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에서 정리한 강의
영성수련회를 마치는 시간이 왔다. 오신 강사님이 쎄게 말하기는 해도, 핵심적인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사실 현재 출석하는 교회에서는 더 포괄적인 해석과 이론을 담고 있지만, 오늘같이 수련회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강조점을 더 강조하는 방식으로 들어간다. 오늘은 하나님나라의 율법의 이해와 일상 속에서 하나님 백성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가 핵심이다. 율법은 몽학선생으로 제 1목표가 아니라 오히려 두 번째 목표이다. 율법이 추구하는 것은 거룩이고, 이 거룩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다. 오늘은 이러한 내용들을 깊이 있게 살펴보는 시간을 갖는다. 수련회가 이제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내가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할 것들을 구분해보고 하나하나 변화된 삶을 살아가야할 때가 온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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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2가지의 주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탈애굽화와 반가나안화이다. 애굽을 나온 이후 이스라엘 민족들은 모세의 율법을 받는다. 하지 말라는 것과 하라는 것을 중심으로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다. 이스라엘 민족은 사실 430년동안 식민지 생활을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지 모두 애굽이었다. 따라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의 삶을 다시 조정하기 위해서는 '율법'이 필요했다.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문화에 찌들어 있던 이스라엘 민족들은 자신들의 정체성도 잃어가고 있었다. 모세는 율법을 통해서 대안적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기준으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다시 조정해가는 것이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자유스럽게 얽매이게 하고 올무처럼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의 힘의 문화, 거짓된 종교들로부터 벗어나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자유롭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 월터 브르그만의 '예언자적 상상력'은 애굽생활에 치중해있떤 당시 이스라엘에 대한 관점을 동시에 미국의 소비문화와 견주어 본다. 미국의 소비주의를 히브리 노예들을 압제한 파라오의 억압 체제와 견준다. 미국의 자본주의 소비문화에 교회가 순응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원인은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자들의 전통적인 신앙을 버리고 그 사회의 지배문화에 적응해버린 예언자들의 삶 때문이었다. 예언자는 원래 지배문화의 의식과 인식에 맞설 수 있는 대안의식과 인식을 끌어내고 키우고 발전시키는 예언자적 사역에 투사가 된 인물이다. 이러한 예언자적 대안의 의식이 바로 '예언자적 상상력'인 것이다. 예언자적 상상력은 지배 의식을 해체할 목적으로 현존하는 질서의 불법성을 드러내고 비판해야 한다. 예언자는 신앙 공동체가 바라볼 하나님의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고 선포함으로써 개인과 공동체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일을 해야 한다. 모세는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내세워 파라오의 정적인 승리주의와 억압과 착취 정치를 해제한다.
정리하자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담겨진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며, 하나님나라 백성답게, 이스라엘 가운데 질서가 유지되기를 원하셨다. 율법을 통해 열방이 하나님을 알게 되며,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기를 원하였다. 이후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다양한 문제들을 겪게 된다. 더욱이 사사기까지 가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게 된다. 그 이유는 예언자들이 율법을 선포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는 장차 임할 하나님나라의 모형이자 그림자였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성취하였다.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속량하셨다. 율법이 정죄하는 결과를 예수님이 업데이트하신 것이다.
르네지라르의 희생양 이론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의 핵심은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폭력의 위기를 특정 개인이나 소수의 집단에게 전가하여, 그들을 상징적으로 희생함으로써 집단적 갈등을 잠재우고 사회적 통합과 안정을 이루는 메커니즘을 설명한 것이다.
지라르는 인간의 욕망이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모방적(mimetic)이라는 점에서 이론을 출발시킨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여 대상이나 가치를 선택하고 이를 추구하게 된다. 이렇게 모방된 욕망이 증폭되고 경쟁이 심화되면서, 결국 사람들은 동일한 대상을 놓고 필연적으로 갈등과 대립, 폭력의 상황을 초래하게 된다.
지라르는 여기서 토마스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와 유사한 혼란 상황을 상정하는데, 이러한 갈등 상황이 계속되면 공동체는 내부적으로 붕괴될 위기에 처한다. 이때 인간 공동체는 무의식적으로 집단적 합의에 따라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공동체의 위기를 초래한 주범으로 지목하게 된다. 이렇게 선택된 희생양은 실제로 공동체 갈등의 직접적 원인이 아니며, 오히려 힘이 없거나 사회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어 쉽게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존재이다. 이들은 집단적 폭력의 대상이 되어 희생당함으로써, 모든 죄와 책임을 상징적으로 떠맡게 된다.
철학적으로 이 이론은 인류가 역사적으로 수행해 온 종교적 희생 제의와 신화의 기원, 그리고 윤리적 금기(taboo)의 형성과정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폭력적 본성을 직시하기 어렵기 때문에, 희생양을 희생시키는 행위를 종교적 의례나 신화를 통해 정당화하고 신성화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죄의식을 해소하게 된다. 지라르에 따르면, 신화적 담론이나 종교적 상징체계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희생양 메커니즘을 숨기고 합리화하며 정당화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또한 지라르는 니체의 원한(ressentiment) 개념, 프로이트의 집단 심리학 등과도 연결지어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인간 사회의 문화와 문명 형성이 기본적으로 폭력의 관리와 억압, 그리고 그 억압된 폭력성을 사회적으로 통제 가능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특히 지라르가 철학적이며 윤리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 안에 내재된 폭력성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인정하는 데 실패할 때, 오히려 무의식적이고 반복적인 희생양 메커니즘에 의존하게 된다는 점이다.
결국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은 단순히 폭력의 해소 과정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 구조와 사회적 폭력의 근본적 원인을 심층적으로 탐구하며, 이로부터 폭력을 넘어서는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성찰의 길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 철학적, 이론적 의의가 매우 크다.
로마서 3장 20절에서는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라고 말한다. 율법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거룩함이 목적이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살게 하기 위한 목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 외에 이제는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율법의 저주로부터 속량을 받아서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었다. 의인으로 여김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이 말씀을 통해서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민족들이 이제는 율법 자체를 섬기게 되었지만,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율법으로부터 회뵉되어서 비로소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된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문자적 율법주의, 율법에 항목에 제한받지 않고 하나님나라의 새언약으로 살아가게 된다. 애굽땅에서 인도하였던 '구 언약'에서 새로운 언약인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으로 넘어가게 된다. 모세가 돌판에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다면, 이제 새로운 율법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판에 새겨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다. 또한 새영을 부어주고, 새 마음을 가지게 하여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율법과 규제를 지키게 되는 것이다. 새 언약 속에서는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우리 안에 오신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다른 접근방식이다. 구약에서의 언약은 돌판에 쓰시고 그것을 이루어가는 것이라면, 신약에서의 언약은 우리의 마음판에 쓰고 그것을 성령이 이끌어가신다는 것이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율법이 요구하는 목표를 자연스럽게 충족시킨다. 여기서 율법에 대한 3가지의 태도가 나온다. 율법에서 나왔지만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논리들이 나오는 것이다. 문자적 율법주의, 율법의 성취론, 율법폐기론이 바로 그것이다. 문자적 율법주의는 유대교, 안식교, 하나님의 교회와 같이 율법자체를 강하게 주장하는 이론이다. 이에 반해서 율법의 완성론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않고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는 것을 말한다. 율법이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율법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주류 기독교이다. 반대로 율법폐기론은 율법자체가 아예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율법폐기론은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이 진리가되는 전환과정을 겪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단종교들이 보통 취하는 방식이다.
율법은 거룩하고 선한 것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초등선생이 된다. 몽학선생이 되는 것이다. 율법은 이미와 아직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도덕적표준, 삶의 원리와 방향을 알게 한다. 문자적이지도 않고 폐기하지도 않는 율법의 완성에 집중해야 한다. 이러한 전제가 이해가 된다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등장한다. 하나님나라의 윤리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을 이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삶의 실제적인 부분에서의 적용을 공관복음에서 '산상수훈'에서 드러내고 있다. 예수님은 옛사람에게 말한 것을 대체하면서 살인, 간음, 이혼, 맹세, 보복, 원수 갑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신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살인하지 말라라고 했으나, 미련한 놈이라고 하거나 노하거나, 멸시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된다. 옛사람에게는 살인만 안하면 되지만 하나님나라의 윤리는 분노나 멸시, 욕을 하는 것은 안된다는 것이다. 기준이 예전보다 훨씬 높아지는 것이다. 살인죄라고 말하니깐 말이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간음'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품었다는 것은 마음 속에서 이미 시뮬레이션을 해 본 것을 말한다. 의도적으로 상상해서 그것을 실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혼에 관련해서도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면 된다고 율법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음행한 이유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한 것이고,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완악함과 여성의 인권을 위해 허락된 이혼을 경솔하게 대한느 자는 간음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모세는 헛맹세를 하지 말라고 했다. 예수님은 도무지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맹세라는 것은 이웃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서로 진실만을 이야기해야 한다.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으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악한자를 대적하지 말고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고 속을 가지고자 하는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고,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 십리를 가자고 하는 것을 말한다.
모세 율법에서는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지만,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너희 원수를 사랑하가고 한다.
하나님 나라의 윤리는 근본적으로 내면적이고 동기적인 면에 있어서도 의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산상수훈의 결론은 하나님이 온전하심 같이, 우리도 온전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온전하게 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힘과 의지로는 안된다. 앞에 이야기한 것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이러한 삶을 조금씩 조금씩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성화'라고 한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신분에 맞게 그 특권을 누리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온전하신 방식대로 사는 것이다. 이것을 특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하신 것이다. 더욱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다.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 바로 온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전파되었지만,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는 예수님을 죽이는 계기가 되어 버린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숭배했고, 이 율법을 폐하러 온 예수님을 없애버리고 싶어했다. 율법에 대한 숭배는 거룩함을 추구하는 율법의 제 1목적이 아니라 율법자체를 지키기 위한 목표로 변질되어 버린다. 예를 들면, 정통 유대인들은 정결한 음식인 '코셔'를 먹는다. 이슬람 무슬림들은 고기를 피째 벅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소나 양을 잡을 때 피를 다 빼낸 후에 도축한 식품인 할랄식품을 먹어야 한다. 유대인들이 무슬림들은 규율에 의해 코셔, 할랄이 아닌부정한 음식을 먹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부분은 괜찮을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먹는 것과 행하는 것에서 자유로움을 누린다. 율법에서 자유로워진 사람들은 내재적이고 동기적인 부분에서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제사상에 올라온 음식은 먹어도 되는가? 무엇이 문제인가? 술을 먹어도 되는가? 왜 안되는가?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지만 먹는 것이 공동체의 덕을 해치거나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리면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율법의 문제는 사실 적용에 있어서 구약과 신약을 왔다 갔다 한다. 포도주를 먹지 않고, 우상에게 절하지도 않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면 모든 율법을 다 지킬 것인가? 그 동기에 있어서 결국은 '이웃사랑과 하나님사랑'이라는 기준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되려면 결국 마음 속에 성령님이 임재하시고, 그 관계가 계속해서 깊어지는 가운데서 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이라고 했고,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리가고도 하셨다. (롬 14:17)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이다. 수 많은 인생의 선택에서 우리는 쉽게 율법의 굴레에 다시 빠질 수도 있고, 자유로운 들판으로도 나갈 수 있다. 예수님이 계속해서 도전하시는 것은 진실된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이웃사랑과 하나님사랑을 실철하는 것을 기준으로 두고 선택하라는 것이다.
바리새인 (Pharisees)
바리새인은 기원전 2세기경부터 등장하여 로마 지배 시기까지 활동했던 유대교의 종교운동이자 종교적 지도자 집단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녔다.
율법에 대한 철저한 준수 : 바리새인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그리고 엄격하게 지키는 데 매우 헌신적이었다. 또한 구전 율법(oral law)을 강조하여, 성문 율법인 토라 외에도 전통과 해석을 통해 생활 속에서 율법을 구체화했다.
내세와 부활에 대한 믿음 : 바리새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 천사와 영의 존재,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믿었다. 이들의 종교적 세계관은 현세적 삶에 대한 보상과 처벌을 넘어 영원한 세계를 강조했다.
대중적이고 실천적 신앙 강조 :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에서 나아가 일상의 정결과 율법 실천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회당(시나고그)을 중심으로 평범한 민중에게 큰 영향력을 끼쳤다.
메시아 사상 : 로마의 억압에서 벗어나 유대 민족을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리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무력적이고 급진적인 혁명보다는 율법 준수를 통한 내적 개혁을 우선시했다.
사두개인 (Sadducees)
사두개인은 주로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한 귀족적 종교 엘리트 집단이었다. 주로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 성전 운영과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성전 중심의 권력 : 사두개인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제사장직과 희생제사를 주관했다. 그들은 당시 유대교의 공식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로마제국과 협력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를 유지했다.
현세주의적 입장 : 사두개인은 내세나 부활, 영혼의 불멸성 등을 믿지 않았다. 현세에서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했으며, 구전 전통을 부정하고 오직 성경의 문자적 기록(토라, 특히 모세오경)만을 인정했다.
보수적, 귀족적 성향 : 이들은 사회적 지위와 부,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현상 유지에 힘썼으며 로마 제국과의 타협을 선호했다. 따라서 일반 민중과는 상당한 거리감을 유지했으며, 민중적 지지를 얻지 못했다.
메시아 사상에 소극적 : 로마의 지배에 비교적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정치적·사회적 안정을 해칠 수 있는 메시아 기대나 혁명 운동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신학적으로 보면 전천년설과 후천년설이 있다. 예수님의 초림을 기준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선포되었는데 재림과의 시간에서 재림을 이미와 아직의 사이에서 천년왕국의 완성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전천년설에서는 예수님의 재림이 있고 나서 천년왕국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세상의 문제는 더욱 극심해질 것이고, 윤리는 마지막에는 바닥으로 치달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윤리적 타락을 관망하거나 혹은 정죄하기에 빠쁘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한 방식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천년설에서는 분리주의 혹은 이원론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대로 후천년설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천년왕국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개념이다. 이것은 복음전파와 교회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통해서 세상이 점진적으로 개선된다고 믿는 것이다. 지금이 바로 천녕왕국의 시기이며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완성해가는 방식이다. 이러한 구분은 하나님나라의 윤리를 바라보는 관점도 바꾸어 놓는다. 어차피 망한 인생, 황폐한 세상을 얼른 떠나고 도피처로 가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윤리와 여기가 바로 하나님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삶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오히려 후천년설의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의 윤리로 살아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전천년설과 후천년설
전천년설(Premillennialism)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왕국의 시작보다 앞선다는 견해로, 세상이 시간이 흐를수록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점점 악화되다가 종말의 극심한 환난을 겪게 되고, 그 끝에 예수 그리스도가 초자연적으로 재림하여 직접 지상에서 통치하는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는 신학적 입장이다. 이들은 성경에 언급된 천년왕국을 실제적이고 문자적인 천 년이라는 시간으로 이해하며, 인간의 힘과 사회적 노력만으로는 완전한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따라서 전천년설의 핵심은 궁극적인 희망을 인간 역사 내부에서 찾기보다는, 초자연적인 개입을 통해 하나님께서 직접 이루시는 역사 바깥의 사건에 둔다. 이러한 입장은 초기 기독교 교부들과 현대의 보수적인 복음주의 진영, 특히 세대주의자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반면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은 천년왕국이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먼저 지상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는 관점으로, 복음 전파와 교회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통해 세상이 점진적으로 개선된다고 믿는다. 이들은 천년왕국을 문자적 1,000년보다는 상징적인 긴 기간으로 해석하며, 인류의 역사적 발전과 함께 복음의 영향력이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확대됨에 따라 정치, 경제, 문화, 도덕성 등 모든 영역에서 지속적인 진보와 개혁이 이루어져, 마침내 지상에 평화롭고 정의로운 시대가 올 것으로 기대한다. 따라서 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세상이 성숙되고 개선된 이후에 최종적이고 영광스러운 사건으로 나타난다고 보는 낙관적인 역사관을 담고 있으며, 인간의 사회적 노력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적극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역사적으로는 17~19세기 서구 사회에서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확산되었고, 현대에도 사회 변혁과 사회 정의를 중시하는 일부 기독교 진영에서 지속적으로 지지되고 있다.
전천년설과 후천년설에서 윤리적 차이
먼저 전천년설은 세상이 점점 악화되고 종말의 위기와 혼란을 거쳐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재림으로만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고 보기 때문에, 윤리적 적용의 중심은 주로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성결과 영적 순결에 맞춰진다. 전천년설적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 윤리는 세상의 악한 흐름과 문화적 타락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경건을 유지하며, 재림을 대비하는 데 초점을 둔다. 사회개혁이나 제도의 개선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지만, 근본적으로 세상은 인간의 노력만으로 변화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윤리적 실천이 개인적·공동체적 차원에서의 내적 변화와 거룩함 유지, 그리고 복음전파를 통한 개인의 구원에 초점을 두는 경향이 강하다. 즉, 세상 속에서 사회적 변혁을 적극적으로 이루는 것보다는, 세상과 구별된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신앙적이고 영적인 태도를 강조한다.
반면 후천년설은 하나님 나라가 점진적으로 세상 안에서 복음의 능력과 교회의 사회적 실천을 통해 확장되고 실현된다고 보기 때문에, 윤리적 적용이 세상 속에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데 집중된다. 후천년설적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 윤리는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성결이나 영적 순결을 넘어, 교회의 사회적 책임, 정치적 참여, 사회구조의 개선, 문화 변혁, 사회적 정의 실현 등의 적극적인 실천을 요구한다.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먼 미래의 초자연적인 사건 이전에, 바로 현재의 삶 속에서 복음적 가치로 사회를 바꾸고 세상의 구조와 제도를 변혁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후천년설적 윤리는 세상을 향한 강한 낙관성과 적극성을 기반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실제 역사와 사회 속에서 점진적으로 성취될 수 있다고 믿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기독교인과 교회의 윤리적 책임을 매우 강조한다.
결과적으로 전천년설과 후천년설의 하나님 나라 윤리 적용 차이는 세상과의 관계성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전천년설은 세상으로부터의 구별과 재림 준비를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 윤리를 적용하는 반면, 후천년설은 세상 안에서 적극적인 참여와 변혁적 실천을 통해 하나님 나라 윤리를 구현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나라를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율법을 지킨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나의 삶과 말과 행동 속에서 실재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대전제는 결국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 펼쳐지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하나님 사랑이 더 깊어지고 이웃들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율법의 목적은 거룩이다. 거룩의 핵심은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 문제가 심해지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 사라져서 이다. 이것을 다시 회복하는 방법은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우리의 삶으로 살아내는 수 밖에 없다. 삶 속에서 실재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수록 이 세상은 하나님이 실재로 살아 있다고 미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수련회가 끝났다. 많은 숙제를 가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