대한다. 반대로 자연주의 신학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자연주의 신학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방식을 반대한다. 그래서 이러한 반대급부로써 틸리히는 '사이'로 들어간다. 그리고 벌어진 이진법의 세상에서 자신의 철학으로 매개하여 연결하려고 한다. 자연과 성례전, 신학과 철학, 역사와 실재 사이에서 매개하는 신학을 렬친다.


칼바르트(Karl Barth, 1886–1968)

칼 바르트는 20세기 개신교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계시의 주도성을 강조하는 신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인간 이성이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자유주의 신학의 시도를 거부하고, 하나님이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계시, 특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에만 초점을 맞춘다. 이 같은 접근은 그의 대표작 '로마서 주석'(1922)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며, 이 책을 통해 당시 독일 신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바르트의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를 중심에 둔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세 가지 형태로 설명한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며, 둘째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증언으로서의 말씀이고, 셋째는 설교를 통해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삼중 구조는 바르트 신학의 핵심 틀을 형성하며, 성경을 문자적으로 신성시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의 권위를 보존하는 방식이었다.

바르트는 신학 초기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 계시와 역사 사이의 긴장, 전적 타자성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변증법적 신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후 '교회교의학'(Kirchliche Dogmatik)으로 대표되는 신학 체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연합되며 화해가 이루어진다고 강조함으로써 그의 신학은 보다 통합적이고 관계지향적으로 전개된다. '교회교의학'은 총 13권으로, 창조, 화해, 구속, 종말론에 이르는 전체 신학 주제를 포괄하는 방대한 작업이다.

예정론에 있어서도 바르트는 기존의 이중예정론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선택된 자이자 버림받은 자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하나님이 인류 전체를 은혜 가운데 구원하시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며, 예정의 문제를 단지 몇몇 개인의 구원/유기 문제로 환원시키지 않으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 예정론은 그의 신정 중심 신학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바르트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시대 상황 속에서 신학과 정치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는 1934년 나치에 협력하던 ‘독일 기독교운동’에 맞서 바르멘 선언을 주도하며,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가 신학을 단지 학문적 논의가 아니라, 시대의 고통과 현실에 응답해야 할 교회의 실천적 작업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자연신학에 대해서도 바르트는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그는 자연이나 이성, 보편종교를 통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고 보는 어떤 입장도 거부하며,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유로운 계시를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특히 루돌프 불트만, 에밀 브루너와의 논쟁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도 바르트는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부름받은 존재, 다시 말해 하나님의 동역자로 본다. 이처럼 바르트는 인간 존재를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 재구성하며, 이 존재가 세상 속에서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에게 신학은 결국 교회와 세계를 위한 공적 책임을 져야 하는 실천적 작업이다.

요약하자면, 칼 바르트의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의 절대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성, 성경의 증언성과 신학의 공공성을 강조하며, 인간의 한계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에 의지하는 신정 중심 신학이다. 그의 작업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성과, 현대 사회에서 교회의 책임을 재정의하려는 노력으로서 평가되며, 오늘날까지도 신학, 윤리,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1. 프로테스탄트의 시대의 주요 내용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프로테스탄트의 시대(The Protestant Era)'는 그가 문화와 종교의 상호작용을 신학적, 철학적으로 분석한 중요한 저작이다. 이 책에서 틸리히는 종교와 문화가 서로를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으며, 각각은 서로를 통해 자기 본질을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그의 대표적인 명제인 “종교는 문화의 실체이며, 문화는 종교의 표현이다”(Religion is the substance of culture, culture is the form of religion)는 이 상호의존적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즉 종교는 문화의 본질적 동력을 제공하고, 문화는 종교가 구체적인 역사와 사회 안에서 형상화되는 방식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틸리히의 전체 사상, 특히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는 개념과 연결된다. 틸리히는 인간이 살아가며 궁극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모든 것이 종교적 차원을 갖는다고 보았으며, 그 궁극적 관심은 문화의 제도, 예술, 정치, 학문 등 모든 영역에서 표현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문화는 종교의 표현 양식이 되며, 반대로 종교는 문화의 기초를 이룬다. 틸리히는 이를 통해 종교를 단순히 제도화된 신앙 체계로 축소하지 않고, 인간 실존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으로 확대한다.


그는 '프로테스탄트의 시대'에서 특히 “프로테스탄트 원리(Protestant Principle)”를 통해 종교와 문화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설명한다. 이 원리는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근본정신으로, 문화와 제도, 종교 자체에 대해서도 비판적 거리를 두게 한다. 즉, 모든 문화적 산물이나 종교 제도는 인간적 것이며 오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궁극자’에 대한 충성은 언제나 상대적 형태들에 대해 초월적인 비판을 가해야 한다. 틸리히는 이를 통해 종교적 열정이 문화나 제도 속에 절대화될 때 위험이 발생한다고 경고한다. 예컨대 교회가 자신을 신의 대리자로 착각할 때, 또는 민족주의가 신앙과 결합해 우상화될 때, 프로테스탄트 원리는 그러한 절대화에 ‘거룩한 아니오’를 선언한다.


틸리히는 신율(theonomy)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종교와 문화의 관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세 가지 상태를 설명한다. 첫째는 타율(heteronomy) 상태로, 종교가 문화에서 완전히 분리되고 양극화되며, 종교는 문화와 대결하거나 파괴하려 한다. 둘째는 자율(autonomy) 상태로, 종교와 문화가 서로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상태이다. 마지막으로 틸리히가 바람직하다고 본 상태가 신율(theonomy)이다. 신율은 종교와 문화가 조화를 이루며 상호 침투하고 통합되는 상태이다. 여기서 문화는 종교의 깊이를 갖고, 종교는 문화 안에서 현실화된다. 틸리히는 종교가 현실과 단절되거나 폐쇄적인 종교주의(religiosity)에 빠질 경우 그 힘을 잃게 되며, 반대로 문화가 영적인 근거 없이 자율성을 절대화하면 공허함에 빠질 수 있다고 보았다. 신율은 이 양자 사이의 균형을 의미한다.


틸리히는 20세기 초 독일과 유럽 사회를 배경으로 근대화, 세속화, 전체주의, 산업화 등의 문화적 변화 속에서 종교가 어떻게 자기 역할을 상실하거나 회복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틸리히는 참된 종교는 문화에 침잠하거나 흡수되어서는 안 되며, 동시에 현실과 괴리되어서도 안 된다고 보았다. 오히려 그는 종교가 현실 문화를 비판하고 변혁시키는 힘으로 작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에는 인간 존재의 불안, 소외, 죄의식과 같은 실존적 문제들에 대한 종교의 해석과 치유 가능성이 포함된다. 틸리히에게 있어서 종교는 단지 초월적 차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문화 속에서 인간이 맞닥뜨리는 실존적 질문들에 대한 궁극적 응답이자 방향을 제시하는 근원이었다.


틸리히는 종교와 문화의 분리 또는 종속이 아니라, 비판적 통합을 추구한다. 그는 종교가 문화의 핵심이며, 그 핵심은 인간의 궁극적 관심이라는 실존적 구조 속에서 작동한다고 본다. 종교는 문화에 의미를 제공하고, 문화는 종교가 현실 안에서 실현되는 장이 된다. 틸리히는 종교가 언제나 문화 안에서 형상화되지만, 그 문화적 형태들을 절대화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초월적으로 반성하고 해체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바로 이 점에서 ‘프로테스탄트 원리’는 모든 신학과 문화비평의 출발점이자 영원한 기준으로 작용한다.



2. 신율, 타율, 자율의 구분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종교와 문화에 대한 논의에서 핵심이 되는 세 가지 개념은 자율(autonomy), 타율(heteronomy), 신율(theonomy)이다. 이들은 인간 문화와 종교(또는 신학)의 관계를 규정짓는 틀로, 특히 근대 이후 종교가 문화 안에서 어떤 위치를 점할 수 있는지를 분석하는 데 중요한 도식이다. 틸리히에게 이 세 구분은 역사적 발전 단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와 사회에서 동시에 나타날 수 있는 구조적 유형들이다. 그는 특히 근대 이후의 위기는 타율로부터 벗어나 자율로 나아간 것은 성공했으나, 신율로의 성숙한 도약을 이루지 못한 데 있다고 본다. 오늘날 신학, 철학, 예술, 정치가 다시 ‘신율’을 회복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단지 종교 부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통합성과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회복하자는 요청이다.


타율(Heteronomy)_외부 권위에 의한 지배

타율은 문화가 외부적이고 절대적인 권위에 종속된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외부 권위란 주로 종교적 계시, 교회 제도, 혹은 절대화된 전통과 같은 것들이다. 즉 문화의 자기 결정 능력이 무시되고, 모든 삶의 의미, 가치, 제도, 예술, 정치가 외부의 ‘신적’ 질서나 권위에 의해 일방적으로 통제될 때 타율적 문화가 된다.

이 상태에서는 종교가 문화의 삶을 지배하려 하며, 문화는 단지 종교의 표현 수단으로만 취급된다. 틸리히는 이 상태가 인간의 자유와 창조성을 억압하며, 종교가 궁극적 진리로부터 멀어지고 우상화(idolatry)로 타락할 위험이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종교가 자기 자신이나 교리, 제도를 절대화하면, 오히려 참된 신적 진리를 가리는 폐쇄적 구조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중세 교권주의적 문화, 이슬람 율법주의 체제, 혹은 오늘날의 종교 근본주의 사회에서 타율적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틸리히는 이러한 타율적 질서를 ‘외적인 신성화’의 결과로 보았으며, 인간의 내면적 자율성과 실존적 깊이를 회복하지 않으면 결국 종교의 본질도 훼손된다고 보았다.


자율(Autonomy)_분리된 공존, 비판과 한계

자율은 문화가 자신의 이성과 능력에 따라 독자적인 가치 판단과 창조적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상태이다. 자율은 인간이 외부 권위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의 내면적 기준에 따라 진리와 도덕, 미적 판단 등을 스스로 구성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적 신념을 담고 있다.

틸리히는 자율을 타율에 대한 해방의 표현으로 평가한다. 계몽주의 이후 인간 이성은 신적 계시나 교회 권위로부터 벗어나 독립적인 존재로 자리잡았고, 이로 인해 근대 철학, 자연과학, 예술, 정치, 인권의 발전이 가능해졌다. 자율은 인간 주체의 자각이며, 그것은 종교가 인간을 억압하지 않고, 자유로운 응답과 해석의 존재로 존중할 때에 가능해진다.

하지만 틸리히는 자율에도 위험이 내재되어 있다고 경고한다. 인간 이성이 스스로를 절대화하여 종교적 차원, 즉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에 대한 인식을 상실할 때 자율은 오히려 자기 우상화(self-idolatry)로 전락하게 된다. 이는 신에 대한 필요를 부정하고, 인간의 이성이나 기술, 정치 이념을 절대화하는 세속적 근대성의 병리적 측면이다. 틸리히는 이런 상태에서 문화는 영적 공허에 빠지며, 삶의 의미와 방향을 잃게 된다고 분석한다.


신율(Theonomy): 종교와 문화의 통합, 이상적 조화

신율(theonomy)은 틸리히가 가장 바람직한 상태로 본 구조이며, 자율과 타율이 변증법적으로 통합된 상태이다. 신율은 인간이 자율적인 존재로서 문화와 가치를 창조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궁극적 실재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인도받는 상태를 말한다.

여기서 핵심은 자율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율은 유지되되, 인간 이성이 하나님의 진리, 사랑, 정의라는 깊은 기반 안에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율은 타율처럼 외부 권위에 종속된 상태도 아니고, 자율처럼 인간 중심의 자기 폐쇄적 구조도 아니다. 자율의 자유와 타율의 깊이가 조화롭게 통합된 문화 상태, 그것이 바로 신율이다.

신율은 ‘신정정치(theocracy)’와 구분되어야 한다. 후자는 정치와 종교 권력이 동일하게 작동하는 제도적 구조지만, 틸리히가 말하는 신율은 철저히 실존적·내면적 구조이며, 문화와 종교가 상호 침투하면서도 비판과 창조를 동시에 가능하게 만드는 동역 관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의 일부 예술작품, 종교개혁기의 신학과 문학, 혹은 바흐의 음악, 보에티우스나 아퀴나스의 철학은 신율의 전형적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인간의 자율적 창조성과 신적 의미가 함께 어우러진 표현이다.

틸리히는 신율이 언제나 유지될 수는 없지만, 종교와 문화의 건강한 관계를 위해 항상 추구되어야 할 이상적 구조라고 말한다. 신율은 종교와 문화 모두에 자기 성찰과 겸손을 요구한다. 종교는 문화 속에서 구체화되며, 문화는 종교로부터 방향과 영감을 얻는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와 신적 진리 사이에 일어나는 긴장과 조화의 다이내믹한 과정이다.



3. 종교와 문화는 어떻게 만나는가?


폴 틸리히(Paul Tillich)에게 있어서 종교와 문화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상호 내포적 관계에 있다. 그는 종교와 문화를 각각 독립된 두 영역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종교는 문화의 실체(substance)이며, 문화는 종교의 형식(form)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곧 종교와 문화가 서로를 통해 자기 본질을 실현하며, 종교는 문화 속에서 형상화되고, 문화는 종교를 통해 의미를 부여받는다는 뜻이다. 틸리히에게 있어 종교와 문화가 만나게 되는 방식은 단순한 외재적 접촉이 아니라, 존재론적 깊이에서 이루어지는 실존적 통합이다.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층위에서 설명한다.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으로서의 종교

틸리히는 종교를 제도, 교리, 의례 등의 외형적 체계로 보지 않고, 인간 실존의 근원적 구조에서 나타나는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으로 정의한다. 즉, 인간이 삶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그로 인해 전존재적으로 헌신하게 되는 그 대상이 곧 종교적 대상이며, 그것이 신이든 진리든 정의든 간에 그 사람의 실존은 이미 종교적 구조를 지닌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문화는 종교를 담고 있다. 예술, 정치, 철학, 법률, 윤리, 학문 등의 문화적 산물들은 결국 인간의 궁극적 관심이 표현되는 통로이다. 그렇기에 틸리히는 종교와 문화의 만남을 외부의 협력이 아니라, 문화 내부에서 종교가 스스로 드러나는 사건으로 이해한다.


상징(Symbol)과 신화(Myth)의 구조

틸리히는 문화가 종교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상징(symbol)과 신화(myth)를 강조한다. 인간은 추상적 개념으로는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를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상징과 신화를 통해서만 그것을 감지하고 소통할 수 있다. 예술작품, 시, 건축, 제도, 사회운동 등은 종교적 깊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예를 들어, 고딕성당의 구조나 바흐의 음악, 단테의 '신곡'은 단지 예술적 성취가 아니라 종교적 세계관과 실존의 고백이 문화적으로 구현된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종교는 문화에 스며들며, 문화는 종교를 담아낸다. 따라서 종교와 문화는 상징 구조를 통해 서로 만난다.


신율(Theonomy) 상태에서의 이상적 만남

틸리히는 종교와 문화의 관계에서 세 가지 유형으로 타율(heteronomy), 자율(autonomy), 신율(theonomy)을 제시하며, 신율이야말로 종교와 문화가 가장 온전하게 만나는 상태라고 말한다.

신율은 인간의 자율성이 보존되면서도, 그 자율성이 궁극적 실재에 뿌리내리고 있을 때 발생하는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 종교는 문화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고, 문화는 종교적 깊이와 의미를 내면화하며, 양자가 긴장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창조적 통합이 가능해진다.

이런 만남은 타율처럼 외부 강제가 아니며, 자율처럼 무신적 무관심도 아니다. 예컨대 르네상스기의 예술과 신학, 종교개혁기의 문학과 사회운동은 신율적 통합의 전형으로 간주될 수 있다.


비판과 통합의 변증법

틸리히는 종교와 문화의 관계를 단지 평화로운 공존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비판과 창조적 충돌이 함께한다고 보며, 이를 변증법적 관계로 설명한다. 문화는 종교 없이도 발전할 수 있지만, 궁극적 의미를 상실할 위험을 내포한다. 종교는 문화와 만나지 않으면 현실성과 구체성을 잃고 추상화되거나 권위주의화된다.

그러므로 종교는 문화 안에 침투하면서도, 항상 문화에 대한 초월적 비판자로서 작동해야 하며, 문화는 종교를 자기 안에 담되, 종교적 형식을 우상화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종교와 문화는 상호 비판-상호 성취의 길을 걷는다.


폴 틸리히에게 종교와 문화가 만나는 방식

존재론적으로 : 인간의 실존이 궁극적 관심을 갖는 구조 자체에서 종교가 문화와 내적으로 연결된다.

상징적으로 : 예술, 언어, 제도 등 문화의 상징적 표현을 통해 종교가 구현된다.

신율의 통합 구조에서 : 자율성과 종교성이 조화롭게 통합될 때 가장 이상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비판적·변증법적으로 : 종교와 문화는 긴장과 비판을 통해 상호 정화되고 심화된다.


4. 종교와 문화 사이에 카이로스


폴 틸리히에게 카이로스(Kairos)는 단순히 역사적 사건의 한 시점이나 일반적 시간 흐름(크로노스, Chronos)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카이로스는 틸리히 사상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영원성이 인간의 시간 안으로 침투하는 특별한 순간’, 즉 은혜의 시간이며 결단의 시간으로 정의된다. 이 개념은 틸리히가 종교와 문화의 관계를 설명할 때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는데, 왜냐하면 종교가 단순히 문화의 일부로서 존재하거나, 혹은 문화의 외부에서 명령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문화에 개입하여 그 심층 구조를 뒤흔드는 방식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때가 바로 카이로스이며, 틸리히는 이러한 순간을 통해 종교가 문화에 변혁적 방식으로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설명한다.


카이로스는 시간 속에서 무수히 지나가는
크로노스 안에서의 사건들과는 구별된다.


그것은 평범한 역사적 시간이 아닌, 영원(영속적 의미)이 시간에 스며드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인간은 그 순간을 통과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돌아보게 되며, 새로운 결단과 삶의 방향 전환이 요구된다. 따라서 카이로스는 단지 역사적 전환점만이 아니라, 존재론적 깊이를 가진 시간이다. 틸리히에게 있어 이 카이로스는 문화 속에서 종교가 드러나는 방식, 다시 말해 종교가 문화에 의미를 제공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방식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틸리히는 이러한 카이로스 개념을 통해, 종교가 문화에 접근하는 방식을 새롭게 설명한다. 그는 종교가 문화에 종속되거나, 혹은 문화를 지배하는 구조(타율)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렇다고 종교가 자율적 문화와 아무런 접촉 없이 고립되어도 안 된다. 오히려 종교는 역사 속에서 특정한 ‘카이로스의 순간’을 통해 문화와 깊은 대화를 시도하고, 기존 문화의 한계를 드러내며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작용해야 한다.


카이로스는 그러한 종교의 창조적 개입의 장이자 비판적 선포의 시점이다. 이러한 종교적 개입은 언제나 문화적 위기나 전환의 문턱에서 발생한다. 문화가 자기 가능성의 한계에 도달하고, 기존의 제도, 상징, 윤리, 정치 등이 그 정당성을 상실하는 시점에, 종교는 카이로스적 선포를 통해 현실을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는 단지 종교가 ‘새로운 질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잊고 있던 존재의 깊이, 궁극적 의미, 초월적 실재와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예컨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종교개혁기 루터의 활동, 20세기 틸리히 자신의 나치 반대 운동 등은 모두 카이로스적 사건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순간에서 종교는 문화를 향해 단순한 윤리적 제안을 넘어서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비전과 진실을 제시한다.


틸리히에게 카이로스는 또한 자율과 타율을 통합하는 신율(theonomy)의 가능성을 여는 문이다. 인간 문화가 자율성을 절대화할 때, 문화는 종종 기술주의, 기능주의, 허무주의에 빠진다. 반면 타율적 구조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진리를 외형화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카이로스는 단순한 중재가 아니라, 초월과 내재의 변증법적 결합, 자율성과 영원성의 만남으로 나타난다. 이 만남은 종교가 문화에 강압적으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깊이에서 비롯된 자기 갱신의 요청으로 작동한다. 즉, 문화가 스스로 초월에 대해 응답할 수 있는 길이 카이로스 안에서 열린다.


더 나아가 틸리히는 카이로스를 개별 인간 실존의 차원에서도 핵심적으로 이해한다. 각 개인은 자신의 삶에서 정체성, 진리, 책임에 대한 실존적 질문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질문들이 구체적인 사건, 위기, 만남, 상실, 환희 등으로 다가오는 순간이 곧 카이로스이다. 이 시간은 인간이 삶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기존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 존재론적 결단의 순간이다. 틸리히에게 종교는 이처럼 실존적 순간에 인간에게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을 상기시키고, 그에 응답하도록 부름을 던진다. 다시 말해, 카이로스는 신학적 사건이면서 동시에 실존적 사건이며, 문화와 존재 사이의 균열이 열리는 시간이다.


카이로스는 또한 예술, 문학, 철학, 사회운동 등 문화적 표현들 속에서도 나타난다. 틸리히는 상징(symbol)을 통해 카이로스가 역사에 침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곧 신적 진실이 인간 문화 안에서 감각적 형식으로 구현되는 방식이다. 단테의 '신곡', 바흐의 ‘마태 수난곡’, 루터의 95개조, 마르틴 루터 킹의 “I Have a Dream” 연설, 진보적 예언자들의 정치적 외침 등은 모두 카이로스가 역사 속에 뿌리내린 문화적 징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단지 그 시대의 창작물이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는 영원성과 시간의 만남의 자리로서, 종교와 문화가 충돌하면서도 창조적으로 통합되는 지점이다.


이제 요약해보자. 폴 틸리히에게 있어 카이로스는 종교와 문화가 가장 치열하게 마주하는 경계선이며, 그 마주침 속에서 새로운 진실, 새로운 질서, 새로운 존재의 방식이 탄생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는 단지 종교가 문화에 영향력을 끼치는 방식이 아니라, 존재 전체에 대한 신적 응답의 시간이며, 실존적 변화를 요구하는 예언자적 시간이다. 틸리히는 현대사회가 자율성과 기술적 이성에 매몰되어가는 시대 속에서도, 여전히 카이로스의 시간은 도래할 수 있으며, 그때 종교는 다시금 문화에 대해 초월적 의미를 제안하는 존재로 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카이로스는 틸리히 신학의 심장부이자, 종교와 문화, 존재와 진리, 시간과 영원이 접촉하는 신비로운 문이다.



5. 폴틸리히의 조직신학에서 '구원'의 문제


폴 틸리히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에서 구원(salvation)은 단순히 죄의 용서나 내세의 보상이라는 전통적 교리 개념을 넘어, 존재론적이고 실존적인 회복의 사건으로 재정의된다. 그는 구원을 인간이 직면한 소외(alienation) 상태에서 벗어나, 존재의 중심(God)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사건으로 이해한다. 이 과정은 단지 도덕적 잘못의 해결이 아니라, 비존재(non-being)에 의해 위협받는 인간이 새로운 존재(New Being)에 참여함으로써 실존적 통합을 이루는 것이라고 본다. 틸리히는 인간이 세 가지 차원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본다. 첫째는 자기 자신과의 소외, 둘째는 타인 및 세계와의 소외, 셋째는 하나님과의 소외이다. 이 소외 상태는 단순한 심리적 단절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붕괴 위기를 의미한다. 인간은 이러한 소외 속에서 허무, 죄책, 불안, 절망을 경험하게 되고, 이는 곧 구원의 필요성을 드러낸다. 구원이란 바로 이러한 소외 상태로부터의 해방이며, 존재의 중심과 다시 연결되는 사건이다.


틸리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존재(New Being)”의 상징이자 현실로 이해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소외는 극복되고, 존재의 충만함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구원은 예수를 단순히 모범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열리는 새로운 존재 양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수는 신성과 인성, 무한성과 유한성, 시간성과 영원성이 만나는 지점으로, 인간이 존재의 중심과 다시 결합하는 방식은 바로 그 안에서 가능하게 된다. 구원은 미래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실존 속에서 경험되는 사건이다. 인간은 자기 존재의 경계에서 불안을 직면하며, 그 가운데서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을 향한 응답을 통해 구원의 사건에 참여한다.


이때 구원은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발생하는 실존적 전환이다. 틸리히는 이를 “신앙의 행위”로 부르며, 존재의 중심에 자기 자신을 맡기는 것을 구원의 핵심으로 본다. 틸리히는 이러한 상징 언어를 통해, 구원이 단지 종교적 교리를 넘어, 존재 깊이에서 발생하는 실존적 사건임을 보여준다. 구원은 개인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인 사건이다. 틸리히는 구원을 개인의 내면적 전환으로만 보지 않고, 역사와 문화, 사회 속에서 실현되어야 할 존재의 회복으로 본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개인의 구세주가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의 근원이며, 교회는 이 구원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구원은 이처럼 자기 자신, 공동체, 세계와의 관계 회복을 포함하는 총체적 사건이다. 틸리히의 구원론은 존재의 위기와 소외를 직면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존재 방식에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실존적 회복이다. 그것은 철저히 존재론적이며, 실존적이며, 상징적이며, 공동체적인 사건이다. 틸리히는 이 구원 개념을 통해, 신학이 현대 인간의 실존 문제와 철학적 언어로 대화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으며, 고전적 교리를 현대 문화와 철학의 언어로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이론적 전환을 제시하였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우리 시대를 향한 기독교의 메시지를 두 단어로 요약해 달라고 요청한다면, 나는 바울의 말을 빌려 그것은 '새로운 창조'에 대한 메시지라고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새로운 창조에 대해 했던 말들을 읽어 왔습니다. 그의 문장들 중 하나를 정확한 번역으로 반복해 보겠습니다. '만약 누군가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다면 그는 새로운 존재입니다. 낡은 상태는 사라졌고 새로운 상태가 존재합니다.'"_폴틸리히 '새로운 존재'


거룩한 공허의 개념

폴 틸리히가 '프로테스탄트의 시대(The Protestant Era)'에서 말하는 ‘거룩한 공허(sacred void)’는 전통적인 신학에서 말하는 단순한 부재나 무(nothingness)의 개념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는 이 개념을 신성(the Holy)에 대한 경험이 깊어지고 순화되는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해체와 비움의 공간으로 이해한다. 즉, ‘거룩한 공허’는 인간 존재가 더 이상 기존의 상징, 교리, 제도 안에서 신을 만날 수 없게 되었을 때, 초월적인 신적 현존이 다시 드러나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공간이다. 종교적 상징과 체계가 붕괴된 자리에서 생겨나는 공허는 곧 새로운 신성과의 만남, 궁극적 실재와의 관계 회복이 가능해지는 실존적 여백으로 기능한다.

틸리히는 이 개념을 단순한 절망이나 부정성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거룩한 공허’는 초월의 가능성, 즉 하나님이 인간의 내면에 다시 말씀하실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매우 창조적이고 희망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는 특히 종교가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거나, 전통과 제도를 우;상화할 때 신성을 왜곡하게 되고, 그 결과 살아 있는 상징은 죽은 껍데기로 변질된다고 비판한다. 이와 같은 종교적 형식주의가 초래하는 결과는 의미 없는 거룩함, 즉 껍데기만 남은 외형적 종교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붕괴 이후의 공허함은 단지 상실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새로운 창조가 준비되는 자리, 은폐된 신이 다시 드러날 수 있는 공간이다.

‘거룩한 공허’는 틸리히의 존재론적 신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그는 인간 존재를 항상 비존재(non-being)의 위협 속에 놓여 있는 실존적 존재로 보았으며, 그 비존재와의 긴장은 삶 전체를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구조라고 보았다. 인간은 하나님, 타자,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을 때 절망과 허무, 소외를 경험하게 되며, 이 소외는 때때로 종교적 기호와 형식이 의미를 잃고 반복되는 순간에도 똑같이 발생한다. 이때의 종교는 더 이상 존재의 중심을 향하지 않으며, 오히려 신의 부재를 가리는 장막으로 작동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공허’는 단순히 비어 있음이 아니라, 인간이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실존적 경계선이며, 하나님이 새롭게 임재할 수 있는 자리이다.

틸리히는 이러한 공허함의 개념을 예술과 건축의 영역으로도 확장시켰다. 그는 특히 건축 공간에서의 ‘비어 있음’이 어떻게 초월적 신성함을 드러내는지를 설명하면서, 고딕 대성당의 높고 빈 천장, 절제된 조각과 어두운 음영, 침묵하는 공간 자체가 오히려 신의 현존을 더욱 선명하게 인식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이러한 신학은 단지 시각적인 표현을 넘어, 인간의 감각이 초과되거나 무너질 때 오히려 신성이 열린다는 틸리히의 상징론적 직관과도 연결된다. 즉, 공허는 결코 결핍이 아니라, 의미의 과잉을 위한 정지된 시간, 영원의 문턱이다.

‘거룩한 공허’는 종교의 위기, 신앙의 침묵, 실존의 붕괴 속에서 경험된다. 틸리히는 현대 사회의 세속화, 기술주의, 자본 중심의 문화가 신성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고 있다고 보았고, 이런 맥락 속에서 기존의 종교 체계들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될 때, 사람들은 오히려 깊은 공허함 속에서 참된 신의 음성을 듣게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때의 공허는 무신론적 허무가 아니라, 초월을 기다리는 열린 공간이다. 즉, 틸리히에게 ‘거룩한 공허’는 ‘신의 부재’를 넘어서 신의 재현(revelation)을 위한 필수 조건이며, 믿음은 이 공허함 속에서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기다리는 용기다.

틸리히의 ‘거룩한 공허’ 개념은 종교적 절망이나 해체의 순간을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존재의 새로운 형태가 생성될 수 있는 ‘창조적 틈’으로 해석한다. 종교는 자기 자신을 우상화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비워낼 때, 참된 신성함을 다시 경험할 수 있다. ‘거룩한 공허’는 종교적 상징이 의미를 잃고 무너질 때 생겨나는 영적 진공 상태이지만, 바로 그곳에서만 참된 신의 현존이 가능해진다. 이 개념은 실존적 위기 속에 있는 개인에게도 적용되며, 우리는 삶이 텅 비어지고 모든 기댈 것이 사라졌을 때, 오히려 신이 말씀하시기 시작하는 깊은 심연과 마주할 수 있다. 틸리히에게 거룩한 공허는 파멸의 자리가 아니라, 은폐된 신이 다시 계시되기 위한 신학적 여백이며, 절망 너머에서 다시 시작될 수 있는 존재의 조건이다.


마블의 썬더볼츠에서는 '센추리'와 함께 그의 어두운 존재인 '보이드'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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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틸리히의 신학은 어렵다. 그러나 변증법과 실존주의 그리고 초월론을 이해하고 나면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언제나 '사이'에서 그 둘을 결합하려고 하는 통합의 신학이라고 느껴진다. 하나하나 곱씹어볼 이야기가 많다. 한국에서는 소개된 책들이 많이 있지만,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자'로 판명 나 있어서 접근성이 높지는 않다. 오늘은 간단하게 프로테스탄트의 시대의 내용과 문화의 신학의 내용을 중심으로 알아보았다. 종교와 철학사이에서, 문화와 종교 사이에서, 초월과 실재 사이에서 우리가 만들어가는 신앙의 좌표를 찍어야 한다. 특히 재미있었던 부분은 거룩한 공허 개념이다. 공허하게 남겨진 공간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현실의 문제가 하나로 만나는 지점이 생겼다. 앞으로 더 알아봐야 하는데 오늘은 이정도로 마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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