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읽는 중국현대철학_량수밍과 문화철학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1840년 아편전쟁을 계기로해서 서양에 침탈을 당한다. 먼저는 서양의 눈부신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세련된 무기들에게 당하고, 뒤이어 체계적인 제도의 치밀함에 또 다시 당한다. 결국 서양이 중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동아시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과학의 발전과 민주주의라는 운영체계의 선진적인 완성도에 있었다. 사실 서양은 르네상스부터 계몽주의를 넘어서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꾸준히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왔고, 민주주의사상은 고대 그리스로마부터 그 발판을 만들었고, 종교개혁을 통해서 확장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시대에 따라서 권력의 종류가 달라지듯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한 기술과 제도는 결국 제국주의 시대를 넘어서면 명확하게 국가들의 경계를 갈랐다.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심기일전하여 양무운동과 변법자강운동을 했지만 대부분 실패했고 일본과의 전쟁에서도 패함으로써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난세가 영웅을 만들어 낸다고 19세기 러시아의 문학가들이 그랬듯이 19세기의 중국은 철학자들이 눈에 띄게 많이 등장한다. 과거의 공자가 쓴 '춘추'에서 '개제'라고 하는 제도적 변혁을 추구했던 캉유웨이에서 과학기술을 도입해서 빠르게 부국강병을 시도한 옌프가 있었고 오늘 알아볼 량수밍은 인도와 중국 그리고 서양의 문화를 분석해서 미래를 내다보기 시작했다. 유식학에서부터 시작해서 프랑스의 생철학을 경유해서 다시 유가로 돌아오는 말그대로 '대장정'이었다. 오늘은 서양에서 왜 먼저 과학과 민주주의 먼저 시작되었는지를 분석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펼치는 량수밍의 일대기와 사상 그리고 주장과 이론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량수민은 누구인가
신유학의 개척자: 량수민은 불교를 연구한 뒤 유학으로 전향하여 현대 신유학의 개척자가 되었다.
'동서 문화와 철학' (1921): 이 책에서 동서양 문화를 비교하고, 유학의 보편적 가치를 강조했다.
사상적 특징: 서구 근대 문명의 폐단을 유학의 정신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중국의 형이상학은 변화를 중시한다는 점이 서양이나 인도와 다르다고 주장하며, 서양의 '이지(理智)'와 달리 중국은 '직관(直觀)'을 중시한다고 보았다. 후에는 직관과 이지의 조화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사상을 발전시켰다.
향촌건설운동: 1930년대에 실천적 유학자로서 향촌건설운동에 투신하여 농촌 사회 개혁에 힘썼다.
정치 활동: 중국민주동맹에 참여하여 정치 활동을 했으며, 특히 마오쩌둥과 의견 충돌을 겪는 등 강직한 인품을 보여주었다.
말년: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저술 활동에 전념했고, 1988년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그의 강직함과 굽히지 않는 태도는 오늘날까지 많은 중국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1893년 량수민은 베이징의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양무운동과 변법자강운동이 한 차례 중국을 휩쓸로간 후였기 때문에 량수밍의 아버지는 량수밍을 세계 역사와 지리를 배울 수 있는 신식학교에 보냈고 여기서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받았다. 또래에 비해서 조숙했던 량수밍은 어질적부터 사회문제에 관삼이 많았고 중학교 재학시절부터 쑨원과 함께 중국동맹회 베이징-톈진 지부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국민당의 분열에다가 혁명의 실패, 어머니의 죽음은 그를 자살로 내몰았다. 삶의 문제에 깊게 천착하면서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다루기 시작했고 이것을 벗어나는 길을 찾다가 '유식학'을 독학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더불어서 량수밍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서양서적, 특히 베르그송의 저작을 탐독했다. '으뜸의 진리를 탐구하고 의심을 해결하는 글'을 1916년에 발표하면서 베이징대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불과 24세에 베이징대학 교수가 되었던 량수밍은 불교철학과 인도의 철학을 강의했다. 그러나 국가적인 위기와신문화운동의 영향으로 사회문제에 다시 집중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불교에서 유학으로 사상적 전회를 겪게 된다. 이전까지는 동서양의 문화를 비교하는 데 집중했다면, 유학사상의 보편적 가치를 시대의 가치로 적용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게 된다. 그 결과 1921년 유학과 불교 그리고 서양철학을 비교한 '동서문화와 철학'이 발표된다. 1년에 다섯차례나 재판되고 관련된 논문만 100편이 넘을 정도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서양의 철학을 수용하기는 하지만 결국은 유학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덕분에 후대는 량수민을 신유가의 개척자로 불렀다.
량수밍은 자신의 사상체계에서 유학을 실천적인 모습으로 발전시킨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학은 이전의 유학과 달랐다. 그의 실천방식은 '농촌'이었다. 후에 농민에 대한 주체의 문제로 모택동과도 대립하는데, 량수민은 공자의 고향인 취푸에 전통유학 교육기관을 세우려고 노력했다. 또한 향촌운동을 통해서 전통 유학정신을 계승하면서도 서구 근대사회의 장점도 수용한다. 량수밍은 국민의 대다수는 농민이고, 이들이 결국은 그들의 삶 속에서 중국을 새롭게 바꿀 주체가 된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민주적 자치능력을 배양하기 위해서 향촌자치운동을 시작했고, 1931년부터 1936년사이에는 산둥 쩌우핑현에서 대규모 향촌건설운동을 하게 된다. 량수밍의 철학에 맞게 기존의 농촌사회에서 근대적인 생산기술을 통해서 발전을 이루었고, 이에 더해 중국적인 윤리의식을 잃지 않으면서 근대적 의식을 두루 갖춘 공동체로 발전하였다.
이후 량수민은 혁명활동과 정치활동을 함께 하면서 마오쩌둥과 만나게 되었다. 이른바 911이라고 하는 1953년 사건 이후 마오쩌둥에게 반동분자로 몰리게 되었다. 이후 문화대혁명 시기에 마오쩌둥의 홍의병들에게 갖은 고쵸를 당했지만, 공자를 비판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꾸준히 지켜왔다. 1949년 '중국문화요의'를 간행하기도 했고, 1986년에는 '동방학술개관'과 '인심과 인생'을 집필하면서 연구를 놓지 않았다. 마침내 등소평 이후 개혁개방의 시대가 열리면서 량수밍의 사회적 지위는 회복되었다. 역사의 흐름을 온 몸으로 겪으며 중국의 문화와 철학에 대한 연구를 놓지 않았떤 량수민은 1988년에 베이징에서 9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앞으로 살펴볼 량수밍의 철학은 이러한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중국의 것'을 지키고 '서양의 해석'하는 대장정의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마오쩌둥과 량수밍의 관계
초기: 지적 교류와 협력적 관계 (1930년대 ~ 1940년대)를 유지하며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다. 량수밍과 마오쩌둥은 모두 중국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량수밍은 '향촌건설운동'을 통해 농촌 사회를 재건하고 유교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마오쩌둥 역시 혁명의 주요 기반을 농민 계급에 두었다. 따라서 초기에는 서로 같은 비전을 가지고 출발했다.
옌안에서의 만남: 1938년 량수밍은 옌안을 방문해 마오쩌둥과 여러 차례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다. 마오쩌둥은 량수밍의 지식과 신념을 높이 평가했고, 량수밍 또한 공산당이 농민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이 시기 두 사람은 서로에게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치적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관계의 전환: 1953년 '9.11 사건'이후 관계가 바뀌게 되었다. 1953년 9월,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량수밍은 농민들이 도시 노동자들에 비해 불공평하게 대우받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농촌과 도시 간의 격차가 '아홉 개의 하늘과 한 개의 땅(九天九地)'만큼 크다고 비판했다. 그는 공산당이 혁명 과정에서 농민들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잡은 후에는 농민들을 소외시키고 도시와 공업 발전에만 집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의 격분: 마오쩌둥은 이 발언을 당의 총노선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량수밍의 주장이 농민과 노동자 계급 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반당(反黨) 행위'라고 규정하며 맹렬하게 비판했다. 마오쩌둥은 량수밍의 발언을 '농민을 이용해 인기를 얻으려는 비열한 행동'이라고 비난했으며, 공개 사과를 요구했다.
결말: 량수밍은 마오쩌둥의 비판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마오쩌둥의 요구를 거부하고 자신의 논리를 옹호했으며, 이는 마오쩌둥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여겨졌다. 이 사건 이후 량수밍은 27년동안 정치적 활동에서 배제되었고, 이후 문화대혁명 시기에 홍위병으로부터 비판과 탄압을 받았다. 그는 마오쩌둥 체제에 순응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지식인 중 한 명으로 남게 되었다.
1910년대부터 시작된 신문화운동은 중국의 변화를 위해서 서양의 과학과 민주주의를 받아들이자는 주장이 핵심이다. 량수밍은 신문화운동에 동의하면서도 더 나아가서 '어째서 서양에서 과학과 민주주의가 생겨났으며, 중국은 그렇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한 대답이 결국 서양문화와 동양문화의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낼 것이며, 중국이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었다. 중요한 건 '문화'의 개념이다. 문화란 한 민족의 생활의 양식이고 생활이란 생명체가 살아가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결국 '생명운동'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생명활동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문화를 만들어 낸다. 우주 전체는 하나의 생활이며 우주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주는 다자의 연속이며 일자의 개념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명은 지속한다. 그러므로 생명활동도 지속한다
량수밍의 이러한 사상은 우주적 차원의 존재론을 설명한 프랑스의 생철학자 베르그송의 '생명과 지속'개념을 활용한 것이다. 또한 불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 세상에는 중생이라는 무수한 생명체들의 끊임없는 활동만 있다. 량수밍에게 우주는 없다. 활동만 있을 뿐이다. 거시적인 우주적 관심에서 미시적인 '나'의 존재론으로 돌아오면 량수밍은 '유식학'을 적용한다. 유식학이란 일체의 모든 현상이 마음에서 비로소된다고 보는 철학이다.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일어난다. 인간은 '이전의 나'에 대해서 계속해석 '현재의 나'로 인식하면서 변화를 만들어 낸다. 그 핵심은 인식의 주체로서 '마음'이다. 현상학에 대한 해석학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 살아온 나는 현상 속에 살았지만 현재 나는 그 과거를 계속해서 마음을 통해서 해석해야 한다. 유식학에서는 물질현상을 내 마음이 구성한 것으로 보았고, 현재는 것을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활동 이면에는 인간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불교의 관점을 유지하고 있는 량수밍은 문화가 가진 좋은 방향에 대한 기대보다는 인간이 가진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면 현실에서 내가 발딛고 서 있는 중국이라는 컨텍스트는 의미가 없어진다. 따라서 서구열강과 일본의 침략으로 쇠퇴해진 중국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여전히 생활을 해야 하며, 문화적으로도 더 나은 성취를 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량수밍은 인간이 생활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태도를 3가지로 정리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가 결국은 인류의 3대 문화의 근본정신으로 발전하게 된다.
량수밍의 생활문제를 해결하는 3가지 방식
자신이 욕구하고 욕망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애쓰는 태도. 어떤 문제에 봉착하면 앞을 향해 나가아면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개조함으로써 욕망을 달성한다. 이것을 생활의 본래적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상황에 맞추어 재설정하는 태도. 문제가 생기거나 달성하지 못하면 자신의 욕망을 현실에 적용하여 조정하는 바업이다. '의욕의 조화'ㄹ르 통해서 문제를 해결한다.
자신의 욕망하는 것을 없애버리기. 어떤 것을 문제삼기 위한 생각 그 자체를 안하는 것을 말한다. 생활의 본성에는 가장 위배되는 방식이다.
3가지 방식이 나오게 된 원인
세 가지의 방식은 근본 문제들을 다른 방식으로 보기 때문에 달라진다.
첫번째 원인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투쟁의 문제이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자연과의 투쟁을 시작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편안함과 안락한 삶을 위해서 자연을 쟁취하여 욕망을 충족시킨다.
두 번째 원인은 인간과 인간의 사이의 소통의 문제이다. 인간에게는 상대방과의 교감이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이는 욕망의 중요한 부분 중에서 하나이다.
세번째 원인은 '나' 자신의 죽음의 문제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게 바련이고 이를 싫어하는 인간의 욕망은 종교를 만들어서 죽음을 초월하려고 한다.
신문화운동의 특징
신문화운동은 1910년대 중반부터 1920년대에 걸쳐 중국에서 일어난 반전통적, 서구 지향적 지적·사회적 개혁 운동이다. 이는 청 왕조가 멸망한 후에도 중국 사회의 근대화가 더디게 진행되자, 그 원인을 전통적인 사상과 문화에서 찾으며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유교 사상을 중심으로 한 봉건적 질서를 비판하고, 과학과 민주주의를 중국 사회의 새로운 정신적 기둥으로 삼았다. 특히 베이징대학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은 잡지 '신청년(新靑年)'을 통해 전통적인 가치관과 관습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상을 확산시켰다.
또한, 소수 지배층만 사용하던 고전 문어체인 고문(古文)을 폐지하고, 대중이 일상적으로 쓰는 백화문(白話文)의 사용을 주장하여 지식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이는 단순히 언어 개혁을 넘어, 사회 전체의 의식을 근대적으로 바꾸고자 한 중요한 시도이다. 이 운동은 이후 중국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량수밍은 생활문제를 해결하는 3가지의 태도를 각각 서양, 중국, 인도의 문화차이로 설명한다. 량수민은 '동서문화와철학'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서양의 문화는 의욕의 전진적인 요구를 근본정신으로 한다. 중국의 문화는 의욕이 스스로 조화와 중용을 유지하는 것을 근본정신으로 한다. 인도 문화는 의욕이 자신에게로 돌이켜 물어나는 것을 근본정신으로 한다.' 인도문화의 근본정신은 '불교의 정신'이다. 불교의 눈으로 보면 의욕은 집착이고 언젠가 사라지는 허무한 것들이다. 이러한 인도문화는 앞으로 나아가는 속성을 지닌 의욕을 절제하는 불교의 근본정신을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량수밍이 보기에 중국 문화는 유학의 정신이다. 유학은 '나'의 욕망 추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조화와 균형을 맞추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인도문화와 중국의 문화는 물질적 욕망이 어느정도 충족된 상태에서 드러나면 매우 좋은 문화로 발전할 수 있다. 인도의 문화는 종교적으로 구원을 얻는 문화로 발전되며 중국의 문화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인도와 중국의 문화는 성숙하지 못한 상태였고, 그 과정에서 이미 과학과 민주주의로 한참 전진을 한 서양의 침략에 무방비하게 무너졌다. 량수밍이 보기에 아편전쟁과 청일전쟁과 같은 외세의 침략에 중국이 무너진 이유는 문화가 충분히 발전하지 못하여서고, 이러한 문화를 제대로 발전시키면 결국은 서양의 침략에 대비하여 중국만의 독특한 문화로 번영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는 것이었다.
서양은 자연과 투쟁하는 '전진'의 문화였다
서양의 역사를 살펴보면 서양은 그리스 로마시대에 첫번째 방향인 '전진'으로 나아갔다가, 중세에는 욕망을 없애버리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이 과정에서 문화의 발전이 둔화되거나 후퇴하였지만 르네상스는 다시 '전진'의 방향으로 돌아왔다. 이런 서양의 문화를 전체적으로 보면 앞으로 나아가는 전진의 의욕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문화였다. '나'를 위해서 전진하는 문화에서는 곧 자연과 맞닥드리게 되는데, 자연과 자신을 대립시킨 결과는 거기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서도 대립과 전진을 추구하게 되었다. 서양은 자신을 위해서 자연을 정복했고, 객관화 했으며, 결국 과학과 민주주의를 낳게 된다. 전진적인 의욕의 결과물이 바로 민주주의와 과학인 것이다. 서양의 정신은 '전진'하는 욕구를 충족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와 과학을 발전시킨 것이다.
량수민은 이러한 관점에서 중국은 과학과 민주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야기는 관계를 중시하는 중국문화에서 부족한 전진의 힘으로 역사를 추동하기 위해서 필요한 과학과 민주주의가 있어야 부국강병을 이루며 세계무대에서 중국을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서만 그치지 않고 서구문명이 가진 문제점에 집중해서 수정을 거듭하면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문화는 언제나 발전하고 움직이는 것이고, 고정되지 않은 혹은 완성되지 않은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과도기'적인 문화를 해석해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수정할 것은 수정해야 했다. 이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옌프의 번역의 문제나, 캉유웨이의 '개제'의 논리와 같이 현실의 문제를 자각하면서도 중국의 문화에 도움이 되는 대안들을 차용한 태도로 볼 수 있다. 전통을 받아들이면서도 '온고이지신'하면서 근대화를 이루자는 논리이다.
서양의 합리주의가 아니라 베르그송의 생철학이다
량수밍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비판한 마르크스주의를 주의깊게 보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러한 비판이 가능해지는 '생철학'에 집중한다. 서구의 문화는 합리주의 전통을 통해서 우리를 한낱 계산에 의해서 이용되기를 기다리는 물질로 취급하면서 다양한 사회문제와 인간 내면의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나 베르그송과 같은 프랑스의 생철학자들은 이것을 '생명과 지속'의 관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했다. 이렇게 본다면 '관계'를 중시하는 중국 문화는 앞으로 '세계 문화'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고 본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전진'의 문화에서 결국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조화와 균형을 중시하는 문화로 발전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중국이 이미 가지고 있었던 문화라는 것이다. 그래서 량수민은 3가지의 태도를 제시한다.
량수민이 제시한 문화적 태도 세가지 원칙
첫째, 인도적인 태도를 배격하여 추호도 용납해서는 안된다. 아직은 후퇴가 아니라 전진이다. 추후에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둘째, 과학과 민주주의가 기반이 된 서양 문화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되 그 태도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문제를 고쳐야 한다. 생철학적인 관점에서 직관을 발전시켜야 한다.
셋째, 중국이 원래 지닌 태도인 '조화와 균형'의 관계론적 태도를 비판적으로 다시 가져와야 한다.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여서 융합시켜야 한다.
이제 량수민이 집중한 생철학의 관점에서 형이상학과 인식론을 다루어보자. 량수밍은 중국 문화의 핵심이 형이상학이 있되, 그것은 서양이나 인도의 성격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다. 서양이나 인도는 언제나 '불변하는 궁극적인 실재'를 다루는 반면, 중국은 '변화'의 문제를 주로 다루었다고 본다. 중국인은 전통적으로 생명의 눈으로 우주와 자연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주역'과 같은 고전에서는 '생명의 생산과 재생산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설명한다는 것이다. 서양의 관점에서는 고정된 실체를 분석하기 위한 이지적인 접근과 명료한 개념적 정의가 가능하다. 그러나 중국의 관점에서는 우주를 쉼 없이 흐르는 생명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끝없는 변화를 보기 위해서는 '이지'가 아니라 '직관'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직관의 개념은 베르그송의 생철학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베르그송 철학의 특징, '창조와 진화'
예측 불가능성 : 베르그송은 진화가 미리 정해진 목적이나 법칙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진화가 마치 예술가의 창작 활동처럼, 새로운 형태와 방향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예측 불가능한 과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다윈의 자연선택설이 환경에 대한 수동적인 적응으로 진화를 설명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생의 약동(Élan vital) : 베르그송은 진화의 원동력을 생명체 내부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충동, 즉 '생의 약동'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는 생명을 단순히 물리화학적 법칙으로 환원하려는 기계론적 관점에 반대하며, 생명체를 외부 환경에 의해 수동적으로 조종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펼쳐나가는 능동적인 힘의 발현으로 이해한다. 이는 스피노자의 존재하려고 하는 존재의 욕망인 '코나투스' 개념을 발전시킨 것이다.
의식과 물질의 분화 : 베르그송에 따르면, 생의 약동은 하나의 근원적 흐름에서 출발하여 서로 다른 두 방향으로 진화한다. 하나는 물질 세계를 형성하는 습관과 정지된 형태의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동물과 인간의 의식을 만들어내는 방향이다. 이 두 방향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력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 결과라고 보았다. 그러나 시작은 바로 '물질'이다. 물질은 그 자체로 진화의 가능성을 불가능성을 포함해서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물질의 특징이 바로 '지속'이고 이후 들뢰즈의 의해서 물질들의 '차이와 반복'에 따라서 새롭게 우주는 생성되고 소멸한다고 보게 된다.
량수민이 제시한 인식론의 방식 3가지
현량(現量) : 현량은 감각이다. 다시 말하면 현량은 논리적 과정을 거치지 않는 직관적인 인식의 일종으로서 감각이다. 량수밍은 이것을 베르그송의 직관(直觀)과 같은 개념으로 보았다. 이는 사물의 본질이나 생명의 역동적인 흐름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통찰력으로, 중국 문화가 윤리와 관계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현량은 반쯕은 객관적이고 반쯕음 주관적이다.
비량(比量) : 비량은 이지이다. 같은 점은 종합하고 다른 점은 분석하여 통일적인 의미를 갖게 만든다. 비량은 논리적 추론과 이성적 분석을 통한 인식이다. 량수밍은 이것을 베르그송의 지성(知性) 개념과 유사하게 보았다. 비량은 감각적 경험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능력으로, 서양 문화가 과학 기술을 발전시켜 물질을 정복하는 데 사용한 주요 도구이다. 비량은 직관의 측면에서 보면 주관적이다.
비량(非量) : 비량은 전체로 아우리는 의미를 찾는다는 측면에서 직관을 이야기한다. 비량은 잘못된 인식을 의미하며, 올바른 지식으로 간주될 수 없다. 이는 사물이나 현상을 잘못 파악하거나, 오류가 있는 추론을 통해 얻은 결과를 말한다. 량수밍은 올바른 판단을 위해서는 현량과 비량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지성에 의존하는 비량의 한계를 강조하며, 유일한 인식 방법으로 비량만을 고집하는 것이 잘못된 결론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량수밍은 이러한 직관의 방식을 '동서문화와 철학'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서양의 생활은 직관으로 이지를 운영하는 것이다. 중국의 생활은 이지로 직관을 운용하는 것이다. 이녿의 생활은 이지로 현량을 운용하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직관으로 인식하는 서양의 정신은 르네상스시기부터 먼저 자아와 자아의 의욕을 각성한 후에 이지라는 개념으로 자연을 정복했고, 과학과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 중국인도 역시 직관을 사용해서 이지를 운용하기는 했지만 자아를 인식하는 직관 이후에 타자와의 분별 즉 이지를 사용했다. 문제는 그것을 대립으로 놓지 않고 '조화와 균형'으로 놓았기 때문에 타자와의 차이점을 기반으로 소위 말하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발전시킨게 아니라 타자와의 합일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주의를 발전시킨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중국의 공동체주의를 버리지 말고 오히려 세계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미래로 갈 것이기 때문에 서양의 과학과 민주주의를 적절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인식론의 관점에서 '직관'이 가장 중요하다
량수밍은 중국의 공자와 맹자, 왕양명 및 양명 후학 중 태주학파가 직관적인 인식론을 중시했다고 보았다. 그러니깐 캉유웨이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직관'을 기준으로 참고점인 레퍼런스 포인트를 잡은 것이다. 공자는 그런 측면에서 보면 '변화'하는 실체에 대해서 직관을 사용해서 시시비비를 가리고 맹자는 측은지심의 감정을 발전시켰다. 모든 것을 판단했지만 측은한 마음이 결정의 근거가 되도록 만든 것이다. 왕양명이 이야기하는 '양지'도 역시 본능적인 직관이었다. 왕양명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는 '양지'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보았고 실제로 사물을 접했을 때 이지를 통해서 양지가 발현된다고 보았다. 같은 측면에서 공자의 '인'의 개념도 '어진 행위'에 대한 직관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평안해지기를 바라는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한 지점이다.
결국 중국인은 이미 '직관'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으로 타자와의 합일을 추구했기 때문에 과학과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연이 자신과 하나이고 다른 사람이 자신과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캉유웨이와는 다른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인다. 직관에 대한 예찬은 그가 비판했던 서양의 '전진'하는 문화가 만든 과학과 민주주의를 수용하는 문제에서 맞이한다. 그래서 량수민은 후에 직관과 이지의 대립을 이성과 이지의 개념으로 대체했고 이것들의 화해 가능성을 모색한다. 일종의 직관을 도덕이성으로 보면서 도덕감정과 직관을 모두 포함하게 된다. 이지는 그런 면에서는 도구적 이성이 된다. 그리고 유식론에서 말하는 '마음'으로 다시 돌아와서 도덕적 이성과 도구적 이성이 서로 조화를 추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중체서용은 유식론의 관점에서
마음의 체가 되고 과학과 민주주의가 용이 된다
도덕적 이성을 '체'로 삼되, 도구적 이성을 '용'으로 삼아서 이 두가지를 유식론의 관점 다시 말하면 '마음'의 관점에서 통합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중국인들은 이런 측면에서 전통적으로 이지인 '도구적 이성'만 발달한 서양문화와 다르게 '도덕적 이성'으로 이미 사회와 개인을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이 두가지를 조화롭게 사용하면 더 발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후 2세대 현대 신유학자로 불린 허린은 이러한 량수밍의 직관개념에 대해서 '중체서용론'을 버리지 못한 학자로 평가받기도 했고, 직관개념이 완전한 '진리'차원에서 인식론 전체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중국이 헤처나갈 미래의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실천적인 향촌운동이나 사회운동을 몸소 보여줬다는 점에서, 자신의 신념을 역사적인 외압 속에서도 굽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칭송받아 마땅하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 역시 중국의 근대화와 같은 문제를 겪었다. 서양의 근대화에 대한 해석과 번역이 곧 미래에 어떤 태도를 취한것인지를 결정했다. 위정척사운동이 한창이었는가 하면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이 등장했고, 임오군란 같은 군대의 개혁 에피소드도 있었다. 결국 한국보다 더 빨리 개화에 성공한 메이지유신의 지사들은 '대동아공영권'을 마음에 품고 대한제국을 넘어서 청나라까지 넘어갔다. 근대화에 대한 대응이 가져온 결과는 그 이후 근 100년을 결정하는 일이었다. 중국철학을 공부하다보니 변환의 시기에, 전환기에 어떤 결정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생긴다. 량수밍처럼 해야할까? 과거로부터 레퍼런스 포인트를 잡고? 아니면 옌푸처럼 과학기술을 빨리 받아들여서 일단은 부국강병을 이루어야 할까? 그도 아니면 캉유웨이처럼 공자로 돌아가서 제도 설계를 다시해야할까? 끊임없는 고민이 해소되지 않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다른 이들의 이론들도 살펴보려고 한다. 오늘은 량수밍의 유식론과 문화의 구분 그리고 그의 대안에 대해서 곱씹어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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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轉依)
전의는 번뇌를 소멸시키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수행의 과정이다. 이는 번뇌가 얽힌 마음을 청정하게 바꾸어 깨달음의 마음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식학은 전의를 통해 번뇌의 근원인 '유위법'에서 해탈의 경지인 '무위법'으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삼성(三性)
삼성은 모든 존재와 현상을 인식하는 세 가지 방식이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실체가 없는 대상을 실재한다고 착각하는 망상적인 인식이다. 예를 들어, 어두운 방에서 밧줄을 뱀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
의타기성(依他起性): 모든 현상이 다른 조건에 의존하여 발생한다는 인식이다. 이는 모든 것이 인연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원성실성(圓成實性): 번뇌가 소멸된 후 깨달음을 통해 얻게 되는 완전하고 참된 실재에 대한 인식이다. 이는 의타기성에서 망상적인 요소를 제거한 궁극적인 진리의 경지이다.
삼무성(三無性)
삼무성은 삼성을 공(空)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세 가지 무자성(無自性)의 개념이다.
상무자성(相無自性): 변계소집성의 대상은 본래 존재하지 않으므로 스스로의 성품이 없다.
생무자성(生無自性): 의타기성은 여러 조건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므로 고유한 성품이 없다.
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 원성실성은 궁극적인 진리이지만, 그 자체로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번뇌가 사라진 상태를 의미하므로 절대적인 자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공(空) 사상을 반영하는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