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와 인생

책을 읽는 습관에 관해서

by 낭만민네이션

언젠가부터 스승님의 보이지 않는 가르침이 삶의 곳곳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책을 고르는 취향이 그렇다. 스승님은 요한하이징가의 '중세의 가을'이나 '호모루덴스' 같은 작품들을 좋아했다. 그 책들의 특징, 그러니깐 요한하이징가의 특징은 무엇인가하면 마치 고흐와 같은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명확한 선을 그리지 않고 면과 색들이 배열하여 새로운 윤곽을 나타내는 방식말이다. 미시적인 사건과 설명들이 간접적으로 거시적인 세계를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에게 해석의 여지와 공간을 선물하는 것이 바로 요한하이징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후로 나는 노르베르트엘리야스의 '문명화 과정'과 같은 책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물론 그 책들은 어렵다. 고전이라고 하는 것은 고전인 이유가 후대에 읽어도 새로운 해석을 주기 때문인데, 그러한 해석을 제공하는 책들에서는 대부분 축적된 상징들이 체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현상학을 좋아한다. 물론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같은 다차원적이고 스펙트럼의 무한을 달리는 책들도 좋아하지만 헤겔 이후에 등장하는 현상학을 좋아한다. 현상에 대한 끊임없는 해석은 지금 현재 내가 느끼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궁금증을 풀어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하나의 현상에 여러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타자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자아에 대한 깊이를 더하는 작업이다. 지식이라는 것은 이런 식으로 확장되고 깊어지는 특징이 있다. 아무튼 나는 현상학자 중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림처럼 느껴지는 모리스메를로퐁티를 좋아한다. 물론 워낙 많은 상징들이 체계에 체계를 만들어 놓은 '지각의 현상학'같은 책들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감이 안 잡히기는 하지만 퐁티의 모티브는 특히 나랑 너무 잘 맞는다. 살아 있음을 느끼는 우리의 몸,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느낀는 몸, 사랑을 하고 있는 사이 호르몬의 분비에 반응하는 몸 등등. 수많은 해석과 가능성들이 해석과 정신을 모두 잡아 놓은 몸에서 시작한다. 이렇듯 현상학은 재미있다. 현상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더해주기 때문이리라.




책을 읽을 때는 고고학적인 방식과 계보학적인 방식을 동원한다. 고고학의 방식은 이 책이 어떤 흐름을 타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고, 계보학적인 방식은 이 책이 동시대의 목소리를 얼마나 담고 있는 지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 책을 쓸 당시 작가의 시대상과 자아인식, 고민의 흔적들이 책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작가의 연보에 대한 이해는 너무나 중요한 독서의 요소가 된다. 이렇게 작가의 연보를 읽고서 책을 읽기 시작하면 책들의 공통점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모든 책들의 머릿말은 가장 나중에 쓰여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릿말을 자세하게 읽게 될 경우 요약정리된 작가의 생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 후에 이제 목차를 살펴볼 차례인데, 목차에서는 고전이고 명저일 수록 자세하게 조합된 제목들을 만나볼 수 있다. 유명한 고전일수록 작가의 생각은 미시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엄청 세분화된 제목들을 내 놓는다. 반대로 대충쓴 글들의 목차는 허술하기 그지없다. 그냥 에세이 같은 글들을 멋진 글인양 드러내는 허영심의 경영자들이 써 놓은 자기계발서적 때문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도매급으로 싼티나게 넘어간다는 사실은 너무 아쉽다. 아무튼 목차를 세부적으로 써 놓은 책들에게서 드러나는 다음의 특징은 반드시 책의 핵심 내용이 한 장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찾아내는 방법은 머릿말의 중심내용과 제목 그리고 글의 구성을 보면 된다. 그럼 곧 이 글의 가장 중심되는 장을 알아낼 수 있고, 사실그 장만 읽어도 그 책의 핵심내용은 파악된다. 미안한 말이지만, 작가는 이러한 하나의 장을 쓰기 위해서 다른 장들을 덧붙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런식으로 책을 읽으면 연대기적으로 책을 읽게 되지 않고, 오히려 인사이트 중심으로 책을 읽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인사이트 중심의 독서방법이 오히려 독서를 즐겁게 하고, 더 많은 것들을 기억하게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지식을 위한 지식, 과시하기 위한 지식으로서의 독서가 너무 보편화되어 있어서 문제다. 나는 이책을 읽었다. 이렇게 말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 같은 느낌도 가끔 들기도 한다.




텍스트들이 개현한다는 표현을 쓰는 자크데리다의 말을 기억한다. 맞는 것 같다. 텍스트들은 인간의 지성을 떠나서 기록되는 순간 생명을 가지고 수많은 이들의 정신을 깨우거나 행동을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언어의 특수성과 문자의 상징성이 다시 고민되는 시점이기는 하다. 그러므로 좋은 책은 빨리 읽으면 안된다. 한문장 한문장 자신의 삶에 대입해보고, 자신의 생각과 맞추어 봐야 한다. 그렇게 삶으로 읽는 독서는 결국에는 '작가의 고민'에 다다르게 된다. 작가는 이 책을 왜 썼는지에 대해서까지 파고들면 그 때부터는 작가와 같은 고민을 나누어 가지고 지식의 정원을 걷게 된다. 사실 이 때부터 책 읽는 것은 민주화된다고 할 수 있다. 작가의 고민까지 공유하지 못한 독서는 금방 안개처럼 사라지기 마련이다.




가끔, 아주 가끔 엄청난 책들을 만날 때가 있다. 나에게는 특별히 한병철 선생님의 책들이 그렇다. 한병철 선생님의 책들을 거의 모두 읽었는데, 사실 이렇게 긴글을 쓸 때를 빼고 브런치에 쓰는 글들은 대부분 한병철 선생님의 호흡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짧은 문장 안에서 엄청난 전투가 일어나는 것이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단어만이 문장안에서 생명력을 다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이런 비유적인 표현으로 글쓰기를 예찬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글쓰기는 그냥 인간의 본성이다. 보고 듣고, 생각한 것들을 표현하는 방식의 하나이 이것이 특별한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튼 한병철 선생님의 글들은 한 문장 안에서 역사족에서 켜켜히 흐르는 철학자들의 생각을 정면돌파하여 결국은 독파한다. 너무 속시원하다. 그래서 간단하고 명료한 글이 사실은 제일 어렵다. 개념들이 명확해야만 쓸 수 있는 글들이기 때문이다. 그 만큼 고민이 많았다는 것이다. 반대로 긴 호흡의 글들은 정면돌파하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으로 쓰여진 것들이 많다. 대부분 그렇기 때문에 이런 글들을 읽으면 오히려 더 헷갈리게 된다. 명료한 문장에 명료한 생각이 드러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레이먼드챈들러나 무라카미 하루키 같이 영감이 왔을 때 글을 쓰는것을 좋아한다. 그렇게 되면 글을 쓴 후에 한참을 읽지 않다가 어느순간 글들이 나를 부를 때 타자를 대하듯이 정중하게 대하게 된다. 그러면 너무나 생소한 노르웨이의 숲을 거니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나의 생각을 객관적으로 볼 수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글쓰기는 재미있다기 보다는 영감이 순간 다가왔을 때 놓치기 싫어서 쓰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괴롭지는 않다. 글을 잘 쓰려고, 인정받을려고 쓰는게 아니라면 글은 그냥 쓰는 것다. 그게 나다. text가 곧 나고 context가 곧 나의 일상이다. 정직해지는 글쓰기가 중요한 때이다.




책과 글에 대한 생각을 솔찍하게 나누니 속이 후련하다. 이상하게 사람들은 내가 어떤 책들을 들고 다니면 지식인 취급을 하거나 조금 유식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면 자신들과 다르다고 색안경 혹은 부러움의 눈빛으로 이야기를 꺼낸다. 이게 머 대수라고 말이다. 나 역시 위대한 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위대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이 거기서 거기지 말이다. 그러므로 정신의 도야를 통해서 교양을 가진 지식인을 규정하는 헤겔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더 배우고 싶어서 헤겔을 공부할 뿐이다. 앞으로 또 많은 책들을 읽을 것 같고, 더군다나 싫어하긴 하지만 목적을 두고 책을 읽어야 하는 시간이 도래한다. 좋은 책은 항상 여운을 주는데, 인격적인 만남을 가진 후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는 어떤 이 같다. 좋은 글도 마찬가지겠지! 나는 그냥 글을 쓰고 이것이 나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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