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바타유*정인곤
20150203_철학아카데미
김인곤_향연과 에로티즘
바타이유_에로티즘 1
들어가기
노동은 생존의 활동이다.
에로티즘은 생존의 활동에서 약간은 다른 각도를 가진다.
죽음에 대한 불안과 유한성에 대한 의식을 통해서 인간은 심리적으로 무엇인가 제한성을 가진다.
자연의 세계는 동물성을 대변하는 연속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면, 인간의 세계는 개별성을 중심으로 하는 불연속의 세계이다.
여기서 에로티즘은 당연히 육체의 합일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이라는 것은 폭력(어떤 종류의 폭력)으로 부터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폭력을 제지하는 차원에서 금기가 발생하게 된다. 금기는 결국 죽음을 멈추게 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은 에로티즘과 에로스를 연결해서 생각해 보자.
향연, 에로티즘
향연과 에로티즘을 이해하는 두가지의 관점이 있다.
그것은 향연에서 볼 수 있는 에로스의 외적 현상이다. 에로스가 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것은 생명과 덕과 지혜를 생산하는 힘이고, 지성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에로티즘은 에로스의 내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고, 합일에 따른 쾌감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관점의 차이를 핵심 단어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에로티즘은 연속과 불연속의 상호균형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연속과 불연속이 에로티즘을 통해서 하나가 된다.
향연은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의 관계에서 추함을 극복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노동은 생산과 획득이라면, 에로티즘은 소모와 사용이라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둘은 어떻게 보면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에로티즘은 죽음과 가까이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방향성의 측면에서, 바로 여기서 바타이유의 사고의 면밀함이 드러난다.
따라서 에로티즘은 생명을 낳음으로써 연속과 불연속을 연결하지만, 향연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내적경험, 에로티즘
인간의 성 행위가 동물의 성 행위와 다른 점은 내적 경험의 복잡성에 있다.
무엇보다도 여기에 종교적 양상이 숨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사실, 내적 경험이라는 것 자체는 개념적 분석을 허용하는 영역이 아니다.
그걸 요리조리 기술하고 표현하느라 문학의 잉크는 마를 틈이 없고 음악의 선율과 악보가 쉴 새 없이 춤을 추지만 그건 말 그대로 직접 느끼고 경험해야 채위지는 영역이다.
에로티즘은 내적 경험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정확하게 말해서 내적 경험을 형성하는 외적 조건을 다룬다.
그것도 아주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측면에서 말이다.
금기와 위반이 바로 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에로티즘의 명료한 내적 경험은 금기와 위반이 시소게임 양상으로 드러나기 전까지 불가능하다.
금기와 위반은 인간의 욕망이라는 감정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며, 윤리와 도덕, 고나습과 법의 작동 매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바탕이 된다.
윤리와 도덕, 관습과 법은 금기로부터 자라난 줄기와 가지들이며,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의 초석이기 때문이다.
죽음, 폭력에 대한 금기
금기는 인간이 동물과는 다른 삶의 길을 걷게 되면서 생겨난 것이다.
금기는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자신에게 부과한 구속이다.
금기는 보통 타부라고 하는데, 오늘날에도 미신이나 토속 신앙, 종교의식 등에 잔존한다고 할 수 있다.
생물진화 과정에서 아주 오래된 생물들이 오늘날에도 살아남아 있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으로 하여금 동물성으로 부터 떨어져 나오게 한 것은 노동이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연을 변화시킴과 동시에 스스로를 변화시켰다.
인간을 오늘날의 이성적 동물로 만든 것은 노동이다.
인간의 노동은 도구의 사용과 함께 동료들과 손발을 맞추어 능률을 극대화하는 집단적이고 지능적인 활동이다.
노동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인간에게 죽음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의식된다.
의식을 발생시킨 건 바로 노동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누구나 피하고 싶고 멀리하고 싶어 한다.
생명을 위협하는 것에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며, 그걸 멀리하고 떼어 놓으려는 것이 금기가 된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자연적 죽음 외에 죽음을 가져오는 것은 폭력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금기는 폭력에 대한 금기이기도 하다.
폭력이 난무해서는 생존을 위한 무리활동, 즉 노동은 불가능하다.
노동을 위한 필요성이 나온다. homo faber라는 단어도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한 때부터 인간은 노동을 더 분화 시켰다.
성, 금기
인간이 동물로 부터 더 크게 벗어난 것은 성 생활이다.
노동을 통해 목적의 인식이 가능해진 인간은 순수한 본능적 반응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함으로써 순수한 본능적 반응으로 부터 멀어져 갔다.
에로티즘은 원칙적으로 노동과 마찬가지로 목적의식적 추구라는 면에서 동물의 성적 충동과 구별된다.
노동과는 달리 획득과 축적의 욕망이 아니다.
에로티즘의 결과는 상실이다.
쾌락을 위한 에로티즘은 노동과 대립한다.
쾌락을 위한 에로티즘은 순전히 소비적이며 폭력을 포함하는 비이성적 충동이기 때문이다.
에로스의 폭력성은 성적 에로스의 내적 외적 행태에서 잘 드러난다.
성에 제한을 가하는 우리 안의 금기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다.
여타의 개별적 금기들은 그것의 변형들이다.
예컨대 근친상간 금기는 폭력의 통제라는 의미 외에도, 남자와 여자의 적절한 분배를 위한 공정한 규칙으로서의 의미도 있다.
가처분 상태의 여자의 증여를 통해 분배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얻으려는 것이다.
번식, 죽음의 친화성
근본적인 금기들이 아주 대립적인 두 영역에 동시에 관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죽음과 번식은 날카롭게 대립하면서도 연결되어 있다.
죽음은 다른 것의 출생과 관련이 있다.
하나의 죽음은 다른 하나의 출생을 예고하며, 전자는 후자의 조건이다.
샘여은 다른 생명의 부패의 산물이다.
성적인 것, 성 행위와 관련해서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갖는다.
그것을 수치스러운 곳이라고 부르며 항문도 포함시킨다. 우리는 똥과 오줌 사이에서 태어난다. 라는 말을 아우구스티누스가 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오물, 부패, 그리고 성은 관계가 밀접하다.
모든 번식은 어머의 죽음을 요구한다. 죽음은 곧 세상의 청춘이다.
죽음만이 세상을 샘솟게 하고, 그것이 없이는 생명도 없다.
식물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죽음에 의한 부패, 그기에 이은 자양물의 끝없는 축적을필요로 한다.
부패와 성 행위는 다양한 양상들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정신에 보여주는 유사성 때문에 결국 우리들에게 똑 같이 반감과 구역질을 자극한다.
죽음과 관련된 금기와 번식을 겨냥한 금기 사이에 아주 오랜 시간적 개입이 있다 해도 금기들은 둘을 향해 같은 반응을 일으키게 하며, 그 만큼 금기들은 밀접한 것이 된다.
바타이유, 에로티즘
바타이유는 생명이라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 자신을 확장한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시 죽음이라는 것이 에로티즘이라는 것과 연결된다면, 에로티즘을 통해서 생명이 확장되고 연장된다. 진실로 맞다. 육첵의 합일을 통해서 죽음은 발생하고 또한 극복된다.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는 데있어서 말이다.
무엇인가를 먹는 다는 것은 죽는 다는 것은, 다시 생명으로 전환되는 과정인 것이다.
생물학에서도 생산은 a라는 개체가 나누어질 때 a'와 b'로 나누어 진다면 그 전에 a는 개체성이 아예 없어지는 것을 말하지 않는가?
에로티즘의 절정의 상태에서 느끼는 오르가슴은 개체성이 무너지는 상태가 된다. 그렇게 되면 불연속이 연속이 된다.
오르가즘은 그래서 작은 죽음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개체성, 의식이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도취상태를 바타이유는 육체적 에로티즘, 정서적 에로티즘, 성서적 에로티즘으로 분류한다. 여기서 에로티즘은 합일이라고 할 수 있다.
연속성이 발생하는 방식이 바로 3가지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입장에서 합일이라는 것이 에로스의 목표라고 할 때, 신과의 합일이 중요해지는 중세시대로 가면 영지주의적인 관점이 탄생하고 이것이 영지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불연속과 연속이 이어지는 방식이 바로 에로스라고 할 수 있다.
인식론적으로 두가지만 있다. 죽음과 죽음이 아닌 것. 그래서 죽음과 노동만 있다. 죽음은 에로티즘이 되고, 노동은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 된다.
민네이션
그렇다면 연속인 자연을 불연속으로 만드는 것이 노동과 에로티즘이라는 것인가?
바타이유의 관점을 생화학이나 생물학으로 전환시켜서 생각하면 어떻게 되는가? 분자생물학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어떤 방식으로 달라지는가?
바타이유 식으로 한다면 우리는 에로티즘을 통해서 이전의 개체가 사라지고 완전히 새로운 개체, 하나의 몸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고, 에로티즘을 통해서 죽음을 경험하고 에로티즘을 통해서 탄생을 경험하는 것이 아닌가?
도취의 3단계를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감성적 에로티즘과 육체적 에로티즘은 분리되지 않았다. 사실은 원래 삼위일체로 종교적 에로티즘까지 한쌍이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요소로 부터 3가지를 나뉘어서 사용하게 되면 각각 부족함을 느끼게 되고 문제가 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 사이에서 3가지가 하나가 될 때 가장 최상의 에로티즘이 발생한다.
남자는 육제적 에로티즘을, 여성은 감성적 에로티즘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고 할 때 사실 이것은 틀린 이야기이다. 인간이 선험적으로 가지고 있는 에로티즘의 욕망은 3가지 모두이다. 그렇게 되면 막스베버의 종교가치의 대한이야기도, 종교에 대한 욕망도 가지고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