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식하는 자본주의_낸시프레이져X라헬예기
낸시프레이저가 오랜만에 책을 냈다. 물론 번역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한국에 나온지 얼마 안되는 '포식하는 자본주의'라는 책으로 일요일 아침마다 스터디를 시작했다. 악셀호네트의 제자인 라엘 예기와 비판주의 전통에 있는 낸시 프레이저의 대담집 '포식하는 자본주의'는 현대 자본주의가 직면한 복합적인 위기를 구조적, 윤리적 차원에서 날카롭게 해부하고 있다. 낸시 프레이저는 자본주의가 생산-재생산이라는 본질적인 삶의 구조 위에 있는 인간-자연, 정치-경제라는 네 가지 본질적인 경계 분할 위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비상품화된 토대들을 착취함으로써 자기 포식적(self-devouring) 속성을 구조적으로 규명한다. 이와 다른 결에서 라엘 예기는 자본주의가 개인의 '삶의 형식(Form of Life)'을 왜곡하고 소외(Alienation)를 심화시킨다는 윤리적 비판을 제기한다. 이들의 통찰은 자본주의의 단순한 개혁을 넘어, 위기의 근본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적 대안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런 '대화'를 담은 책이다.
이 글은 먼저 두 학자가 제시한 자본주의 비판의 핵심 논지를 심층적으로 검토하고, 전통적 개혁 방안인 사회적 자유주의가 가지는 근본적인 한계를 명확히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사회적 자유주의의 안정화 기능 위에 커먼즈의 새로운 소유 및 생산 양식을 제시한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하나로 모아보는 첫 번째 발자국이다. 이어서 협력적 거버넌스를 만들기 위해서 민주적 통제 메커니즘을 통합하는 '시민적 재생의 헤게모니'라는 혁신적 이념을 제시할 것이다. 이 모델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과 인간적 병리를 동시에 해소하는 통합적이고 재생적인 사회-경제 질서를 모색하는 것이 핵심이다. 포식하는 자본주의로 시작했지만 그 대안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이다.
'포식하는 자본주의'는 현대 비판 이론의 대표적인 두 학자인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와 라엘 예기(Rahel Jaeggi)의 대담을 중심으로 구성된 책이다. 이 책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심화된 자본주의의 다차원적 위기를 진단하며, 자본주의가 경제적 불평등을 야기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의 생존 기반을 훼손하고 개인의 삶의 의미까지 파괴하는 '포식적(Cannibalistic)' 체제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두 학자는 각자의 이론적 관점(프레이저의 구조적 비판과 예기의 윤리적 비판)을 교차시키며, 자본주의 비판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과 체제 변혁적 대안의 필요성을 논의 한다. 특히 라엘 예기는 프랑크푸르트학파 4세대로 일컬어지며 3세대의 대표주자인 악셀호네트의 제자이다. 그리고 악셀호네트와 '인정이냐 지위냐'로 싸웠던 낸시프레이져는 그 결에 있어서는 비판학파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현상에 대한 진단이면서 비판학파의 미래를 점칠 수 있는 대화가 주된 핵심이다.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 중 하나는 낸시 프레이저가 제시하는 자본주의 비판 영역의 확장이다. 프레이저는 자본주의를 단순히 생산 영역에 국한하지 않고, 비경제적 토대들까지 포괄하는 '제도화된 사회 질서'로 개념화한다. 그녀는 자본주의가 자체로 유지되기 위해 필수적인 ① 사회적 재생산(돌봄 노동), ② 비인간 자연(생태계), ③ 공적 권력(정치/국가)이라는 영역에 자본주의가 무임승차하고 더 나아가서 이를 침탈함으로써 자기 파괴적 위기를 초래한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는 경제적인 영역에만 자본주의 비판이 이루어졌고 오히려 그것이 경제적인 영역에 대한 자본주의의 비판을 막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낸시프레이저는 경제적 착취뿐만 아니라 젠더, 인종, 생태, 정치적 위기를 거론하고 그와 더불어 발생의 원인이 되는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를 통합적으로 설명하는 구조적 비판의 틀을 제시한다.
또 다른 이 책의 중요한 특징은 라엘 예기의 관점을 통해 자본주의 비판에 윤리적이고 철학적 깊이를 더한다는 점이다. 예기는 자본주의가 단순히 경제적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삶의 형식(Form of Life)' 자체를 왜곡하고 병들게 만든다고 진단한다. 책의 초반에 예기는 루카치의 물화 개념을 재해석한다. 자본주의가 소외(Alienation)를 통해 인간이 자신의 삶과 사회에 대해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 것을 방해하며 주체성을 상실하게 만든다고 지적하지만, 사실 '물화'가 모든 영역에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생태와 인종, 젠더와 같은 부분을 '물화'라는 개념으로만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따른다. 그런데 이렇게 설명해 버리면 '정합성'을 잃어 버리고, 결국 원인과 결과라는 흐름도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예기는 자본주의 비판의 초점을 구조적 모순뿐 아니라 개인의 실존적이고 규범적 위기로까지 확장시키는 것이다. 물화로 퉁치지 않고 물화되지 않은 삶과 자본주의에 영향을 받은 삶의 방식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이 책은 자본주의와 그에 대응하는 운동들에 대해서 비판에 머무르지 않고 총체적인 대안 모색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두 학자는 자본주의의 다층적 모순에 맞서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계급투쟁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본다. 프레이저는 네 가지 경계를 둘러싼 분열된 투쟁들(페미니즘, 생태주의, 반인종주의 등)을 '경계투쟁(Boundary Struggles)'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연합된 투쟁을 통해 자본주의적 질서에 맞서는 '대항 헤게모니'를 구축하고, 민주적이고 지속 가능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실천적 전략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전에 펴냈던 책 '좌파의 길'에서 자세하게 다루었다. 사실은 이 책의 원래 이름은 '식인 자본주의'이다.
예기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소외 개념을 확장하여, 현대 자본주의에서 소외를 '자기 세계와의 관계 실패'로 규정한다. 자본주의적 경쟁과 복잡한 시스템 속에서 개인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를 이해하거나 통제할 수 없게 되며, 이는 실존적 위기와 무력감을 심화시킨다. 인간 관계가 수단화되고 공동체적 유대가 파괴되는 현상은 단순히 경제적 문제가 아닌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예기는 자본주의를 특정한 사회적 병리를 내재한 삶의 형식으로 규정하며, 이 병리는 체제가 스스로 이상으로 내세우는 자유, 평등, 민주적 참여와 실제 현실 사이의 규범적 괴리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는 스스로가 수립한 정의의 기준을 위반함으로써 내재적 모순(Immanent Critique)을 야기한다. 그녀의 비판은 이 윤리적 실패를 지적하며 체제 변혁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다. 예기의 비판은 소외 극복을 위한 정치적 주체성의 회복을 지향한다. 소외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개인이 단순히 시스템에 적응하는 것을 넘어, 사회 문제 해결 과정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자기 세계와 건강한 관계를 맺는' 능동적인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적 경험을 통해 개인은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수동적인 존재 방식을 탈피하는 것이다.
라엘예기의 루카치 비판
라엘 예기(Rahel Jaeggi)는 게오르그 루카치(György Lukács)의 물화(物化, Reification) 개념이 자본주의 비판에 중요함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제시한 물화의 해소 방식과 철학적 전제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다. 예기는 루카치의 개념이 지닌 형이상학적이고 구원론적인 측면을 극복하고, 물화 비판을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기는 루카치가 물화를 단순한 경제 현상이 아닌, 사회적 삶 전체와 인간의 의식 형태를 왜곡하는 총체적 현상으로 파악한 점을 계승한다. 그러나 루카치가 물화를 자본주의의 '본질'에서 벗어난 '타락한' 상태로 보고, 프롤레타리아 계급 의식을 통해 물화를 궁극적으로 해소할 수 있다고 본 구원론적(soteriological) 전망을 비판한다. 예기는 이러한 루카치의 접근이 현실에서의 물화가 지닌 복잡하고 지속적인 성격을 간과하게 만들며, 헤겔적 형이상학의 잔재를 담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루카치는 자본주의적 물화로 인한 사회의 파편화에 맞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을 통해 객관적이고 단일한 사회적 전체성(Totality)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예기는 이러한 객관적 전체성 대신, 물화와 소외를 '자기 세계와의 관계 실패'라는 주관적이고 실천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예기에게 중요한 것은 단일한 객관적 진리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삶의 형태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통해 세상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 '삶의 총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예기는 루카치가 물화를 객관적 구조의 문제로 주로 다룬 것과 달리, 물화 비판의 초점을 인간의 '삶의 형식(Form of Life)'이 병들거나 왜곡되는 윤리적·병리학적 문제로 전환한다. 예기에게 물화는 개인의 자율성, 관계 맺는 능력, 가치 판단 등 삶의 규범적 측면이 손상되는 현상이다. 따라서 비판은 물화된 객관적 현실을 폭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병리적인 삶의 형식을 극복하고 건강한 사회적 관계를 회복하는 실천적인 변화에 맞춰지는 것이다.
루카치는 프롤레타리아 의식이라는 역사적 주체에 기반하여 자본주의를 비판했지만, 예기는 루카치로부터 계승한 내재적 비판(Immanent Critique)을 루카치의 구원론적 전제 없이 사용한다. 예기는 자본주의가 스스로 표방하는 자유와 평등 등의 가치와 현실 사이의 모순(괴리)을 폭로하는 데 집중하며, 이를 통해 비판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본다. 이는 특정 계급의 역사적 역할에 의존하기보다, 체제 내부의 윤리적 실패를 지적하는 더욱 규범적이고 실천적인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프레이저는 자본주의를 비경제적 토대까지 포괄하는 '제도화된 사회 질서'로 개념화한다. 그녀는 자본주의가 사회적 재생산(돌봄), 비인간 자연(생태계), 공적 권력(정치)이라는 영역을 외부의 것으로 설정하고, 이들의 필수적인 유지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서(무임승차) 무한 축적을 추구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자기 기반을 파괴하는 구조 때문에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다층적 위기를 내포하는 자기 포식적 체제가 되는 것이다.
프레이저는 사회적 재생산 영역에 대한 자본의 착취를 중시한다. 자본은 노동력을 저렴하게 재생산해야 하지만, 돌봄 노동(주로 여성, 유색 인종이 수행)에 대한 공적 투자를 최소화하여 돌봄의 위기(Care Crisis)를 초래한다. 또한, 수탈(Expropriation) 개념을 통해 식민주의와 인종차별이 자본주의 축적에 본질적이었음을 밝히며, 젠더와 인종 문제를 계급 투쟁의 핵심 의제로 통합하는 것이다.
자본의 글로벌화는 민주적 통제력(정치)을 약화시키고 국가를 시장 논리에 복종시켜 민주주의의 정당성 위기를 심화시킨다. 프레이저는 이러한 구조적 모순에 맞서기 위해, 분열된 투쟁들(페미니즘, 생태주의, 반인종주의 등)을 '경계투쟁'으로 통합하여 대항 헤게모니 블록을 형성해야 한다는 전략적 대안을 제시한다. 이는 자본주의를 총체적으로 변혁하기 위한 정치적 지침이 되는 것이다. 그럼 이러한 논의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확장된 자본주의 개념과 구조적 위기론
프레이저는 자본주의를 단순히 경제적 생산 영역에 국한하지 않고, 비경제적 토대들까지 포괄하는 ‘제도화된 사회 질서(Institutionalized Social Order)'로 확장하여 개념화하는 것이다.
그녀는 자본주의가 사회적 재생산(돌봄 노동), 자연, 공적 권력(정치)이라는 네 가지 영역을 자신의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착취(무임승차)함으로써 자기 포식적(self-devouring) 위기를 초래한다고 분석한다.
이는 위기가 일시적 현상이 아닌 자본주의 구조 자체에 내재된 내재적 모순에서 비롯된다는 구조적 위기론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분배-인정-재현의 다차원적 정의론
프레이저의 정의론은 초기에는 '분배(Redistribution)'와 '인정(Recognition)'의 이중 개념으로 출발했다가 이후 '재현(Representation)' 또는 '참여의 평등(Parity of Participation)'을 추가하여 다차원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녀는 경제적 불평등(분배)뿐만 아니라 문화적 오인정(인정), 그리고 공적 토론과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되는 정치적 문제(재현)가 모두 정의의 위협이라고 본다.
특히 '참여의 평등'은 모든 성인이 동등한 지위에서 사회생활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의미하며, 이것이 정의의 궁극적인 기준이 되는 것이다.
페미니즘적 비판 이론의 심화
프레이저의 철학은 페미니즘적 관점을 비판 이론의 핵심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그녀는 사회적 재생산 영역에 대한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가 젠더화된 노동에 어떻게 의존하며 유지되는지를 폭로한다.
즉, 돌봄 노동이 비상품화되고 저평가됨으로써 자본이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착취(exploitation)를 넘어 수탈(expropriation) 개념을 도입하여 인종과 성별에 따라 차별적으로 이루어지는 자본의 침탈 과정을 드러내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정치적 개입으로서의 '대항 헤게모니' 전략
프레이저는 자신의 비판 이론이 단순히 학문적 분석에 머무르지 않고 정치적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녀는 자본주의의 다층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투쟁들, 즉 계급투쟁, 페미니즘 투쟁, 생태 투쟁, 민주주의 투쟁 등을 통합하는 '경계투쟁(Boundary Struggles)'을 주장한다.
이 투쟁들의 연합은 자본주의적 질서에 맞서는 '대항 헤게모니(Counter-Hegemony)'를 구축하여 근본적인 사회 변혁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규범적 이중 관점(Dual-Perspective)의 활용
프레이저는 사회 분석에서 규범적 이중 관점을 활용하는 특징을 보인다.
한편으로는 참여의 평등이라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정의의 기준을 제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기준을 바탕으로 자본주의가 스스로 표방하는 자유와 평등의 약속을 어떻게 위반하고 있는지를 폭로하는 내재적 비판(Immanent Critique) 방법을 사용한다.
이러한 접근은 기존 체제 내부의 모순을 활용하여 비판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새로운 규범적 이상을 제시하는 비판 이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름대로 대안을 찾아본다면 어떻게 해볼 수 있을까? 여기서부터는 내가 생각하는 대안이다. 먼저는 이념형으로 사회적 자유주의다. 비판적으로 시작한다면, 사회적 자유주의는 복지 확대와 재분배를 통해 불평등을 완화하지만, 자본주의의 핵심인 무한한 축적과 성장이라는 논리 자체를 건드리지 않는다. 이는 프레이저가 지적한 생태 파괴와 재생산 위기의 근본 원인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며, 사회적 자유주의는 일종의 '자본주의 친화적인 완충 장치' 역할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예기의 비판 관점에서 볼 때, 사회적 자유주의는 개인의 소외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근본적인 한계를 보인다. 복지 증진은 삶의 안정을 가져오지만, 경쟁과 시장 중심의 삶의 형식은 여전히 개인의 수동성과 고립을 심화시킨다.
진정한 소외 극복은 개인이 능동적으로 사회 자원의 결정과 관리에 참여하는 자치적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한데, 사회적 자유주의는 이를 위한 제도적 틀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회적 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근본 동력에 도전하지 않는 선에서 개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프레이저가 비판한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 모호성은 구조적 변혁 대신 인정과 분배에 초점을 맞추어 자본주의의 위기를 봉합하려 했고, 이는 결국 우익 포퓰리즘이 반발할 공간을 제공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면 이런 비판을 뒤로하고 긍정적인 부분, 그러니깐 구원적 비평을 통해서 전체가 아닌 일부분이라도 대안적 성격을 가진 개념들을 구출해보자.
긍정적 자유(Positive Liberty)의 핵심 가치
사회적 자유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소극적 자유(Negative Liberty) 개념, 즉 국가나 타인의 간섭으로부터의 자유를 넘어, 긍정적 자유(Positive Liberty)를 핵심 가치로 삼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무엇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개발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무엇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따라서 사회적 자유주의는 빈곤, 질병, 무지와 같은 사회적 장애물이 개인의 실질적인 자유를 침해한다고 보고,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이러한 장애물을 제거할 사회적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혼합 경제 체제와 시장에 대한 규제적 개입
사회적 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인정하지만, 시장의 실패(Market Failure)와 필연적인 불평등을 방지하기 위해 국가의 적극적인 규제와 개입을 옹호한다.
이들은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를 거부하고, 시장의 공정성을 확보하며 독과점을 규제하고, 환경 보호 기준을 설정하는 등의 정부 역할을 중요시한다.
이러한 입장은 시장 원칙을 기본으로 하되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가의 조정을 허용하는 수정 자본주의 또는 사회적 시장 경제의 기반이 된 것이다.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한 포괄적 복지 국가
사회적 자유주의는 사회 정의(Social Justice)를 중요한 목표로 설정하고, 모든 시민에게 기본적인 삶의 질과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복지 국가(Welfare State)의 확대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누진세를 통한 소득 및 부의 재분배, 보편적인 공공 의료 및 교육 서비스 제공, 그리고 실업 및 노령에 대비한 사회 안전망 구축을 필수적으로 본다.
정부는 빈곤과 불평등을 완화함으로써 사회 구성원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고,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진보적인 사회문화적 가치 및 권리 확장
이 사상은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을 확장하는 차원에서 사회문화적인 영역에서도 진보적인 입장을 취한다. 단순히 경제적 측면을 넘어, 시민적 권리(Civil Rights)의 확장과 소수자 권리 옹호를 중요시한다.
여기에는 성별, 인종, 성적 지향에 관계없이 모든 개인의 평등한 대우를 보장하고,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다양성과 다원주의를 사회의 핵심 가치로 수용하는 것이다.
민주적 절차를 통한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개혁
사회적 자유주의는 사회 모순을 해결하고 이상을 실현하는 방법론에 있어 점진주의(Gradualism)와 민주적 절차를 엄격히 준수한다.
폭력적인 혁명이나 급진적인 체제 전복을 배제하고, 의회와 선거를 통한 입법 과정 및 합법적인 정치 행위를 통해 사회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사회 변동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다양한 이해관계자 간의 대화와 타협을 통해 실용적인 정책 해법을 모색하는 것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포식적 축적 논리를 대체하는 핵심은 커먼즈(Commons) 기반의 혁신이다. 커먼즈는 지식, 기술, 자연 자원, 심지어 돌봄(Care)과 같은 비물질적 자원까지 사적 소유나 국가 소유가 아닌 공동 관리의 영역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커먼즈 혁신은 이윤 동기가 아닌 공유와 협력을 혁신의 기본 원리로 삼아, 자본의 침탈을 막고 비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을 구축하는 것이다. 커먼즈는 프레이저가 지적한 재생산 위기와 생태 파괴를 직접적으로 해결한다. 돌봄 커먼즈는 돌봄 노동을 시장의 착취에서 해방시켜 사회적 재생산을 공동체의 책임 아래 복원하며, 생태 커먼즈는 자연을 무한한 자원이 아닌 보호와 공생의 대상으로 규정한다. 이는 자본주의의 자기 포식적 구조에 맞서 재생적(Regenerative) 생산 방식을 확립하는 혁신적 전환이 되는 것이다.
커먼즈 활동은 예기가 요구한 소외 극복의 구체적인 실천 장이 된다. 자원의 관리와 유지에 직접 참여하는 경험은 개인들에게 능동적인 행위 주체성(Agency)과 공동의 책임감을 부여한다. 이는 경쟁과 이기심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관계를 넘어, 상호 의존과 협력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적 관계, 즉 예기가 지향한 '건강한 삶의 형식'을 공동으로 창출하는 혁신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더 나아가 협력적 거버넌스의 개념으로 종합해보자. 협력적 거버넌스(Collaborative Governance)는 커먼즈가 지역 차원의 이상에 머무르지 않고 더 큰 사회적 변혁을 이끌도록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메커니즘이다. 이는 국가, 커먼즈 공동체, 시민, 전문가 등이 혁신 의제와 자원 관리에 대등한 주체로 참여하여 공동으로 의사결정하는 구조이다. 이 구조는 자본과 관료의 전횡을 견제하며 정치 영역의 민주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협력적 거버넌스는 프레이저가 주장한 경계투쟁의 의제들을 공식적인 정책 및 혁신 과정에 통합하는 플랫폼 역할을 수행한다. 생태, 재생산, 평등과 같은 사회적 가치를 혁신의 최우선 목표로 설정하도록 강제하며, 자본주의적 가치를 넘어서는 호혜적 혁신을 촉진한다. 이는 혁신의 방향을 시장의 이윤이 아닌 공동체의 필요에 맞추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 거버넌스 모델은 사회적 자유주의의 안정화 기능(복지, 기본소득 등)을 활용하여 시민들이 능동적인 참여자가 될 수 있는 물적 기반을 제공한다. 시민들은 생존의 위협에서 벗어나 협력적 거버넌스와 커먼즈 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로써 민주적 자치, 공유적 가치, 사회적 안정을 동시에 실현하는 '시민적 재생의 헤게모니'라는 새로운 규범적 질서가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라엘 예기와 낸시 프레이저의 깊이 있는 비판은 현대 자본주의의 위기가 그 구조적 모순과 윤리적 병리에서 기인하는 총체적 위기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단순한 복지 확대나 시장 규제로는 이 포식적 시스템과 소외적 삶의 형식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해법으로 제시된 '시민적 재생의 헤게모니'는 사회적 자유주의, 커먼즈, 협력적 거버넌스를 통합하여, 자본주의가 분리해 놓은 영역들(생산/재생산, 인간/자연)을 협력과 공유의 원칙 아래 재결합시킨다. 혁신은 더 이상 사적 이윤을 위한 도구가 아닌, 민주적 자치와 공동의 가치 실현을 위한 호혜적 실천이 된다. 이는 두 학자가 지향한 구조적 변혁과 주체성 회복의 비전을 통합적으로 실현하는 가장 강력하고 구체적인 대안적 전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책을 더욱 본격적으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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