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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학일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하나님나라

하나님사랑 이웃사랑_마태복음 22장 36절 - 40절

by 낭만민네이션

0. 들어가기


영성수련회를 왔다. 나는 미션NGO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영성이 매우 중요하다. 영성을 서로 확인하고 회복하기 위해서 '영성수련회'를 1년에 1회 갖고 있다. 영성이란 '일상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정의해본다면, 계속해서 쏟아지는 일상 속에서 잊어버린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 영성수련회가 될 것이다. 영성은 믿음과 삶의 교차점에서 생긴다. 일터에서 영성의 목표는 '내면의식'의 확장이다. 내면의식은 초월의식과 공감의식, 공동체의식과 소명의식의 변증법에서 만들어진다. 내가 누구인지를 공동체에서 확인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을 회복하고,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다시 고민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자신을 넘어서는 하나님과 하나님나라에 대한 초월의식이 생긴다. 그래서 영성수련회를 한다. 오늘은 강사님의 이야기를 정리해보았다. 물론 들으면서 바로바로 하는 것이라고 오타도 많고 비문도 많다. 더욱이 내가 생각하는 신학과는 다른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기억을 위해서 정리를 한다.

1. 하나님나라에 대한 오해와 진실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있다. 2024년을 이어서 2025년에도 세계사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묵묵히 이루어져 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파도가 부딪히는 것만 보지만, 우리의 삶의 깊이에는 여전히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져 간다. 인간이 계속 걸어갈 수 있는 이유는 '가치'가 있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무의미한 일을 계속 주어지면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워진다. 이쪽 돌을 다른 쪽으로 옮기기만 시킨다면 그것은 의미없고 무가치하다. 그러나 여기에 의미가 생기면 같은 일을 하더라도 다른 방식의 원동력이 생긴다. 자본주의가 만연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을 이루는 것을 추구한다면 매우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이러한 기본적이지만 잊혀져가는 '부르심'의 의미를 찾고 가치를 회복하는 시간이 도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디안 광야는 모세에게 일터였다. 이드로라는 장인에게서 할당받은 땅에서 양들을 치는 일터였다. 양떼들을 끌고 자주 다녔던 길에서 어느날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을 보았다. 그러나 떨기나무에는 입사귀가 많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불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타고 있었다. 이상해서 가보니 소리가 난다. "네가 선 곳은 거룻한 곳이니 신을 벗어라!"라고 말이다. 모세가 선 땅, 흙이 거룩해지는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가 거룩함의 핵심이다. 우리가 일을 할 때 일터 자체가 거룩한게 아니라, 일터에서 임하신 하나님의 존재가 거룩한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를 경험하고 있는 그 곳이 바로 거룩한 곳이다. 그러면 어떤 일을 하든지 거룩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일요일에 얘배를 빠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낙? 10분의 1을 십일조로 드리면 거룩해지는가? 어쩌면 10분의 9를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임한다면 그것이 바로 거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너무나 '이원론'에 치우친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의 삶은 '거룩한 장소'에 국한되어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는 언제나 동일하다. 변함이 없다. 우리가 그 의미를 알던 모르던 간에 하나님의 때는 언제나 임하고 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 하나님의 임재연습을 잃어버렸고, 우리 자신이 너무 중요해졌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에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신 말씀은 마가복음 1장 14절의 이야기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전파하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 당시 로마에는 네로 황제가 있었다. 이미 황제가 있는 국가에서 '예수가 왕이다!'라고 외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고 그 나라의 주인이 예수님이라는 소식은 '복된 소식'의 핵심이었다. 이것을 마태는 '천국이 가까이에 왔다'라고 표현한다. 물론 '천국'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만 나온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에게 전한 복음서이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외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하늘'이라는 대체표현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이야기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동양적 개념으로 가지고 오면 '하늘'이라는 지시어를 그대로 가지고 온다. 천국이라는 단어에서 '천'이라는 '하늘'을 가지고 오고 '나라'라고 할 때 '국'이라는 단위를 표현하게 된다. 지리적이고 영토적인 개념으로 '나라'를 천국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거기에 동양적 맥락에서 '옥황상제'가 지배하는 천당의 개념까지 연결되어서 결국은 '천국'은 장소개념의 심판받는 미래의 종말을 뜻했다. 그러나 옳게 해석하면 하나님이 통치하고 다스리는 방식 자체를 하나님나라라고 볼 수 있다. '아도나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지시어를 '하늘'이라는 비유적으로 표현한 이유는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는 유대인들 때문이었다. 이를 동양적 개념에서 받으면서 우리의 기복신앙과 연결되어서 '장소'개념을 하나님의 거룩을 생각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다양한 접근

하나님의 통치 (God's Reign) : 하나님 나라는 특정한 영토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리심, 즉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의미한다.(막 1:15; 눅 17:20-21). 신약에서 하나님 나라는 "이미"(already) 시작되었지만, "아직"(not yet) 완성되지 않은 양면적 성격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실현 :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과 메시지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며, 심지어 이미 이 땅 가운데 임했다고 선포하셨다(마 12:28; 눅 11:20).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 귀신 축출은 하나님 나라가 현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였다.

역설적이고 반전적인 성격 :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가치관과 대조된다. 세상에서 낮은 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에게 열려 있으며, 강력하고 높은 자들에게는 숨겨져 있다(마 5:3-12; 눅 6:20-26).예수님의 비유(씨 뿌리는 비유, 겨자씨 비유, 누룩 비유 등)는 하나님 나라가 작고 미약한 모습으로 시작하여 점점 확장되고, 결국 모든 것을 포용하고 변화시킨다는 역설적 특징을 강조한다(마 13장).

종말론적이며 미래적인 차원 :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온전히 성취될 미래의 소망이다(마 25:31-46; 고전 15:24-28; 계 21-22장).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르는 것은 장차 올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의미를 지닌다.

공동체적이고 실천적인 차원 : 하나님 나라는 개인의 영적 변화뿐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정의, 평화, 사랑, 화해가 이루어지는 삶을 의미합니다(행 2:42-47; 롬 14:17).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표지(sign)이며,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성령의 임재와 능력으로 나타남 : 신약에서는 하나님 나라와 성령의 임재가 긴밀히 연결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행 2장) 이후 성령의 역사하심은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동력이 됩니다. 성령은 신자들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경험하게 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 줍니다(롬 14:17; 갈 5:22-23).



2.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오스카쿨만의 이해는 하나님나라를 도식화하는데 도움이 된다. 영원전에 인간은 의식을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인간은 현재에서 영원을 본다. 그것은 하나님나라의 완전한 이해와 통치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보고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 현재를 살아가는 삶 속에서 우리의 이정표는 교회가 된다. 교회는 아직과 이미의 긴장 속에서 하나님나라를 보여주고 계시하는 존재가 된다. 따라서 교회에서 우리의 존재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우리는 일상에서, 우리의 일터에서도 이루어가는 것이다.


오스카쿨만의 하나님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긴장 상태이다. 쿨만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오심과 십자가 및 부활을 통해 이미 이 땅에 시작되었다. 즉,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구원의 결정적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여전히 불완전하며, 최종적이고 완전한 성취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루어지므로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에 긴장이 존재한다. 쿨만은 이를 2차 세계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D-Day)과 실제 전쟁의 종결(VE-Day) 사이에 있었던 긴장 상황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이미 결정적인 승리가 이뤄졌으나 아직 최종적 평화는 오지 않았던 상태처럼, 하나님 나라도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결정적 승리를 얻었지만 최종적 승리인 재림까지는 긴장이 유지된다.

하나님 나라는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드러나는 구원역사의 중심적 개념이다. 쿨만에게 하나님 나라는 시간 밖의 추상적 실체가 아니라, 인류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실제 사건이다. 그는 이를 구원역사(Heilsgeschichte)라 부른다. 구원역사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역사 속에서 단계적으로 이루시는 활동이며, 이 중심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생애, 죽음, 부활을 통해 결정적으로 나타났고, 이제 역사의 종말까지 점점 확장되어 가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시작된 그리스도 중심적 사건이다. 하나님 나라는 단순한 개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 현실 속에 드러났다. 쿨만은 하나님 나라의 의미와 성격이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을 하나님의 나라 개념의 핵심으로 강조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통해 현실화되는 종말론적 긴장 상태의 삶이다. 쿨만은 하나님 나라가 단순히 미래에 올 천국의 상태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현실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긴장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주는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현실 세계 속에 실천하는 사명을 가진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 그 자체는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표지이자 도구이다. 쿨만에 따르면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동일한 실체는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의 현존과 도래를 세상에 증거하는 역할을 한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특징들인 정의, 사랑, 평화, 화해 등을 미리 보여주는 ‘표지(sign)’ 역할을 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도구(instrument)’ 역할도 함께 맡고 있다.



3. 세계관의 관점에서 위기와 도전


하나님나라의 신앙을 가지고 현실을 살아가려고 할 때 다양한 도전들이 다가온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진리가 사라진 세상'이다. 진리가 아니라 다양성과 포용성을 기치로 내건 포스트모더니즘을 추구하면서 과학이 진리의 내용을 채우고 있다. 특히 자본주의는 '맘모니즘'으로 모든 것이 물질적인 방식으로 이해되고 움직인다. 더욱이 보이는 것들이 진리라고 여겨지는 실존주의에서 넘어가는 실용주의는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가 전혀 쓸모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가장 큰 문제는 무엇보다 하나님보다 자기자신에게 관심을 지나치게 많이진 것이다. 자기중심주의는 사실 제일 중요한 '하나님과 대적'하는 부분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인생의 모든 목적이 쾌락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어떻게 할까? 이런과정에서 '내가 누구인지'라는 것을 잊어 버린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의 이성 중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비판하면서 나타난 철학적·문화적 사조로, 보편적 진리나 객관적 실재를 부정하고 모든 진리와 가치를 상대적이며 상황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절대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으며, 다양한 견해와 입장을 동등하게 존중하는 다원주의를 강조한다. 또한 권력 구조와 언어, 지식이 얽혀 있다고 보고 기존의 권위나 전통을 해체(deconstruction)하여 숨겨진 모순과 억압을 드러내려는 특징을 가진다.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등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은 주로 언어와 권력의 관계를 탐구하며, 기존의 관습과 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과학주의 : 과학주의는 과학적 방법과 지식만이 진리를 발견하는 유일하고 완전한 수단이라고 주장하는 사상으로, 과학의 힘을 절대화하며 다른 형태의 지식(예술, 철학, 종교 등)을 부차적이고 불완전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 사상은 주로 현대의 신무신론이나 물리주의와 관련이 깊으며, 인간의 삶이나 사회현상까지 과학적 설명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과학주의의 문제점은 과학의 경계를 넘어 인문학이나 윤리적 영역에까지 과학적 잣대를 무리하게 적용함으로써, 인간의 존재나 도덕적 가치를 과도하게 축소하는 데 있다. 리처드 도킨스나 샘 해리스와 같은 과학주의적 성향의 인물들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종교나 철학적 주장을 비판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맘모니즘 : 맘모니즘은 물질적 재화와 경제적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인간의 행복과 성공을 오직 재정적 성취로 평가하는 사상이다. 맘모니즘이라는 용어는 성경에 등장하는 재물을 의미하는 ‘맘몬(Mammon)’에서 유래한 것으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돈과 소유 중심의 삶의 태도를 지칭한다. 이 사상은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적 가치를 돈과 소유의 척도로만 판단하는 문제를 낳으며, 공동체적이고 윤리적인 가치들을 소홀히 하고 개인주의와 경쟁적 삶의 방식을 확산시킨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직면한 윤리적 위기와 사회적 불평등 문제는 맘모니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실용주의 : 실용주의는 진리나 가치를 절대적인 원칙이 아니라 실질적인 효과와 실천적 효용성에 따라 평가하는 사상이다. 즉, 진리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개념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얼마나 유용하고 실용적인가에 따라 결정된다. 실용주의자들은 고정된 이론이나 관념보다는 현실의 문제를 실제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중시하며, 환경에 따라 유연하고 창의적으로 대처할 것을 강조한다. 윌리엄 제임스는 진리를 ‘실생활에서 유용한 것’으로 정의했고, 존 듀이는 지식과 교육이 현실에서 구체적인 결과를 낼 때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고 보았다. 다만, 실용주의가 지나칠 경우, 윤리적 기준이나 장기적 비전 없이 단기적인 성과와 효율성만을 추구하게 되는 한계를 갖기도 한다.

자기중심주의는 모든 상황과 관계에서 자기 자신만을 기준으로 삼아 판단하고 행동하는 태도나 사고방식이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가장 우선시하며, 다른 사람의 입장이나 감정, 필요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인간관계에서 공감과 소통이 부족해지고 타인과의 갈등이나 충돌을 자주 겪게 된다. 자기중심주의가 강할수록 타인을 도구적으로 이용하거나 자신만을 위해 행동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공동체적이고 협력적인 가치를 훼손할 위험이 크다.

쾌락주의는 삶의 목적과 가치를 쾌락이나 즐거움에서 찾고 고통을 최소화하는 데 집중하는 사상이다. 고대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비교적 절제되고 이성적인 형태를 띠었으나, 현대의 쾌락주의는 즉각적이고 감각적인 만족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소비주의, 오락 중심의 문화와 연결되며, 순간의 즐거움을 최우선으로 여기면서 장기적인 가치나 책임감을 소홀히 할 수 있다. 이처럼 쾌락주의는 삶의 의미와 행복을 개인적 만족과 즐거움에만 집중함으로써 윤리적 판단이나 공동체적 책임을 경시할 위험이 있다.



4.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어떻게 살아야할까? 요약하자면 창조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신분과 특권을 누림과 동시에 하나님의 피조물 답게,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리스도인 답게, 합당하게 하는데 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만나는 것을 공동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을 정의할 때 '같은 공동체'라고 정의한다면 다음과 같이 정의해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점점 그렇게 될 것이다. 올림픽 대표팀의 선수는 자신이 지금은 비록 그렇지 않더라도 미래를 생각하면서 자신을 만들어 간다. 야식을 먹고 싶어도 미래를 생각하면서 현재를 절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나라를 이미 경험하고 완전하게 회복될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기다리고 참고,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_탈애굽화와, 반가나안화

나는 하나님나라의 거룩한 백성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

예수그리스도의 피 값을 산자

보배롭고 존귀한 자

왕 같은 제사장

하나님의 영, 성령이 내주하는 자

하나님의 성전

교회공동체로 함께 지어져 가는 성도

하나님나라의 기업을 누릴 자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과 해석의 문제

현행 사회법에서 금지하는 것들

윤리, 도덕에 반 하는 것들

신약성경이 명확하게 말씀하는 것들

adiaphora : 성경이 명확하게 금지하거나 규정하지 않는 것들


율법의 구성_feat. 토마스 아퀴나스

자연법 : 법의 정신

사회법 : 민법, 형법, 상법

의식법 : 절기, 제사, 제도

도덕법 : 십계명과 같은 도덕법



5. 하나님나라의 백성, 그리스도인들의 삶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다. 율법의 목적은 거룩이었다.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할 것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셔서 하나님나라를 전파하시고 모든 율법을 완성하는 한 단어 '사랑'을 이야기하셨다. 사랑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모든 율법의 문제가 집약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때론 '정의'에만 집중한 나머지 '사랑'을 잊어 버린다. 더욱이 '사랑'만 외치는 사람들에게는 정의가 사라진다. 사실 정의가 사라지면 사랑이 드러날 수 없다. '잘못한 것'을 규정하지 않으면 '용서할 것'이 규정되지 않는다. 하나님도 율법을 주시지 않으면 그것을 용서한다는 개념도 생겨나지 않는다. 우리 내면에는 매일 선악과가 열리고 우리는 그것을 따 먹을 수도 있지만 따 먹지 않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있는 의지의 전쟁이 열린다.



탈애굽화와 탈가나안화

그리스도인이 분명한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탈애굽화'와 '탈가나안화'라는 두 가지 과정이 모두 필요하다. 먼저, 탈애굽화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애굽)에서 노예 상태로 살아가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방되었듯이, 그리스도인이 과거의 죄악된 삶과 세속적 습관으로부터 명확히 벗어나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한 번의 회심이나 변화만을 뜻하지 않고, 삶 전체에서 지속적으로 죄의 유혹과 세속적 습관을 끊어내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탈애굽화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 중심적이고 세속적이며, 억압적인 삶의 패턴에서 완전히 벗어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자유와 생명력 있는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탈애굽화만으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충분히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과제인 탈가나안화가 요구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이후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지만, 그곳에서 번영과 풍요를 누리는 과정에서 가나안의 우상숭배와 세속적 문화에 깊이 빠지는 실수를 반복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도 세속적 가치관과 물질주의, 성공주의, 개인주의 등 현대사회가 주는 다양한 풍요의 유혹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믿음과 정체성을 잃어버리기 쉽다. 따라서 탈가나안화란 물질적 풍요와 성공 중심의 가치관, 소비주의와 맘모니즘, 개인적 쾌락주의 같은 세상의 문화적 영향력에서 거리를 두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우선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세속적 풍요가 삶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헌신, 공동체적 책임과 영적 가치를 삶의 우선순위로 두고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생명의 제1원리 Primum principium vitae_feat. 토마스아퀴나스

모든 생명체는 생명의 원리로서의 영혼을 지니고 있다.

생명체의 모든 현상은 유일한 하나의 생명원리를 통해 발생하고 작용하는데 이것이 생명의 실체성이다.

생명의 실체성은 플라톤의 영혼의 삼분설이나 아베로에스주의자들의 '영혼의 보편성'을 부정하고, 모든 인간은 유일하고 단일한 개별적 영혼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

감각이란 지성에 대한 불완전한 참여와 같은 것이다. 감각능력과 이성능력은 동일한 하나의 영혼능력이다. (신학대전)

인간존재의 생물학적, 감성적, 윤리적, 정신적 지평, 영적지평은 영혼이라는 하나의 원리로 통합되고 수렴되면서 하나의 유기적 구조 속에서 상호관계를 이루고 있다.

인간의 영혼이 다른 생명체들이 가진 영혼과 다른 이유는 인간의 영혼이 '자립하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자립의 의미 : 육체적 질료로써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존재하며, 자기 자신의 본질에 귀환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존재함의 조건은 질료와 형상의 결합이 아니라 형상과 존재행위esse의 결합이다. 이를 통해서 '인간 영혼의 불멸성'의 근거가 마련된다.

인간은 반성하는 능력reflection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 그리고 내면에 존재하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추론하고, 의미를 찾아가는 행위를 하게 된다. 따라서 반성하는 능력을 통해서 학문활동이 가능해진다. 반성하는 능력으로 인간은 '자기 세계'를 형성하며, 창조적 행위의 하나로써 창조주의 본성을 보여준다.



0. 나오기


중세시대의 '거룩'의 개념은 시간의 개념이었다. 이른바 "때"라고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하나님의 때가 차면 하나님의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중세시대가 지나고 근대가 찾아오면서 '장소'개념으로 다시 말하면 '공간의 거룩'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 되었다. 교회는 거룩하고, 예배드리는 장소가 거룩한 것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그러나 장소는 언제나 그 의미가 없다. 거기에 누가, 언제, 어떤 이야기를 썼는지가 핵심이 된다. 결국 때가 되면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이 거룩함을 만들어 간다. 오늘 강사님은 하나님나라의 대해서 다양한 도전거리를 던졌다. 기독교인은 술을 먹으면 안되는가? 기독교인은 노름을 하면 안되는가? 일터에서 뇌물을 받으면 안되는가? 이런 고민들을 시작해야 한다. 물론 나는 그에 대해서 여러가지 생각들이 있지만 탈애굽과 탈가나안을 하고서 다시 핵심으로 돌아오면 결국 그것은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다. 다시 시작해보자. 이웃사랑과 하나님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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