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손과 들뢰즈의 철학을 시작하다
20170113_철학아카데미
들 질뢰즈_영화와 철학_이지영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강사)
몽타주 개념의 현대적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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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이미 만들어진 영토를 넘어서는 일을 했다.
들뢰즈는 영화를 위해서 베르그손의 이해를 가지고 온다.
베르그손은 시간 개념으로 무한과 실재를 연결하는 일들을 했다.
베르그손의 지속개념에서 변화하는 어떤 흐름에서 들뢰지는 운동성을 발견했고, 그 가운데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하였다.
형상은 외재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질료가 형상을 낳는 것이다.
질료와 형상은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질료 안에 형상이 존재하고 운동하는 가운데 분만해 내는 작용을 이야기한다.
형상이 나오는 질료의 운동성에 대해서 이해가 필요하다.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현실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힘이 되기 위해서는 단지 영화나 예술에만 머물게 할 수 없다.
들뢰즈의 철학은 미래로, 무한으로, 불안으로 뻗어나게가 탈출시키는 철학이다.
몽타주개념, 현대적 개념
영화의 사유이자 철학이라고 할수 있는 몽타주 개념은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특히 고전적 몽타주와 현대적 몽타주를 구분하는 핵심적인 차이라 할 수 있는 전체 개념은 지속, 열린 전체로 이해된다.
따라서 고전 영화에서 나타나는 불연속은 연속성으로 포섭된다.
그러나 현대 영화에서 전체 개념이 바깥이 되면, 불연속적 단절들은 그 자체로 의미있는 단절들이다.
다시 말해서 무리수적 단절이나 틈새로 변화한다.
현대영화는 무리수적 단절들의 배치들을 통해 가장 강력한 사유의 역량으로서의 무능력과 만나게 된다.
바깥으로서의 전체와 마주하게 된 현대 영화는 영화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사유와 그 작용을 획득하게 된다.
이를 위해 현대적인 몽타주는 무리수적 절단들의 배치를 통해 계열적인 영화를 생산한다.
계열적 영화로의 생성은 이미지들을 절단하고 재연쇄하고 뒤집고 다시 뒤집는 발산적이고 중심이탈적인 독서라는 관객의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계열적인 이미지들의 생성이 다름아닌 계열로서의 시간이라는 시간의 순수 형식을 의미한다.
이 시간의 순수 형식은 간접적인 시간의 재현, 열려있는 지속의 총체화로서의 전체를 가능하게 하는 바탕이자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영화
몽타주 개념의 확장을 통해 영화뿐만 아니라 비디오 설치 작업에도 적용될 수 있는 확장된 몽타주라는 이론적 개념틀이 존재한다.
현대 영화의 몽타주는 일반적인 영화에 한정되어 있으나, 확장된 몽타주는 일반적인 여화의 물리적 한계들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다.
쇼트와 쇼트의 연결 대신 분리된 영상과 영상의 결합으로, 무리수적 단절과 틈새는물리적인 간격과 실제 거리로, 이미지의 독서는 관객들의 임의적이고 자발적인 관람 순서로, 계열로서의 이미지의 생성은 실제 이미지들의 간격을 둔 배치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확장된 몽타주 개념을 비디오 설치 작업에서의 의미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가능한 하나의 이론적 해석의 준거틀로 제안하는 것은 의미있다.
확장된 몽타주 개념은 이미 탈중심의 가능성과 다양한 변화들을 그 자체로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 영화론
운동-이미지의 내재성의 평면의 의미는 어떠한 것인지를 파악함으로써 들뢰즈의 영화론의 철학적 위상을 파악할 수 있다.
들뢰즈에게 사유란 무엇인가에 기호에 의해서 강제되어 나타나는 것이고, 기호들의 연속된 흐름인 영화나 예술에서는 일상보다 더 우월하다.
들뢰즈의 예술은 구성의 평면 위에 세워지고, 철학은 내재성의 평면 위에 세워진다고 말한다.
그런데 영화는 운동-이미지의 내재성의 평면 위에 세워지낟고 말하낟.
그러므로 들뢰즈의 예술론과 함께 운동-이미지의 내재성의 평면의 의미를 탐구함으로써 들뢰즈의 영화론의 철학적 위상을 파악할 수 있다.
들뢰즈의 영화론은 그의 구체적 실천으로서의 철학에 대한 입장이 구체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베르그손, 들뢰즈
들뢰즈는 물질과 기억으로 노벨상을 받는다.
존재는 지각되는 것인가? 아니면 지각 이전에 실재하는 것인가?
우리는 물질을 전체로 이해하지 못한다. 항상 어떤 기호와 상징에 기댄다.
이미지는 무엇에 대해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한 측면만 제시한다. 지각은 이렇게 전체가 아니다.
이미지는 객관적인 전체를 제시하지 못하고, 주관적으로 변형되기 쉬운 어떤 것이 된다.
객관성과 주관성을 동시에 내포하면서 생각과 현실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들의 총체가 물질이다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베르그손에게 이미지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미시에서 거시까지 이미지다.
이 세상 만물은 항상 이미지의 형태를 뛴다. 그런데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운동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이러한 베르그손의 이미지-운동의 개념을 사유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이미지-운동에 기반하고 있다.
작용, 반작용
작용과 반작용은 이미지-운동의 근본 속성이다.
단순히 몸만이 아니라 정신도 마찬가지다. 어떤 자극이 작용되면 그것에 대한 몸의 자연적인 반작용과 의식의 반작용이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특권적인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객관적인 신체와 주관적인 의식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주관적인 의식 때문에 인간은 반작용을 선택할 수 있다.
따라서 주관적인 체제에서 배열과 배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배열과 배치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인간은 지각의 단계를 경험한다.
지각은 이미 반작용된 배열과 배치가 반복될 때 일어나는 것이다.
차이는 배열과 배치를 다르게 만들고 이것이 반복되면서 지각이 일어난다.
새로운 것은 지각되지 않고 새로운 연결과 접속하고 배열과 배치를 통해서 끊임없이 영통화를 추구하게 된다.
지각이 이미 발생하고 나면 관심과 필요에 의해서 기존의 지각을 가지고 행위와 관련된 반작용이 일어난다.
지각, 인식
지각은 일정한 인지 공간을 만들어 낸다.
평소에는 평평하거나 넓고 얇게 존재하다가 새로운 필요나 관심이 생기면 그것들이 새로운 배치와 배열을 하게 된다.
지각이라는 것은 인식 작용이 아니라 이미지들의 배치와 연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배치와 연결은 방향성이 정해지고 나서야 만들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각을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의 배열은 관심과 필요에 의해서 기억된다.
물리적으로는 볼 수 있지만 관심과 필요에 따라서 지각장에서는 연결과 배치가 이어나지 않은 것이다.
지각장은 그래서 매 순간 다른 형태로 다른 범주로 존재하게 된다.
이것을 이미지들의 부분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베르그손의 이미지-운동의 개념은 그래서 유물론적이다.
이러한 지각장을 영화로 넘어오면 프레임으로 달리 표현된다.
영화에서는 인식의 선택을 프레임으로 구성한다. 관심과 필요에 따라서 이미지들의 배치와 접속, 연결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운동이미지들의 내재성의 평면'이 바로 베르그손에서 들뢰즈로 넘어오는 프레임이다.
우주는 내재와 외재를 모두 포함하는 완전한 이미지라고 상정한다.
영화는 지각-이미지에서 행위-이미지로 변환되는 과정이다. 이것이 연결되는 인관관계의 변화가 영화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것을 flot이라고 한다.
좀더 세분화시켜보면 지각-이미지는 감정-이미지를 통해서 행위-이미지로 변환된다.
이것을 바로 '감각-운동 도식'이라고 부른다. 영화는 감각과 운동으로 이어지는 도식을 다른말로 바꾸면 인과관계이다.
인'과 과'를 따로 분리하는 것이 지각-감각-행위'이며 이것들이 어떻게 배치되고 접속되는가에 따라서 영화, 프레임, 생각, 기억은 완전히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지각, 감정
인간은 지각과 함께 행위로 넘어간다.
대부분은 지각장이 만들어지고 인과적 관계, 내러티브에 의해서 행위로 넘어가 버리면 기억으로 변환되지 않는다.
기억이 되기 위해서는 지각-이미지가 감정-이미지까지 진행되어야 하고, 행위-이미지로 넘어가지 않아야만 감정적인 욕망과 아픔 혹은 기쁨이 생긴다.
그래서 영화난 우리의 기억은 상실이나 좌절, 혹은 기다림 후의 성공이 많은 것이다.
사랑은 기다림이라는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은 의지적으로 행위로 발전하지 않고 지각된 것들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닿을 수 없는 타자의 존재에 대해서 바로 행위로 내어 버리지 않는 것, 마치 한나아렌트가 이야기하는 이야기하는 '악의 평범성'은 생각하지 않고 행위해버리는 것과도 유사한 것들이다.
들뢰즈, 사유
들뢰즈에게 사유란 공준들처럼 이미 주어지고 규칙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철학 체계에 임의적으로 가정되어 있는 공준들을 통해서 대상들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은 사유가 아니라 일종의 정당화다.
달리말해 대상들 안에서 이미 주어져 있던 진리나 가치를 재발견하고 알아보는 것은 그저 정당화 혹은 재인일 뿐 결코 사유라고 할 수 없다.
들뢰즈에게 사유는 공준들처럼 이미 주어져 있는 선철학적 이미지를 벗어날 때에만 가능하다.
기존의 가치나 진리를 벗어난다는 것은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삶의 새로운 기능성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사유라면 사유는 창조행위라고 할 수 있다.
사유는 어떤 돌발적인 충격과도 같은 폭력적인 경우에 처해서만 시작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 때까지 알고 있었던 가치 기준이나 지식으로는 파악하거나 동일시할 수 없는 어떤 사태를 우연히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민네이션, 생각
들뢰즈가 말하는 탈영토화라는 것은 칸트가 이야기한 범주의 개념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칸트가 이야기하는 인간상이 틀어지면서 아예 새로운 무한으로 넘어가게 된다.
새로운 범주 안에서 질료는 새로운 형상을 만난다.
실재와 의식이 만나는 지점에서 정신이 발생한다. 아니 정신은 현상화된다.
항상 변화하는 이미지는 그 자체로 운동하고 있는 것이다. 실재로 포착하려고 할 때 이미 포착하는 순간에도 이미지는 변화되고 있다.
작용과 반작용의 흐름들의 계속해서 새로운 이미지를 생각해 낸다.
이미지는 오직 한번만 인생에게 반짝거린다.
영화의 프레임은 30개가 1초 안에 운동을 만들어 낸다. 사실은 이미지들이 운동하고 있는 것이이지 운동하고 있는 것을 이미지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기억이다.
기억은 오직 감정과 이미지로만 기억된다.
기억은 이미지들의 재현이 새롭게 머릿속에서 드러나게 되면서 새로운 길들을 열어내는 것이다.
연결과 접속은 이미지들이 존재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것은 프랙탈하여 미시와 거시 그리고 모든 존재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시간은 이미지를 입고 공간에 나타난다.
주관적인 선택에 의해서 인식은 확대되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한다.
이 부분에서 하이데거의 현존재와 인식론을 발견할 수 있다.
레비나스의 타자, 자기 소외된 이웃, 문화에서 배제된 대상 이런 것들은 지각에 있어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이미 만들어진 배열과 배치, 연결을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헤겔과 베르그손을 넘어서는 유기체적 정치학의 탄생을 그려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