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와 번역 그리고 철학
우리는 오늘날 '철학', '주관', '객관'이라는 단어들을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사용하며 사고하고 있다. 하지만 이 단어들이 우리 언어 체계에 들어오기 전, 동아시아인의 사유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지형 위에 있었다. 이러한 사유의 지도를 근대적 방식으로 완전히 다시 그린 인물이 바로 일본의 지식인 니시 아마네다. 그는 보지 못한 동물인 사자에게 이름을 붙이듯, 서구의 'Philosophy'를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번역했다. 이는 단순히 단어의 치환이 아니라 동양의 수양 중심 학문을 서구의 실증 중심 학문으로 바꾼 사건이다. 그의 번역 작업은 네덜란드 유학 시절 접한 서구의 합리주의와 실증주의라는 강력한 지적 충격에서 시작되었다.
니시는 서구의 우월함이 기계적 힘이 아닌 그 이면의 철학적 질서에 있다고 믿으며 이를 이식하려 했다. 그의 노력은 일본을 넘어 한국과 중국 등 동아시아 전체의 근대적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결정적 토대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니시 아마네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 뇌 구조를 설계한 근대 지성의 기원을 탐구하고자 한다. 당연하게 여겨온 학문적 일상 뒤에 숨겨진 니시 아마네의 치열한 번역과 사유의 과정을 마주할 시간이다. 니시 아마네의 생애는 전통적인 유교 교육에서 시작하여 서구의 근대 학문으로 나아간 거대한 전환의 연속이었다. 그는 본래 막부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성리학적 세계관 속에서 성장하며 학문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그러나 페리 제독의 흑선 사건 이후 일본이 겪은 충격은
그의 지적 관심사를 서구의 학문으로 돌려놓았다.
그는 한자어의 조어 능력을 활용하여 추상적인 서구의 개념들을 동양의 언어로 구체화하는 불가능한 과제에 도전했다. 그가 만든 단어들은 오늘날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분석하는 논리적 틀인 '개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니시 아마네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지식의 도구들이 어디서 왔는지 묻는 것과 같다. 그는 학위나 권위가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에 스스로 학문의 길을 개척하며 근대적 대학의 모형을 제시했다. 그가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교에서 습득한 지식은 일본의 국가 체계를 정립하는 실질적인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이 여정은 단순히 한 개인의 전기가 아니라 동아시아 지성사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고통스러운 산고의 기록이다. 우리는 이제 니시 아마네가 설계한 지식의 미로 속으로 들어가 그가 남긴 지적 유산의 실체를 명확히 파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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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 아마네는 1862년 에도 막부의 명을 받아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교로 유학을 떠나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얻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일본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던 유일한 창구였으며, 라이덴은 유럽 지성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니시는 그곳에서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주의와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를 접하며 거대한 지적 충격을 받았다. 그는 학문이란 더 이상 도덕적 수양이 아니라 객관적인 증거와 논리로 세상을 설명하는 과학이어야 함을 깨달았다. 라이덴에서의 유학 생활은 그에게 동양의 유교적 세계관을 대체할 수 있는 강력한 논리적 무기를 제공해 주었다. 그는 특히 지식의 체계적 분류에 매료되었으며, 모든 학문이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통찰을 얻게 되었다.
실증주의는 그에게 미신과 관습에 갇힌 동양 사회를 구원할 유일한 근대적 대안으로 비춰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유럽의 법률, 경제, 철학을 공부하며 이를 일본의 국가 건설에 적용할 구체적인 설계도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라이덴 대학교의 자유로운 학풍은 그가 '아시아인 최초의 프리메이슨 가입'이라는 파격적인 행보를 걷게 만든 토양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서구 문명의 핵심이 종교적 독단이 아닌 이성적 토론과 합리적 질서에 있음을 몸소 체험했다. 네덜란드에서 니시 아마네가 가장 깊이 파고든 분야는 바로 지식의 분류 체계와 그 논리적 기반인 철학이었다. 그는 모든 개별 과학의 정점에 철학이 존재하며, 철학을 통해 지식의 통일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다.
라이덴 대학교의 교수들로부터 배운 사회계약설과 법학 지식은 그가 귀국 후 일본의 법 체계를 정립하는 기초가 되었다. 그는 서구 문명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을 넘어 그 내면의 원리인 '이성(Reason)'을 이식하려는 원대한 꿈을 가졌다. 실증주의적 태도는 그로 하여금 감정이나 전통보다는 데이터와 객관적 법칙을 중시하는 냉철한 지식인으로 만들었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보낸 시간을 통해 중세적 인간에서 근대적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치열한 자기 혁신을 겪었다. 라이덴에서의 배움은 그가 훗날 '백학연환'이라는 강의를 통해 일본 지성계를 계몽하는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유럽의 도서관과 강의실을 누비며 동아시아가 가보지 못한 새로운 지적 영토의 지도를 세밀하게 그려나갔다.
이 시기의 경험은 그에게 '번역'이라는 작업이 단순한 언어 놀이가 아니라
문명 전체를 옮기는 작업임을 일깨워주었다.
그는 네덜란드의 찬란한 근대성을 목격하며 이를 일본이라는 척박한 토양에 옮겨심기 위한 지적 자양분을 충분히 섭취했다. 실증주의의 수용은 니시 아마네에게 인간의 정신 활동조차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는 대담한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는 라이덴에서 배운 심리학과 생리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의식 구조를 논리적으로 설명해내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도덕(Morality)마저도 사회적 유용성과 합리적 계산의 결과물로 이해하려는 공리주의적 시각을 견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태도는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절대적으로 따르던 전통적인 학문 공동체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이었다.
그는 네덜란드 유학 중에도 끊임없이 한자 개념을 대조하며 서구의 추상어들을 옮길 적절한 표현을 찾아 고뇌했다. 라이덴 대학교의 도서관은 그에게 지식의 보고였으며, 그곳에서 보낸 시간들은 그의 조어 능력을 극대화하는 훈련장이었다. 그는 서구인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방식이 동양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에 주목하며 그 차이를 분석했다. 이러한 분석적 시각은 그가 귀국 후 '주관'과 '객관'이라는 분리된 인식의 틀을 창조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실증주의는 그에게 과거와의 결별을 선언하게 했으며, 오직 증명 가능한 지식만이 미래를 열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 니시 아마네의 라이덴 유학은 동아시아 지성사가 서구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비추기 시작한 최초의 본격적인 시도였다.
니시 아마네가 일본 지성사에 남긴 업적은 추상적인 서구 사유를 담아낼 새로운 번역어들의 창제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중국에서 '옌푸'가 했던 것처럼 니시 아마네는 서양의 단어들이 가진 뜻을 스스로 해석하여 일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Philosophy'라는 단어를 마주했을 때, 이를 동양의 전통적 가치와 연결하면서도 차별화된 이름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초기에는 지혜를 갈구한다는 의미에서 '희철학(希哲學)'이라 불렀으나, 결국 지혜의 학문이라는 뜻인 '철학(哲學)'으로 확정했다. 이 명칭은 단순히 단어 하나를 만든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에 '전문적인 사유의 학문'이라는 영역을 독립시킨 사건이다.
그는 철학 외에도 '과학', '기술', '이론', '예술' 등 오늘날 학문의 근간이 되는 수많은 용어를 직접 고안해냈다. 이러한 번역어들은 한자 문화권의 지식인들이 서구 문명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돕는 결정적인 도구가 되었다. 그는 한자의 조어력을 활용해 보이지 않는 개념들에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동아시아인의 사고 범위를 혁명적으로 넓혔다. '철학'이라는 번역어의 탄생은 우리가 보지 못한 사자에게 이름을 붙여 그 존재를 인식하게 된 것과 같은 효과를 냈다. 그가 만든 번역어 중 인식론적으로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바로 '주관(Subjective)'과 '객관(Objective)'이라는 용어다. 동양의 사유는 인간과 세계가 하나라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지향했기에 주체와 객체를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니시는 서구의 칸트 철학과 데카르트적 이분법을 수용하기 위해 나를 뜻하는 주체와 대상을 뜻하는 객체르 대비시켰다. 이를 통해 동아시아인들은 비로소 세계를 나로부터 분리된 '관찰과 분석의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는 혁명을 겪었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과학적 탐구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인 전제 조건이 되었으며 근대 학문의 토대가 되었다. 니시는 '의식', '심리학', '인식' 등의 단어를 통해 보이지 않는 인간의 내면 활동을 해부하고 분류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가 만든 언어적 도구들은 우리가 세상을 '논리적'으로 재단하고 파악할 수 있는 강력한 안경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분리는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소외시키고 세계를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하는 부작용도 동시에 가져왔다. 니시 아마네는 언어를 통해 우리의 영혼 속에 근대성이라는 새로운 운영 체제를 성공적으로 설치한 설계자와 같았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표현하는 방식의 절반 이상은 그가 만든 번역어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니시 아마네의 번역 작업은 단순한 직역을 넘어 문화적 맥락을 재창조하는 창조적 행위였으며 지적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는 'Right'를 '권리'로 번역하며 동양에 없던 주체적 개인의 법적 자격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했다. 초기에는 권리라는 말이 권세와 이익이라는 부정적 뉘앙스로 읽힐까 우려했으나, 그는 이를 근대 시민의 핵심 가치로 정착시켰다.
'예술(Art)'이라는 번역어 역시 기술과 구별되는 미학적 창작의 영역을 독립시키려는 그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물이다. 그는 서구의 단어 하나하나에 담긴 역사적 무게를 한자라는 그릇에 담아내기 위해 밤새도록 고문헌과 대조하며 고심했다. 그가 만든 번역어들은 일본을 거쳐 중국과 한국으로 전파되며 한자 문화권의 공통된 지적 자산이 되는 기염을 토했다. 우리는 니시 아마네 덕분에 서구의 복잡한 철학 체계를 우리의 문자로 소통하고 학습할 수 있게 된 혜택을 누린다. 그가 창안한 '이론', '귀납', '연역' 같은 논리학 용어들은 우리 지성사에 없던 엄밀한 사고의 규칙을 선물했다. 그의 번역 작업은 동양의 정신적 유산과 서양의 지적 혁명을 결합하려 했던 거대한 융합의 용광로와 같았다. 결국 니시 아마네의 번역어들은 동아시아 근대 지성사를 지탱하는 가장 튼튼하고 거대한 기둥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니시 아마네는 귀국 후 자신의 사유를 집대성하여 '백학연환(百學連環)'이라는 기념비적인 강의를 통해 지식의 체계를 설파했다. 이 강의는 제목 그대로 '백 가지 학문이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뜻으로, 근대적 의미의 학문 분류학을 제시했다. 그는 학문을 크게 보편학인 철학(Philosophy)과 각 분야를 다루는 특수학(Science)으로 구분하며 체계를 세웠다. 이는 동양의 막연한 '학문' 개념을 분과 학문(Discipline)이라는 현대적 전공 체계로 전환시킨 역사적 전환점이다. 그는 철학을 모든 학문의 근간이자 '최상의 과학'으로 규정하며, 철학적 기초가 없는 지식은 파편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백학연환'은 당시 일본 지식인들에게 서구 지식의 지도를 보여주는 나침반 역할을 하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는 이 강의에서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각 학문의 고유한 방법론을 상세히 설명했다. 이는 오늘날 대학교의 커리큘럼이나 백과사전적 지식 체계의 시초가 되었으며 학문적 전문성을 강조했다. 니시는 이 체계를 통해 지식이 단순히 암기하는 대상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구성된 유기적 조직체임을 입증했다. 그의 학문 분류는 동아시아인이 세계를 질서 정연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지적 프레임을 견고하게 구축했다. '백학연환'에서 니시 아마네가 강조한 핵심 중 하나는 바로 지식의 실용성과 사회적 가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었다. 그는 학문이 개인의 도덕적 완성에 머물지 않고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공리주의적 태도를 견지했다.
니시는 물리, 화학 등의 기초 과학이 어떻게 공학이나 의학 같은 응용 학문으로 이어지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이러한 시각은 일본이 서구의 기술 문명을 빠르게 흡수하고 산업화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이론적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니시는 지식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로 '객관적 관찰'과 '비판적 이성'을 강조하며 전통적 권위에 대한 의문을 독려했다. 그는 학문 간의 연결고리를 찾음으로써 지식의 공백을 메우고 전체적인 문명의 수준을 높이려 했던 계몽주의자였다. '백학연환'은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서구 문명을 지탱하는 지적 인프라를 통째로 이식하려는 대담한 프로젝트였다. 그는 강의를 통해 지식이 권력이 되는 근대 사회의 속성을 꿰뚫어 보고 일본인들을 그 주인공으로 만들려 했다.
이 강의록은 오늘날에도 동아시아 근대 지성사의 출발점을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니시 아마네는 이 작업을 통해 일본 지식계의 명실상부한 '지식의 설계자'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다지게 되었다. 니시 아마네의 학문 체계 수립은 대학이라는 제도의 정착과 맞물려 한국과 중국의 교육 체계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철학을 중심으로 법학, 정치학, 경제학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사회의 질서를 유지한다고 보았던 사상가다. 특히 그는 서양의 'Science'를 '과학(科學)'으로 번역하며, 학문이 과목별로 나누어져 있음을 강조하는 혜안을 보여주었다.
'백학연환'에서 제시된 학문 분류는 이후 경성제국대학 등
식민지 대학의 학과 구성에도 그대로 반영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지식의 보편성을 믿었기에 서구의 학문 체계가 동양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보급했다. 하지만 이러한 체계화는 한편으로 전통적인 통합적 사유 방식을 파편화시키고 분절화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니시는 학문의 사슬을 강조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학문 간의 벽을 높이는 전문화의 길을 열어준 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만든 지식의 체계가 없었다면 동아시아의 근대적 성장은 훨씬 더 더디고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는 '백학연환'을 통해 우리에게 세상을 논리적으로 쪼개고 다시 합치는 '지적 조립법'을 전수해준 스승이었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전공을 분과학문으로 나누고, 학문을 연구하는 방식의 뿌리에는 니시 아마네의 이 거대한 사슬이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어떻게 고칠지도 고민을 해봐야 한다.
니시 아마네의 철학적 여정은 후쿠자와 유키치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자유보다는 강력한 국가주의 체제를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귀결되었다. 그는 철학적 합리성을 국가의 통치 질서에 접목하려 했던 '관료 철학자'로서의 면모를 강력하게 드러냈다. 니시는 메이지 정부의 핵심 인사로서 일본 제국 군대의 정신적 지주가 된 '군인칙유(軍人勅諭)'의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는 철학이 민중을 계몽하는 도구를 넘어 국가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쓰일 수 있다고 보았다. 그에게 근대화란 서구의 자유주의를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국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적 가치였다. 그는 "백성은 이치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법과 질서로 다스려야 한다"는 냉소적인 통치 철학을 견지하기도 했다. 이는 그가 네덜란드에서 배운 공리주의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국가의 최대 이익'으로 치환한 결과였다.
니시 아마네의 사유 속에서 철학은 비판적 기능을 상실하고 국가의 효율적 운영을 위한 '행정적 도구'로 전락했다. 그의 철학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확장을 정당화하는 지적 기반을 마련해주었다는 비판적 시각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가 니시 아마네를 공부하며 경계해야 할 지점은 바로 지식이 권력과 결합할 때 발생하는 억압의 위험성이다. 서양철학이 가지고 있는 권위와 오만의 경계를 니시 아마네도 넘어 버렸다. 그리고 그러한 '엘리트주의'가 한국에도 그대로 전해진다. 경성제국대학에서 말이다. 니시 아마네가 만든 번역어인 '권리'나 '자유' 역시 그의 손을 거치며 국가적 질서 내에서의 한정된 의미로 축소되었다. 그는 개인의 권리가 국가의 존립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확고한 국가주의적 신념을 사유의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가 창조한 '주관'과 '객관'의 분리는 인간을 기계적 조직의 부품으로 관리하기 쉬운 존재로 전락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는 서구의 지적 도구들을 빌려와 일본의 전통적인 수직적 질서를 더욱 세련되게 포장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철학적 실험은 자율적인 시민 사회를 형성하기보다는 효율적인 '제국적 신민'을 양성하는 데 더 큰 관심을 두었다. 이러한 성격은 이후 한국 지성사에도 그대로 이식되어 철학이 권력에 봉사하거나 현실과 동떨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니시는 철학의 사명을 국가의 부강함에 두었기에 개인의 고뇌나 실존적 문제는 그의 사유에서 변두리로 밀려났다. 그는 동아시아에 '철학'이라는 이름을 주었지만, 동시에 그 철학을 국가라는 감옥에 가두어버린 인물이었던 셈이다. 그의 사상적 궤적을 쫓다 보면 근대성이 가진 폭력적 이면과 지식인의 책임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게 된다. 우리는 니시 아마네가 설계한 근대의 빛뿐만 아니라 그 이면의 짙은 그림자까지도 함께 응시해야만 한다. 결국 니시 아마네의 한계는 서구의 형식을 빌려와 동양의 권위주의를 강화하려 했던 **'하향식 계몽주의'**의 모순에 있다. 그는 서구의 실증주의를 맹신한 나머지, 우리 고유의 삶의 양식과 사유 속에 담긴 지혜를 전근대적인 폐습으로 매도했다.
니시아마네가 만든 분과 학문 체계는 한국의 사유를
전문 지식의 칸막이에 가두어버려
종합적인 삶의 통찰을 방해했다고 볼 수 있다.
철학은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니시는 이를 체제 유지를 위한 기술적 지식으로 변질시켰다. 그의 사후 일본은 그가 닦아놓은 지적 기반 위에서 군국주의의 길로 치닫으며 아시아 전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물론 아래에 공유한 기사처럼 이렇게 보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러나 '주체성'과 '근대수용'의 관점에서 이들이 지닌 사상의 뿌리는 결국 돋아나 열매를 맺는다. 그게 제국주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가 만든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사유하면서도, 정작 그가 억압했던 주체적 사유를 회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는 근대의 문을 열어준 안내자였지만, 동시에 우리가 반드시 넘어서야 할 거대한 벽이기도 하다. 니시 아마네의 사유가 지닌 이중성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지성사의 비극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첫걸음이겠다.
메이로쿠사
니시아마네가 주도한 메이로쿠사는 1873년 설립된 일본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 결사체이자 계몽 운동의 산실이다.
이들은 서구의 철학, 법률, 경제 등 선진 문물을 일본에 소개하며 국가 근대화의 지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메이로쿠 잡지'를 발행하여 '철학', '권리'와 같은 근대적 학술 용어들을 번역하고 보급함으로써 동아시아 지성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구성원이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단체 해체 이후 교육과 언론에 전념하며 일본의 독자적인 근대 노선을 구축했으나, 이는 훗날 아시아와 결별하자는 '탈아론'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이와 유사하게 독립협회나 신민회 같은 단체들이 지식인 주도의 계몽과 국권 회복을 꾀하며 근대 철학의 흐름을 이어받았다. 이러한 계몽의 전통은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을 거쳐 오늘날 서울대학교 철학과의 학풍으로 연결되며 한국 근대 지성의 한 축을 형성했다.
니시 아마네를 공부하는 것은 단순히 한 명의 사상가를 아는 것을 넘어 우리 인식의 기원을 찾는 고고학적 탐구다. 그가 본 적 없는 사자에게 이름을 붙여준 덕분에 우리는 서구 문명이라는 맹수와 대화하고 이를 길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사자의 이름을 부르는 동안 우리 산속의 호랑이가 사라졌음을 우리는 이제야 뼈아프게 깨닫고 있다. 철학은 고정된 지식이 아니라 끊임없이 의심하고 다시 쓰는 주체적인 사유의 과정이어야 함을 그는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니시 아마네가 설계한 지식의 미궁에서 빠져나와 우리만의 언어로 세상을 정의할 때 진정한 현대는 시작될 것이다. 그의 위대한 번역 작업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그가 남긴 억압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이 우리 시대의 철학적 소명이다.
지식은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며, 번역된 사유는 어떻게 우리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근원적인 물음을 계속 던져야 한다. 니시 아마네는 우리에게 서구라는 거대한 파도를 넘을 수 있는 배를 만들어주었지만, 그 배의 방향은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주관', '객관', '과학'이라는 단어 속에 숨겨진 니시 아마네의 의도를 파악할 때 비로소 우리는 언어의 주인이 된다. 그는 철학을 제도화하여 학문의 위상을 높였지만, 동시에 철학을 삶의 현장에서 격리시키는 부작용도 낳았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대학 강의실에 갇힌 철학이 아니라, 고통받는 시대와 호흡하는 살아있는 철학을 다시 세워야 할 때다.니시 아마네는 우리에게 근대적 인간이 될 수 있는 도구 상자를 주었으나, 그 도구를 사용하는 손은 바로 우리의 손이다.
타인이 번역해준 사유에 안주하는 삶은 결코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니시 아마네의 시대를 넘어, 동양과 서양의 지혜가 조화롭게 만나는 새로운 철학의 지평을 열어갈 능력이 있다. 과거의 인물들이 겪었던 고뇌와 시행착오를 밑거름 삼아, 우리는 더 성숙하고 포용적인 사유의 싹을 틔워야 한다. 철학은 낯선 것을 익숙하게 만드는 과정이자, 동시에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용기 있는 작업임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니시 아마네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들을 하나씩 풀어나가며, 우리는 비로소 우리 지성사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주인이 되는 과정에서 배운 것들로 다른 사람들을 하인으로 만들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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