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삶에서 느끼는 자유
나는 어릴적부터 항상 외로웠다.
모든 사람들이 잠드는 시간에도 외로워져 잠을 자지 못했다. 영혼의 흐느낌이라고 할까?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은 언제나 채워지지 않고 목마르게 만들었다. 외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찾아다녔지만, 모든 사람들과 언젠간 작별을 하고 내 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외로움에 관심이 많았다. 약간 병이라고 느껴질 만큼 심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외로움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학이 생긴것도 같다. 오늘은 그것을 한번 나누어보려고 한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미래의 나에게 혹시나 '지금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면' 이 글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외로움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감정에서 온다. 자신에게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해서 찾아오는 감정이 외로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외로움을 피하고자 다른 사람을 만나고, 게임을 하고, 여행을 하고, 사람들이 붐비는 곳으로 간다. 그렇지만 외로움은 더 큰 외로움을 불러 온다. 자신이 외롭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그 외로움은 채워지지 않고 더 큰 허기가 지는 것처럼 더 큰 외로움이 찾아온다. 외로움을 해결하려고 몰아붙인 후에 그 허탈함이 외로움에 사무쳐서 혼자 있는 것보다 더 크기 때문에 사람들은 또 도피를 한다. 핵심은 '자기자신'이 중요한 사람들에게 외로움은 독약처럼 찾아온다는 것이다. 자신의 자아로 똘똘뭉친 마음의 중심에 곰팡이가 서식하듯이 외로움이 서식하기 딱 좋은 장소가 된다.
더욱이, 이 세상은 우리가 얼마나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지를 강조한다. 외로움을 느끼게 해야만 사람들은 필요하지도 않은 소비를 하게 되기 때문에 모든 광고를 외로움으로 부축인다. 외로움을 피해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러 나가면서 물건을 사고 꾸며야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만나서 또 무엇인가를 먹고 재미를 즐겨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외로움을 더욱 강조한다. 그래서 '자기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에게 '외로움'이란 곧 자신이 '소비를 마음껏 해도 괜찮은' 보상심리의 원형이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어떻게 하면 이 외로움을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고독함을 나아가는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의 외로움보다는 오히려 감정이 아닌 일종의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상태인 '고독'으로 나아가보자.
그것은 바로 고독함을 즐기는 것이다.
외로움을 채우려고 하나님을 만나지 말자. 왜냐하면 그렇게 외로움을 채우러 하나님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때문에 자신이 외로움을 극복했다고 하는 착각이 오히려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들고 같이 예배드리러 온 사람에게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다. 통성으로 기도하고 소리질러서 찬양하는 것들이 외로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마음에 사랑이 가득찬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예배가 끝난 후에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생각해보자. 다시 외로워질 것이고, 이것을 채우기 위해서 다시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사람들을 찾으러 가는 것이다. 외로움은 어쩌다가 이렇게 현대인들의 신앙의 원천이 되었을까? 외로움이 아니라 고독이다. 고독함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따로 시간을 내서 다른 이와 떨어져서 오롯이 하나님과 걷고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 시선의 자유에서 시작되면서, 내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것들에게서 영향력을 떨어뜨려 놓았을 때만 가능하다.
어쩌면 외로울 때는 하나님도 말씀하지지 않는 것 같다.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쩌면 나의 편견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외로울 때 하나님을 만난 적은 신앙의 초기를 빼고는 별로 없다. 오히려 분주한 때에 더 자주 만나고, 평온할 때에 더 깊게 만난다. 말씀을 깊게 읽으면서 숨을 들이쉬면 나는 고독해지고 이 모든 것들로 부터 거리를 두게 된다. 그리고 전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인간의 자리를 생각한다. 내가 왜 여기 서 있는지, 무엇으로 살고 있는지를 '타자로서 자기자신'이 되어서 생각해본다.
신은 자신을 공백속으로 밀어서
세상을 창조했다
그래서 보이는 세상은 하나님의 뒤로 물러난 결과이다. 보이지 않는 세상 속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우리도 역시 공백속으로 들어가야 하나님을 만난다. 이 세상 속에서는 아무것도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공백'이 발생하지만 그것은 '고독'이며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는 시간이 된다. 공백 속에서 드려지는 은밀한 기도가 결국 우리 존재의 결핍과 부족함을 채우고 다시 보이는 영역으로 나갈 희망과 용기를 준다. 그럴려면 우리는 먼저 이 세상에서 뒤로 밀려나서 공백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뒤로 잠깐 물러나야 한다. 때론 세상에서 비천해지면서, 비겁해보이기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물러남이 오히려 생명을 창조하게 만들고, 새로운 삶의 질서를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되며, 동기가 된다.
외로움과 고독사이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을 내려놓고서는 점점 공백을 만들어가는 삶. 그래서 정글의 기린처럼 엄청난 심장의 크기처럼 누구라도 함께 깃들어 살아갈 수 있는 삶.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도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고 했다. 자기를 부인하면서 주어지는 자유는 고독의 자유이다. 이제 막 광야로 홀로 걷지만 어디로나 갈 수 있는 마음의 자유.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으면서 어디에나 계시는 분과 소통하는 자유. 높은 동산이 아니여도 나즈막한 오르막길에서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자유. 그러한 자유는 고독에서 온다. 이제 공백으로 들어가자. 그 안에 자유롭게 거니시는 하나님을 만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