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 2시에 보내는 편지
항상 끝이 보이지 않는 게임을 좋아했다.
이미 예상할 수 있는 것들은 시시해서 시작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사람들이 시키는대로 따라야하는 시간에는 이러한 사실을 숨겼다. 사실은 매우 지루한 나날을, 지옥같은 시간을 지나가고 있지만 그저 그런대로 착한아이처럼 견뎠다. 심지어 너무 힘들 때는 내가 '석가모니'라고 생각하고 '열반'에 이르는 상상까지 해 보았다. 시간이 흘러서 이제는 내가 스스로 시간을 정하고, 장소를 정하고, 목표를 정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판을 다시 짜기 시작했다. 함께 걸어가는 길에서 혹은 함께 시작하는 게임에서 미래의 어떤 시점에 존재하는 정답을 지웠다. 예상된 것들을 무한으로 돌려 놓았다. 인생에서 지워진 결론들은 항상 열려있는 상태로 도전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 첫걸음은 너무나 보잘것없고 누추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학습을 해 나가면서 배우고 또 자신의 것으로 만들게 되었다.
그렇게 얻어낸 것들이 무한한 게임의 전장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재료가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감각을 얻어낸 이후에는 '모든 순간에서 배운다'라는 교육철학을 가지고 어떤 순간이든 배울게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잊지 않을려고 했다. 아무리 어려운 순간에도 배울 게 있으며, 정말 어처구니 없는 사람에게도 반면교사할 수 있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 자체로 그런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배움이었다. '내일은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단순히 내가 지금 편해서 내일이 기대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어려움이 또 어떤 배움으로 변화될 것인가를 기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끊이지 않는 도전은 삶의 여정에서의 친절한 친구가 되었다.
계획이 아니라 정체성이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이 찾아낸 변화의 시작은 '습관'이었다. 인간의 욕망과 마음의 수만번의 변화를 하나로 압축시켜서 계속해서 그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은 습관이었다. 그리고 '아주작은 습관의 힘'에서는 이러한 습관을 만드는 것은 '치밀한 계획'이 아니라 '정체성의 변화'였다. 그러니깐 살을 빼려면 구체적인 계획과 식단관리, 헬스장에서의 시간이 아니라 '나는 운동선수야'라는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운동선수 중에서 몇 종목을 빼고선느 살이 찐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밥을 먹을 때 '나는 운동선수인데?'라는 생각이 들면 스스로 절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인가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습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정의하는 정체성을 다시 잡아야 한다.
그래서 너무 바쁠 때, 한 번에 여러가지 일들이 몰아 닦칠 때 조용히 시간의 방으로 들어가서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지금 내가 만약 총리라면 이 모든 일들보다 10배는 일이 많을텐데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내면에 잠들어 있던 수 많은 영혼들이 되살아나서 에인전트가 된다. 두뇌가 여러가지로 나누어지고 스스로 자신들이 해야할 일을 보고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우선순위를 정해서 알려주고 나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일에 집중한다. 그러면 잠시 눈을 돌려서 혹은 잠시 눈을 감으면 조금 전에 시켜 놓은 일들이 어느정도 머릿속에서 완성이 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사물의 시간은 제각각이다. 하나의 사물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고 공간 속에서 시간을 함축한다. 사물이 우리의 인상 속에서 들어오는 순간 사물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 통합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통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가능하다. 인간은 통합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통합한다고 믿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물의 시간은 우리의 내면에 인식되고 나서도 각각 자신의 시간들을 살아간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우리 내면에 들어온 어떤 생각이나 사물의 흔적이나 역사적인 사건들은 그 자체로 통합되거나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무의식의 어떤 영역에 자리잡아서 자신만의 존재감을 갖는다. 그리고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그 재료들이 하나의 시간선에 드러앉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서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사물들이 하나의 사건에 딸려서 줄줄이 나온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우리 내면에 쌓여진 생각의 재료들이 실은 사물의 시간들이 우리 내면에 자리잡은 순서를 조정한 결과이다.
앞으로도 수 많은 도전들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아니 도전이라고 부르지 않고 역경이나 시험, 재수 없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을 모두 도전으로 바꾸는 단어는 '배움'이다. 이 순간에서도 배우고 깨닫고 회고하고 성찰하고 다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 습관. 이 시작은 결국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하는 물움,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이다.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나 혼자만 잘 살고 잘 먹지 않고 누군가에서는 따뜻한 밥 한끼 지어서 나눌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면 근본적인 문제부터 건드려야 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떤 이유로 삶을 사는가, 인간은 어떨 때 타락하는가, 인간이 만든 제도가 인간을 악하게 만드는가, 누구의 책임인가, 책임지는 사람들은 어떻게 시대마다 양성되는가?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사람.
시간에서 향기가 나길 기대한다. 무게가 없어진 시간 위에서 러닝머신을 달리듯이 의미도 없이 방향도 없이 가속도가 붙는 삶이 아니라. 시간이 자리잡은 곳마다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고 무게가 있는 삶. 이제는 좀처럼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힘들지만, 이것 역시 도전이라면 그런 사람들과 대화에서 어떻게 이런 의미를 끌어낼 것인가라는 물음이 도착한다. 죽기 전에 꼭 이것을 써먹고, 꼭 빛을 보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미래의 어느시점에 이러한 '의지'가, '방법'이, '지식'이 전해져서 누군가를 일으키고, 죽었던 마음이 살아나고, 다른 이들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기를 기도한다. 이 글은 어쩌면 미래의 어느시점의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겠다. 만약 이렇게 살고 있지 않다면, 만약 이러한 마음이 중심을, 이러한 정체성을 잊어 버렸다면 다시 돌아오길 바라며 말이다.
오랜만에 한적한 일요일 오후 2시. 점점 스며드는 나태함을 다시 도전으로 바꾸면서 미래에 나에게 건내는 편지 혹은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